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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박경진

지난해 악마 들린 여학생을 구하기 위한 두 사제의 싸움을 다룬 <검은 사제들>이란 영화가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훤칠하고 수려한 배우 덕분에 사제복의 재발견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는데요, 영화 <검은 사제들>처럼 두 사제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유명한 소설이 있습니다. 바로 움베르토 에코의 대표작 <장미의 이름>입니다. 젊은 수련사인 아드소와 그의 사부인 윌리엄 수도사는 중세 유럽의 한 수도원을 배경으로 벌어진 살인 사건을 추적하며 인간에게 깃든 맹신이라는 이름의 악마와 싸움을 벌입니다.




명탐정 윌리엄 수도사


소설을 읽다 보면 윌리엄 수도사의 박식함과 통찰력에 감탄하게 됩니다. 윌리엄 수도사의 능력은 살인 사건의 무대인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으로 향하는 길에서부터 발휘되는데요, 사소한 힌트들만 가지고 수도원에서 사라진 말의 특징과 이름까지 맞추는 윌리엄 수도사를 보면 마치 명탐정 셜록 홈즈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수도원의 원장은 믿음직스러운 윌리엄 수도사에게 살인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 달라고 부탁하지요.


윌리엄 신부와 아드소는 연이어 벌어지는 수도사들의 죽음을 분석하며 조금씩 사건의 진실에 가까워집니다. 그들은 동서고금의 방대한 지식들을 갖추고 있는 수도원의 장서관이 살인 사건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암호를 풀어내어 장서관에 숨겨진 밀실을 찾아냅니다.



웃음이 죄라고?


수도원에서 일어난 끔찍한 연쇄살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이 책은 소실되었거나 아예 쓰이지도 않았다고 여겨지는 전설 속의 책입니다. 비극의 의미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웃음과 슬픔에 대해 쓰겠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에, 희극의 의미를 다룬 책도 존재할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지요. 작가인 움베르토 에코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시학 2권의 필사본이 중세 한 수도원의 장서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가정했습니다. 장서관의 전직 사서였던 늙은 수도사 호르헤는 이 책을 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서책은 하나같이 기독교가 수세기에 걸쳐 축적했던 지식의 일부를 먹어 들어갔소. … 이 서책이 공공연한 해석의 대상이 되는 날 우리는 하느님께서 그어 놓으신 마지막 경계를 기어이 넘게 되고 말 것이오.


당시 신학자들은 신앙은 근엄해야 하고, 사람들은 신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고 믿으며 웃음을 멀리했습니다. 웃음이 두려움을 없애고 경박한 재치를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했거든요. 호르헤는 한 발 더 나아가 웃음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죄악이라고 믿었고, 이를 자유롭게 해석하는 행위는 하느님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래서 시학 2권의 필사본에 독을 발라서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을 살해한 것이지요.



맹목적인 신념의 위험성



장서관의 밀실에서 마주한 범인 호르헤와 윌리엄 수도사는 ‘웃음’에 대한 격렬한 토론을 이어갑니다. 두 사람은 여러 성현의 말씀과 서책을 근거로 날선 공방을 주고받습니다. 윌리엄 수도사는 호르헤의 발언에 하나하나 반론을 제기하지만 대화는 계속해서 평행선을 그립니다. 대화를 나눌수록 자칫 그럴듯해 보이는 호르헤의 이야기는 살인에 대한 변명에 불과하며, 그가 다른 사람의 의견을 수용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집니다. 자신이 저지른 살인조차 신의 뜻이라고 여기는 호르헤에게 윌리엄 수도사는 “악마는 바로 당신”이라며 소리칩니다.


수많은 책을 읽고 깊은 종교적 믿음을 가지고 있던 호르헤는 왜 악마가 되었을까요? 윌리엄 수도사는 ‘영혼의 교만, 의혹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 진리’가 바로 악마라고 말합니다. 호르헤는 스스로 신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정하고 자신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맹목적인 신념이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지요.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할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비웃게 하고, 진리로 하여금 웃게 하는 것일 듯하구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좇아야 할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겠느냐?


불바다로 변한 수도원을 바라보며 윌리엄 신부가 아드소에게 한 말입니다. 호르헤가 가졌던 맹목적 신념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바람직한 자세에 대해 제시하고 있지요. 언제나 자신을 낮추고, 끊임없이 비판하며 의심해야 한다고 말이에요.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아요. 어떤 사실에 대하여 전혀 모를 때보다는 조금은 알고 있는 경우에 또 다른 이론이나 생각을 받아들이기가 더 힘들기도 하고요.


윌리엄 수도사의 조언처럼 진리를 추구하고 진정한 성장을 하기 위해서 웃음의 힘을 빌려 보면 어떨까요? ‘내가 아는 것이 틀릴 수도 있지.’라고 웃어 넘겨보고, ‘이런 것도 있었구나!’라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으며 행복한 미소도 지어 보면서 말이에요.



움베르트 에코는?


2016년 2월 19일 타계한 움베르토 에코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으로 손꼽힙니다. 기호학자, 미학자, 언어학자, 철학자, 소설가 등 매우 다양한 수식어가 따라붙었던 그는 방대한 학문에 족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9개 국어에 능통한 언어의 천재이기도 했어요. 이 시대의 르네상스맨이라고 불릴 만하지요.


그의 소설은 주석이 많고 다양한 배경 지식을 필요로 하지만, 잘 짜여진 문학작품으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역사 자료로서의 가치, 움베르토 에코라는 20세기 지성이 남긴 철학적 가치가 고루 담겨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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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
장석주



시인 장석주가 추천하는 ‘책장 속 고전’

작가 박완서의 삶과 문학 그리고 소설 《나목》



박완서는 자기 의지가 아닌 한국문학이 그를 콕 찍어서 작가로 호명한 것이란 생각을 갖게 하는 작가입니다. 『나목』으로 시작해서 『친절한 복희씨』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소설들로 우리 안의 탐욕과 뻔뻔함, 위선과 허장성세를 참혹할 만큼 예리하게 벗겨내곤 했습니다. 『엄마의 말뚝』 연작,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 등에서는 그만의 살아있는 문체를 만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실제 체험을 투영하여 ‘허구를 완전하게 배제한’ 악몽 같은 시대 체험을 담아낸 것입니다.



 

 





평범한 주부에서 소설가가 되기까지

박완서라는 이름으로 담아낸 특유의 문체는 문학적 평가와 대중의 지지를 함께 이끌어냅니다.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서 살아가는 개인의 울음을 담아낸 박완서의 글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약자들의 이야기를 대변합니다. 평론가 황도경은 박완서의 소설을 두고 “잡담하기, 수다 떨기, 울기, 웃기, 곡하기, 염불 외기, 비명 지르기, 신음하기, 딸꾹질하기, 주정하기, 도리질하기”라고 평가하는데요. 이러한 독특함이 박완서를 한국의 ‘대표작가’이자 우리 시대의 ‘증언자’로 자리매김토록 하는 지점입니다.

 

그의 일생을 잠깐 살펴보는 것은 박완서의 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박완서는 1931년 경기도 개풍군에서 태어나 2011년 1월 22일 담낭암 투병중에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뜹니다. 어머니의 ‘치맛바람’ 덕분에 서울로 와서 살게 되었고, 해방 전해에 숙명여고를 들어가 졸업하고, 1950년 6•25가 나던 해 서울대학교 문리대 국문과로 진학합니다. 당시 대학교 입학식은 6월이었다고 하는데요. 이 때문에 입학 후 그가 학교를 다닌 기간은 며칠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전쟁통에 오빠와 숙부를 잃고, 미 8군 ‘PX’의 초상화부에 취직해 생계를 이어가다, 1953년 휴전 무렵 결혼합니다.

 

“휴전이 되고 집에서 결혼을 재촉했다. 나는 선을 보고 조건도 보고 마땅한 남자를 만나 약혼을 하고 청첩장을 찍었다. 마치 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것처럼 나에게 그건 당연한 순서였다.”

-「그 남자네 집」 中

 

결혼 뒤 박완서는 평범한 가정주부로 4녀1남을 낳아 기르는 일에 몰두합니다. 커다란 한옥에 연탄아궁이가 있는 집에서 보통여자로 살림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1970년 『여성동아』 장편공모에 「나목」으로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합니다. 바로 그가 젊은 시절 미 8군 PX 초상화부에서 만난 화가 박수근과의 추억을 담은 소설입니다. 처음에 논픽션으로 썼다가 나중에 소설로 고쳐 썼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져 있지요.

 





화가 박수근과의 만남을 기억의 서사로 풀어내다


 





박완서 지음

세계사, 2012

한국문학 최고의 유산인 박완서의 데뷔작이자 생애 마지막까지 직접 보고 다듬고 매만진 아름다운 유작.







 

“난 아무것도 쓰지 않고 그냥 살아왔던 시간도 중요하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사실 애 다섯을 낳아서 키우다보면 아무 생각도 못하죠.”

 

작가의 고백에 따르면 그렇게 변변한 습작도 하지 못한 채, 마흔 살, 늦깍이 작가로 출발한 것입니다. 별다른 습작을 거치지 않고 대뜸 「나목」 같은 빼어난 장편소설을 써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나목」은 전쟁으로 폐허간 된 채 수복된 서울, 그 한가운데의 미군 PX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펼쳐갑니다. 현재 신세계백화점 본점이 바로 미군 PX로 사용된 곳인데요. 해방 후 동화백화점으로 운영되던 이곳은 6•25 전쟁과 함께 또 다른 삶의 격전지로 변모합니다. 여 주인공의 일터인 미8군 PX는 생존에 내몰린 이들에게 거의 유일한 젖줄입니다. 전쟁 중에 수많은 사람들은 죽어나가고, 산 자들은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현장입니다. 박완서는 ‘고가’와 ‘PX’의 ‘하우스’ 사이를 오가던 여주인공 ‘이경’과 화가 박수근을 모델로 한 ‘옥희도’와의 만남을 축으로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 몰린 인간 군상을 보여줍니다.

 

이는 마치 흥미로운 생태보고서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사람들의 생존 이야기로 읽는다면 소설을 너무 단순화하는 것입니다. 「나목」에는 풍부한 서사와 시대의 무게가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미군의 초상화를 그리는 천재화가와 그 아픈 시대의 사랑

“큰댁 덕에 비교적 윤택하던 피난살이, 아니 그 전일 게다. 활량하던 피난길, 그때도 아니다. 그 전, 어수선하던 크리스마스였던가. 피난을 갈까 말까 어머니 몰래 보따리를 챙겼다간 풀고, 다시 챙기고. 그때도 아니다. 그 전, 수복 후의 나날들, 비췻빛 하늘을 인 노오란 빛들, 아낌없이 쏟아지던 노오란 빛들, 지금도 눈이 부시다. 그때도 아니다. 그럼 그 전, 그러나 나는 여기서 기억의 소급을 정지시켰다. 몇십 년이나 묵은 은행이 그 가을엔 왜 그렇게 처절하도록 노오랬던가. 난 그것을 보며 왜 그렇게 살고 싶고, 죽고 싶고를 번갈아가며 격렬하게 소망했던가. 지금도 그것이 궁금할뿐 내 기억의 소급은 노오란 빛 속에 용해되어 다시는 헤어나질 못했다.”

-「나목」 中

 

박완서는 자신의 기억을 끄집어내어, 풍부한 기억의 서사로 「나목」을 채워나갑니다. 전쟁 속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모멸감과 수치심을 이야기하지만, 그 속에서 사람과 사람 간의 사랑을 끄집어냅니다. 천재화가가 생계를 위해 미군의 초상화를 그리고, 대학 생활 대신 세일즈로 생계를 꾸리는 삶. 전쟁이 만들어낸 삶의 추락을 여지 없지 드러내지만, 그 속에서 인간애를 놓지 않는 것입니다.

 

박완서의 우리나라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겪어낸 일상인입니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 일제 강점기와 해방, 6•25전쟁, 4•19혁명, 5•16군사 쿠데타 등 근대화의 과정을 견뎌냈지요. 박완서는 작가가 아닌 일상인으로 살았던 그 세월을 5백 년 같은 세월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경이롭고도 신산스럽다. 나는 수공업 시대에 태어났고 그때는 유리도 워낙 귀해서 유리로 된 물건을 본 것은 푸르스름한 정종병 정도였다. 나는 어떤 때 내가 5백 년을 산 것 같은 끔찍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전히 우리곁에 남아 삶의 위안이 되어주다

그가 겪어낸 시대는 박완서를 작가이게끔 하는 밑천이 되었습니다. 5백 년 같은 그 세월을 부지런히 담아내며 박완서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하지만 자기 체험을 알뜰하게 ‘파먹는’다고 누구나 다 좋은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 개인적인 것에 역사라는 것이 어떻게 불어와 내 삶을 왜곡시키는 그런 것에 중점을 두었지 순전히 내 개인적인 것은 울궈먹을 생각이 없어요.”

 

소설이라는 것은 체험이라는 원단을 갖고 개성적인 ‘옷’을 지어내는 작업입니다. 좋은 원단이 좋은 ‘옷’의 기초가 되겠지만, 디자이너에 따라서 천차만별의 ‘옷’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박완서가 대작가로 우뚝 선 것은 개인이 겪어낸 경험을 좋은 원단 삼아 자신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천부적 재능을 풀어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 느껴지는 정서적 흡입력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서 속에 동시대의 삶과 인간에 대한 통찰력과 체험을 바탕으로 담아내는 압도적인 문체, 살아 움직이는 입말 등이 어우러집니다. 이러한 요소 간의 화학적 조합이 너무나 절묘하지요. 작가는 죽어서 우리 곁을 떠난지 벌써 다섯 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젊은’ 소설들은 늙을 줄도 모른 채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어 위안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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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작가 한상남이 추천하는 ‘책장 속 고전'
유쾌하고 따뜻한 이야기 《키다리 아저씨》
한상남


동화작가 한상남이 추천하는 ‘책장 속 고전’

유쾌하고 따뜻한 이야기 《키다리 아저씨》


미국의 여류 작가, 진 웹스터의 《키다리 아저씨》는 편지글로 구성된 몇 안 되는 고전 중의 하나입니다. 주인공 제루샤 애벗의 고아원 생활을 그린 맨 앞의 짧은 첫 장을 제외한 모든 내용이 단 한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장에서는 그녀가 얼마나 힘든 고아원 생활을 했는지, 그러면서도 얼마나 밝고 성실한 성격을 지녔는지, 또 얼마나 풍부한 상상력으로 그 힘든 생활 속에서 웃음을 찾아내는지를 보여주는데요. 그런 그녀에게 마침내 그녀에게 행운이 찾아오게 됩니다.


 



단 한 사람에게 보내는 소녀의 편지





제루샤 애벗은 신분을 밝히지 않은 후원자로부터 대학에 보내주겠다는 제안을 받게 되는데, 후원의 단 한 가지 조건은 한 달에 한 번씩 그녀의 대학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서 편지를 보내라는 것. 그녀가 자신의 후원자에게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원장실에 가는 길에 복도에서 잠깐 본 그의 뒷모습이 전부입니다. 마침 다가오는 자동차 불빛 때문에 팔다리가 우스꽝스러울 만큼 긴 그의 그림자가 바닥과 복도 벽에 깔리는데, 그 때문에 ‘키다리 아저씨’라는 친근한 별명이 생깁니다. 


첫 번째 편지는 대학의 기숙사에 도착하면서 시작됩니다. 제루샤는 자기가 고아원 출신이라는 것을 친구들에게 숨기고 생활하지만, 고아원 밖에서 맞게 되는 수많은 새로운 경험들 앞에서 때로는 당황하고 때로는 놀라고, 때로는 즐거워합니다. 그 모든 경험과 느낌을 생생하게 편지에 담아 보내는 이 수다쟁이 아가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저씨께선 한 달에 한 번만 편지하라고 하셨지만, 저는 사흘이 멀다 하고 쓰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혼자만 간직하는 게 너무 아까워서 그렇답니다.…


…그런데 하마터면 나도 모르게 ‘이런 일은 처음이야’라고 말해버리는 실수를 저질렀어요. 재빨리 겨우 수습을 했어요. 마음속에 숨기는 게 있다는 건 참 괴로운 일이에요. 게다가 저는 성격상 비밀을 갖는 게 힘들어요. 이렇게 편지를 드릴 아저씨마저 안 계셨다면 제 가슴은 이미 폭발해 버렸을 거예요…





역경을 극복하는 씩씩한 여주인공의 매력

그녀는 할머니가 있는 친구들을 부러워하며, 느닷없이 키다리 아저씨에게 잠시 동안만 자기 할머니가 되어 달라는 깜찍한 요청을 하는가 하면, 너무 행복해서 앞으로 아름다운 성격을 길러갈 거라는 소녀다운 다짐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매사에 밝고 긍정적인 그녀지만, 때때로 고아원에 있을 때의 기억, 그 상처를 떠올려서 독자의 가슴을 먹먹하게 하기도 합니다.  


…구호품 상자에서 꺼낸 옷을 입고 학교에 갈 때의 제 기분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아저씨는 상상하지 못할 거예요. 제 짝이 그 구호품 상자에 옷을 넣은 아이였나 봐요. 그 아이는 다른 애들이랑 소곤대며 키득거렸어요. 라이벌이 버린 옷을 입어야 하는 비참함은 영혼을 갉아먹을 정도이지요. 평생 실크 스타킹을 신는다 해도 그 상처는 지워지지 않을 거예요.…  


…제가 어린 시절에 겪은 부끄러운 사건을 알고 계시나요? 쿠키를 훔쳤다고 벌을 받고서 고아원을 도망친 사건인데요…. 식품 저장고에서 굶주린 아홉 살짜리 여자애에게 혼자서 나이프를 닦게 한 거예요. 옆에 쿠키 그릇이 있었고요. 원장이 불쑥 들어왔을 때, 그 여자애의 입가에 과자가루가 조금 묻어 있을 만도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원장은 아이의 팔을 낚아채고 뺨을 때렸어요. 게다가 저녁 식사 때는 다른 아이들 앞에서 푸딩을 못 먹게 하며 도둑질을 한 벌이라고 말했으니 아이가 달아날 만하지 않나요?…  


그녀는 평소 마음에 들지 않았던 자기 이름을 ‘주디’로 바꾸기도 하고, 새로 장만한 예쁜 옷이며 장갑이며 모자에 대한 이야기를 시시콜콜 늘어놓으면서 그 또래의 아가씨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성장





하지만 대학 4년, 그 신선하고도 진지한 탐구의 시간은 그녀를 건강하게 성장시키고, 어느덧 삶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갖게 해줍니다. 그것은 어쩌면 ‘키다리 아저씨’가 세상에 태어난 지 100년이 넘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더 절실한 삶의 철학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삶을 마치 경주라고 생각하는 듯해요. 목적지에 빨리 도달하려고 헉헉거리며 달리는 동안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는 모두 놓치고 마는 거예요. 그리고 경주가 끝날 때쯤엔 이미 자기가 너무 늙었다는 것,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이 작품이 독자를 즐겁게 하는 또 한 가지는 유쾌한 해피엔딩입니다. 한 소녀의 꿈을 이루어 주고, 그 성장을 곁에서 지켜봐 준 키다리 아저씨는 주디의 상상과는 달리 젊은 청년인데요. 그는 4년의 대학생활 동안 우연을 가장해서 몇 차례 주디와 만납니다. 그리고 마침내 키다리 아저씨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 주디의 마지막 편지는 이렇게 끝납니다.


…평생 처음 써보는 연애편지예요. 제가 연애편지 쓰는 법을 알고 있다니, 재미있지 않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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