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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미식,편식:정동현의 三食일기
나폴리에 간 목적은 단 하나, 피자를 먹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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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레모를 쓴 경찰은 기관총을 메고 있었다. 세계 3대 미항이란 별명이 붙은 나폴리의 첫 모습이었다. 관광객의 들뜬 분위기에 물들어 있던 로마는 옛 꿈 같았다. 한눈에 봐도 낡은 건물과 자동차, 좁고 더러운 길, 그리고 팍팍한 표정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위쪽 지방보다 곱슬머리가 많았고 키도 작았다. 나폴리 중앙 역사는 컸지만 제대로 된 브랜드 매장은 찾을 수 없었다. 이탈리아에서 손꼽히게 못사는 동네란 사실이 실감됐다. 으스스한 느낌에 역 밖으로 나오는 것도 망설여졌다. 나폴리에 온 목적은 단 하나였다. 피자를 먹는 것. 이탈리아 여행 전체 일정이 바로 이 ‘나폴리에서 피자 먹기’를 중심으로 짜여졌다. 나폴리를 사이에 두고 도시를 고르고 피자집 휴무일을 피해서 일정을 조정했다.





“저 길로 가야 돼?”



아내는 설마 저 길이 우리가 가야할 길인지 나에게 다시 확인했다. 역 앞에 펼쳐진 좁은 길에는 무표정한 사내들이 잡동사니를 팔고 있었다. 나폴리 중앙역 앞 가리발디 역 인근은 마피아의 본거지로 유명한 곳이다. 으슥해질 무렵이면 권총과 칼을 무장한 강도 사건도 심심치 않게 난다고 했다. 어차피 대낮이었고 길에는 사람들이 빽빽했다. 그럼에도 으스스한 분위기에 긴장이 됐다. 우리 둘은 진땀이 날 정도로 손을 꼭 잡고 길을 걸었다. 그 길을 가야 했던 이유는 세계에서 제일 맛있는 피자집으로 알려진 ‘안티카 피제리아 다 미켈레(Antica Pizzeria Da Michele)’가 있기 때문이다.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도 나왔던 이 피자집은 관광객 뿐만 아니라 현지인들 사이에서도 최고로 손꼽힌다. 1870년에 문을 열었으니 조선시대부터 피자를 팔았던 셈이다.



세계에서 제일 맛있는 피자집으로 알려진 ‘안티카 피제리아 다 미켈레(Antica Pizzeria Da Michele)’



‘다 미켈레’ 근처에 가자 피자를 포장해 가는 사람들이 하나둘 눈에 띄었다. 피자 굽는 냄새가 나는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도착한 시각은 오후 5시 즈음, 다행히도 듣던 것만큼 줄이 길지는 않았다. 우리와 함께 기차를 탔던 한 남자는 역 앞에서 만난 여자친구와 함께 피자집 앞에서 진한 키스를 하고 있었다. 전혀 로맨틱하지 않은 전경에서 벌어지는 애정행각에 기다리는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받은 번호표를 들고 사진도 찍고 남이 키스하는 모습도 구경하다 보니 금세 차례가 됐다. 실내는 생각보다 좁지 않았다. 시선을 사로 잡는 것은 1층 전면의 피자 화덕과 피자를 굽는 노인이었다. 하얀 머리에 굽은 허리의 노인은 계속해서 서 있기가 힘든지 피자를 펴서 화덕에 넣고 나면 작은 의자에 앉아 숨을 골랐다. 노인 옆으로 장작이 한 가득 쌓여 있었고 또 그 옆으로 피자 반죽을 펴고 토핑을 올리는 이가 있었다. 모두 나이가 지긋해 보였다.


우리의 자리는 식당 맨 안쪽, 피자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마치 소원을 빌기 위해 별똥별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피자를 먹고 있는 사람들은 오랜 꿈을 이룬 것 마냥 기쁘게 웃고 있었다. 영화 ‘익스펜더블 (The Expendables)’에 나왔던 ‘제이슨 스타뎀(Jason Statham)’을 닮았던 종업원은 하얀 해군모에 반팔 옷을 입고 굵은 팔뚝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종업원은 길거리에서 마주친 사람들처럼 무표정했지만 각박한 느낌은 없었다. 그러나 함부로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인상도 인상이고 혼자 홀을 다 보다 보니 너무 바빠보였다. 속으로 ‘미소, 미소’를 중얼거리며 해맑은 관광객 표정을 지었다. 그 덕인지 다른 테이블보다 먼저 받은 맥주와 콜라를 한 모금 마시니 이 식당까지 오느라 쌓인 피로가 한번에 풀렸다.



왼쪽에서부터 나폴리 피자의 대명사 마리나라(marinara), 마르게리타(margherita)



이 집의 메뉴는 토마토 소스에 말린 오레가노가 올라가는 마리나라(marinara)와 모짜렐라 치즈와 바질 잎이 올라가는 마르게리타(margherita), 단 두 가지뿐이다. 여기에 맥주, 콜라를 곁들이면 나폴리식 피자 한 끼가 완성된다. 이탈리아 전역에서 물처럼 먹는 와인는 아예 팔지도 않는다. 피자가 원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음식이었다는 방증이다. 피자에 들어가는 재료 자체가 워낙에 간단한 것도 그 이유다. 재료가 간단한 만큼 피자의 맛을 좌우하는 것도 재료다. 이탈리아산 듀럼 밀*은 강력분과 마찬가지로 단백질 함량이 11~12%로 높지만 질기지 않고 딱딱 끊어지는 성질이 있다. 역시나 이 맛을 실감하려면 직접 먹어보는 수밖에 없다.


* 듀럼(Durum) 밀 : 밀의 종류 중 가장 딱딱한 종으로 주로 파스타의 원료로 활용된다.





한 십여 분 기다렸을까? 맥주와 탄산수를 거진 다 마셨을 때 거의 핸들 크기만한 피자가 내 앞에 놓였다. 이탈리아, 특히 나폴리는 일인 일판이 기본이다. 피자를 각자 하나씩 앞에 두고 심호흡을 쉬었다. 보기에도 피자는 먹음직스러웠다. 어릴 적 먹던 토핑 가득한 피자, 햄, 소시지, 할라피뇨, 오징어, 도우에는 치즈에 고구마까지 집어넣은 잡스러운 종합선물세트가 아니라 한 명의 고수와 소리꾼만 있는 판소리를 보는 것처럼 단촐하기 그지 없었다. 표범 무늬가 박힌 도우를 잡아당겼다. 토마토 소스로만 맛을 낸 마리나라 피자를 입에 넣었다. 토마토의 신맛과 단맛이 파도가 치듯 밀려 들었다. 무엇보다 거뭇거뭇 그을린 도우의 쓴 탄 맛이 단단한 배경이 되었다. 우리는 입을 웅얼거리며 서로를 마주봤다. 피자가 이런 맛이었구나! 깔끔하고 정갈한 맛이 마치 수묵화를 보는 것 같았다. 그 다음은 대망의 마르게리타, 흔히 보는 '천연 치즈'라는 미사여구가 전혀 필요없다. 맛이 있으면 된다. 나폴리를 비롯한 남부 지역은 버펄로가 아닌 젖소의 우유로 모짜렐라 치즈를 만드는데 그 맛은 버펄로의 것보다 조금 더 진하고 고소하다. 그 모짜렐라 치즈가 녹아내린 마르게리타 피자를 먹었을 때 그 고소한 풍미와 달콤하고 신 토마토의 풍미가 온 몸이 스며들었다. 올린 듯 만 듯 한 바질 잎의 시큼한 맛은 용의 눈동자를 그려넣 듯 기름진 맛에 방점을 찍었다. 그 이후로는 배가 부르다는 말을 연신 하면서도 결국 피자 두 판을 해치우고 말았다. 이 맛의 비결이 무엇인가 따져보면 여러 요소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것과 당도가 아예 다른 토마토, 좋은 모짜렐라 치즈, 그리고 메뉴판에 나오듯 나폴리의 물, 좋은 밀가루, 장작을 쓴 화덕, 확실한 염도 등등. 요리를 하다보면 유혹에 빠질 때가 많다. 이것저것 많이 넣으면 맛있어지리란 믿음 혹은 희망으로 여러 재료를 쓰지만 그럴수록 맛은 맥락을 잃고 불투명해진다. 오히려 몇 가지 재료에 집중해 재료 자체의 질을 높이고 투입량을 정확히 산정하는 것이 나은 방법일 때가 많다. 그러나 실천하기는 어렵다. 마치 방을 정리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그 상태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 단정한 피자를 먹고 일어나니 역시 뒤로 줄이 길게 섰고 화덕은 여전히 불탔다. 그리고 허리 굽은 노인은 똑같이 피자를 굽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인사를 하고 말았다.



"고맙습니다, 아버지(Grazie, papa.)"



이에 노인은 나에게 손을 흔들며 맑게 웃었다. 그 노인의 눈동자는 지중해를 닮은 푸른 빛이었다.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 정동현 셰프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에서 '먹고(FOOD) 마시는(BEVERAGE)'일에 몰두하고 있는 셰프,
오늘도 지구촌의 핫한 먹거리를 맛보면서 혀를 단련 중!
저서로는 <셰프의 빨간 노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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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으로 완성한 한 장의 레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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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하루에 사계절을 모두 볼 수 있다는 멜버른이었다. 해가 떴다가 소나기가 내리고 심지어 우박이 떨어질 때도 있었다. 남극에서 올라오는 차가운 공기와 호주 대륙에서 내려오는 뜨거운 공기가 만나 기층이 불안정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직 점심이 되지 않은 오전, 눈을 비비고 일어나니 방안 공기가 눅눅하게 몸을 감싸 안았다. 두꺼운 이불 속에 몸을 말고 다시 눈을 감았다. 휴일이었다. 간밤 자정까지 일하고 기절하듯 누워 잔 것이 몇 시간 전이었다. 휴일 아침이니 더 잘 수 있다는 느긋한 희망과 잠으로 휴일을 보낼 수 없다는 아쉬움에 갈등했다.


몇 분 후 나는 애벌레가 고치에서 기어나오듯 느릿하게 침대 밖으로 나왔다. 목이 말랐다. 아래층 주방 냉장고 문을 열고 맥주를 꺼냈다. 다시 방에 와 침대에 하반신을 묻고 맥주를 마셨다. 탄산이 목구멍을 간지럽혔다. 차가운 기운이 내장을 훑고 알코올은 혈관을 타고 올라왔다. 살짝 올라오는 취기에 잠 기운이 가셨다. 멍하니 창 밖을 바라봤다. 창 밖으로 들려오는 소리, 그리고 살짝 비릿한 비 냄새를 맡았다. 해가 높게 뜬 날에는 있는 것조차 몰랐던 내 마음은 비가 오면 그 존재를 알리는 양 잔잔히 흔들렸다.


비가 오면 이 시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시를 읽으면 간밤의 뜨거운 순간이 다 헛것 같았다. 악다구니를 쓰며 팬을 돌리고 얼굴 위로 흐르는 땀을 훔쳐가며 지낸 밤, 날아오는 총알처럼 무수히 쏟아지던 주문을 쳐내며 허둥대던 시간이 가고, 패잔병처럼 텅 빈 주방 구석에 앉아 차가운 맥주를 마시며 몸을 식히던 자정 언저리의 풍경. 그 모든 것이 몇 시간 전이건만 가만히 침대 위에 앉아 빗소리를 들으면 다 꿈만 같았다. 그렇게 흔들리던 마음을 바라보다 정신이 드는 것은 얼마간 후였다.


침대 맡에 둔 요리책을 들어올려 무릎 위에 올리고 책장을 넘겼다. 그 종이 위에는 전쟁의 기록들이 냉정한 숫자로 기록되어 있었다. 나는 g(그램)으로 대표되는 중량이 아니라 한 스푼, 한 컵과 같은 부피로 계량을 한 요리책을 싫어한다. 아예 사지를 않는다. 왜냐하면 부피로 계량을 한 레시피는 부정확하기 때문이다. 밀가루 한 컵을 계량하더라도 수분과 밀도에 따라 약 1.5배까지 무게 차이가 날 수 있다. 그럼에도 부피 계량을 여전히 많은 요리책에서 쓰는 까닭은 오래된 습관일 뿐이요, 게으른 타성일 뿐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1g까지도 정확하게 파고드는 집요한 레시피였다. 내가 또 싫어하는 말 중 하나는 요리는 손맛이란 격언 아닌 격언이다. 한식은 계량할 수 없다며 손맛이 중요하다고 외치는 구호를 들을 때마다 측정하지 않고 기록하지 않는 게으름을 합리화 하는 행태에 당혹감을 느낀다. 모든 요리는 화학이고 물리학이다. 열 에너지와 운동 에너지가 결합되고 그것이 각 분자의 물성과 시간의 변화에 맞춰 작용할 때 우리가 지각하는 맛과 향이 나온다. 과학은 측정할 수 있다. 이 말인즉슨 모든 조리법 역시 계량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애매모호한 부피 계량과 조리법이 적힌 요리책을 덮었다. 그리고 측정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세세하게 적어놓은 요리책을 찾아 펼쳤다.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매일 요리를 하는 주방은 레시피를 검증하기 좋은 무대다. 모든 요리책이 정확한 레시피를 적어놓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 레시피가 부정확할 때가 많다. 그 레시피를 믿고 조리를 하다보면 어느 순간 표정이 일그러진다. 모든 조건을 정확하게 맞춰도 맛이 제대로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럴 땐 시간과 노력을 쓰레기통에 버리게 된다. 잘못된 지도를 펼쳐든 셈이다. 셰프들은 그 지도에 선을 죽죽 긋고 새롭게 측량하여 길을 낸다.


나는 누더기에 가까운 레시피 한 장을 볼 때마다 선조의 오랜 유물을 보는 것 같이 감상에 빠질 때가 잦았다. 1g의 차이를 기록하고 1분의 간극을 조정하며 만들어낸 레시피는 집념의 산물이요 지극한 정성으로 쓰인 연애편지 같았다. 누군가 적어내린 요리에 대한 연애편지를 읽으며 나는 오래전 처음 칼을 잡았을 때를 떠올렸다.


해군 이등병 시절, 주방에 일손이 달려 칼을 처음 잡았다. 예리한 칼날이 손등에서 1mm 간격을 두고 위 아래를 오고갔다. 초짜 북재비가 북을 치듯 엉성한 리듬에 비뚤비뚤한 간격으로 도마를 내리치던 시간은 잠깐이었다.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용기를 내면, 그제서야 칼은 주인을 만난 듯 시원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심장이 두근 거렸다. 전진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내 몸이 악기가 된 것처럼 즐거운 소리가 들렸다.





그날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빨리 다음 날이 오기를 기도했다. 아침부터 나는 칼 주변을 서성거렸다. 주방의 모든 일에 먼저 달려들었다. 그러다보면 칼은 내 차지였다. 밤이 되면 잠을 자지 않고 주방 구석 작은 의자에 앉았다. 조리 하사가 보던 요리책을 펼쳤다. 지난 낮의 순간이 요리책에 담겨 있었다. 재료를 손질하고 칼로 썰고 몇 g(그램)의 조미료를 넣고 몇 분간 끓이고 볶는다는 문장 속에 잘 벼린 칼날과 뜨거운 불길이 녹아 있었다. 그이는 그 한장의 레시피를 완성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들여 기록하고 다듬었을 것이다. 나는 홀로 그이가 보낸 시간에 조용히 감탄하고 감사했다.


비오는 소리에 맞춰 책장을 넘기길 몇 시간이었다. 마지막 책장을 덮었을 때 문득 방 안이 환해져 있음을 깨달았다. 그새 비가 그쳐 해가 떠 있었다. 멜버른의 날씨다웠다. 나는 그제야 침대 밖으로 나와 주방으로 내려갔다. 냉장고에서 먹다 남은 재료를 꺼내 별 것 없는 파스타를 만들었다. 홀로 앉아 파스타를 깨작이며 창문 너머를 보면 새파랗게 푸른 하늘을 배경에 비현실적으로 풍성한 구름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나는 찬란하게 밝은 멜버른의 오후를 좋아했다. 휴일 오후 멜버른의 맛있는 커피를 마시며 망중한을 즐기는 것은 사치스러운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밝음을 피해 어두운 주방으로 도망가고 싶었다. 반쯤 미친 사람들이 칼과 냄비를 붙잡고 서서 허리를 굽히고 하루를 보내는 지옥 같은 그곳은 어떤 거짓말도 없는 순수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비가 오기를 바랐다. 빗소리를 들으며 거두지 않고 바라지 않는 사랑을 노래하는 시를 생각하고, 숫자와 건조한 지시어로 쓰인 요리책 보는 시간을 나는 사랑했다. 차분히 쌓아올린 숫자 더미, 그 속에 담긴 시간과 땀, 그것은 시끄러운 구호가 아닌 조용한 열정이었다.


회색빛 사무실 구석에 앉아 있는 지금, 나는 빗소리를 들으며 요리책을 보던 그 시절처럼 오전 적막한 가운데 들리는 키보드 소리에 마음이 뭉클해질 때가 있다. 누군가는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그 숫자, 단어 하나 하나, 가득히 쌓인 A4 종이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실히 쌓아올린 하루하루가 무엇보다 진실된 것이 아닌가. 쉽게 이야기 하고 쉽게 강요하는 그 열정은 잔잔히 들리는 키보드 소리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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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류, 그들의 뒷모습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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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시 장인: 지로의 꿈(Jiro Dreams of Sushi)' 트레일러 영상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의 힘찬 카덴차가 흘러나온다. 음악을 언어의 하나이자, 어떤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본 낭만주의 사조에 충실하게 멜로디는 논리가 아니라 급변하는 충동에 따라 흐르고 템포는 사랑에 빠진 연인처럼 고저를 오고 간다. 그 흐름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 스시 한 점이 접시 위에 올라간다. 푸르게 벼린 칼날에 베인 생선의 단면은 별빛처럼 반짝이고 그 위에 바른 간장은 오래전 산수화의 담백한 음영처럼 은은히 빛난다. 그 스시를 바라보는 노인은 보일듯 말듯한 미소를 짓는다. 다큐멘터리 영화 ‘스시 장인: 지로의 꿈(Jiro Dreams Of Sushi, 2011)’의 한 장면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내내 배경음악으로 쓰이는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은 스시를 내놓는 리듬감이 마치 협주곡의 카덴차만큼이나 다이나믹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다. 스시가 단지 밥 위에 생선을 올린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만드는 이의 의도와 철학이 담긴 어떤 예술에 가깝다는 조용한 웅변이기도 하다. 엄격한 아버지였다는 지로는 그 음악을 배경으로 은근한 자부심을 드러내며 본인이 스시를 만들어온 과거를 설명한다.



“스시 위에 간장을 발라서 내놓는 것도 내가 처음 한 것이었지. 그러고 나니 다른 스시집에서 따라 하기 시작했어.”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고급 스시집에 가면 손님이 스시에 간장을 찍어 먹는 것이 아니라 요리사가 직접 스시 위에 간장을 발라준다. 손님이 스시를 간장에 찍을 때 밥이 떨어져 나가거나 간이 강하게 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어 편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손님이 요리사가 의도한 맛을 즐길 수 있다. 콜롬버스의 달걀처럼 지금은 매우 손쉬운 발상으로 보이지만 당시에는 획기적인 시도였다고 한다. 이런 끝없는 도전과 연구는 긴자 지하철역 지하, 화장실도 바깥에 있는 10석가량의 작은 스시집이 미쉐린 3 스타를 받을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미쉐린 3 스타란 그 레스토랑에 가기 위해 그 나라로 여행을 갈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이제 아흔 살이 넘은 지로의 스시집, 스키야바시 지로에 가기 위해서는 최소한 3개월 전에 예약해야 한다. 그러나 3개월 이란 수치도 대략적인 것이고 일본의 인맥, 일류 호텔의 컨시어지 등을 통하지 않고서는 쉽게 예약을 할 수가 없다. 힘들게 예약을 하고서도 식사 시간은 채 30분이 되지 않는다. 전채요리 등이 아예 없고 스시가 10~12점 나오는 게 전부다. 식대는 모두 그날그날 시가에 따라 다르지만 최소 3만엔, 원화로 대략 30만 원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두 명이 식사를 하고 사케 등을 시킨다면 최소 100만 원이 나온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전 세계에서 스키야바시 지로에 가기 위해 예약 문의가 쇄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큐멘터리 영화 초입에 지로는 이렇게 말한다.



“맛이란 무엇일까? 맛은 설명하기 어려워. 나는 꿈에서 아이디어가 떠올라. 생각들이 터져 나와서 한밤중에 잠에서 깨곤 해. 꿈에서 나는 스시의 환영을 보지.”





나도 요리하는 꿈을 꾸던 시절이 있었다. 15시간 넘게 주방에 서 있다 아무도 없는 방에 홀로 집에 들어오면 나는 잠을 잘 수 없었다. 주방의 열기가 몸에 남아 채 식지 않고 곤두선 신경은 가라앉지 않았다. 내가 한 실수, 그 덕에 들어야 했던 수모와 욕설, 어찌할 수 없는 자괴감, 음식이 나가는 빠른 템포, 뜨거운 팬을 붙잡고 악다구니를 쓰던 순간이 사라지지 않고 마치 몸에 새겨진 듯했다. 시간이 흘러 늦은 밤, 잠이 들면 나는 또 주방에 서 있었다. 실수를 반복하는 내가 보였다. 나를 보고 비웃는 동료가 보였다. 그러면 꿈에서도 피가 거꾸로 솟았다. 다시 눈을 뜨면 또 주방에 서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 충혈된 눈을 한 동료들이 피곤에 찌든 얼굴로 건조하게 인사를 했다. 몸이 지치면 마음도 지치는 법이다. 악순환이다. 지친 정신에 몸은 나약해진다. 나의 몸은 아프기를 고대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 조금 쉴 수 있으려니, 나는 나약한 것이 아니라 몸이 아픈 것이라고 변명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실제로 몸이 아팠다. 오래 서 있으니 자연히 허리가 아팠고 신경을 계속 쓰니 장이 뒤를 따랐다. 일 년 에 한 번, 한 해를 마무리하는 갈라 디너 날, 온몸에서 미열이 났다.


준비하는데 꼬박 일주일이 걸린 갈라 디너였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고급 레스토랑의 요리는 주문이 들어오는 순간 만드는 것이 아니다. 마치 짬뽕을 만들듯 볶아내면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육수를 우리는 것부터 시작, 재료에 따라 준비하는데 며칠이 걸리는 것들이 수두룩하다. 코스 중 한 접시를 만들기 위해서 투입되는 노동력은 어마어마하다. 접시 하나는 요리 하나가 아니다. 주요리에 부요리 몇 개가 올라가게 된다. 이런 상황이니 요리사는 절대적으로 쉴 수가 없다. 그 중 하나였던 나는 몸이 아팠지만, 한편으로는 기뻤다. 나는 불쌍한 요리사다. 나는 혹사당해서 그런 것이다. 그러니 모두 나를 불쌍히 여겨라. 아침부터 인상을 잔뜩 쓰고 있는 나를 보고 몇몇이 걱정의 말을 던졌다. 나는 괜찮다고 답을 하면서도 아프다고 부연 설명을 했다. 그래도 나는 주방에 서 있었다. 이윽고 대망의 디너가 시작되기 30분 전이 됐다. 주방장이었던 애쉬가 말을 걸었다.



“너 어디 아프지?”

“어.”

“생애 최고의 날에 아프단 말이야? 말도 안 돼.”



투명한 파란 눈에 꼬불거리는 금발이었던 애쉬는 쏘아붙이듯 말했다. 그에게 아프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고였다. 무엇보다 일주일을 준비해 손님들을 대접하는 갈라 디너 날, 아프다는 것은 가능할 수 없었다. 레스토랑이 가진 최고의 재료를 엄선해 모든 요리사가 달라붙어 준비한 이 날은 애쉬에게 생애 최고의 날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멍해졌다. 처음에는 서러웠다. 나는 아픈 몸이었다. 그러니 위로를 받아 마땅한데 핀잔 아닌 핀잔을 들었다.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는 애쉬가 미웠다. 그러나 나는 알았다. 그 미움은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다시 허리를 곧추세웠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애쉬의 구령에 따라 음식들은 접시 위에 올라갔다. 수십 가지가 되는 요리들이 모두 똑같은 맛과 모양을 가지고 손님 앞에 나갔다. 빠르게 흐르는 시간 속 순간순간은 느리게 느껴졌다. 불이 이글거리는 틈 사이로 손을 넣었다 뺄 수 있을 것만 같은 초현실적인 느낌이었다. 풀어졌던 신경이 예민해지고 나의 몸은 잘 준비된 도구가 되었다. 얼굴에 흐른 땀이 말라 짠 소금이 되었을 때 모든 요리가 나갔다. 끝이었다. 애쉬가 다시 나에게 물었다.



“아프다고 했지? 빨리 집에 가. 수고했어.”

“아니야. 괜찮아. 이제 안 아파.”



나의 답에 그는 비웃음도 미소도 아닌 오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대청소가 시작됐다. 웃으며 성공적인 마무리를 축하하던 동료들은 빗자루와 대걸레를 들고 주방 곳곳을 쓸고 닦았다. 어디든 마찬가지지만 택배를 받거나 쓰레기를 버리는 등, 일터에서 멀리 나가야 하는 일은 누구나 하기 꺼린다. 주방에서 나온 어마어마한 양의 쓰레기를 건물 공용 쓰레기장에 갖다 놓는 일도 그랬다. 같이 일하던 백인 요리사들은 그 일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면 늘 나나 다른 외국인 요리사가 그 일을 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날 나는 쓰레기통을 찾을 수 없었다. 건물 뒤편으로 나가 쓰레기통의 행적을 살폈을 때 나는 애쉬의 뒷모습을 봤다. 주방장인 애쉬는 쓰레기통을 밀며 뛰고 있었다. 아무도 보지 않고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그는 어떻게든 일을 빨리 끝내려 뛰고 있었다.


일류와 일등의 차이는 간단하다. 일등은 이등이 필요하다. 이등을 밟고 올라가야 일등이 된다. 남과 비교하고 우열을 가린다. 비교할 수 있는 남이 없으면 일등도 없다. 그러나 일류는 이류가 필요 없다. 일류에게는 남의 시선도 필요 없다. 그는 길을 만드는 사람이다.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길을 간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라도, 그 길이 더럽고 힘들지라도 그곳을 간다. 그래서 그는 일등이란 순위를 얻는 것이 아니라 일류(一流), 즉 사조를 만든다. 그리고 그들은 뒷모습이 아름답다. 깊은 밤, 어두운 지하에서도 빛나던 그의 등을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 모습은 나를 부끄러움으로 뜨겁게 달궈 오래 잠들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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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귤 한봉지의 추억
정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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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무반에 후임과 나 둘 뿐이었다. 당직 근무를 선 덕에 느닷없는 비상 훈련을 빠지게 된 운 좋은 둘이었다. 그렇다고 불을 키고 책을 보거나 할 수도 없었다. 훈련은 훈련, 모든 내무반에 불을 꺼야 했다. 할 수 있는 것은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있는 일 밖에 없었다. 때 이른 강제 취침에 잠이 오지 않았다. 멀찍이 누운 후임도 잠이 오지 않는지 뒤척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마치 구남친이라도 된 양 허공을 향해 말했다.


“자냐?”


후임은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아닙니다.”


후임과 할 이야기가 많지는 않았다. 근무를 같이 서지도, 친하지도 않았다. 보통 이럴 땐 남 흉을 보며 이야기를 트기 마련이다. 누가 짠돌이다, 누가 요령을 많이 핀다, 축구를 잘 한다 못한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먹는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는 한창 배고픈 청춘이었다.


“맥도날드 맥플러리!”

“아악! 쿠앤크가 최고지 말입니다.”

“초코파이 보단 몽쉘통통!’

“으악! 초콜릿 함량 자체가 다른 거 아십니까?”


배부른 지금이야 바보 같은 대화이겠지만 그때는 가장 절실한 대화였다. 어차피 연애편지 오는 여자친구도 없었다. 20대 중반, 피 끓는 젊음은 먹는 이야기를 하며 잠 오지 않는 밤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끝말잇기를 하듯 끊임없이 음식 이름이 나왔다. 치킨, 피자, 햄버거, 아이스크림…입대 전 먹고 온 것, 휴가 때 미처 먹고 오지 못한 것 등, 천일야화를 하듯 새벽이 되어도 대화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다 결정적인 이름 하나가 나왔다.





“귤!”

“아…, 정말 한 박스라도 먹을 자신 있습니다.”

"맞아. 검은 봉다리에 이천원 어치 하는 거 사서 방 바닥에 배 깔고 까 먹으면 정말 맛있는데….”

“아…….”


남는 것은 아련한 신음 소리 뿐이었다. 나는 감귤을 빨리 먹는 것은 늘 자신 있었다. 후임과 이야기한 것처럼 찬 바람 부는 겨울이 되면 배를 깔고 누워 박스에 든 감귤을 까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는 것만큼 재미난 것이 없었다. 감귤은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았다. 온돌에 배를 따뜻하게 지지고 입 안으로 시큼하고 달콤한 귤을 연신 넣는 것은 어린 시절 나의 크나큰 즐거움이었다. 그런 내가 감귤을 따게 되리라곤 생각해보지 않았다. 다 비자(Visa) 때문이었다. 호주에서 내가 가지고 있던 워킹홀리데이비자를 연장하려면 1차 산업에 3달 간 종사해야 했다. 말 그대로 농장을 가든 배를 타든, 광산에 들어가든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와중에 우연히 눈에 띈 것이 감귤 농장이었다. 모집 광고는 흔한 문구로 씌어져 있었다. ‘일은 그다지 힘들지 않다’, ‘돈 많이 번다고 확답을 줄수는 없다.’ ‘그래도 열심히 하면 꽤 번다’ 등등등. 나는 그 문구 하나 보고 남호주의 에들레이드로 떠나는 버스를 잡아 탔다. 10시간 넘게 버스를 타 에들레이드에 도착한 다음 또 버스를 갈아타고 6시간을 달렸다. 그리고 나는 남호주의 소도시 ‘렌마크(Renmark)’에 도착했다. 


렌마크는 감귤과 오렌지의 도시였다. 지평선 끝까지 달려도 과수원이 끝나지 않았다. 남호주에 이렇게 큰 과수 단지가 들어선 것은 미국 캘리포니아와의 상관 관계가 작용했다. 호주는 미국 캘리포니아와 적도 반대편에 있다보니 계절 상 수확 시기도 정확히 반대다. 미국 산 오렌지가 나지 않는 시기에 호주 산 오렌지가 나게 되는 것이다(비슷한 이유로 같은 위도에 있는 브라질과 경쟁 관계에 있다). 어찌 되었든 오렌지와 감귤이 어마어마 하게 자라는 이 작은 도시에 일감을 찾아온 한국인, 일본인, 대만인 등은 한철 메뚜기처럼 같이 어울려 살게 된다. 나는 그들 중 하나 였다. 나의 숙소는 스무 명이 함께 사는 큰 집의 이층 침대 아래 쪽이었다. 요리를 계속 하기 위해 찾아온 호주의 사막 한가운데 어딘가, 8인 실 구석에서 나는 첫날을 뜬눈으로 지샜다. 





다음날부터 나는 칼이 아니라 작은 니퍼를 손에 쥐고, 가슴에는 앞치마가 아닌 캥거루 백을 맸다. 몇 십 명 씩 부대 단위로 움직이는 이 군단 아닌 군단을 농장과 계약한 수퍼바이저(superviser)가 인솔했고 그날 아침 구역을 배정 받으면 그 부대가 그 구역을 책임지고 수확하는 구조였다. 팀은 2인1조로 짰다. 남자가 사다리를 매고 다니며 나무의 위쪽을 맡고 여자는 나무의 아래쪽을 맡았다. 우리가 주로 딴 것은 감귤이었다. 단위 당 받는 돈이 오렌지 보다 더 했기에 우리 담당 한국인 수퍼바이저는 늘 감귤 쿼터를 따왔다. 


감귤 따기는 장난이 아니었다. 내 머릿 속에 있던, 그러니까 영롱이는 햇살 아래 웃으며 수확의 기쁨을 맛보는 아름다운 광경 따위는 없었다. 돈을 벌어야 하니 모두 전의에 불탔다. 처음엔 어리버리 했지만 조금씩 요령이 붙었다. 감귤이라는 놈은 나무 가지 아래 따기 좋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녀석이 아니었다. 가지 깊숙이 도저히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매달려 있기도 했고 사다리 맨 끝까지 올라가야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기도 했다. 따기 어렵다고 따지 않고 넘어갈수도 없었다. 일정 크기 이상은 모두 따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팀과 부대 별로 농장에서 페널티를 받았다. 나뭇가지 사이로 몸을 밀어넣느라 옷이 찢어지고 팔에는 무수한 상처가 났다. 숨도 쉬지 않고 감귤을 따 가슴팍에 매달린 캥거루 백에 넣다 그 백도 다 차면 한 변이 1.5m인 수집 박스에 부었다. 그 박스를 둘이서 세 개 정도는 가득 채워야 하루에 한명 당 150달러를 벌 수 있었다. 얼굴이 까맣게 타고 흙먼지가 하얗게 붙노라면 농사일이 쉬운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와중에 이 감귤 따기도 잘 하는 팀과 못하는 팀이 나뉘었다. 특히 시골에서 일 좀 해봤던 축은 그 속도가 배 가량 차이가 났다. 그 말은 벌이도 배 가량 차이가 났다는 뜻이다. 나는 그때 ‘나도 시골에서 일 좀 해볼 걸’ 하는 생각을 하며 아무리 채워도 가득 차지 않는 플라스틱 박스를 원망스래 쳐다보곤 했다. 그래도 일은 재미있었다. 책상 앞에서 모니터를 보고 있는 것과는 다른, 요리와는 또 다른 정직한 육체 노동의 세계였다. 몸을 얼마나 움직이느냐에 따라 산출물이 달라졌다. 한번 더 움직이고 한번 덜 쉬면 결과물이 달랐다. 자연 속에 일하니 리듬도 자연에 맞춰졌다. 해가 뜨면 일을 시작하고 해가 지면 일이 끝났다. 비가 오면 일을 쉬고 조용히 몸을 뉘었다. 나무에서 바로 따 먹는 감귤 맛도 너무나 남달랐다. 내가 흘린 땀 때문일까? 조금 전까지도 나무로부터 영양분을 받아 자라던 살아있는 존재이기 때문일까? 까맣게 때가 낀 손가락으로 껍질을 뜯듯이 벗겨 그 탱글한 속 알을 입에 넣으면 갓난아기의 꺄르르 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밝고 상쾌한 맛이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그 작은 감귤 하나가 살아 있음에 대한 기쁨 같았고 고된 삶 속에서도 언제나 발견할 수 있는 귀중한 행복의 현현(顯現) 같았다. 


나는 지금도 찬바람을 뚫고 찾아온 감귤을 보면 남다른 기분이 든다. 감귤을 여전히 좋아하기 때문이 첫째요, 그 작은 한 알을 얻기 위해 흘려야 하는 땀이 얼마인지 아는 것이 둘째 이유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땀을 흘려야만 맛볼 수 있는 그 산뜻한 생(生)의 쾌감이 여전히 생생하기에 감귤 하나에도 나는 쉽게 감격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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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미식,편식:정동현의 三食일기
감자탕 대(大)자 하나요!
정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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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을 하자 마자 퇴근을 하고 싶었다. 매일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언제나 성실한 21세기의 일꾼인 나로서는 드문 날이었다. 그나마 내가 가진 장기 중 가장 예민한 코가 아침부터 벌렁거렸다. 가죽, 자동차, 기계 상가가 들어찬 하드보일드한 성수동 공기 중으로 기름지고 고소하며 얼큰한 냄새가 부유하는 듯 했다. 그렇다면 내가 할 말은 한가지 밖에 없었다.


“오늘 점심은 감자탕이다.”


나의 한마디에 모두의 눈이 반짝였다. ‘감자탕’이라는 고유 명사로 족했다. 우리가 가야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성수동의 ‘소문난 성수 감자탕’이었다.


감자탕이라는 음식은 그 족보가 곰탕이나 설렁탕처럼 멀리 올라가지 않는다. 감자를 넣어서 끓이던 탕에 해방 이후 돼지 공급이 늘어나면서 뼈를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는 설, 돼지뼈를 감자라고 불렀다는 설 등이 혼재 한다. 하지만 어원으로 음식의 계보를 따지는 것은 그 실체가 모호하고 사회경제적인 흐름 속에 음식의 탄생과 소멸은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조금 더 믿을 만 하다. 그리하여 시중 감자탕집의 역사는 대부분 그리 길지 않다. 동네 마다 군소 감자탕집이 있고 몇몇 프랜차이즈가 그 나머지 자리를 차지한다. 그럼에도 몇 집을 꼽자면 분당의 ‘서울24시 감자탕’, 을지로의 ‘동원집’, 그리고 우리가 찾은 ‘소문난 성수동 감자탕’집이 있다. 분당 ‘서울24시 감자탕’은 주방에 카메라를 설치해서 손님에 주방 상황을 실시간을 보여준다. 청결에 신경을 쓰는 이른바 신도시형 맛집이다. 묵은지가 들어가는 맛은 그 외관에 걸맞게 깔끔하고 양은 푸짐하다. 그 반대편에 있는 곳은 을지로의 ‘동원집’이다. 이제는 일본 중국 관광객까지 찾아드는 ‘동원집’은 감자탕 집 중 가히 노포라 부를 만 하다. 좁은 실내와 계단 사이로 어깨를 비비며 자리를 잡으면 을지로 뒷골목의 풍경을 옮겨놓은 듯한 감자탕이 앞에 놓인다. 국물은 붉고 살은 두터운데 맛을 보면 일면 담백하게 밀려오는 질감에 살짝 놀란다. 순대와 수육을 반반 시켜서 곁들이면 소주 안주로 그 이상이 없다. ‘소문난 성수 감자탕’으로 할 것 같으면 동네 맛집이 방송을 타고 전국구 대열의 반열에 든 경우다. 방송 이후에도 꾸준히 줄을 서니 이 집의 실력은 밝혀지지 않았던 것일 뿐 절대 유명세를 얻어 탄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이 집은 여느 감자탕 집과 마찬가지로 뚝배기에 파는 것과 냄비째 끓이는 것 두 종류가 메뉴에 올라와 있다. 바쁘고 혼자라면 뚝배기를 시켜야겠지만 머릿수가 둘을 넘어가면 냄비째 시키는 것이 옳은 선택이다.


“네 명인데 중(中)자를 시켜야겠죠?”

“무슨 말씀이세요. 대(大)자는 시켜야죠.”


감자탕이라는 말에 비선 조직처럼 은밀히 감자탕 집 구석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메뉴 선정에 작은 혼선을 빚었다. 그것은 둘은 소, 셋은 중, 넷은 대자라는 간단한 공식을 암기하지 못한 자의 불찰일 뿐이었다. 11시 40분을 넘어 남의 돈을 받아 먹고 사는 인간의 무리들이 하나 둘씩 감자탕 집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미 피로에 찌든 종업원은 보기에도 큼지막한 냄비를 브루스타 위에 올려 놓고 갈 길을 갔다.


“다 익혀서 나온 거니까 끓으면 바로 드세요.”


그녀가 남긴 한마디에 나는 가스 불을 점화했다. 혹자는 테이블 위에 브루스타가 올라간 풍경이 그리 아름답지 못하다고 말한다. 또 누군가는 식당의 노동력을 절감하고자 하는 한반도 국가 현실의 방증이라고도 한다. 점심 나절부터 브루스타를 끓이는 것이 남 보기 부끄럽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만약 미식의 길을 간다면 그 번잡스러움은 마땅히 치뤄야할 대가이다. 그 대가는 시간과 노력이라는 X와 Y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아무리 종업원이 끓기만 하면 바로 먹으라 했지만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들으면 안 된다. 아무리 육수에 넣고 끓인 고기라 할지라도 바로 먹게 되면 맛이 덜하다. 더군다나 시래기와 대파를 올렸기에 국물이 우려나는데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하다. 프렌치 요리에서 기본이 되는 채소 스톡을 우릴 때도 많은 시간을 쓰지 않는다. 물이 한번 끓으면 불을 끄고 그대로 우려내기도 하고 시간이 얼마 없을 때는 간단히 한번 끓이는 것으로 갈음 하기도 한다. 그 최소 시간이 바로 10분이다. 오히려 스톡을 오래 우리게 되면 오히려 쓴맛이 빠져나와 맛을 버리게 된다.


우리는 식전 반주라는 전통을 수호하고자 약간의 알콜을 섭취하며 잠깐 찾아온 기다림의 순간을 만끽했다. 채소를 국물에 넣고 위로 뜬 부유물을 제거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시간+ 노력 = 맛 이라는 공식은 그렇게 완성된다. 드디어 대파의 심이 죽어 향긋한 아로마와 달큰한 부케가 공기와 국물 속으로 뻗어나가고 나서야 우리는 국자를 떠서 큰 뼈다귀를 나눠 앞 접시에 담았다. 우리는 태초, 원시에 한 가족이었던 것처럼 뼈 틈을 파해치고 손으로 들어 입으로 뜯었다. 건조 과정 속에 감칠맛이 증폭된 시래기를 살에 싸서 먹고 시큼한 깍두기의 산미를 지렛대 삼아 식욕을 폭발 시켰다.


“뼈 추가요!”


기본으로 나온 뼈는 이미 4인에게는 충분하지 않았다. 된장 푼 육수에 담긴 뼈를 추가하고 나서야 4인의 배가 채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뼈로 끝날 것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한국인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코스가 남아 있었다.


“라면 사리 두 개 주세요.”


꼬불꼬불한 면 가닥이 들어갈 자리는 있는 것이 한민족이다. 두 봉지는 너무 많다는 소수 의견도 있었지만 물 속에 담긴 나선형 모양을 보자 그 이견은 찬성으로 바뀌었다. 건조면을 반으로 쪼개어 국물 속에 넣었다. 면의 심이 조금 남은 ‘알덴테’ 스타일로 해달라는 의견도 접수했다. 먼저 불을 세게 올렸다. 면이 불지 않고 탱탱하게 유지하려는 의도였다. 라면을 굳이 같이 끓이는 이유는 허기를 달래는 것 이외에 또 다른 의도가 있다. 면의 전분기가 빠지면서 국물의 농도가 진해진다. 마치 중식에서 수프를 끓일 때 물전분을 넣는 것과 비슷한 효과가 난다. 국물의 농도와 점성이 높아질수록 혀에 닿는 밀도감도 달라진다. 흔히 ‘맛에 깊이가 있다’고 할때의 깊이는 추상적인 느낌이 아니라 화학과 물리학적 반응에 의한 것이다.


포만감이 더해지고 취기가 오를수록 국물의 양이 줄어들었다. 이것은 무의식적인 방치가 아니라 의도에 의한 것이었다. 프렌치의 소스의 기본 중 하나가 바로 ‘주(Jus)’다. 영어로는 주스와 같은 어원을 가진 이 소스는 단순히 말하자면 스톡을 젤라틴이 응고되는 수준으로 졸이고 졸인 것을 말한다. 대략 처음 스톡의 1/10 수준이 되면 그 모든 것이 응축된 맛이 난다. 밀도는 높아지고 질감은 더욱 부드러워진다. 비록 감자탕 집이었지만 우리의 냄비 속 액체도 프렌치 음식의 그 무엇과 비슷한 모양새를 내고 있었다. 이렇게 까지 육수를 졸인 것은 마지막 코스를 끝마치기 위해서였다.


“볶음밥 두 개요!”


이제 고함을 질러야만 종업원을 부를 수 있었다. 김치 등등을 썰어넣은 밥을 들고 종업원이 왔을 때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육수의 수위에 놀라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수분을 살짝 날려 바삭하게 굽듯이 볶은 밥을 먹으니 1시간이 끝났다. 밖으로 나오니 어둡고 불길했던 하늘은 개었고 공기는 커다란 에어컨을 틀어놓은 것처럼 산뜻하게 양 볼을 스쳤다. 배가 부르니 이 세상이 조금 더 살만한 것 같았다. 그 생의 기쁨에 우리 중 하나가 크게 소리쳤다.


“아 배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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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미식,편식:정동현의 三食일기
마음에 점을 찍는다, 딤섬
정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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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 도착하니 자정이 넘었다. 피로한 각색의 인종은 어두침침한 공항 출입국 사무소 앞에 뱀처럼 꼬불꼬불한 줄을 섰다. 이무기 같은 그 뱀은 몇 번이나 똬리를 꼬았다. 나는 그 줄의 중간에 홀로 서서 눈을 비볐다. 빠르고 불친절한 영어, 알아들 수 없는 광둥어는 모두에게 평등했다. 자기 몸 만한 가방을 맨 서양인, 나와 같은 동양 여행객, 이 모두 홍콩이라는 작은 섬에 모여들어 시큰한 냄새를 나는 공항에서 입국 스탬프를 받기 위해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영국에서 중국으로 이양된 것이 이제 20여 년, 사이가 틀어진 부부처럼 서양과 동양이 묘하게 뒤섞인 이 섬은 몇 천억 대의 돈을 굴리는 세계의 금융회사와 그들을 태우는 엄청난 규모의 택시, 그리고 그 모두를 먹이는 식당들이 단테의 지옥도처럼 난잡하게 뒤엉켜있다. 그 섬에 모인 다양한 인종들만큼이나 홍콩에서 먹지 못할 음식은 없다. 영화배우 양조위가 단골이라는 국수집 앞은 합석도 개의치 않는 관광객들이 일렬로 줄을 섰고 호텔 지하 떨어질듯 위태로이 매달린 샹들리에를 단 고급 레스토랑에는 저 높은 빌딩 어딘가에 책상이 있을 사람들이 점잖을 떨며 음식을 기다린다. 

 

나는 미쉘린 2스타를 받은 성퉁럭(Sun Tung Lok)에 자리를 잡았다. 성퉁럭은 본래 미쉘린 3스타였으나 멸종 위기에 처한 야생 동식물의 국제거래에 관한 협약(CITES)에도 불구, 시그니쳐 메뉴인 샥스핀을 계속 판매하여 2스타가 되었다는 명문 레스토랑이다. 악마적인 그 고집스러움이 빛나는 이 레스토랑에서 나는 점심으로 가볍게 딤섬 몇 가지를 시켰다. 잠시 후 바싹 마른 웨이터가 가져다준 슈마이를 먹고 나는 정신이 멍했다. 마치 기천만 짜리 오디오로 듣는 라이브 실황처럼, 각각의 재료는 하나하나의 맛을 잃지 않았으며 그럼에도 하나로 모여친 총합의 맛은 그 개별을 초과하는 규모였다. 이것이 바로 본토의 딤섬이구나. 나는 탄식을 하며 접시를 비웠다. 




홍콩에서 비행기로 4시간이 걸리는 한국은 딤섬의 불모지다. 마음에 점을 찍는다는 뜻의 딤섬(點心), 홍콩과 광둥성을 중심으로 실제 점심에 즐겨 먹는 딤섬의 섬세한 맛을 한국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 현지에서 만나는 딤섬의 종류는 수백 가지가 넘는다. 얇은 피 안에 젤라틴을 넣고 쪄서 육즙이 가득찬 소롱포(小籠包)부터 시작해 찐빵과 모양이 흡사한 빠오(包), 전분으로 투명한 피를 만들어 속에 새우를 넣은 하가우(蝦餃), 돼지고기와 새우살을 다져 뭉치고 찐 슈마이(燒賣), 쌀가루로 피를 만들어 그 속에 돼지고기 바비큐나 새우 등을 넣고 돌돌만 창펀(肠粉), 그외 무수한 페이스트리(pastry)가 적힌 메뉴판을 보면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다.


하지만 한국으로 넘어오면 그 메뉴판은 경상도 남자의 안부 인사처럼 매우 단순해지고 그 맛을 보면 딤섬이 아니라 냉동만두를 먹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많다. 우선 딤섬이 대중적이지 못하다. 사람들이 자주 찾는 메뉴가 아니다보니 시장이 작다. 돈이 안 되니 인력도, 또 투자도 모이지 않는다. 지금껏 대만과 홍콩에서 몇 큰 브랜드가 한국 시장 문을 두드렸으나 대부분 실패로 끝이 났다. 노동력이 많이 투입되고 재료도 귀한 딤섬을 서비스로 내어주는 만두와 값을 비교하며 가성티 타령을 하니 그 고급스러운 맛도 함께 즐기기 힘든 것이다.


더구나 딤섬 문화를 지탱할 화교 인구는 한국식으로 변형된 ‘중화요리’에 뛰어들고, 화교 자체도 다른 나라에 비해 역사적으로 탄압을 받은지라 그 힘이 약하다. 여러모로 딤섬 먹기 힘든 나라다. 그러나 딤섬 없이 견딜 수 없는 노릇이다. 그 작고 맛난 것을 입 안에 넣지 않고 몇 주를 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럴 때 나는 홍콩에서 맛본 딤섬을 추억하며 가로수 길이 아닌 세로수 길, 15평 남짓한 ‘쮸즈’에 간다.


‘기둥’이란 뜻의 쮸즈가 세로수길 안경점 자리에 들어선 것은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이었다. 처음엔 농담처럼 시작된 세로수길이란 말은 이제 가로수길의 뒷골목을 통칭하는 고유명사가 됐다. 좁다란 가로수길에서 개인 사업자 명의를 둔 가게는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살인적이라는 극단적인 뜻의 관형어는 가로수길의 임대료 앞에서 현실이 됐기 때문이다. 바람에 지친 새가 조그만 나뭇가지에 자리를 잡듯 세로수길엔 옹기종기 젊은 창업자들이 둥지를 틀었고 그 중 하나가 쮸즈다. 가게 규모는 15평 남짓, 창가로 조그만 좌석을 넣고 건물 안쪽으로 두 사람이 엉덩이를 비빌만한 크기로 주방을 만들었다.




5평이나 될까, 그 안에서 83년 생 젊은 주인장은 매일 딤섬 피를 빚고 육수를 끓인다. 중국 베이징에서 요리학교를 나온 이력을 증명이나 하듯 좁은 가게 안으로 주인장의 사진과 자격증 등이 붙어 있다. 점심 가게 문을 여는 것이 오전 11시 30분, 그러나 매번 그 훨씬 이전부터 사람들이 줄을 선다. 나는 그 긴 줄 뒤에 꼬리 부분을 맞으며 홍콩 출입국 사무소 앞에 있던 시간을 떠올렸다. 무엇이 사람들을 이 좁은 가게 앞에 서게 만드는 것일까? 유리문 넘어 젊은 요리사들은 손님에게 잠시 눈 줄 틈 없이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마침내 자리를 잡은 것은 1시간 뒤였다. 종업원은 미안한 표정을 가득 지으며 자리를 안내 했다. 그 줄을 뚫고 자리를 잡았으니 주문에 실패가 있어서는 안 된다. 우선 이 집의 대표 메뉴인 소룡포(3500원)를 빼놓을 수 없다. 얇은 피 안에 담긴 뜨거운 육수를 호호 불어가며 입에 넣으면 애교를 부리는 것 같은 섬세한 피와, 돌직구 고백처럼 위장으로 파고드는 향긋한 육수는 이 집의 정통성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게다가 강남 한복판이란 것이 믿겨지지 않는 가격, 그러나 유명 음식점을 넘어서는 맛에 인기는 필연적이고 그래서 자주 재료가 다 떨어졌다는 가게 측의 사과 인사를 듣게 된다.


여기에 10여 가지의 재료로 직접 만드는 고추기름에 다층적인 향은 네덜란드 미술가 에셔(Escher)의 그림처럼 끝없이 겹쳐져 매콤완탕(6000원)을 베스트 셀러로 만든다. 그 기름은 고소한 탄탄면(7000원)에도, 소고기와 무로 육수를 낸 우육면(8000원)에도 올라간다. 고추, 팔각, 정향, 생강, 제피, 대파와 같은 향신료의 향은 인도 영화 속 군무처럼 화려하지만 길을 잃지 않고 오직 손님의 혀를 위해 봉사할 뿐이다. 더구나 이 모든 것이 10000원 이하란 것은 또 다른 놀라움이다. 이래서 남는 게 있냐고, 산적을 닮은 주인장에게 물으면 늘 이런 답이 돌아온다.


“저는 한국에 딤섬의 진짜 맛을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었어요.”


주인장은 그 말을 끝내자 마자 땀으로 물들어 야하게 비치는 등판을 내보였다. 물이 끓고 주인장이 땀을 흘리는 주방 건너편, 가게를 가득 메운 손님들의 얼굴 위로는 작은 점을 찍듯 미소가 퍼졌다. 


*스타필드 하남에는 200평 규모의 얌차 레스토랑 ‘피닉스’가 새로 생겼다. 호주의 유명 얌차 레스토랑인 ‘피닉스’와 기술제휴를 맺고 처음 국내에 들여온 전문점이다. 종업원들이 갓 찐 딤섬을 새로 설계한 특수 카트에 싣고 돌아다니며 그때 그때 손님에게 내놓는다. 가슴을 퍽 치고 들어오는 묵직한 맛이 호주를 사로잡을만 하다. 더구나 넓고 쾌적하여 가족 동반도 용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