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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임진왜란 때 원숭이 기병대가 있었다고?
김 석


지난 6월의 어느 날이었지요. 습관처럼 뉴스를 뒤적거리다 퍽 흥미로운 기사 한 편을 만났습니다. 한 일간신문이 6월 13일 자로 <임진왜란 때 왜적 혼 빼놓은 ‘원숭이 기병대’ 실제 있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이야기일까요. 제목만 딱 보면 황당하기도 하고 솔깃하기도 하죠. 기사를 읽어봤더니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기사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의 《택리지 擇里志》를 번역하던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책의 여러 이본(異本)을 비교 조사하는 과정에서 임진왜란 당시에 ‘원숭이 부대’가 실제 전투에서 활약했다는 기록이 거의 빠짐없이 수록됐을 뿐 아니라 내용에도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택리지》에 등장하는 원숭이 부대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이 쓴 인문지리서 《택리지》



“(명나라 장수) 양호는 (중략) 중무장한 기병 4,000명과 교란용 원숭이(弄猿) 기병 수백 마리를 이끌고 가서 소사하 다리 아래 들판이 끝나는 곳에 매복하게 하였다. 왜군이 숲처럼 빽빽한 대오를 이루어 직산으로부터 북상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거리가 100여 보가 되기 직전에 먼저 교란용 원숭이를 풀어놓았다. 원숭이는 말을 타고 채찍을 잡고서 말에 채찍을 가해서 적진으로 돌진하였다.


(왜군들은) 원숭이를 처음으로 보게 되자 사람인 듯 하면서도 사람이 아닌지라 모두 의아해하고 괴이하게 여겨 발을 멈추고 쳐다만 보았다. 적진에 바짝 다가서자 원숭이는 말에서 내려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왜적들은 원숭이를 사로잡거나 때려잡으려 하였으나 원숭이는 몸을 숨기고 도망 다니기를 잘해서 진영을 꿰뚫고 지나갔다.”



이 장면은 평양전투, 행주산성전투와 더불어 임진왜란 당시 육상에서 거둔 3대첩의 하나로 꼽히는 ‘소사전투’를 묘사한 대목인데요. 소사(素沙)는 지금의 충남 천안 일대입니다. 소사전투는 1597년의 일이고, 그로부터 150여 년이 흐른 뒤에 이중환은 《택리지》를 저술하면서 ‘팔도론․충청도’ 항목에 이 기록을 남깁니다. 할리우드 영화 <혹성탈출>의 한 장면이 실제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놀랍고도 흥미로운 대목이지요.


위 기록이 알려주는 사실들을 다시 정리해 봅니다. ① 전투 초기에 적진을 교란하기 위해 원숭이를 투입했다. ② 원숭이가 사람처럼 말을 탈 줄 알았다. ③ 사람인 것 같았지만 사람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당시 원숭이 기병대가 실제 전투에 투입돼 쏠쏠한 활약을 했다는 겁니다. 그냥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치부하기에는 묘사가 꽤 구체적이고 생생하죠? 진짜일까요? 만약 이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실로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겠지요?



소사전투에서 활약한 원숭이 기병대의 실체


이 대목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 안대회 교수는 원숭이 부대에 관한 다른 기록들을 찾아내 논문을 씁니다. <소사전투에서 활약한 원숭이 기병대의 실체>란 제목의 논문은 《역사비평》 2018년 가을 호에 수록됩니다. 궁금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이번엔 논문을 찾아 읽었습니다. 안대회 교수가 찾아낸 기록 몇 가지가 있더군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의 <경리 양호 치제문(楊經理鎬致祭文)>. 명나라 장수 양호의 죽음을 애도한 글인데, 여기에 이런 구절이 있답니다.



弄猿三百 농원 삼백이

一時鞭馬 한꺼번에 말을 달렸지.

狡彼倭奴 저 교활한 왜적들을

悉殲蹄間 모조리 말굽 아래서 섬멸했네.



이 짧은 구절에 새로운 사실이 등장합니다. 교란용 원숭이가 ‘3백’이었다고 써놓았습니다. 연암은 대체 뭘 근거로 이렇게 쓴 걸까요. 틀림없이 뭔가를 보고 썼을 텐데요. 하지만 안대회 교수도 그 정확한 근거까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자료가 더 없나 여기저기 찾아보다가 원숭이 부대에 관한 또 다른 기록을 발견하지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의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이런 내용이 보입니다.



“왜적을 베어 죽일 때 군사들이 모두 붉은 옷이나 비단옷을 입고 등에는 원숭이 한 마리를 업었다. 원숭이는 채찍을 휘둘러 말을 내달렸다. (중략) 원숭이가 좌충우돌하니 왜적이 처음 보고서 놀라고 혼란스러워 완전히 패하여 남은 이가 없었으니 원숭이 또한 전공을 세웠다고 하겠다.”



위에서 본 내용과는 조금 다릅니다. 말을 탄 병사가 등에 원숭이를 업었고, 그 원숭이가 채찍으로 말을 몰았다는 겁니다. 원숭이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부분은 앞에서 소개한 기록과 일치하고요. 이것 말고도 안대회 교수가 찾아낸 또 다른 기록이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무인이자 의병장으로 활약한 조경남(趙慶男, 1570~1641)이 쓴 《난중잡록(亂中雜錄)》은 임진왜란에 관한 한 가장 자세한 기록물로 평가되는데요. 이 책에는 조경남이 사명대사 유정(劉綎, 1544~1610)의 부대를 직접 목격하고 쓴 흥미로운 대목이 나옵니다.



“초원(楚猿) 4마리가 있어 말을 타고 다루는 솜씨가 사람과 같았다. 몸뚱이는 큰 고양이를 닮았다.”



사람이라면 굳이 ‘사람과 같았다.’고 표현할 까닭이 있었을까요. 게다가 ‘큰 고양이를 닮았다.’고까지 했습니다. 안대회 교수에 따르면, 유정의 부대에 원숭이가 있었다는 기록은 임진왜란 당시 신녕현감으로 전투에도 참가한 손기양(孫起陽, 1559~1617)이란 분의 일기에도 살짝 등장합니다.



“원숭이는 능히 적진으로 돌진할 수 있고…”



하지만 안대회 교수로 하여금 원숭이 부대가 실제로 있었음을 믿게 해준 결정적인 기록은 따로 있었습니다. 경상북도 안동에 터를 잡고 살아온 풍산김씨 문중에 대대로 전해오는 화첩, 그러니까 그림 모음집 안에서 원숭이 기병대를 묘사한 그림이 있다는 것이었죠. 《세전서화첩(世傳書畫帖)》이라 불리는 이 화첩에는 그림 32점이 실려 있는데요. 이 가운데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란 제목의 그림 2점 가운데 한 점을 주목해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천조장사전별도>에 그려진 원숭이 병사?


풍산김씨 가문에 대대로 전해오는 《세전서화첩》에 수록된 <천조장사전별도>



이 귀중한 화첩이 2012년에 번역 출간됐더군요. 궁금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화첩을 구해다가 문제의 그림을 직접 확인해보았습니다. 그림의 내용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명나라 원군을 전송하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그림에 붙은 설명을 보면 당시 풍산김씨 문중의 김대현(金大賢, 1553~1602)이란 분이 명나라 부대를 여러모로 살뜰하게 챙긴 모양입니다. 명나라 장수가 조선을 떠나면서 특별히 김대현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하지요.



“지난 두 해 동안 힘든 일을 겪으면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돌보아 준 것을 참으로 잊을 수 없다. 지금 서로 이별하게 되니 그동안의 감회가 구름처럼 떠오른다. 귀국의 유명 화가인 김수운(金守雲)이 그린 전별도를 길이 기념할 수 있도록 그대에게 주겠다.”고 하면서 그림을 건네주었다.



밑줄 친 부분에서 이 그림을 그린 화가가 조선의 김수운이란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화첩의 그림이 그때 그 그림은 아닐 개연성이 크지요. 명색이 조선의 유명 화가가 이 정도 수준의 그림을 그렸으리라곤 생각하기 어려우니까요. 김수운이 그렸다는 원본이 남아 있지 않으니, <천조장사전별도>는 후대의 화가가 상상력을 발휘해 다시 그린 것으로밖엔 볼 수 없습니다.



<천조장사전별도>에 그려진 포르투갈 출신의 용병 해귀(海鬼)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이 그림의 왼쪽 아래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퀴 달린 수레에 아주 이국적인 외모의 병사 네 명이 타고 있지요. 다른 병사들을 묘사한 것과 비교하면 몸집이 훨씬 큰 데다 피부색은 까무잡잡하고 머리털은 붉은 색으로 그려졌습니다. 가운데 삐죽 솟아나온 병사의 머리 오른쪽 위로 글자가 보이지요? 해귀(海鬼)입니다. 해귀는 포르투갈 출신의 해군 용병입니다. 


임진왜란에 포르투갈 용병이 참전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게 그냥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닌 것이, 바로 이 그림을 근거로 현재 주한 포르투갈 대사관에서 풍산김씨 후손들에게 해마다 연하장을 보낸다지 뭡니까. 제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임진왜란에 참전한 다국적 군대를 묘사한 것으로는 이 그림이 유일무이하지 않나 싶어요. 그러니 잘 그리고 못 그리고는 둘째고, 이런 귀중한 그림을 화첩에 묶어 대대로 전해온 정성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런 그림을 만날 수 있었을까요.



<천조장사전별도>에 그려진 원병(猿兵)



이제 해귀들 오른쪽 아래로 시선을 옮기면 짐승의 탈을 쓴 사람인 것도 같고 짐승인 것도 같은 털 복숭이 병사들이 보이죠. 생김새를 보면 신체의 모양이나 서 있는 모습은 사람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몸을 잔뜩 뒤덮고 있는 털의 묘사라든가 짐승처럼 주둥이가 뾰족한 머리 모양을 보면 사람과는 또 딴판으로 보이기도 하고요. 그림만 봐선 딱 잘라서 뭐라 단정 짓기가 어렵지요.


깃발에는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원병삼백(猿兵三百)’. 원숭이 병사 3백이라고 적었습니다. 앞에서 본 연암 박지원의 글 내용과 일치하는 숫자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걸 실제 원숭이로 볼 것이냐, 아니면 단지 변장을 한 사람으로 볼 것이냐, 헷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세전서화첩》을 연구해서 2012년에 번역본을 낸 두 연구자는 이들을 “여진족 출신 투항자들로 구성된 군인들”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이것까지 포함해서 안대회 교수는 원숭이 기병대에 관한 해석이 크게 네 가지로 이뤄지고 있다고 논문에 소개합니다.



① 원숭이처럼 민첩한 병사

② 털이 많이 난 중국 주변 국가의 소수민족 병사

③ 원숭이의 탈을 써서 변장한 병사

④ 원기(猿騎), 곧 마상재(馬上才)



역사,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로 안내하다


자, 여기까지 읽고 난 여러분은 위의 보기 넷 가운데 어느 쪽에 더 가깝다고 보시나요. 사실 이 논문은 충분히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임에도 언론들이 크게 주목하지는 않았습니다. 언뜻 봐선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처럼 들리니까요. 제가 여기에 소개한 내용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죠. 그래도 궁금하다면 안대회 교수의 논문을 직접 찾아 읽어야 합니다.


그럼 제 생각은 어떠냐고요? 논문을 찾아 읽고 화첩까지 구해 본 저로서는 원숭이 부대가 실재했다는 쪽을 조금 더 믿어보고 싶습니다. 이런 흥미로운 역사의 한 장면이 진짜라고 한다면 훗날 대하역사극의 한 대목에서 원숭이 기병대가 활약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될 날이 오지 않을까요. 역사라는 건 분명 흘러간 과거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지만 수백 년이 흐른 지금 우리를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로 안내하곤 한답니다.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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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그림으로 피어난 우리 땅 ‘독도’
김 석

그 섬에 화가가 있었습니다. 하늘은 푸르렀고, 바다의 푸름은 그보다 더 깊었지요. 파도 소리, 새 소리 가득한 섬. 벗인 양, 연인인 양 서로를 마주보며 웃음 짓는 모습이 얼마나 정겨웠던지. 육지에서 멀찍이 떨어진 외딴 섬은 화가의 가슴을 한없이 요동치게 했습니다. 이렇게 작은 두 섬이 그토록 오랜 풍파를 꿋꿋이 견뎌온 어엿한 우리 땅이었으니까요. 동도에서 서도를 바라보는 화가의 붓은 그림 속에서 아련한 메아리를 불러냅니다.


류인선, <독도-동도에서 서도를 바라보다>, 23.3×40.9cm,  캔버스에 아크릴과 오일 파스텔, 2015



언제나 시릴 그 바다와 또 언제나 맑고 신선할 그 공기와 괭이갈매기 소리…! 제가 본 독도는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아주 오래 전 울릉도로 갈 때 본 동해는 그 깊이가 얼마나 아득한 건지 검은 돌 같기도 했는데, 하얀 파도와 어울린 독도의 물빛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푸른빛이었습니다. 괭이갈매기(독도의 주인인 듯한)의 배설물이 척박한 환경을 비옥하게 만들어주었는지 소리쟁이와 방가지똥은 바람에도 꺾이지 않을 만큼 튼실해 보였습니다. 철 이른 연보랏빛 해국 꽃이 드문드문 보이고 개갓냉이 노란 꽃은 무리를 이뤄 독도에 노란 옷을 입혀주고 있었습니다. 바위채송화와 갯제비쑥도 곱게 연초록 융단을 짜고 있을 즈음, 잊지 못할 2015년 5월 16일이었습니다. 

- 작가의 말


화가가 독도에 첫 발을 내디딘 건 한창 꽃피는 5월이었습니다. 소리쟁이, 방가지똥, 개갓냉이, 갯제비쑥… 정겨워서 더 고마운 꽃들이 뿌리 내리고 번성한 섬. 육지에서 그렇게도 먼 곳에서 어쩌면 그렇게 살뜰하고 의젓하게 뭇 생명들의 싹을 틔워 올렸을까요. 그 대견함에 문득 가슴이 뭉클해지는 건 비단 화가뿐이었을까요. 긴 세월 모진 풍파를 말없이 견뎌낸 저 꽃들이야말로 독도의 어엿한 주인이 아닐는지요.


류인선 <독도-풀꽃 사이로 보다 1, 2, 3>, 116.8×91cm, 면천에 한지와 채색, 2015


이 땅의 온갖 꽃에 남다른 애정을 품은 화가가 독도의 꽃들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겠지요. 동양화가인 류인선 작가가 2015년에 완성한 그림 <독도-풀꽃 사이로 보다>입니다. 세 그림이 하나의 작품을 이루고 있는데요. 화폭 아래 배꼼 고개를 내민 풀꽃들이 마치 독도를 바라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 같지요.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가의 시선이 풀꽃들의 시선과 겹쳐져 있어요. 생명으로서의 꽃을 존중할 줄 아는 화가의 바로 그 ‘눈높이’ 덕분에 이 작품은 독도를 묘사한 그 어떤 그림보다도 따뜻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류인선 <독도수호바위 풍경>, 91×182cm, 면천에 한지와 채색, 2015



화가들, 독도를 그리다


독도를 그린 화가는 꽤 많습니다. 독도를 주제로 한 미술 전시회 또한 그리 드물지 않고요. 위에 소개한 류인선 작가의 작품들도 2015년 10월 28일부터 12월 13일까지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개최된 특별기획전 <독도 오감도>란 전시회에서 대중에 선보였는데요. ‘문화를 통한 독도사랑’을 표방한 예술가들이 뜻을 모아 꾸린 라메르에릴(바다와 섬)이란 이름의 사단법인이 기획한 첫 전시였지요.


우리 화가들에게 독도는 단순한 풍경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잊힐 만하면 불거지는 일본의 도발에 화가들은 붓으로 답했습니다. <독도 오감도>를 시작으로 같은 주제로 전시회가 모두 네 차례 열립니다. 가장 최근 전시는 지난해 11월 29일부터 12월 17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한국의 진경 – 독도와 울릉도>였습니다. 일부러 찾아가긴 멀지만 가까이서 독도를 볼 수 있었던 건 화가들의 그림 덕분이었죠.


3,200개가 넘는 우리나라의 섬 가운데 가장 많이 그려진 섬. 이 땅의 자연지형 가운데 가장 많이 그려진 대상물. 독도는 지금까지도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화가들에 의해 그려지겠지요. 그러니 그 많은 독도 그림을 역사라는 틀 안에만 꽁꽁 가둘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림은 무엇보다 그림으로 보면 되는 거니까요. 그렇게 본다면 어떤 그림들은 더 특별한 예술적 감동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김선두 <독도-작은 리조트>, 145×112cm, 장지에 분채, 2017


정일영 <독도>, 97×162cm, 캔버스에 아크릴, 2017


하태임 <독도>, 91×116.8cm, 캔버스에 아크릴, 2017


임만혁 <독도 17-1>, 75×213cm, 한지에 목탄, 2017


김덕기 <원더풀 독도>, 193.9×259.1cm, 캔버스에 아크릴, 2015



‘용의 기운’을 품은 신비의 섬 독도


독도만 그리는 화가가 과연 있을까요. 글쎄요. 과문한 탓인지 아직 그런 화가를 만나보진 못했습니다. 그럼 독도를 주제로 개인 전시회를 연 화가는 있었을까요. 찾아보니 실제로 있더군요. 모르긴 몰라도 처음 만난 독도는 화가에게 말할 수 없이 깊은 예술적 영감을 주었을 겁니다. 그래서 다시는 못 올 것처럼 동도에서 서도까지 독도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눈과 가슴에 한가득 담아가는 것도 모자라 붓을 들었겠지요.


2015년 6월, 서울 대학로 혜화아트센터에서 아주 특별한 전시회가 열립니다. 전시 제목은 <조광기 독도 아크릴 드로잉 전>. 엿새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 화가가 독도 그림만을 모아 대중에 선보인 건 아마도 처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당시 전시회 포스터를 보면 독도의 두 섬 가운데 동도 그림이 보이고 그 아래 이런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조금 떨어진 바다에서 본 동도의 모습은 한 마리 용이 꿈틀거리는 듯…”


조광기 <독도의 꿈>, 77×107cm, 메트지에 아크릴 드로잉, 2015


그런데 참 묘하게도 독도의 모습에서 용을 떠올린 화가가 또 있었답니다. 한국화가 소산 박대성 화백의 <독도>입니다. 올해 2월 7일부터 3월 4일까지 서울 인사아트센터에서 개최된 박 화백의 개인전 <수묵에서 모더니즘을 찾았다>에서 공개된 그림인데요. 가로 8미터로 전시장 한 쪽 벽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장대한 규모의 이 작품은 압도적인 힘으로 관람객을 사로잡는 대작입니다. 독도 그림으로 이보다 큰 작품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어요. 붉은 여의주를 움켜쥔 신성한 해룡(海龍)의 대갈일성이 그림 밖으로 생생하게 전해져오는 것만 같습니다.


박대성 <독도>, 218×800cm, 종이에 잉크, 2015


예술가들만 감지해낼 수 있는 어떤 강한 에너지가 전해진 걸까요. 2015년의 어느 하루 8시간 동안 독도를 만나고 돌아온 화가는 곧바로 독도를 그리는 일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습니다. 그렇게 완성한 그림 12점을 대중 앞에 선보입니다. 독도가 아니었다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그림이었고 전시회였을 겁니다. 독도 그림으로 처음 개인전을 연 서양화가 조광기 화백의 독도 그림은 지금까지 보아온 다른 화가들의 작품과 또 다릅니다. 독특하게 아크릴 물감을 드로잉의 재료로 활용했는데, 바탕 재질에 따라 질감의 차이가 도드라지는 게 특징이지요. 


조광기 <독도의 꿈>, 90×71cm, 캔버스에 아크릴, 2015


(좌) 조광기 <독도의 꿈>, 107×77cm, 메트지에 아크릴 드로잉, 2015    (우) 조광기 <독도의 꿈(일출)>, 90×71cm, 캔버스에 아크릴, 2015





조광기 <청산사유(독도)>, 60×50cm, 혼합재료, 2018


시인이 뜨거운 우리 말글로 그려낸 독도. 아마 독도를 노래한 시인 역시 꽤 많겠지요. 그 중에서 독도 하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시는 아마도 도종환 시인의 <독도>일 겁니다. 때론 감상적이면서도 때론 유장한 시어들이 빚어내는 깊은 울림에 가슴이 먹먹해져 오는데요. 조광기 화백이 최근에 그려낸 독도 그림 한 점은 마치 도종환의 시를 붓으로 풀어낸 것처럼 강렬한 이미지로 다가왔습니다. 하늘이며 땅이며 온통 푸른 빛 안에서 한 덩어리가 된 독도, 푸름 안에 깃든 독도였지요.



그림 속에서 독도가 말을 걸어왔다



김준권 <山韻-0901>, 400×160cm, 수묵목판, 2009


얼마 전 벼르고 별렀던 한 전시회에 다녀왔습니다. 아마 기억하실 겁니다. 올해 4월 27일 판문점에서 개최된 남북정상회담 당시 회담 못지않게 화제가 된 미술품이 있었지요. 두 정상의 뒤로 멋들어진 첩첩 산줄기가 장대하게 펼쳐진 이 판화 작품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목판화가 김준권의 <산운(山韻)-0901>입니다. 어떻습니까. 굽이굽이 이어지는 산줄기 너머에서 산의 소리가 들리시나요?


하지만 전시장을 가만 돌아보던 제게는 그보다 더 눈에 띄는 작품들이 있었답니다. 바로 독도 그림이었어요. 며칠 동안 독도에 관해 생각하고 자료를 찾고 글을 써오던 차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공간에서 또 다른 독도를 만난 겁니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전시장을 돌면서 몇 번이고 독도를 눈에 담았지요. 독도를 그린 꽤 많은 작품을 봐왔어도 ‘독도의 아침’을 담아낸 작품은 처음 만났습니다. 바로 이 작품입니다.


김준권 <독도의 아침>, 30×40cm, 유성목판, 2018


이 작품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잠시 판화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는데, 목판으로 찍어냈다는 걸 알고 다시 보면 정말 믿기지 않는 그림입니다. 화면 중앙을 가로지르는 수평선을 기준으로 하늘은 하늘대로, 바다는 바다대로, 저토록 미세한 색의 변화를 판화로 표현해냈다는 데 놀랐습니다. 아침 해가 서서히 고개를 내밀면서 자욱했던 해무가 조금씩 걷히는 그 순간의 독도를 참으로 절묘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전시장에는 이 그림 양쪽 옆에 독도의 동도, 서도가 나란히 걸려 있었어요. 작가의 솜씨인지, 전시기획자의 감각인지는 몰라도 색이 입혀진 독도 그림이 그렇게 동쪽과 서쪽에서 독도의 아침을 호위하듯 서 있는 모습마저도 퍽 특별해 보이더군요. 작품을 본 사람들은 판화라는 사실 자체를 믿기 어렵다는 반응이었지요. 붓으로 그렸다고 해도 고개를 끄덕일 만큼 섬세한 선과 결의 묘사라든가 색채의 조화가 돋보이는 그림이었습니다.


(좌) 김준권 <독도-서도>, 89×60cm, 채묵목판, 2014    (우) 김준권 <독도-동도>, 89×54cm, 채묵목판, 2014



독도가 전하는 메시지


꽤 많은 독도 그림을 찾아보고 살피는 내내 책 한 권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소설가 김탁환의 <독도평전>인데요. 제목이 참 독특하지요? 사람도 아닌 섬의 평전을 쓴다니, 그 발상이 참 남다릅니다. 독도가 품은 이야기는 또 얼마나 많은지요. 책이 발간된 2005년까지 독도의 생애를 적어나간 작가는 그 이후의 삶을 여생(餘生)이라는 제목 아래 짧게 기록합니다.


까맣게 모른 채 그냥 지나갈 것 같아 적어둡니다. 10월 25일은 ‘독도의 날’입니다. 독도는 멀지만 그림은 가깝잖아요. 그래서 독도 그림을 애써 찾아다니고 수없이 다른 얼굴로 다가오는 독도를 만나보려 했던 겁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진실은 유행가 가사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독도는 소중한 우리 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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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석
#김석기자


제법 쌀쌀한 겨울날이었습니다. 한 생소한 사진작가의 전시를 보러 2016년 새해 첫 인사동 나들이에 나섰지요. 옷깃을 여미며 전시장 문을 열고 들어서자 또 다른 겨울이 활짝 눈 앞에 펼쳐지더군요. 눈 덮인 설악산은 저리도 거룩하고 아름다웠던가. 분명 사진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사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수묵화’였어요. 멀찍이 떨어져서 보면 영락없는 한 폭의 수묵화.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습니다. 사진이라는 걸 알고 찾아온 관객들조차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답니다.



설악 1626, 107×160cm, 한지에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2016


외설악 산줄기에 병풍처럼 우뚝 솟은 울산바위, 해발 1200미터 신선대에서 내려다본 장엄한 구름바다, 순백의 설원으로 물든 백담계곡까지… 굽이굽이 설악의 진면목이 먹빛으로 피어나고 있더군요. 비결을 알아보니 ‘한지’였습니다. 흔한 사진용 인화지가 아니라 우리 전통 한지였던 겁니다. 바짝 다가서면 한지 특유의 결이 올올이 살아 있었어요. 꿈속을 헤매듯 설악의 겨울 비경 속에 푹 빠져든 느낌이랄까요. 그때 손 하나가 불쑥 다가왔습니다. 사진을 찍은 주인공 임채욱 작가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이뤄졌습니다.


전시 제목을 <인터뷰 설악산>이라 붙인 까닭을 물었어요. “우리가 설악산을 지금까지 너무 관광지로만 인식했던 것 같아요. 이제부터라도 설악산이 하는 이야기를 우리가 듣고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산이 하는 말을 듣기 위해 8년 동안 쉰 번 넘게 설악산을 오르내렸다고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전시와 맞물려 설악산 케이블카 문제로 뜨거운 공방이 벌어졌지요. 굳게 입을 다문 채 아무 말 없던 설악산이 마침내 입을 엽니다. 임채욱 작가의 사진 속에서 산의 ‘숨결’이 들려왔어요.



산장 1716, 107×160cm,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2017



산을 찍은 사진, 산을 닮은 얼굴


그로부터 1년여가 흐른 2017년 4월, 페이스북에서 본 사진 한 장 때문에 작가에게 연락했습니다. 액자를 지게에 짊어지고 북한산을 오르는 산악인들의 모습이 사진에 담겨 있었거든요. 90년 역사를 품은 백운산장에서 전시한다고 했습니다. 산장까지 오르는 수고로움이 미안했던지 전시 소식조차 알려오지 않았어요. 사라질 운명에 놓인 백운산장을 살려보겠다고 산장에서 사진전을 여는 작가. 이번엔 사진 속에 산 대신 ‘사람’이 있었습니다. 산에 깃들어 사는 이들, 산을 닮은 이들의 얼굴 말입니다.


<인터뷰 설악산>과 <백운산장> 사이에 두 차례 전시가 더 있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 됐지요. 낙산과 인왕산 사진전이었습니다. 역시 먼저 연락해오는 법은 없더군요. 드러내지도 과시하지도 않는 그 소탈함이 좋았습니다. 2017년 여름, 푹푹 찌는 무더위를 뚫고 찾아간 을지로 작업실에서 작가와 오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긴 대화가 끝나갈 무렵 비로소 깨달았지요. 임채욱 작가의 사진에서 결국 중요한 건 기교가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을요.



마인드 스펙트럼-월천리, 100×100cm,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2008


작가 임채욱을 세상에 알린 건 월천리 솔섬 사진입니다. 작가 스스로 고백했듯 솔섬 사진의 미학적 핵심은 동양화의 ‘여백’이었습니다. 사진의 중심에는 섬이 있지만, 그 섬은 더 크고 넉넉한 하늘과 물에 안겨 있지요. 그 근간은 물론 작가가 미술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이력입니다. 실제로 장노출 기법으로 찍은 솔섬 사진을 들여다보면 미세하게 움직이는 물의 흐름이 수묵화처럼 번지듯 표현된 것을 볼 수 있어요. 훗날 설악산 사진을 한지에 뽑아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붓을 쥐어본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일 겁니다.


하지만 단순히 동양화 같고 수묵화 같은 기법의 특이성이나 외형적 아름다움으로만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합니다. 당시 솔섬 앞에선 LNG 생산기지 건설 계획이 추진되고 있었지요. 임채욱은 거기에 사진으로 맞섭니다. 저명한 사진작가 마이클 케나(Michael Kenna)가 찍은 사진 한 장에 사라질 위기에 처한 섬의 비극적 운명을 세상에 알렸다는 ‘신화’가 덧칠되는 순간에도 그는 묵묵했습니다. 다만 솔섬의 아픔을 끌어안고 같이 흐느꼈을 뿐. 그 진정성과 성실함은 사진 이상으로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좌) 인수봉 1803, 160×107cm, 한지에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2018

(우) 인수봉 1805, 160×107cm, 한지에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2018



그는 왜 인수봉을 찍었을까?


2016년 <인터뷰 설악산> 이후 작가가 근 2년 만에 여는 대규모 개인전의 주제로 선택한 건 북한산 인수봉이었습니다. 왜 인수봉일까. 산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인수봉을 아는 이가 대체 얼마나 될까. 설악산도 인왕산도 아닌 북한산, 그것도 벌거벗은 봉우리 하나가 사람들에게 어떤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작가에게 처음부터 대놓고 캐물었죠. 인수봉 작업이 자칫 자기만족에 그치는 건 아닌지 조금은 걱정스러운 마음도 없지 않았거든요.


을지로 작업실을 드나들면서 인수봉에 대한 작가의 생각들이 구체적인 작업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걱정은 기우(杞憂)에 지나지 않았어요. 군 복무 시절 수유리 버스터미널에서 빌딩 숲 사이로 배꼼 고개를 내민 인수봉을 본 순간을 임채욱 작가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더군요. 그때부터 경북 성주 출신의 시골뜨기 미술학도에게 인수봉은 곧 서울이었고 마음 한구석에 소중하게 간직된 큰 바위 얼굴이었습니다.



인수봉 18109, 107×160cm,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2018


누군가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군요. 지극히 평범하게 보이는 인수봉 사진에서 예술적 감동을 얻는 것은 어렵지 않겠느냐고 말이에요. 아예 틀린 말은 아닙니다. 작가 스스로도 인수봉 작업에선 회화적 사진의 비중보다는 다큐멘터리 사진을 지향했다고 하니까요. 결국, 낱낱의 사진이 갖는 예술적 완성도보다는 사진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야 합니다. 결과가 아닌 과정에 주목하면 작가가 인수봉에 매달린 까닭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요.


이번 전시에는 그동안 작가가 실험해온 한지의 특성을 십분 활용한 작품들이 망라됐습니다. 작가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묵화 같은 사진은 물론 한지의 유연성과 질긴 특성을 활용해 손으로 구겨서 완성한 한지 부조 사진도 선보입니다. 특히 더 주목되는 건 한지의 빛 투과성을 활용해 스마트 조명과 결합한 이른바 ‘스마트 인수봉’입니다.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회심의 역작이에요.


사진에서 입체로 발전시킨 임채욱 작가의 스마트 인수봉



인수봉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


스마트 인수봉은 앞뒤를 서로 다른 사진으로 접합해 완전한 입체 형식으로 완성한 뒤 스마트 조명을 결합한 독특한 작품입니다. 관람객이 스마트폰으로 간단하게 인수봉의 색깔을 바꿀 수도 있어요. 이 똑똑한 인수봉은 외부의 음악과 소리에도 능동적으로 반응합니다. 자칫 딱딱하고 지루하게 느낄 수 있는 인수봉에 좀 더 친근하고 흥미롭게 다가설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지요. 작가가 인수봉 작업에서 다큐멘터리 사진을 당당하게 선보일 수 있었던 데는 바로 이 스마트 인수봉이란 숨은 무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눈여겨봐야 할 것은 인수봉에 관한 풍부한 자료들을 모은 아카이브 전시 공간입니다. 단순히 자료를 한데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아카이브 자체가 작품 못지않은 짜임새를 자랑합니다. 인수봉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등반가이자 세계적인 친환경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의 설립자인 이본 취나드(Yvon Chouinard)의 장비에서부터 저서와 영상 아카이브, 한국과의 인연과 파타고니아를 창립한 사연 등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지요.



인수봉 등반에 실제로 사용된 장비들을 이용해서 만든 설치 작품


이 밖에도 인수봉 조난사와 보수 공사의 내력, 인수봉과 관련한 해외 가이드북과 각종 안내서들, 등반 안내 지도에 이르기까지 자료 하나하나에 인수봉의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작가가 작업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라고 말하는 인수봉을 대학 시절에 그린 작품 두 점도 처음으로 선보이고요. 여기에 작가의 인수봉 작업과 과거 백운산장 작업, 인수봉의 역사와 함께 호흡해온 산악인들의 땀과 눈물을 담은 귀중한 기록들도 모았습니다. 언제 이 많은 자료를 다 모았나 싶더군요. 인수봉을 향한 작가의 남다른 애정과 야심을 읽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새로 작업한 인수봉 사진을 보여줄 때마다 작가는 매번 열변을 토하곤 했어요. 실로 무서운 열정이요 집중력이었죠. 처음엔 하루가 멀다 하고 인수봉을 오르더니, 나중엔 서울에서 인수봉이 바라보이는 거의 모든 지점을 샅샅이 훑었습니다. 산은 늘 거기 보이는 곳에 서 있었어요. 미처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을 뿐이죠. 최근 몰라보게 자연생태를 회복한 우이천에서 맨손으로 고기 잡는 소년의 모습을 포착한 사진이야말로 이번 전시의 백미일 겁니다.



인수봉 18104, 107×160cm,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2018



‘생태’의 관점에서 본 사진 미학


산이 있고 물이 있고 사람이 있는 풍경. 임채욱은 이번 개인전에서 사진작가로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변함없이 지켜온 ‘생태’에 대한 작가적 의지를 보다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생의 절반을 함께 한 인수봉은 작가 임채욱에게 ‘작업의 고향’이었어요. 이따금씩 연락을 해보면 거짓말처럼 그는 늘 산에 있더군요. 그간의 길고도 지난했던 출사 여정에 잠시 쉼표를 찍는 전시회입니다. 하지만 완성된 예술이란 없는 법. 언제고 그는 카메라를 들고 또다시 산에 오를 겁니다. 산이 남몰래 털어놓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위해서 말이죠.






김 석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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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화가들의 핫 플레이스 ‘인왕산’
2편. 역사와 예술을 품은 인왕산
김 석
#김석기자


500년 조선 왕조의 법궁(法宮)이었던 경복궁 위로 고개를 내민 작지만 늠름하기 이를 데 없는 산. 한양의 주산(主山)인 백악산(북악산)입니다. 해발고도가 342m에 불과해도 동쪽의 낙산(타락산), 서쪽의 인왕산, 남쪽의 남산(목멱산)과 함께 한양을 감싸 안은 내사산(內四山) 가운데 가장 높답니다. 적어도 조선 중기까지 한양을 대표하는 산의 지위를 누린 건 백악산이었지요.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송두리째 불에 타 폐허가 되자 상황이 달라집니다. 주인 없이 터만 남은 궁궐 뒤에 쓸쓸히 서 있던 백악 대신 인왕산의 존재가 부각되기 시작한 겁니다.


(좌) 정황, <청풍계>, 18~19세기, 모시에 엷은 채색, 22.7×16.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 장시흥, <창의문>, 18세기 후반, 종이에 엷은 채색, 19×15.5cm,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그런 시대 분위기에 정점을 찍은 인물이 바로 화성(畫聖 : 그림의 성인, 즉 매우 뛰어난 화가를 높여 이르는 말)으로 추앙받는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이었고요. 인왕산을 한양의 ‘랜드 마크’로 만든 것은 전적으로 겸재의 유산이었습니다. 인왕산 구석구석을 그림으로 남긴 것은 물론 인왕산 전경을 최초로 화폭에 아로새긴 화가 또한 겸재였으니까요. <인왕제색도> 덕분에 인왕산은 국보에 그려진 최초의 산이라는 영예를 누리게 되지요. ‘인왕산 화가’ 하면 겸재를 꼽는 데 아무도 이의를 달 사람이 없을 겁니다. 생전에도 그랬고 사후에도 겸재의 영향력은 대단했습니다.


겸재의 진경산수화풍이 크게 유행하면서 그를 따르고 본받은 화가들이 ‘겸재 화파’를 이룹니다. 겸재의 그림 솜씨를 물려받은 손자 정황(鄭榥, 1735∼?)의 <청풍계>는 겸재의 그림과 구별이 안 될 만큼 꼭 닮았습니다. 오른쪽 그림은 장시흥(張始興, ?~?)이라는 화가가 그린 <창의문>입니다. 청와대를 지나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을 지금은 자하문 고개라고 많이들 부르지요. 자하문은 창의문의 별칭이었습니다. 인왕산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린 능선은 창의문을 기점으로 백악산으로 다시 솟구쳐 오릅니다. 역시 낙관만 가리면 영락없는 겸재의 그림입니다.



인왕산 전경을 담은 또 하나의 그림


강희언, <인왕산도>, 종이에 엷은 채색, 36.6×53.7㎝, 개인 소장


겸재 이후 인왕산 전경을 그린 화가가 또 있습니다. 조선 후기의 중인 화가인 담졸 강희언(姜熙彦, 1738~?)입니다. 위 그림이 강희언의 <인왕산도>인데요. 한눈에 봐도 겸재의 <인왕제색도>와는 확연히 다른 화풍이 눈에 띄지요. 가장 도드라진 특징은 역시 인왕산의 당시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일 겁니다. 겸재의 인왕산은 실제 경치와 분명히 다릅니다. 실제와 똑같이 묘사한 것이 아니라 예술적 상상력을 발휘해 가장 인왕산다운 인왕산을 그렸으니까요. 반면 강희언의 그림을 보면 산세는 물론 인왕산을 끼고 이어진 한양도성과 산 아랫마을까지 꼼꼼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화면 오른쪽 위에서 사선으로 물결치듯 죽죽 뻗어 내려간 골짜기의 묘사에도 상당한 공을 들였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전통 한국화에선 볼 수 없었던 원근법을 적용했다는 점일 겁니다. 그림 오른쪽 상단 글씨에 “늦은 봄 도화동에 올라 인왕산을 바라보며(暮春登桃花洞 望仁王山)” 그렸다고 적혀 있습니다. 카메라를 들고 현장을 직접 찾아 나선 미술사학자 이태호 교수는 지금의 창의문 쪽 백악산 중턱에서 그린 것으로 봤어요. 500~600미터 떨어진 곳에서 볼 때 인왕산의 전모가 한눈에도 적절하게 포착된다는 겁니다. 이태호 교수는 “강희언 그림에서 현대적인 기품이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라 생각된다.”고 했습니다.


또 하나 특징적인 것은 화면 아래 흰 안개도 그렇지만 하늘을 마치 수채화 그리듯 시원하게 채색했다는 점이에요. 이 부분은 강희언의 직업과 연결해서 풀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강희언은 열일곱 나이에 천문 지리 분야인 음양과에 급제한 뒤 관상감에서 관원으로 일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기상청 직원 출신 화가라고 할까요. 자신보다 63살이나 많은 겸재와 이웃에 살며 그림을 배웠지만, 제자는 스승의 유산에 서양화풍을 과감하게 접목합니다. 그림 왼쪽 상단에 당시 예술계의 큰 어른이었던 표암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의 평가가 적혀 있습니다.



寫眞境者 每患而使乎也圖 而此幅 旣得十分逼眞 且不失畵家諸法
(진경을 그리는 자는 그림이 지도와 같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이 그림은 충분히 사실적이고 또한 화가들의 여러 화법을 잃지 않았다.)



겸재가 좋아 인왕산을 그리게 한 시인


겸재 정선과 같은 시대를 산 인물 가운데 권섭(權燮, 1671~1759)이란 분이 있습니다. 명문세가 출신임에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아 이름은 덜 알려졌지만, 우리 문학계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시인이지요. 지금까지 전해오는 한시만 3,000수가 넘는다고 하는데요. 권섭은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삼연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의 문하에서 화가인 겸재 정선과 가깝게 지냈습니다. 나이 차도 5살밖에 안 됐고요. 두 사람의 돈독한 친분을 보여주는 시 한 편이 남아 있습니다. 제목은 ‘정선에게(寄鄭元伯)’입니다.



2002년 서울옥션 미술품 경매에 출품된 《옥소북악십경》 (사진제공: 서울옥션)


권섭은 생전에 겸재의 그림을 무척 좋아했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꼭 갖고 싶은 겸재의 그림이 있으면 손자에게 같은 구도로 다시 그리게 해서 화첩으로 묶어 간직했을 정도니까요. 그 손자가 권신응(權信應, 1728~1786)이란 화가입니다. 2002년 서울옥션 미술품 경매에서 권섭의 작품으로 소개된 《옥소북악십경》이란 8폭짜리 화첩이 출품돼 관심을 모았는데요. 당연히 권섭이 직접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을 테고, 그렇다면 손자를 시켜서 그린 게 아닐까 합니다. 《옥소북악십경》을 자세히 검토한 미술평론가 최열 선생은 화풍으로 볼 때 권신응의 그림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인왕산이 등장합니다.


권신응, <청풍계>, 1753년, 종이에 엷은 채색, 41.7×25.7cm, 개인 소장


화면 맨 위에 가는 먹선 두어 개로 쓱쓱 그어나간 능선 위에 한자로 인왕산(仁王山) 세 글자가 또렷하게 적혀 있습니다. 산수화에다가 구체적인 지명을 써넣은 대표적인 화가가 겸재 정선이었지요. 다분히 겸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지도에 지명을 써넣은 당시의 경향을 흡수한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사정이야 어찌됐든 지도가 아닌 그림에 인왕산 이름이 적혀 있는 사례로는 극히 이례적이지요. 그 왼쪽 아래 커다란 바위에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 적혀 있습니다. 지금도 인왕산에 가면 볼 수 있는 백세청풍 바위의 글자는 조선 중기의 문신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이 당대 최고의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글씨를 가져와 새겼습니다.


겸재 정선의 그림으로 더 유명한 인왕산 청풍계는 당시 세도정치의 주역이었던 안동 김씨 장동파, 즉 장동김씨의 땅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백세청풍 각자를 새긴 김상용은 인왕산 쪽에, 형보다 더 유명했던 동생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인왕산이 바라다보이는 백악산 쪽에 살았습니다.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간 김상헌은 고달픈 타향살이 속에서 인왕산을 그리워하는 시를 씁니다.



필운산(弼雲山)은 인왕산의 옛 이름입니다. 떠나온 집을 그리는 간절하고 애틋한 마음이 절절하게 전해지는 것만 같습니다. 아무튼, 당대 최고의 권문세가가 깃든 터전이었으니 도성 안에서 얼마나 풍광이 뛰어나고 아름다운 곳이었는지 알만하지요. 기왕 김상헌의 형 김상용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보다 앞선 시기에 청풍계를 그린 작품을 한 점 더 볼까요. 경기도 안산시에 있는 성호기념관에 <청풍계첩(靑楓契帖)>이란 주목할 만한 시화첩이 소장돼 있습니다. 광해군 12년인 1620년 봄에 인왕산 청풍계(靑楓溪) 태고정(太古亭)에서 이름난 문인 7명이 모여 봄을 즐기고 시를 지어 책으로 묶습니다. 이런 모임을 계회(契會)라고 하는데, 계회를 기념하는 그림 한 점이 함께 수록돼 있습니다.



가장 오래된 인왕산 그림을 만나다


성호기념관 소장 《청풍계첩》에 수록된 인왕산 청풍계 그림


왼쪽으로 인왕산 아래 개울이 흐르고 그 옆에 초가집이 한 채 고고하게 서 있지요. 김상용의 집 태고정(太古亭)입니다. 이곳에서 모임을 연 겁니다. 정작 집주인인 김상용은 다른 지방에서 벼슬을 살고 있어 모임에는 함께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당시 모임에 참석한 인물은 모두 7명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병조판서 이상의(李尙毅, 1560~1624)라는 분을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계회를 연 뒤 시와 그림을 두루마리에 묶어 참석자들이 한 부씩 나눠 가졌습니다. 이런 두루마리를 계축(契軸)이라고 합니다. 다른 두루마리는 모두 사라지고 이상의 소장본만 집안에 대대로 전해집니다.


(좌)백세청풍 각자 (우) 김상용 집터 표석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상의의 증손자가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입니다. 이익은 ‘경서청풍계첩후(敬書淸楓溪帖後)’라는 글에서 두루마리의 그림이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1736년에 원본을 똑같이 그리게 한 뒤 원래 두루마리였던 것을 첩(帖), 그러니까 책의 형태로 바꿨다는 사실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결국 <청풍계첩>에 수록된 위의 그림은 17세기에 그려진 원본을 18세기에 다시 그린 거지요. 그렇다고 해도 이 그림의 가치가 폄하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인왕산 청풍계를 그린 유일한 작품일 뿐 아니라, 겸재 정선보다 시기적으로 무려 120년이나 앞서기 때문입니다. 청풍계 역시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렵습니다. 김상용의 집터였음을 알리는 표석이 서 있을 뿐이지요.


권신응, <옥류동>, 1753년, 종이에 엷은 채색, 41.7×25.7cm, 개인 소장


다시 권신응의 그림을 더 볼까요. 《옥소북악십경》 가운데 <옥류동>이란 작품에도 인왕산(仁王山) 세 글자가 선명합니다. 그 아래로 죽 내려오면 또 다른 세 글자가 보이는군요. 수성동(水聲洞)입니다. 겸재 정선의 그림 덕분에 옛 모습에 가깝게 복원된 바로 그 수성동 계곡입니다. 이렇게 그림으로 그려진 것만 봐도 당시에 얼마나 이름난 명승지였는지 알 수 있지요.


(좌)권신응, <삼계동>, 1753년, 종이에 엷은 채색, 41.7×25.7cm, 개인 소장

(우)권신응, <수문루>, 1753년, 종이에 엷은 채색, 41.7×25.7cm, 개인 소장


이 밖에도 《옥소북악십경》에는 크든 작든 인왕산이 등장하는 그림이 더 있습니다. 왼쪽 그림의 삼계동(三溪洞)은 지금의 부암동, 그러니까 서울미술관과 석파정이 있는 그 일대 땅의 옛 이름입니다. 오른쪽 그림은 <수문루(水門樓)>입니다. 오른쪽 아래로 보이는 문은 홍지문(弘智門)이고, 그 왼편에 수문 다섯 개가 나란한 구조물은 오간수문(五間水門)입니다. 문루 위에 적힌 세 글자는 한북문(漢北門)으로 홍지문의 다른 이름이고요. 조선시대에는 인왕산 능선을 타고 뻗은 한양도성이 부암동으로 내려와 홍지문까지 이어졌지요. 멀리 북한산 문수봉이 우람하고, 가깝게는 홍제천이 굽이굽이 흐르는 이곳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절경이었던 모양입니다. 화면 오른쪽으로 깎아지른 인왕산 바위가 흔적을 남겨 놓았습니다.



옥계시사와 임득명의 인왕산 그림


인왕산 기슭에 초가집을 짓고 살며 서당 훈장 노릇을 하던 천수경(千壽慶, 1758~1818)이란 분이 있습니다. 양반이 아닌 중인 출신으로 가난했지만 글 좋아하고 시를 무척 잘 썼다고 하지요. 조선의 문예군주로 불리는 정조가 서얼과 중인 출신 인재들을 대거 등용해 규장각에서 일하게 한 사실은 유명합니다. 조선 중앙관청의 하급관리인 경아전(京衙前), 특히 규장각 서리들이 주로 모여 살던 곳이 바로 인왕산 기슭의 옥계(玉溪), 즉 옥류동(玉流洞) 일대였어요. 천수경을 중심으로 시 짓고 풍류 즐기는 이들 13명이 의기투합해 1786년 7월 16일 시 모임을 결성합니다. 옥계시사(玉溪詩社)라는 이름으로 말이죠.


임득명, <등고상화>, 《옥계사수계첩》, 종이에 엷은 채색, 24.2×18.9㎝, 삼성출판박물관 소장


그 해에 옥계시사 동인들은 자신들의 시와 그림을 엮어 책을 꾸밉니다. 현재 삼성출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옥계사수계첩(玉溪社修禊帖)》인데요. 여기에 옥계시사 동인이었던 화가 임득명(林得明, 1767~?)의 그림 4점이 전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그림이 12폭이었다고 하는데 8점은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전해지는 그림 4점 가운데 인왕산 그림 한 점은 각별하게 주목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임득명의 <등고상화(登高賞華)>는 인왕산에서 즐기는 봄꽃놀이 장면을 그린 작품인데요. 갈지자(之)로 흘러내리는 능선을 따라 붉은 꽃이 활짝 피어나 보기 드문 진풍경을 연출하고 있지요. 인왕산의 봄을 대표하는 그림이라 해도 좋을 겁니다.


임득명이라는 화가가 남긴 흔적은 더 있습니다. 옥계시사 결성 5년 뒤인 1791년에 꾸며진 《옥계사시첩(玉溪社詩帖)》에 임득명의 그림 11점이 수록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지요. 이 시첩은 현재 영국 국립도서관(The British Library)에 소장돼 있습니다. 그동안 제대로 빛을 못 보다가 한국사학자 정옥자 교수가 《조선후기 중인문화연구》라는 책에 자세한 내용을 그림과 함께 소개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인왕산의 야경을 그린 단원 김홍도


김홍도, <송석원시사 야연도>, 1791년, 종이에 엷은 채색, 25.6×31.8cm, 한독의약박물관 소장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옥계사시첩(玉溪社詩帖)》이 만들어진 그해에 모임에 초청받은 전문 화가들이 또 다른 그림을 남겼다는 사실입니다. 그중 하나가 조선 최고의 화가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의 <송석원시사 야연도(松石園詩社夜宴圖)>입니다. 난데없이 왜 송석원시사로 이름이 바뀌었냐고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옥계시사 결성을 주도한 천수경은 나중에 자신의 호를 송석원(松石園), 송석도인(松石道人)으로 바꿉니다. 옥계시사와 송석원시사는 결국 같은 모임으로 시기에 따라 명칭이 달리 불린 것뿐입니다.


제목에서 보듯 이 작품은 밤 그림입니다. 조선 정조 때인 1791년 6월 15일 유두날 밤, 천수경의 집 송석원에서 열린 시 모임을 그린 작품이지요. 달빛 그윽한 밤에 당대의 시인과 문사 9명이 초가집 앞의 너른 뜨락에 앉아 풍류를 즐기고 있습니다. 문인들의 고상한 모임을 그린 이런 그림을 아회도(雅會圖), 또는 아집도(雅集圖)라고 부릅니다. 이 모임에 초청받은 김홍도가 그림을 그리고, 당대의 서예가였던 미산 마성린(1727~1798)이 시를 썼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대 최고의 화가에게 모임을 그리게 할 정도로 이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마성린이 쓴 시의 내용처럼 여름밤의 아스라한 분위기가 깊은 운치를 자아내지요. 김홍도가 46세에 그린 이 작품은 한껏 무르익은 그 시대의 문화적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입니다.


이인문, <송석원시회도>, 《송석원시사첩》, 1791년, 종이에 엷은 채색, 25.6×31.8cm, 개인 소장


여기에 김홍도의 그림과 짝을 이루는 작품이 한 점 더 있습니다. 김홍도와 동갑내기 화가인 이인문(李寅文, 1745~1821)의 <송석원시회도(松石園詩會圖)>입니다. 김홍도의 그림과 달리 이 작품은 낮 그림이에요. 화면 왼쪽 너럭바위 위에 두 무리가 옹기종기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이지요. 뒤로는 왼쪽에 인왕산, 오른쪽에 백악산이 솟아 있고 멀리 뒤로 삼각산이 보입니다. 김홍도와 단짝 친구였던 이인문 역시 모임에 초빙돼 그림을 그렸다는 걸 알 수 있지요. 낮과 밤에 모인 장소가 달랐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화폭을 잔잔하게 물들이고 있는 인왕산 자락의 그윽한 풍경이 참 아름답습니다. 사람들이 모인 배경에 치솟은 커다란 바위에는 송석원(松石園) 세 글자가 적혀 있습니다.


(좌)1950년대에 김영상이 찍은 송석원 각자 바위 (우)송석원 터 표석


송석원이 대체 어디에 있었는지 많은 이가 궁금증을 품고 찾아다녔지요. 하지만 어렴풋하게 추정만 할 뿐 정확한 위치는 아직까지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1950년대에 서울연구가 김영상 선생이 찍은 사진으로 남아 있는 ‘송석원’이란 바위 글자는 저 유명한 추사 김정희의 32세 때 글씨라고 합니다. 이 바위 역시 지금은 행방이 묘연합니다. 연구자들은 아마도 지금의 박노수미술관 근처 어딘가에 바위가 묻혀 있지 않을까 추측하기도 합니다. 인왕산 일대 답사에 나선 이들은 보통 박노수미술관 근처에서 송석원시사의 흔적을 어렴풋이나마 더듬어보곤 하지요. 과거의 자취는 사라지고 지금은 그 터로 추정되는 자리에 표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수많은 사연과 이야기를 품은 산


박제신, <서교전별>, 1826년, 종이에 엷은 채색, 25.3×31.8cm


옛 그림에서 인왕산의 흔적을 더듬어보는 여행도 이제 막바지에 다다랐습니다. 지난해 말, 국내의 한 고미술품 경매에 인왕산 그림이 한 점 나왔습니다. 소향관 박제신(朴齊臣, 1792~?)이란 생소한 화가가 그렸다는 <서교전별(西郊餞別)>이란 작품인데요. 경매사 측이 소개한 그림 내력을 보니, 조선 후기 실학자인 담헌 홍대용의 손자인 홍양후(洪良厚, 1800~1879)가 연행사의 일원으로 청나라에 갈 때 서대문 밖에서 배웅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입니다. 그림 좌우 여백에 적혀 있는 글씨가 그런 내용을 알려주지요. 박제신은 정조 때 우의정을 지낸 박종악(朴宗岳, 1735~1795)의 손자였으니, 아버지 대에서 맺은 인연이 자손들에게까지 이어져 이런 그림이 탄생하지 않았나 하고 경매사 측은 설명합니다.


그림을 자세히 뜯어보면 역시나 겸재의 영향이 지대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겸재의 그림이 시대의 전범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던 겁니다. 하지만 조선 말기에 들어서면 인왕산 그림을 더는 보기 어렵게 됩니다. 조선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영조와 정조의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인왕산도 차츰 그 빛을 잃어갔습니다. 이 시점에서 옛 화가들이 그림 속에 남긴 인왕산의 흔적을 더듬어보는 까닭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그토록 가까운 곳에 산 좋고 물 좋은 곳이 있었으니 한양 최고의 명승으로 각광받았을 수밖에요. 500년 조선 역사에 그렇게도 많은 이야기와 사연을 품은 채 그림의 소재로, 배경으로 널리 사랑받은 산이 달리 또 있을까요.



김 석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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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미식,편식:정동현의 三食일기
워라밸의 시작, 요리하는 자유
정동현
#정동현


신세계그룹이 올해부터 대기업 최초로 주 35시간 근무제를 도입했다. 덕분에 업무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오후 다섯시다. 회사 문을 나서 지하철에 들어서면 쉽게 앉을 자리를 찾을 수 있다. 삶의 형태가 바뀐 것이다. 팀의 부제가 ‘2AM’, 팀 주제가로 ‘죽어도 못 보내’를 부르던 시절은 안녕이다. 아침 9시에 업무를 시작해 저녁이라고 부르기엔 부끄러운 오후 5시가 되면 일이 끝난다. 이른바 워라밸은 이렇게 이룩되었다. 정확한 시간에 일이 시작되고 끝난다.





지하철은 바흐의 평균율 연주처럼 규칙적인 리듬으로 역을 통과한다. 직장인이 받는 가장 큰 스트레스는 생활을 통제할 수 없는 것에서 온다고 한다. 자기 삶에 대한 결정권을 가질 때 계획을 세울 수 있다. 그것은 자율이라고 하고 또 다른 말로는 자유라고 한다. 이제 남는 시간에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다른 문제가 생겨난다. 선택의 문제다. 여기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자유에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할 수 있는 자유, 또 다른 하나는 하지 않을 자유다. 어떤 것을 할지 말지 결정해야 한다. 나는 말하고 싶다. 요리할 수 있는 자유를 선택하라.


생존의 필수 기술이었던 요리가 취미 생활이란 범주 안에 들어간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이제 요리는 당당한 취미 생활이고 또 당당한 특기인 시대다. 그 말은 요리 자체에 돈과 시간이 꽤 많이 든다는 이야기다. 한가지 밝힐 사실이 있다. 만약 절약하고 자 한다면 4인 가구 이상이 아니라면 외식을 하는 편이 훨씬 낫다. 비싼 식재료 값, 각종 기구, 수도광열비, 특히 시간을 돈으로 환산한다면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요리를 한다는 말은 구시대적인 발상이다. 대규모로 식재료를 구입하고 대량으로 조리해 단가를 낮춘 즉석식품을 먹는 편이 시간과 돈을 아끼고자 한다면 보다 현명한 선택이다.





그렇다면 요리를 해야 하는 이유가 뭘까? 쉽게 생각해보자 일 년에 몇 안 되는 캠핑과 같은 행사에 솜씨를 발휘할 수도 있다. 물론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다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무인도에 떨어진다거나 하는 위급한 상황에서 좋은 기술인 것도 맞다. 역시 이 또한 매우 드문 확률이다. 직업으로서 요리란 기술을 습득한다면 세계 어느 나라에 가서도 직업을 구할 수 있다. 세계 어느 나라에 가서든 하루 12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시달리며 그 나라 최저임금에 가까운 급여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 또한 확실하다. 하나하나 따지면 굳이 스스로 요리를 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남이 몰아주는 차가 제일 좋듯 남이 해주는 요리가 제일 맛있다는 말에 수긍이 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요리는 편리나 이익, 영리 같은 숫자 놀음과 큰 관련이 없다.



불, 요리 그리고 진화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한 책 요리본능(2011, 리처드 랭엄 지음, 조현욱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옛날 요리는 생존의 기술이었고 인류가 동물과 다른 존재가 된 전제조건이었다. 하버드 교수 랭엄 박사는 자신의 저서 ‘요리 본능’에서 현재 인류가 존재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요리라고 썼다. 요리함으로써 각종 식재료의 맛과 흡수율이 높아지고 그에 따라 가용 가능한 열량이 늘어나게 되어 뇌 체적 증가로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현재 각종 신념과 여러 필요 때문에 식재료 그대로 생식을 하는 집단의 경우 시간당 흡수 열량 자체가 요리해서 먹는 쪽에 비교해 현저히 낮으며 그에 따라 성장 장애, 영양결핍, 생리불순, 심지어 불임과 같은 여러 증상을 겪게 된다는 연구 결과도 많다. 거창하지만 요리란 인간이기 위한 하나의 조건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요리는 문화 그 자체이다. 문화가 발전함에 따라 요리에 각국의 기후, 문화, 역사, 경제 상황에 스며들었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오래 보관이 가능한 건조 파스타 위주의 단순한 식문화가 발달했고 중앙집권적인 정치 제도를 가졌으며 물산이 풍요로운 프랑스에서는 일찍이 왕족과 귀족들을 중심으로 호화로운 식문화가 탄생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요리로 귀결된다.


요리하며 느끼게 되는 것은 이 인간의 조건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말 자체는 거창하지만, 요리를 하는 순간 나는 제대로 된 인간이 되는 것 같다. 밥을 짓고 나물을 무치며 국을 끓일 때, 그 모든 준비 과정에서 고립된 현대인이 아니라 이 사회와 관계하는 인간임을 느낀다. 만약 밥을 짓는다면 어떤 쌀을 고를지, 그 쌀이 어떤 처리 과정을 거쳤는지, 쌀에 물을 얼마나 불릴지, 화력에 따라 쌀알의 분포에 따라, 기구에 따라, 어떻게 밥맛이 달라지는지 느끼게 된다. 그 과정이 반복되고 학습되면 요리란 행위로 이름 붙여진다. 시금치를 산다. 서양의 시금치와 동양 시금치의 차이에 대해서, 왜 소금물에 데쳐야 싱싱한 초록색이 살아나는가에 대해서, 왜 소금간을 할 때 설탕으로 살짝 밑간을 하는지, 왜 소금에서도 단맛이 나는지, 이런 사실에 대해 알게 된다. 그것이 요리다.





만약 밥 짓기 전문가라면 이보다 더욱 많은 설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쌀의 유래, 품종의 역사, 그리고 한국 농경 정책과 자본의 역할 등, 수많은 이야기가 밥 짓기 하나에 얽혀 있다. 요리를 하려면 장을 봐야 한다. 그때부터 무수한 선택이 기다리고 있다. 어떤 쌀을 살 것인가? 왜 이 쌀이어야 하는가? 그 선택을 하며 사회에 대한 이해가 넓어진다. 쌀이 어떤 가공을 거치고, 그 가공 방법에 있어 어떤 법제가 적용되는지. 그리고 문화적으로 왜 쌀이 우리에게 중요한지, 밥을 중심으로 한 한국인의 식문화는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등 그 끝이 없다. 실제로 요리에 들어가게 되면 또 다른 차원의 설명이 필요하다. 요리는 이제 화학이 된다. 물을 얼만큼 부어야 하고, 어떻게 불 조절을 해야 하는지는 삼투압과 열에너지, 비열 등과 관련이 있다. 어떤 팬이 잘 뜨거워지는가? 왜 팬은 무거워야 하는가? 비열이 높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요리를 하며 배운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 즉 요리를 통해 우리는 사회에 대한 감수성이 높아진다. 김밥을 한 번이라도 싸본 사람은 김밥 원가 운운하며 그 값이 비싸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김밥 하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수작업이 선행되어야 하는지 김밥을 싸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그 과정에 숙련되면 마지막에는 창조의 기쁨을 느낀다.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듯 재료들을 썰고 볶아 새로운 결과물을 만드는 기쁨이 찾아온다. 이윽고 그 결과물을 사람들과 나눌 때는, 먹을 것을 나누는 원초적인 사랑이 탄생한다.


느껴보라. 차가운 물이 손에 닿고 쌀알이 그 물속에서 움직이는 감촉을. 갓 지은 밥의 구수한 향내를. 요리는 귀찮고 해치워야 하는 숙제가 아니다. 인간이 세계와 소통하는 방법이요, 필수적인 과제다. 자신이 먹을 것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자립의 가장 기초다. 바로 주방에 가라. 칼을 들어라. 양파를 잘라라. 불 위에 팬을 올려라. 인간이란 동물로서, 한 사회와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한 남자와 여자로서, 삶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그 밸런스를 위해, 요리란 무게추를 삶에 올려놓자. 돈과 서류 속에서 존재하는 허깨비 같은 삶이 아니라 칼과 불, 피와 고기, 풀과 나무 속에 존재하는 인간이 되자. 그리고 깨닫게 된다. 행복이란 균형 속에 찾아온다는 것을. 균형이란 행복의 또 다른 이름이란 것을.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 정동현 셰프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에서 '먹고(FOOD) 마시는(BEVERAGE)'일에 몰두하고 있는 셰프,
오늘도 지구촌의 핫한 먹거리를 맛보면서 혀를 단련 중!
저서로는 <셰프의 빨간 노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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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미식,편식:정동현의 三食일기
감귤 한봉지의 추억
정동현
#정동현


내무반에 후임과 나 둘 뿐이었다. 당직 근무를 선 덕에 느닷없는 비상 훈련을 빠지게 된 운 좋은 둘이었다. 그렇다고 불을 키고 책을 보거나 할 수도 없었다. 훈련은 훈련, 모든 내무반에 불을 꺼야 했다. 할 수 있는 것은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있는 일 밖에 없었다. 때 이른 강제 취침에 잠이 오지 않았다. 멀찍이 누운 후임도 잠이 오지 않는지 뒤척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마치 구남친이라도 된 양 허공을 향해 말했다.


“자냐?”


후임은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아닙니다.”


후임과 할 이야기가 많지는 않았다. 근무를 같이 서지도, 친하지도 않았다. 보통 이럴 땐 남 흉을 보며 이야기를 트기 마련이다. 누가 짠돌이다, 누가 요령을 많이 핀다, 축구를 잘 한다 못한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먹는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는 한창 배고픈 청춘이었다.


“맥도날드 맥플러리!”

“아악! 쿠앤크가 최고지 말입니다.”

“초코파이 보단 몽쉘통통!’

“으악! 초콜릿 함량 자체가 다른 거 아십니까?”


배부른 지금이야 바보 같은 대화이겠지만 그때는 가장 절실한 대화였다. 어차피 연애편지 오는 여자친구도 없었다. 20대 중반, 피 끓는 젊음은 먹는 이야기를 하며 잠 오지 않는 밤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끝말잇기를 하듯 끊임없이 음식 이름이 나왔다. 치킨, 피자, 햄버거, 아이스크림…입대 전 먹고 온 것, 휴가 때 미처 먹고 오지 못한 것 등, 천일야화를 하듯 새벽이 되어도 대화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다 결정적인 이름 하나가 나왔다.





“귤!”

“아…, 정말 한 박스라도 먹을 자신 있습니다.”

"맞아. 검은 봉다리에 이천원 어치 하는 거 사서 방 바닥에 배 깔고 까 먹으면 정말 맛있는데….”

“아…….”


남는 것은 아련한 신음 소리 뿐이었다. 나는 감귤을 빨리 먹는 것은 늘 자신 있었다. 후임과 이야기한 것처럼 찬 바람 부는 겨울이 되면 배를 깔고 누워 박스에 든 감귤을 까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는 것만큼 재미난 것이 없었다. 감귤은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았다. 온돌에 배를 따뜻하게 지지고 입 안으로 시큼하고 달콤한 귤을 연신 넣는 것은 어린 시절 나의 크나큰 즐거움이었다. 그런 내가 감귤을 따게 되리라곤 생각해보지 않았다. 다 비자(Visa) 때문이었다. 호주에서 내가 가지고 있던 워킹홀리데이비자를 연장하려면 1차 산업에 3달 간 종사해야 했다. 말 그대로 농장을 가든 배를 타든, 광산에 들어가든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와중에 우연히 눈에 띈 것이 감귤 농장이었다. 모집 광고는 흔한 문구로 씌어져 있었다. ‘일은 그다지 힘들지 않다’, ‘돈 많이 번다고 확답을 줄수는 없다.’ ‘그래도 열심히 하면 꽤 번다’ 등등등. 나는 그 문구 하나 보고 남호주의 에들레이드로 떠나는 버스를 잡아 탔다. 10시간 넘게 버스를 타 에들레이드에 도착한 다음 또 버스를 갈아타고 6시간을 달렸다. 그리고 나는 남호주의 소도시 ‘렌마크(Renmark)’에 도착했다. 


렌마크는 감귤과 오렌지의 도시였다. 지평선 끝까지 달려도 과수원이 끝나지 않았다. 남호주에 이렇게 큰 과수 단지가 들어선 것은 미국 캘리포니아와의 상관 관계가 작용했다. 호주는 미국 캘리포니아와 적도 반대편에 있다보니 계절 상 수확 시기도 정확히 반대다. 미국 산 오렌지가 나지 않는 시기에 호주 산 오렌지가 나게 되는 것이다(비슷한 이유로 같은 위도에 있는 브라질과 경쟁 관계에 있다). 어찌 되었든 오렌지와 감귤이 어마어마 하게 자라는 이 작은 도시에 일감을 찾아온 한국인, 일본인, 대만인 등은 한철 메뚜기처럼 같이 어울려 살게 된다. 나는 그들 중 하나 였다. 나의 숙소는 스무 명이 함께 사는 큰 집의 이층 침대 아래 쪽이었다. 요리를 계속 하기 위해 찾아온 호주의 사막 한가운데 어딘가, 8인 실 구석에서 나는 첫날을 뜬눈으로 지샜다. 





다음날부터 나는 칼이 아니라 작은 니퍼를 손에 쥐고, 가슴에는 앞치마가 아닌 캥거루 백을 맸다. 몇 십 명 씩 부대 단위로 움직이는 이 군단 아닌 군단을 농장과 계약한 수퍼바이저(superviser)가 인솔했고 그날 아침 구역을 배정 받으면 그 부대가 그 구역을 책임지고 수확하는 구조였다. 팀은 2인1조로 짰다. 남자가 사다리를 매고 다니며 나무의 위쪽을 맡고 여자는 나무의 아래쪽을 맡았다. 우리가 주로 딴 것은 감귤이었다. 단위 당 받는 돈이 오렌지 보다 더 했기에 우리 담당 한국인 수퍼바이저는 늘 감귤 쿼터를 따왔다. 


감귤 따기는 장난이 아니었다. 내 머릿 속에 있던, 그러니까 영롱이는 햇살 아래 웃으며 수확의 기쁨을 맛보는 아름다운 광경 따위는 없었다. 돈을 벌어야 하니 모두 전의에 불탔다. 처음엔 어리버리 했지만 조금씩 요령이 붙었다. 감귤이라는 놈은 나무 가지 아래 따기 좋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녀석이 아니었다. 가지 깊숙이 도저히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매달려 있기도 했고 사다리 맨 끝까지 올라가야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기도 했다. 따기 어렵다고 따지 않고 넘어갈수도 없었다. 일정 크기 이상은 모두 따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팀과 부대 별로 농장에서 페널티를 받았다. 나뭇가지 사이로 몸을 밀어넣느라 옷이 찢어지고 팔에는 무수한 상처가 났다. 숨도 쉬지 않고 감귤을 따 가슴팍에 매달린 캥거루 백에 넣다 그 백도 다 차면 한 변이 1.5m인 수집 박스에 부었다. 그 박스를 둘이서 세 개 정도는 가득 채워야 하루에 한명 당 150달러를 벌 수 있었다. 얼굴이 까맣게 타고 흙먼지가 하얗게 붙노라면 농사일이 쉬운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와중에 이 감귤 따기도 잘 하는 팀과 못하는 팀이 나뉘었다. 특히 시골에서 일 좀 해봤던 축은 그 속도가 배 가량 차이가 났다. 그 말은 벌이도 배 가량 차이가 났다는 뜻이다. 나는 그때 ‘나도 시골에서 일 좀 해볼 걸’ 하는 생각을 하며 아무리 채워도 가득 차지 않는 플라스틱 박스를 원망스래 쳐다보곤 했다. 그래도 일은 재미있었다. 책상 앞에서 모니터를 보고 있는 것과는 다른, 요리와는 또 다른 정직한 육체 노동의 세계였다. 몸을 얼마나 움직이느냐에 따라 산출물이 달라졌다. 한번 더 움직이고 한번 덜 쉬면 결과물이 달랐다. 자연 속에 일하니 리듬도 자연에 맞춰졌다. 해가 뜨면 일을 시작하고 해가 지면 일이 끝났다. 비가 오면 일을 쉬고 조용히 몸을 뉘었다. 나무에서 바로 따 먹는 감귤 맛도 너무나 남달랐다. 내가 흘린 땀 때문일까? 조금 전까지도 나무로부터 영양분을 받아 자라던 살아있는 존재이기 때문일까? 까맣게 때가 낀 손가락으로 껍질을 뜯듯이 벗겨 그 탱글한 속 알을 입에 넣으면 갓난아기의 꺄르르 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밝고 상쾌한 맛이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그 작은 감귤 하나가 살아 있음에 대한 기쁨 같았고 고된 삶 속에서도 언제나 발견할 수 있는 귀중한 행복의 현현(顯現) 같았다. 


나는 지금도 찬바람을 뚫고 찾아온 감귤을 보면 남다른 기분이 든다. 감귤을 여전히 좋아하기 때문이 첫째요, 그 작은 한 알을 얻기 위해 흘려야 하는 땀이 얼마인지 아는 것이 둘째 이유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땀을 흘려야만 맛볼 수 있는 그 산뜻한 생(生)의 쾌감이 여전히 생생하기에 감귤 하나에도 나는 쉽게 감격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