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새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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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봄의 스프링 노트
5화. 소망을 들어주는 우주의 비밀
이새봄
#이새봄



10년 전쯤, 이제는 '자소서'라는 말이 더 익숙한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정말 할 말이 없어도 이 말 만은 쓰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했던 문장이 하나 있다.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를 읽은 사람들 중에서는 이 문장을 읽으면서 뭉클하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더 힘들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한참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고 있을 때  이 구절은 큰 위로와 힘이 됐다. 워낙 유명해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이라도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 말은 그 시절에는 더욱 유행처럼 자주 회자됐더랬다. 아마도, '듣고싶은 것 위주로 듣는' 경향이 있는 나라서, 취업이 간절하고 절박했던 처지로 인해 이 말이 더 자주 귀에 콕콕 박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였는지 나와 비슷한 처지의 많은 '취준생(취업준비생)'들은 "당신의 좌우명이 무엇인가요"라고 묻는 질문에 정성들여 이 문장을 한자 한자 적어내려갔다.

 

이제 10년차에서 조금 모자란 9년차 사회인이 된 나지만 여전히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내 소망을 이뤄줄 것'이라는 말에 매달려 위로받곤 한다. 물론 이제 내가 '간절히 바라는 바'는 조금 달라졌다.  나는 내집 마련을 위해 열심히 주택 청약을 넣고 있지만 2년이 넘게 족족 떨어지고 있다. 그때 이 말을 되새기며 다음 청약을 기다린다. '언젠간 우주가 나를 도와주겠지, 온 우주의 기를 모아 다시 한번 넣어보자, 한 번은 안 되겠어'.  한참 아기를 갖기 위해 준비를 하면서도 저 말을 되새기곤 했다. '온 우주의 기를 모아서...' 앗! 이 얘기는 자칫하면 19금이 될 수도 있으니 여기까지만 하겠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책을 읽은 이후 10년이 넘게 이 구절을 붙들고 있으면서 도대체 왜 그때 자기소개서에 절대 이 문장을 넣지 않겠다고 결심했는지를 털어놓겠다. 일단 '뻔해서'였기도 했고, 두번째로는 '없어보이기'때문이었다. 아니 사실은 없어보이는 게 아니라 정말 없는거다. 뭐가? 그 간절함을 이루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말이다. 이 문장만 놓고 보면 '간절함=결실 혹은 성취'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나를 뽑아줘야할 사람들에게 '네가 나를 뽑아주게끔 온 우주가 돕고있으니 넌 날 뽑아야해'라는 주문같은 말을 해서 뭐하겠는가. 정말 말 그대로 '어쩌라고' 다. 참, 절대 오해하지 마시라.이 소설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굳이 비난을 한다면 그 대상은 한 소년이 순례를 통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한 권의 긴 소설을 이 한문장으로만 요약하고 기억하는 나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지않을까.

 

사회생활을 하면서 더더욱 느낀 점은 '간절함' 만으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와 우리는 때로 그 간절함이 우리의 세계를 바꿔 줄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을 차마 놓지 못한다. 특히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런 '착각'을 통해 위안을 삼는 경우가 있다.  '와, 저 사람은 얼마나 운이 좋았으면 저 자리에 섰을까' 하면서 말이다. '나도 아이템만 잘 잡으면 저렇게 사업을 해서 돈을 쓸어담을 수 있을텐데, 누가 나한테도 저런 획기적인 사업아이템 하나만 던져주면 바로 회사를 그만두겠다' 이라는 생각을 해 본 게 나 혼자만은 아닐 거라고 믿는다.

 

얼마전에 만난 한 젊은 창업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나는 같은 생각을 했다.


'아, 정말 온 우주가 당신을 돕고 있구나. 운이 참 좋은 사람이다. 나한테도 저런 운이 따라줬으면.'


나보다 고작 한 살이 많은 그녀는 지금까지 내가 만난 많은 '대표'들과는 조금 달랐다. 어느 인터뷰 날에 약속된 장소에 나가봤더니 머리가 희끗하고 카리스마 있는 눈빛을 가진, 누가봐도 '사장님'인 중년 노신사가 아니라 화장기 없는 얼굴에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청바지를 입은 앳된 여성이 앉아있었다. 음식관련 쇼핑몰의 창업자이자 대표인 그녀를 보고 '멋지다'를 연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배가 아파왔다는 사실을 고백하겠다.

 

아픈 배를 움켜쥐고 그녀에게 사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 물었다. 대답은 너무도 단순했다. '먹을 것이 좋아서'였단다. 당장 사업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고, 다만 직장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식재료를 구입해보고 요리를 하고 틈나는 대로 맛집을 찾고 사진을 찍는 '음식 덕후'였다고 했다. 여기까지는 '먹기좋아하는' 다른 여자애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그런 그녀를 정말 '온 우주가 돕는' 사건이 하나 생긴다. 마치 '키다리 아저씨' 처럼,한 사내가 눈 앞에 나타나 '원하는 만큼 투자를 해 줄테니 네가 원하는 사업을 마음껏 펼쳐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해 온 것이다.  세상에, 이것이야 말로 진짜 우주가 내려준 '굴러온 떡'이 아니냔 말이다. 배가 아플 뿐 아니라 속이 쓰리고 머리까지 띵했다. 아,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일은 왜 그대에게만 일어나고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는가.

 

누군가의 성공 스토리를 다룬 책이나 인터뷰는 이런 '신데렐라' 스토리를 좋아한다. 인터뷰 기사를 쓰는 나 역시도 그녀의 이런 '우연이 가져다준 성공 스토리'를 가장 먼저 부각시켰을 것이다. 그래야 더 주목도가 있을테니 말이다. 수 년간의 인생 스토리를 짧은 글 속에 담으려면 이 중 가장 재미있는 요소를 뽑고 요약하고 요리하는 과정을 거쳐야한다. 특히 요즘같이 단 몇개의 문장과 사진 만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카드뉴스' 같은 글들은 더욱 그렇다.

 

하지만 조금 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녀에게 '굴러온 떡'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그 떡을 굴린 장본인은 우주가 아닌 그녀 자신이다. '먹을것을 좋아하는 여자애'이던 그녀는 꾸준히 식재료를 살피고 좋은 재료를 얻기 위해 전국의 농장을 직접 찾아다닌다. '이 농장 재료를 소비자가 살 수 있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도 품는다. 신혼여행은 휴양지 대신 프랑스 미식여행을 택했다.직접 클렌즈쥬스 레시피를 개발하고 정리해 만들어보고, 세계의 유명한 식재료 매장을 꼼꼼히 모니터링 했다. 컨설팅 회사에 근무하면서 다양한 유통기업을 상대하며 유통시장과 물류시장에 대해 공부하고 주변인들에게는 농반 진반 '언젠가는 음식쪽 일을 해 보고 싶다'는 말을 던지며 꾸준히 자신의 꿈을 알렸다. 그런 끝없는 관심과 움직임을 눈여겨본 지인이 때마침 식재료와 음식과 관련된 사업을 생각하고 있는 투자자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살짝 전한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엔젤투자자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차 한잔 하자'고 제안해 왔을때 그녀는 처음 보는 한 중년 남성 앞에서 별 다른 준비 없이도  자신의 능력을 솔직하게, 그리고 여지없이 '프레젠테이션' 한 셈이다. 그리고 그 투자금을 수십 수백배로 불려나가서 사업을 키우고 안착 시켜 진짜 결실을 맺기 까지의 과정도 오롯이 그녀의 몫이었다. 앞으로 이 사업을 유지해 나가기 위한 노력도 계속 되어야만 한다. 그녀의 삶에서 운이 따라줬던 것은 분명하지만, '운'이나 '우연'만으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 미국 드라마의 유명 대사처럼 '여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것이다.

 

이쯤에서 연금술사라는 소설에 담겨있던 '잊고싶었던' 몇개의 문장을 꺼내본다. 밑줄까지 칠 만큼 공감 했지만 결국에는 마음속에 담지 않았던 문장들이다. 


"하늘 아래 일어나는 모든 일의 결과를 어찌 그대의 고통과 멀다 할 수 있겠는가. 모든 것들은 하나야"

"무언가를 찾아나서는 도전은 언제나 '초심자의 행운'으로 시작되고, 반드시 '가혹한 시험'으로 끝을 맺는 것이네"

 

성공과 결실은 어려운 고비를 넘어서야만 찾아온다는 사실을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 없이 말하고 있다.  이 문장들은 소설을 수 차례 읽은 내가, 아니 우리가 알면서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구절일 지 모른다. 오늘을 살면서 자꾸만 눈을 감고 싶은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눈을 감아버리면, 우리 인생도 브라질 평론가가 소설 연금술사에 대해 내린 악평처럼 '현실의 복잡한 갈등구조를 마술과 신비주의 같은 달콤한 마취제로 얼버무릴 뿐'인 저급 소설로 전락해버릴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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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상사에게 내 사소한 실수가 포착되다
이새봄

어느 순간 나는 내 자존심이 무너지지 않도록 붙잡아줄 지푸라기만한 단서들을 찾고 있었다. 일부러 부하 직원들의 빈틈을 찾아내 꼬투리를 잡기로 작정한 예민한 상사에게 내 사소한 실수가 포착됐기 때문이다. 사실 반항 보다는 항변을 하고 싶어 시작한 일이다.



그 일, 나의 '사소한 실수'

나는 이날 어떤 뉴스를 놓쳤다. 보는 관점에 따라 중요한 뉴스이기도 했지만 그냥 넘어가도 대세에 큰 지장이 없을 만한 뉴스이기도 했다. 신문사에 다니다보면 이렇게 모순되는 일들을 종종 겪는다. 정말 중요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뉴스와 사건이 눈 앞에 펼쳐져있다.

 

이 뉴스가 내일 자 신문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지 여부는 현장에 있는 기자가 가장 먼저 판단한다. 이후 팀장과 데스크, 편집국장이 네 번 이상의 회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기사의 가치가 결정된다. 학교에서 배운 바로는 이렇게 하루에 벌어지는 수많은 일들을 취사선택하는 과정을 '게이트키핑'이라고 한다. 실제로는 매일 쉴틈없이 반복적으로 진행되는 일이라 이 행위를 이렇게 멋진 용어로 불러본 적은 없다.

 

여튼 나는 이러한 과정의 말단에 있는 취재 기자다. 구구절절 그럴듯하게 설명했지만 그 때의 나는 사실 이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사실을 말하는 김에 한번 더 고백을 하자면,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내가 무슨 기사를 놓쳤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뉴스란게 그렇다. 하루가 지나고 나면 뉴스는 더이상 뉴스로 불리지 않는다. 그래서 옛날 옛적 괴테는 '신문을 자세히 읽는 일은 시간낭비다'라는 명언을 남겼을 지도 모를일이다. 괴테 가라사대 "수개월간 신문을 읽지 않고 나중에 한꺼번에 읽어 보면 이런 종이쪽지를 상대로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해 왔는지 알게 된다" (책 '괴테, 청춘에 말하다' 에서 발췌)라고 하시니. 바로 그러한 종이쪽지를 만드는 데 하루의 절반 이상을 뚝 잘라 쓰고 있는 나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내가 유독 '그 일'에 대해서는 별도로 윗선에 보고하지 않은 이유를 털어놓자면, 이 조차도 너무 사소하다. 그냥 내 메일함에 들어와있는 보도자료를 보지 못했을 뿐이다. 메일을 열어보지도 않았는데 그 자료가 중요한지 어떻게 알까.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투시 능력이 없다. 그런데 하필 데스크가 바로 그 '읽지않음' 메일에 담겨있는 내용을 온라인 뉴스 속보를 통해 먼저 발견했다. 회사 메신저에 두 단어 온라인 링크 하나가 날아왔다. "이게 뭐지?"



'도망치듯' 이라는 말로 스스로를 얽매지 말라고





마음과 몸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이 뉴스를 보고하지 않은 이유를 당장 찾아야만 했다. 내가 깜빡하고 놓쳣다는 말은 하고싶지 않았다. 이 말을 감추기 위해선 뉴스가 지면에 다뤄질 만한 가치가 없었다는 근거를 내 무기로 꺼내들어야했다. 결국 뭔가를 찾아내긴 했는데 찾다 보니 어느새부턴가 내가 비참해 졌다. 자존심을 챙기려고 했던 일에 내가 다쳤다. 사실은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내 자존심을 내가 건드린 꼴이다.

 

왜 이렇게 되고 말았을까. 다시 맨 앞으로 돌아가 보자. 나는 그 날따라 '일부러 부하 직원들의 빈틈을 찾아내 꼬투리를 잡기로 작정한 상사'에게 걸렸다. 나는 '사소한' 실수를 했다. 나는 이 사소한 실수를 덮고 싶었을 뿐 아니라 정말로 덮을 수 있을 만큼 정말 사소한 실수였다고 다시금 확신했으며 그것 때문에 아주아주 예민하기 이를데 없는 상사에게 꼬투리를 잡히고 싶지도 않았다. 여기서부터 내 자존심이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마음이 파김치가 되어 들어온 늦은 밤, 곱씹어가며 읽고 있는 미쓰다 마리의 만화 '수짱 시리즈'를 한장 한장 넘기며, 그제서야 눈물을 펑펑 쏟았다. 만화 속에선 하루하루를 견디기 어려워 직장을 그만둔 등장인물이 오랫만에 예전에 알고 지내던 인생 선배를 만나 반가이 인사를 나눈다. 근황을 묻는 질문에 그는 회사에서 나온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도망치듯 그만둔 거죠 뭐'라고 말을 하더라.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선배가 그 말을 정정해 준다.

 

'도망치듯 그만뒀다'가 아니라 그냥 '그만뒀다'가 맞는 거라고. '도망치듯' 이라는 말로 스스로를 얽매지 말라고.



때로는 받아들이고 흘려보내자

나도 그랬다. 내 실수는 '사소'했고, 상사는 '꼬투리를 잡기로 작정했으며 아주 예민'했다. 그 전제에 얽메여 나는 오늘 나를 다치게 만들었다. 처음부터 그냥 실수를 받아들이면 될 일이었다. 실수를 인정한다고 해서 크게 책임을 져야할 상황도 아니었다. 심지어 예민하고 꼬투리 잡기를 즐긴다는 바로 그 상사조차도 '이게 뭐지?'외에는 사실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내가 억지로 가져다 붙인 변명들에 나 혼자만 온종일 갇혀있었다.

 

애초에 나를 변호하기 위해 찾아낸 이런 저런 해석들은 사실은 누덕누덕하게 내 위에 붙어 스스로를 가두는 올무가 된다.

 

누더기처럼 살지 않으려면 그저 단순해 져야 한다. 적어도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나름의 해석을 붙일 필요가 없는 순간에 대해서는, 받아들이고 흘려 보낼 줄 알아야 한다.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닌 순간을 보내놓고 나는 결국 밤을 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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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주말의 가치
이새봄

내가 다니는 회사는 누군가는 항상 주말이나 휴일에 일해야 한다. 월요일에 두툼한 신문이 나오려면, 누군가는 주말에 기사를 준비하고 지면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공짜로 하는 것은 아니다. 주말이나 휴일에 근무하면 특근수당을 받는다. 이 수당은 꽤 오랫동안 인상된 적이 없어서 친한 회사 선후배들끼리는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적은’돈도 아니므로, 의외로 많은 사람은 이 수당을 위해 자발적으로 주말 근무를 택하는 경우도 있다.

 

사실 회사 규정에는 주말 출근을 하면 ‘특근수당’과 ‘대체휴무’를 선택할 수 있게 되어있지만, 주말에 나온 대신 평일에 하루를 쉴 수 있는 대체휴무를 선택할 ‘용자(용기 있는 사람)’는 거의 없다. 회사 분위기도 분위기이지만 대체휴무를 쓸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쉬면 내 일을 누군가가 떠맡아야 하는데 각자의 업무량이 많아 다른 사람의 일을 대신 해 줄 여유가 없다. 그리고 인수인계를 하기가 어려워 ‘무조건 내가 해결해야 하는 일’도 있기 마련이다. 이럴 경우 휴일이라도 호출되는 경우가 상당수이다. 어쨌든 이런 저런 이유로, 괜히 대체휴무를 선택했다가는 돈도 날리고 휴가도 날리는 상황이 생기고 만다.



‘휴무’에 자유롭지 못한 서글픈 우리 존재들




회사는 나에게 돈과 휴무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다.

 

사실 나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직장인은 주말을 비롯해 많은 시간을 회사에서 할애한다. 주말 근무수당은 어느 정도 지켜지고 있다고 해도 야근수당은 초과근무를 넘어서지 않는 이상은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럴 경우는 그야말로 무료봉사를 해야 한다. 그래서 대기업에 다니는 내 친구는 잔업이 남아 퇴근 시간인 6시를 넘기게 되면 아예 밤 10시까지 사무실에 둥지를 틀고 있다. 9시에 일이 끝나고 퇴근하면 수당이 없으니 다음날 할 일을 당겨 하더라도 한 시간을 더 버티는 것이다. 그가 4시간을 더 일하고 버텨서 버는 돈은 고작 2만 원이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있다고 해도 월급 받는 입장에서 회사에 ‘헌신’해야 한다는 분위기는 도무지 바뀌지 않는다. 또 다른 나의 가까운 친구는 어떤 아침에 갑작스러운 허리 통증으로 침대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결국, 그는 출근하는 대신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에 갔다. 응급 처치를 하고 겨우 몸을 추스르고는 바로 회사 상사에게 전화했는데, 상사가 그에게 한 말은 말 그대로 가관이었다.

 

“그래서, 출근을 언제하겠다고?”

 

물론 모든 상사가 이만큼 비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좋게 해석해 보기로 했다. 얼마나 내 지인이 ‘능력자’였으면 상사가 그의 아픔과 처지 보다 그의 빈자리부터 걱정했을까. 아이고 장하다, 수술 날짜를 잡으면서도 눈치를 봐야 하는 내 친구!

 

이토록 서글픈 ‘우리 존재들’에 대해 떠올리며 나 역시 결국 겉보기에는 자발적으로, 사실은 매우 비자발적으로 ‘대체휴무’대신 ‘특근수당’란에 체크를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제발 수당을 한 푼도 받지 않더라도 내가 일한 주말을 휴무일로 보상받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아직은 돈 대신 시간을 귀하다고 여기는 내가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앞으로도 그런 선택을 원하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말이다. 지금뿐 아니라 앞으로도 그런 선택을 원하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더 구체적으로는 선택권이 주어졌을 때 주저 없이 돈보다 시간을 택할 수 있는, 그런 처지의 중년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루하루 생계를 고민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는 상관없이 처지에 따라 결정을 내려야 할 테니까.



나를 위한 주말의 가치가 인정받는 그날까지!




여기에 조금 더 보태자면 나는 금요일 저녁에 회사 동료를 포함해 일과 관련된 어떤 사람도 만나고 싶지 않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거기에 금요일 오후 6시까지 충분히 우린 함께 하고 있잖아? 이미 그 시간만 다 합쳐도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보다 길다.

 

그래서 금요일 저녁부터 일요일까지는 나와 가족을 위해 쓰고 싶다.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엔 이 생각을 원칙으로 삼겠다고 다짐하는 중이다.

 

하지만 이런 다짐을 호기롭게 하고 있는 사이 회사 선배가 불금에 잡힌 본인의 약속에 동참하라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취재와 관련된 꽤 중요한 사람을 만나는 자리였다. 물론 나는 요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선배에게 충성스러운 답변을 보내고는 원칙주의자가 되기는 글렀구나, 하며 자리에 앉아 웃었다. 역시 허세는 일기장에서나 가능한 것이란 말인가.

 

그래도 작은 기대는 해본다. 내가 계속 사회생활을 해 나간다면 조금은 더 나아지지 않을까. 지금 생각하고 있는 이 가치를 나중에도 지키기 위해 애를 쓴다면 말이다.

 

내 선배들이 치열하게 직장생활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민을 한 세대라면 나는 치열하게 내 삶과 하루를 지켜내기 위한 고민을 하는 세대이니까, 일만큼 시간의 가치를 귀중히 여기는 내가 매일, 매달, 매년 이 가치를 부여잡고 있다면 언젠가는 바뀌겠지.

 

그래, 이럴때 쓰는 말은 아니지만 시간이 정말 약이 될 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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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아침 7시, 남대문 시장에서는
이새봄

평소보다 30분 일찍 일어나 오랜만에 서두르지 않고 출근길에 나섰다.

 




뒤적뒤적 이어폰을 찾아 귀에 꽂고는 라디오 앱을 실행해 ’30대 여성들이 좋아하는 노래’들을 들으며 꽤 마음 촉촉한 출근을 했다. 내가 고른 노래가 아님에도 근사하게 마음에 들었다. ‘역시, 난 특별하지 않구나’. 무난한 취향을 가진 나에게 새삼 감사.

 

이날 나의 목적지는 명동이었는데, 노래를 흥얼 흥얼 따라 부르다 마음이 달떴는지 목적지보다 한 정거장 전에서 내렸다. 덕분에 숭례문 앞에서부터 남대문 시장을 거쳐 짧지 않은 거리를 걸었다. 익숙하지 않은 시장길, 평소라면 온갖 소음과 썩 기분 좋지 않은 냄새 때문에 발걸음을 재촉했을 테지만 이어폰으로 들리는 근사한 노래들 탓인가? 아니면 이른 출근길 서두르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활기를 찾아갈 무렵의 시장을 찬찬히 살피며 지났다.

 

 

아침 일곱시의 남대문 시장에는




아침 일곱시의 남대문 시장에는 쪼그리고 앉아 마약김밥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노점상 할머니가 있다. 우글우글해진 투박한 양은 쟁반이 세월을 짐작케 한다. 참기름을 발라 맨들거리는 김밥들이 유독 반짝인다. 아마도 할머니는 출근길을 재촉하는 사람들에게 이 김밥을 내놓으려 못해도 두시간 전부터 몸과 마음이 분주했을 것이다. 쟁반보다 더 우글우글 주름진 얼굴의 할머니가 만든 김밥은 날씬하고 반듯하다. 아무도 깨지 않은 새벽 숨죽여 김밥을 싸면서 그녀는 아들과 딸이 김밥처럼 반듯하길 남모르게 기도했을지도 모른다.

 

점심부터 손님을 받는 식당은 불을 켜지않아 컴컴했지만 문이 활짝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덜커덕 덜커덕 바쁜 소리가 들린다. 복작대는 움직임 사이 간간히 들리는 옆나라 말들, 알아들을 수 없지만 웃음기가 섞여 경쾌하다. 불이 꺼진 시간 동안 이 곳은 그들에게 하루종일 잊고 살아야하는 고향말을 꺼내보는 방앗간이다. 당근과 양파가 가득 담긴 광주리가 도란대는 이야기 사이로 쉴 새 없이 들어간다.

 

수개월 동안 팔리지 않은 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방들은 아침맞이 새 단장 중이다. 가방가게 주인이 가게 앞에 진열해 놓은 가방에 밤새 쌓인 먼지를 꼼꼼히 털고 있다. 나 역시 여러번 못 본채 하면서 지나갔으면서도, 언젠가는 새 주인을 찾겠지 속으로 응원을 해 본다. 고소한 빵 냄새를 풍기는 빵집이, 아직 가판에 펼쳐지지 않은 물건들이 가득 담긴 가방이, 서로 아침 인사를 나누는 시장 상인들의 목소리가 그 아침 그 곳에 있었다. 그저 묵묵한 풍경이다. 누군가의 시선에 신경을 쓸 새 없이 매일을 보내는 그들에겐 특별할 것 없는 하루다.

 

 

해야할 일을 해나가는 모두의 하루를 위해

곧 자리를 찾아올 주인을 기다리는 가판대 앞 의자 위에 ‘돈 빌려드립니다’ 라고 쓰여있는 명함이 나뒹군다. 급전이 필요한, 하지만 은행에서는 돈을 빌려주지 않아 괴로운 누군가가 아무래도 이 시장안에 조금 더 많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만든다. 곳곳이 테이프로 둘둘 말려있는 딱딱한 의자가 왜인지 서글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아침마다 나뒹구는 대출 알선 명함을 치우고 그 의자에 앉아 하루를 시작하는 이유는, 곱은 손으로 새벽부터 김밥을 싸고 고향말을 감춘 채 어눌한 한국말로 손님을 맞는 이유는,아마도 그들이 책임져야 할 가족이다. 내일은 조금 더 나아지겠지 하는 희망이다. 이 모든 것을 위해 다만 오늘 하루가 무사하기를 바라는 그들의 염원이다. 그래서, 안쓰럽고 애뜻하게 여기는 마음 조차 불청객이다.

 

사무실에 가까워질수록 자꾸만 무거워지는 내 마음이 나름대로의 하루를 시작하는 그들을 바라본다고 해서 결코 가벼워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나의 몫이고 내 밥그릇을 채우기 위함이다. 내가 책임져야 할 나의 하루다. 다만, 일 하기 싫은 어느 날의 내가 ‘다 때려 치고 장사나 하고 싶다’라며 푸념했던 그 말을 가능하다면 주워 삼키고 싶었다. 나와 조금은 다른 세상의 조각을 맞춰가는 그들의 삶을 잘 알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쉽게 여겼던 내 나날들이 부끄러웠다.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소설 속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신사’라고 말했다. 소설 속 인물은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이야 말로 마치 신사처럼 ‘품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 배경과 상황은 전혀 다르지만 그런 의미에서 내가 아침에 만난 모든 사람은 신사다.

 

그래, 이른 아침 엿본 이들의 품격에 경의를 표하며 나는 품격을 지키기 위해 하루를 시작한다. 쉽지도, 단순하지도, (대부분은)재미있지도 않은, 하지만 내가 해야하는 나의 일을 해 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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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국영수를 잘해서요
이새봄



최근 인기 절정으로 막을 내린 드라마 ‘태양의 후예’를 뒤늦게 몰아보기 하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왜 의사가 됐느냐는 질문을 받은 여주인공(송혜교)이 1초의 고민도 없이 한 답이 ‘국영수를 잘해서’ 였기 때문이다. 이 말은 곧 ‘공부를 잘해서’라는 말일 테고, 그 말에 공감이 가서 깔깔대며 웃었다.

 

그렇지, 정말 국영수를 잘 하던 내 친구들은 의사가 됐다. 물론 모두 의사가 된 건 아니다. 검사도 되고, 변호사도 되고, 변리사도 됐다. 줄줄이 나열을 하려면 한이 없을테니 이정도만 하자. 그런 직업을 가지지 않았더라도 일단 대부분은 좋은 대학을 갔다. 왜? 국영수를 잘했으니까.





 

공부를 잘한다는 것과 일을 잘한다는 것

이렇게 보면 공부를 잘한다는 건 어찌보면 너무나도 간단하다. 국영수만 잘하면 되니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교과서 중심으로 국영수를 집중적으로’ 공부해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면 된다. 1등을 하면 ‘아주 공부를 잘 하는 애’가 될 수 있고, 10등 안에 들면 ‘꽤 잘하는 애’소리를 들을 수 있다. 간단하다는게 쉽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기준이 확실하기 때문에 적어도 내 위치가 어디쯤인지는 스스로 파악을 할 수 있다.

 

그런데,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는 내 위치가 당췌 파악이 되지를 않는다. ‘일을 잘한다는 것’의 기준을 도무지 모르겠다. 신문사에 다니고 있는 나는 다른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과 달리(사실 다른 직업을 가져보질 못해서 제대로 비교도 못하지만) 연차와 상관없이 모든기자가 매일 아침 기사를 발제하고 이 중 다음날 실릴 기사를 선택 당한다. 매일 신문에 이름이 실리니 다른 직업에 비해 업무 평가가 쉬울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학교와는 사뭇 다르다.

 

좋은 선배들이 있지만 선생님처럼 항상 내 기사에 점수와 등수를 매겨주진 않는다. 내 업무태도를 평가해 생활기록부를 만들어 주는 것도 아니다. 나는 항상 분주하지만 내가 과연 일을 잘 하고 있는 건지 알 길이 없다. 월요일엔 좋은 기사를 썼다고 칭찬받다가, 화요일에는 왜이리 취재가 부실하냐며 혼이 나기도 한다. 내 기사만 잘 쓰면 되는지, 선배의 취재를 잘 도와줘야 하는지, 후배를 너그럽게 챙겨주는 것 마저도 일 잘하는 기준과 항목에 들어가는 건지, 기사 외적인 부분에도 힘을 기울여야 하는건지 복잡한 것 투성이다. 기획 기사를 잘 써야하는지, 흔히 ‘특종’이라고 말하는 단독 기사를 더 자주 터트려 줘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가장 돋보이는 결과를 내 보이고 이로 인해 주목도 좀 받아야 하지않을까, 하는게 내 결론이었다. 국영수 중심으로, 교과서 위주로, 예습 복습을 철저히 해 1등 성적표를 받는게 최고인 초, 중, 고 시절을 보낸 내가 내린 모범 답변이었다.

 




 

가끔 100점을 맞는 사람보다는, 늘 80점을 맞는 사람

이날도 오랜만에 ‘일 잘하는 기준’으로 고민을 하고 있던 찰나였다.(늘 이런 고민은 일이 잘 안풀릴 때 시작된다.) 찾아가 고민을 털어놓지도 않았는데 한 선배가 먼저 차를 한 잔 권하면서 이 이야기를 해 주었다.

 

“많은 사람들은 가끔 100점짜리의 결과를 만들어 오고는 ‘일을 잘 한다’고 착각하곤 하지. 하지만 일을 잘한다는 것은 항상 비슷한 수준의 결과물을 만들어오는 거야. 그게 꼭 100점일 필요는 없단다”

 

티를 내지 않으려 애 썼지만 속으로는 흠칫 놀랐다. 나름의 장고를 통해 100점은 아니더라도 90점은 가끔씩 맞아줘야한다고 생각했던 나에게는 다소 생경하게 느껴지기도 한 결론이었다. 선배가 말 하는 ‘일 잘하는 사람’의 정의에 무조건 동의할 수는 없지만 새로운 접근에 마음이 갔다.

 

그는 말을 이어가며 그래서 자신은 가끔 100점을 맞는 사람보다는, 늘 80점을 맞는 후배와 일하고 싶다고 했다. 가끔 맞는 100점은 그 사람의 실력이라고 보기 어렵지만, 늘 80점 이상의 결과를 내는 후배는 적어도 ‘80점 이상’의 실력이 검증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게 꾸준한 후배의 결과물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향상된단다. 언젠가는 85점, 그리고 또 언젠가 부터는 90점 짜리로.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인생 철학과도 같은 이 이야기가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에 나오는 ‘1만시간의 법칙’과도 궤를 같이 하는 것 같이 보였다. “어떤 분야든 1만 시간을 투자하면 그 분야에 통달한 장인이 된다”는 법칙 말이다. 굳이 법칙을 논할 정도로 거창한 대화는 아니었지만, 충동적이지 않은 꾸준함이 사람을 성장하게 한다는 말이 아주 절절하게 와 닿았다.

 

찰나의 대화가 내 마음을 크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내 앞에 있는 그 사람이, 바로 20년을 그렇게 꾸준히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늘 80점을 목표로 살아온 그는 100점짜리 선배가 되어 내 앞에 앉아 웃고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자신을 ’80점짜리’라고 여기며 말이다.

 

학교와 사회가 다른 점도 이런게 아닐까 싶다. 공부를 잘 하는 친구들의 비결은 한결같지만 일을 잘 하는 사람들의 비결은 제각각이다. 정답이 없기에 각자의 철학이 각자의 삶을 만들어가고 이와 함께 업력도 쌓여간다. 아마도 나는 계속 답을 찾지 못하고 고민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쉽게 끝나지 않을 이 과정을 겪는 동안 적어도 ’80점’은 지키려고 노력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어느덧 조금씩은 나아지는 내 모습을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