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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왜 우리는 유독 파란색에 매혹되는 걸까?
김 석

어떤 그림을 보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은 전율을 느껴본 적 있으신가요? 미술에 까막눈이었던 제겐 그런 강렬한 첫 만남의 추억이 있답니다. 아, 그때 기분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림 앞에 발걸음을 멈춘 순간 심장이 마구 쿵쾅거리던 그 신비로운 경험을 말이지요. 그림의 내용을 이해하는 건 부차적인 일이었습니다. 광선처럼 스쳐가는 찰나의 감성이랄까요. 마치 나를 위한 그림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진 기분이었습니다.

2011년 봄, 서울 한남동에 있는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열린 <코리안 랩소디>라는 기획전시를 취재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주요 미술 작품으로 조망해보는 야심만만한 전시회였는데요. 손에 꼽히는 걸작들이 즐비한 속에서 유독 제 눈이 번쩍 뜨이게 만드는 그림이 한 점이 있었지요. 난생 처음 들어본 화가의 이름은 강요배. 그림 제목은 <한라산 자락 사람들>이었습니다.

강요배, <한라산 자락 사람들>, 1992년, 캔버스에 아크릴, 112×193.7cm

제주 4·3 사건 연작의 하나인 이 작품에서 저를 단박에 사로잡은 건 다름 아닌 푸르른 한라산이었습니다. 물감으로 저런 색을 만들어낼 수 있다니! 감탄하고 또 감탄했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세상에는 수많은 색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파랑이 있고요. 하지만 강요배의 파랑은 그때고 지금이고 제게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단 하나의 파랑이에요. 그 모든 걸 안다는 듯 저 혼자 의연하게 오롯한 푸름을 간직한 산. 파랑은 그렇게 강렬하게 제 마음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파랑은 언제부터 각광받기 시작했을까?

여러분이 가장 좋아하는 색깔은 뭔가요? 아마 사람마다 대답은 천차만별일 겁니다. 그 이유도 각양각색일 테고요. 다섯 살 난 제 첫째 아이는 저만큼, 아니 저보다 몇 배는 더 파랑을 좋아합니다. 옷부터 가방, 식기류에 장난감까지 온통 파랑 일색이지요. 심지어 과자를 살 때도 포장지가 파랑이냐 아니냐를 가장 먼저 따집니다. 이 아이는 어떻게 파랑을 그토록 사랑하게 된 걸까요. 부모인 저도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무척 궁금할 때가 많거든요.

작가 미상, <영국의 왕 리처드 2세를 위해 그려진 두 폭 패널화>,
1395~1399년, 패널에 템페라, 각 53×37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사실 인류가 수많은 색 가운데 파랑을 지금처럼 널리 사랑하게 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랍니다. 지구가 탄생하는 순간부터 파랑은 도처에 널려 있었어요. 고대인들도 지금의 우리처럼 파란 하늘, 파란 바다를 보며 살았을 겁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와 로마는 물론 중세에 들어서까지도 파랑은 전혀 주목받지 못한 색깔이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기간 천대받던 파랑이 색채의 세계에서 급부상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지요. 바로 성모 마리아 그림입니다.

프랑스의 저명한 중세사 연구자 미셸 파스투로(Michel Pastoureau)는 <파랑의 역사>란 흥미로운 책에서 12세기부터 성모의 푸른 옷이 그림에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이걸 계기로 과거에 홀대받던 파랑이 성모 마리아와 결부된 ‘신성한 푸른색’으로 탈바꿈하게 되지요. 청색에 대한 중세인의 인식은 성모 숭배와 더불어 획기적으로 달라집니다. 이 신성한 색은 더 나아가 왕의 색으로도 각광받게 됩니다. 경건함과 고귀함의 상징이 된 거죠.

(좌)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1665년, 캔버스에 유채, 44.5×39cm,
네덜란드 헤이그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소장

(우) <편지를 읽는 푸른 옷의 여인>, 1663~1664년, 캔버스에 유채, 49.6×40.3cm,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레이크스 국립박물관 소장

유구한 서양 미술의 역사에서 진정 ‘청색의 화가’라 불릴 만한 이는 과연 누구일까요. 파스투로는 17세기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1632~1675)를 첫손으로 꼽습니다. 페르메이르가 누구냐고요? 저 유명한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그린 바로 그 화가입니다. 파스투로는 이렇게 단언하죠. 그 어떤 뛰어난 화가도 페르메이르처럼 청색을 섬세하게 다루지는 못했다고.

“안료(청금석, 남동석, 산화코발트)들에 대한 화학적 분석을 통해 청색 계통에 관해서는 페르메이르가 동시대 다른 화가들에 비해 아무 혁신도 일으키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색칠을 물리적으로 분석해 보면, 재료를 굉장히 까다롭게 다뤘다는 것과 청색의 대담한 터치에 흰색이나 회색 또는 노란색의 섬세한 붓놀림을 통해 ‘옷을 번쩍거리게’ 장식하는 독창적인 방식을 구사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자, 이제 페르메이르의 그림을 다시 봅니다. 어떠신가요? 특히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는 수없이 복제되고 대중화된 덕분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지요. 그 시대에 저토록 세련된 푸른색을 화폭에 그려낼 줄 알았던 화가에게 위대하다는 수식어는 조금도 아깝지 않아 보입니다. <편지를 읽는 푸른 옷의 여인>은 또 어떻고요. 그 어떤 색으로 대신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창조할 줄 알았던 페르메이르는 진정 ‘청색의 화가’였습니다.

혜원 신윤복의 그림에서 만난 파랑의 매혹

그렇다면 우리 옛 그림은 어떨까요. 조선시대에도 ‘청색의 화가’라 불릴 만한 이가 있었을까요.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청색을 유달리 잘 구사한 화가는 없었을까요. 저도 그게 궁금해서 옛 그림에 관한 숱한 자료를 뒤적거려 봤습니다. 하지만 과문한 탓에 우리 옛 그림의 색채만을 따로 떼어서 연구한 책은 아직 못 만났습니다. 특히 파랑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고요.

국보로 지정된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 중에서 주유청강(舟遊淸江)

그럼에도 우리 옛 그림 가운데 기억할 만한 파랑을 구사한 화가를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 혜원 신윤복을 들고 싶습니다. 지난해였던가요.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특별전 <바람을 그리다: 신윤복 정선>을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동안 간송미술관에서 몇 차례 본 적 있는 신윤복의 그림이 그날은 전혀 다르게 보였거든요. 그림이라는 것이 볼 때마다 다른 감동을 주곤 한다는데, 그때는 유독 혜원 풍속화에서 ‘색’이 자꾸만 눈에 밟히는 겁니다.

저 시대에 저토록 색을 모던하게(!) 사용할 줄 알았다니. 넋을 놓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혜원의 풍속화에는 파란색이 의외로 참 많이 쓰였습니다. 채색에 주목하지 않으면 잘 눈여겨보게 되지 않는 부분인데요. 기회가 된다면 혜원 풍속화를 색깔 위주로만 찬찬히 들여다보셨으면 합니다. 전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을 받으실 거예요. 신윤복의 여러 작품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주유청강(舟遊淸江)이란 작품을 눈여겨보게 됩니다.

이 그림의 기조를 이루는 색은 보시다시피 파랑입니다. 기생들의 치마 색깔을 보세요. 같은 파랑인데도 농담을 조금씩 달리했지요. 햇볕을 가리기 위해 천막처럼 설치한 차일 가장자리에도 푸른 물을 들여놓았네요. 심지어 배경을 이루는 커다란 바위에도 전체적으로 푸른빛이 감돕니다. 이 작품을 실제로 보면 어쩜 그렇게 긴 세월에도 파랑의 신선함이 도드라지는지 모릅니다.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옛 사람들은 파랑 물감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조선 시대 궁중 회화부터 불교 회화에 이르기까지 청색은 채색화에서 널리 쓰였습니다. 청색은 오방색의 하나로 예로부터 궁궐의 목조건물 단청에도 절대 빠질 수 없는 색깔이었죠. 그렇다면 옛사람들은 형형색색 다양한 채색 물감을 대체 어떻게 만들어 썼을까요. 궁금증을 품고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던 차에 한양대 국문과 정민 교수가 쓴 <책벌레와 메모광>이란 흥미진진한 책에서 이런 대목을 만났습니다.

“이덕무의 <앙엽기>는 주로 역사에 관한 내용이 많다. 하지만 화가가 사용하는 그림물감의 각종 빛깔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에 대해 적은 기록도 보인다. <철경록(輟耕錄)>이란 책을 읽다가 여러 빛깔의 물감 제조 방법에 관한 내용에 흥미를 느껴 메모장을 만들어두었다. 그 뒤에 <개자원화보(芥子園畫譜)>에서 비슷하지만 설명이 훨씬 구체적인 대목을 하나 더 찾았다. 그래서 이 두 메모를 합쳐서 한 항목으로 정리한 것이다. 두 자료가 한데 묶이고 보니, 동양화의 물감 제조법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었다. 아주 요긴하고 귀한 자료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조선 후기의 유명한 실학자로 조선 시대에 둘째가라면 서러울 독서광으로도 굉장히 유명한 분이지요. 위 인용문에 소개된 <앙엽기>는 이덕무가 펴낸 기념비적인 백과사전 《청장관전서》에 수록된 글입니다. 총 8장으로 이뤄져 있는데 온갖 시시콜콜하고 자질구레한 지식을 모아 놓은 일종의 잡학사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여기에 그림물감 제조법에 관한 글도 있습니다. ‘화가(畫家)에게 소용되는 그림물감(畫家顔色)’이란 제목으로 <앙엽기> 제7장에 스물한 번째로 실려 있지요.

위 인용문에서 이덕무가 읽었다는 <철경록>은 중국 원나라 말기의 저술가인 도종의(陶宗儀)라는 분이 펴낸 수필집입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원나라의 법률 제도 및 서화문예(書畵文藝)의 고정(考訂) 따위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 많아 원나라 때의 사료로서 가치가 높다.”고 돼 있습니다. 1366년에 완성했고, 모두 30권인데요. 이덕무가 이 책에서 물감 제조법에 관한 대목을 읽고 적어두었다가 자신의 책에 수록한 겁니다.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정말 별의별 색깔이 다 있더군요. 그중에서 청색과 관련한 대목만 추려 보겠습니다.

남청색(藍靑色)은 삼청(三靑)에다 고삼록(高三綠)을 넣어 조제하고,
아청색(鵝靑色)은 소청(蘇靑)에다 나청(螺靑)을 곁들여 조제하고,
대저 물감을 조제 사용하는 데 섬세한 색상으로는
두청(頭靑)·이청(二靑)·삼청(三靑)·심중청(心 中靑)·천중청(淺中靑)·
나청(螺靑)·소청(蘇靑)…

채색 물감을 만드는 데 ‘조제’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사실 그 옛날의 그림물감 재료는 상당 부분 약재(藥材)였습니다. 그래서 물감을 만드는 것이 병을 낫게 하는 약을 조제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거지요. 그러니 정성도 정성이었겠지만 가격도 만만치 않았을 겁니다. 위에 열거된 용어들을 전부 다 이해하는 건 전문가가 아니고서야 절대 무리입니다. 다만 청색을 만드는 데 널리는 쓰인 석청(石靑)이라는 재료만 설명해 보겠습니다.

조선시대에 청색을 만드는 데 널리 쓰인 재료는 구리 산화물의 일종인 남동석(Azurite)입니다.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해왔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세종실록>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을 보면 국내에서도 삼청의 재료인 토삼청(土三靑)을 캤다는 기록이 더러 남아 있기도 합니다. 이 남동석을 가루로 만든 것이 바로 석청이라는 물감 재료입니다. 옛사람들은 이걸 적절히 가공해서 다양한 청색을 만들어 썼습니다.

이덕무의 <앙엽기>를 보면 바로 그 물감 제조법을 <개자원화보>(‘개자원화전’이라고도 합니다.)란 책에서 읽고 옮겨 놓았습니다. <개자원화보>는 청나라 화가 왕개(王槪)가 지은 회화 입문서인데요. 그림을 배우는 데 꼭 필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어서 당시 청나라뿐 아니라 조선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미술책이었습니다. 이 책에 그림물감의 재료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석청(石靑)은 이른바 매화편(梅花片)과 같은 일종(一種)만이 여기에 소용되는데, 그 모양이 조각(片)으로 되어 매화편과 비슷하므로 이른 말이다. 석청을 조제할 적에는 사기그릇에 담고 맑은 물을 조금 부어 휘저은 다음 채취하는 데 맨 위에 자리 잡은 가루는 유자(油子)란 것으로 의복에 들이는 물감으로 쓰이고, 중간에 자리 잡은 것은 가장 좋은 석청으로 정면(正面)으로 된 청록색(靑綠色)의 산수(山水)를 그리는 물감으로 쓰이고, 맨 밑에 자리 잡은 것은 협엽(夾葉)을 상감(象嵌)하거나 견첩(絹帖)의 후면(後面)에 바르는 데 쓰이는데, 이것을 두청(頭靑)·이청(二靑)·삼청(三靑)이라 한다.
물을 부어서 잘 저은 다음 높이에 따라 상중하로 나눠 재료를 채취해서 각각의 용도에 따라 사용한다는 겁니다. 맨 밑에 가라앉은 것을 채색 물감 재료로 썼다는 거지요. 기록에 따르면 조선시대 가장 널리 쓰인 청색 물감 재료는 위에 보이는 삼청(三靑)과 청화(靑花)였다고 합니다. 조선 최고의 화가 김홍도와 신윤복을 나란히 등장시켜 엄청난 화제를 모은 이정명의 소설 <바람의 화원>에도 물감에 관한 이야기가 꽤 많이 나오는데요. 그 가운데 한 대목을 옮겨봅니다.

“(도화서) 화원들이 색을 쓰지 못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것은 색을 내는 안료를 구하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쪽과 함께 푸른색을 내는 석청(石淸)은 중국에서도 멀리 서역 너머에서 들여왔다. 황색을 내는 등황은 안남(베트남)에서 배를 타고 더 들어가는 섬나라의 나무에서 채취해야 했다. 구하기도 힘들지만,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가격도 천정부지였다. 돈 많은 양반의 초상화나 어진을 그릴 때는 그나마 구하기 쉬운 황색 계통의 안료가 쓰일 따름이었다.”
그만큼 채색 물감은 참으로 구하기 힘든 귀한 재료였던 겁니다. 게다가 병을 고치는 약재를 제조하듯 만드는 데도 갖은 정성을 들였으니 말이에요. 그렇게 어렵사리 구한 재료로 곱게 색을 입혔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옛 그림을 더 깊이 음미하고 사랑할 수밖에요. 다시 혜원 신윤복의 그림으로 돌아가 봅니다. 혜원은 ‘파랑’을 즐겨 쓴 화가였습니다. 그것도 아주 세련된 방식으로 말입니다. 지금 보아도 저 색채 감각은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서울의 랜드마크 인왕산을 물들인 ‘풍류 블루’

지금이야 물감 자체가 워낙 구하기도 쉽고 종류도 다양해졌잖아요. 찢어지게 가난해서 아예 돈이 없다면 모를까 물감 못 구해서 그림 못 그린다는 화가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파랑을 주로 사용하는 화가들은 의외로 굉장히 많습니다. 오로지 파란색만을 고집하는 화가도 꽤 있고요. 그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그림이 있습니다. 전시장에서 작품 앞에 서는 순간, ‘와’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만든 어느 화가의 파랑은 무척이나 매혹적이었습니다.

한국화가 조풍류 화백은 근래에 왕성하게 활동하는 작가들, 특히 한국화가 중에서 파란색을 가장 즐겨 쓰면서도 남다른 깊이를 보여주는 화가입니다. 2015년 겨울, 서울 인사동의 한 전시장에서 화가를 처음 만났는데요. 전시장에 걸린 그림들 가운데 유독 제 눈길을 사로잡은 건 인왕산 그림이었습니다.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인왕산의 야경에 넋을 잃을 정도로 빨려 들어갔지요. 실로 눈부신 블루였습니다.

조풍류, <인왕산>, 2017년, 캔버스에 먹 호분 분채 석채, 140×220cm

제가 아는 한 조풍류 화백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인왕산 화가이기도 합니다. 푸른 인왕산 하면 대번에 조풍류라는 화가를 떠올릴 정도이지요. 사실 인왕산을 그리는 화가는 의외로 꽤 많습니다. 인왕산 기슭에 깃들어 사는 화가도 많고요. 하지만 인왕산의 야경을 이토록 아련하고 깊이 있게 그려낸 화가는 일찍이 본 적이 없습니다. 조 화백의 인왕산 그림은 보시는 것처럼 파랑이 주조를 이룹니다. 그래서 어느 미술사학자는 그 파랑에 이름을 붙여주었답니다. ‘풍류 블루’라고.

사진으로는 잘 구분이 안 되지만 직접 그림 앞에 서면 한 덩어리처럼 보이는 저 파랑 속에서 무수한 색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지요. 이 그림의 멋을 제대로 느끼려면 열 일 제쳐두고 가까이 다가가서 찬찬히 살펴야 합니다. 산 아래로 점점이 불을 밝힌 인왕산 어귀 마을이 마치 반딧불처럼 깜빡이는 아련한 풍경. 겸재 정선의 저 유명한 <인왕제색도>가 그 시대의 인왕산이라면, 조풍류의 <인왕산>은 바로 우리 시대의 인왕산입니다.

파랑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사랑받는 색깔이 된 이유를 두고 여러 가지 해석들을 하지요. 가장 큰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오래 봐도 지루하지 않고 눈이 피로하지 않다는 걸 테고요. 금방 식상해지지도 않을뿐더러 보는 이에게 안정감을 준다고도 하고요. 심지어 최근에는 파랑이란 색을 주제로 한 전시회가 열리기도 합니다. 이유야 어찌 됐든 한 번 빠져들면 헤어 나오기 힘든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단 하나의 색, 그 이름은 ‘파랑’입니다.

조풍류, <인왕산>, 2017년, 한지에 먹 호분 분채 석채, 60×30cm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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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옛 그림에서 찾은 무술년 개 이야기
김 석
#김석기자


오수개의 이야기를 기억하시나요? 고려 시대에 전라북도 임실에 살던 김개인(金盖仁)이라는 사람이 개 한 마리를 길렀습니다. 어느 날 외출을 하는데 개도 함께 따라나섰지요. 주인이 술에 취해 길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불이 나서 점점 가까이 다가왔어요. 개가 아무리 짖어도 주인은 안 일어났고요. 그래서 개는 냇물에 몸을 담근 뒤 풀밭을 이리저리 굴러 불이 못 번지게 막습니다. 그러고는 기운이 다해 그만 죽고 말지요. 주인이 잠에서 깨어나 그 사실을 알고는 노래를 지어 기리고 고이 묻어줍니다. 그때 무덤에 꽂은 지팡이가 나무로 자라서 그 땅을 오수(獒樹)라고 했다지요. 이 이야기는 고려 후기의 문신 최자(崔滋, 1188∼1260)의 <보한집 補閑集>에 실려 후대에 널리 알려집니다.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


제 한 몸 바쳐 주인을 구한 충직한 개의 이야기는 그 뒤에도 조금씩 내용만 달리해서 여러 문헌을 통해 전해집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개만큼 인간과 가까운 동물이 또 있을까요. 개와 인간이 함께한 역사만도 2만 년이나 됐다고 하니까요. 고구려 고분 벽화인 무용총 수렵도는 사냥 장면을 그린 가장 오래된 그림입니다. 화면 맨 아래에 검은 사냥개가 말 탄 사냥꾼과 함께 역동적인 모습으로 먹잇감을 쫓고 있지요. 삼국시대에 이미 사냥을 위해 개를 길들였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좌) 김유신묘 십이지신상 부조

(중) 삼국시대 굽다리접시 (호림박물관 소장)

(우) 경복궁 근정전 월대 석견


2018년은 무술년(戊戌年) 개띠 해입니다. 무(戊)는 오방색 가운데 황색을 뜻하고, 술(戌)은 개를 의미하지요. 그래서 2018년을 황색 개띠 해라고 합니다. 개는 열두 가지 띠 동물 가운데 열한 번째 동물입니다. 방위로는 서북서 방향을 지키는 신이고, 시간으로는 오후 7~9시, 달로는 음력 9월을 담당하는 시간의 수호신이기도 하고요. 잘 짖는 본성으로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는 존재로서의 상징성이 오래전부터 옛 풍습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음을 알 수 있지요. 경복궁 근정전 월대 모서리에 석견(石犬)을 새긴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의 기행문 <춘성유기 春城遊記>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근정전 월대 모서리에는 암수 석견이 있는데, 암컷은 새끼 한 마리를 안고 있다. 무학대사는 이 석견은 남쪽 왜구를 향해 짖고 있는 것이고, 개가 늙으면 대를 이어 가라고 새끼를 표현해 넣었다고 했다.



이암, <화조구자도>, 16세기 중반, 종이에 채색, 86×44.9㎝, 보물 제1392호,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강아지 그림이 있습니다. 볕이 따사로운 봄날, 화면 가운데에 앉아 있는 검둥이 녀석이 하얀 꽃망울을 피워 올린 배나무 아래에서 고개를 돌려 동그랗게 뜬 눈으로 어딘가를 쳐다봅니다. 저 눈동자 표현 좀 보세요.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 뒤로 누렁이 한 마리가 두 발을 앙증맞게 모은 채 쿨쿨 낮잠을 자고 있군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평화롭게 잠든 저 표정, 참 귀엽습니다. 그런가 하면 호기심 가득한 흰둥이 녀석은 땅바닥에 철퍼덕 엎드린 채 앞발로 꾹 누른 방아깨비와 노느라 여념이 없네요.


그냥 보기만 좋은 그림이 아닙니다. 개는 털을 가진 동물이죠. 그런데 그림 속 강아지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털이 하나도 없습니다. 털을 묘사하는 대신 몸통을 먹으로 채웠어요. 이 그림은 조선 초기에 개와 매 그림으로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왕족 출신 화가 이암(李巖, 1507~1566)이란 분의 작품인데요. 먹을 이렇게 쓴 그림은 당시 중국에도 없었답니다. 전문가들이 극찬을 아끼지 않은 이유에요. <화조구자도>란 제목이 붙은 이 대단한 그림은 현재까지 확인된 걸로는 조선시대 최초의 개 그림으로 전합니다.


일본화가 소다츠의 개 그림


더 대단한 건 이암의 그림이 국내는 물론 당시 일본에까지 큰 영향을 줬다는 사실입니다. 위의 두 작품은 이암보다 100년쯤 뒤에 교토에서 활동한 일본화가 다와라야 소다츠(俵屋宗達)의 그림인데요. 털을 그리지 않고 먹으로 물들이듯 그렸지요. 일본에서 다라시고미(滲し込み)라 불리는 이 기법의 뿌리가 바로 조선의 이암이었던 겁니다. 그만큼 이암의 그림이 일찌감치 일본에 건너갔다는 뜻이고요. 심지어 17세기 일본에서 나온 <본조화사 本朝畵史>란 책에는 이암을 아예 일본 화가로 소개하기도 했답니다.



(좌) 이암, <모견도>, 16세기 중반, 종이에 옅은 채색, 73.5×42.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중),(우) 이암, <화조묘구도>, 16세기, 종이에 채색, 폭당 87×44.2cm,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개의 변함없는 충직함은 때론 배신을 밥 먹듯 해대는 인간들의 반면교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황해도 강령에서 전승되는 탈놀이인 <강령탈춤>의 한 대목에는 개도 사람에 해당하는 다섯 가지 윤리, 즉 오륜(五倫)을 두루 갖췄다는 내용이 나오는데요. 그럼에도 툭하면 욕설에 이름을 붙여 부르는 인간들이 야속할 만도 합니다. 게다가 위 그림에서도 보듯 전통적으로 개는 고양이와 앙숙이지요. 그런데 이것 때문에도 상대적으로 푸대접을 받아야 했으니 얼마나 억울했겠어요. 조선 후기 문장가 이옥(李鈺, 1760~1815)의 ‘고양이를 탄핵한다(劾猫)’는 재미있는 글에서 개는 자신의 억울한 처지를 다음과 같이 토로합니다.


신은 비록 미천하고 용렬하오나 그 지키는 바가 도둑입니다. 밥을 물에 말아 국을 타고, 한 노구솥 밥에 태반이 콩인 것으로 하루 두 번 배고픔을 면하는 것은 오로지 주인의 은혜입니다. 그리하며 밤이면 감히 눈을 붙이지 못하고 구멍마다 돌면서 경계하여 오로지 도둑을 잡으려는 것입니다. 저 울타리 밖의 도둑도 몰아 쫓아내고자 하는데 하물며 집안의 도둑이겠습니까? ... 이것이 신이 저것을 보면 반드시 쫓아 버리고 마주치면 물어뜯는 이유입니다. ... 어찌 주인께서는 무슨 사심이 그 사이에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십니까? ... 장차 고양이는 배가 불러 죽고 신은 가마솥에서 죽게 됨을 보게 될 것입니다.



(좌) 김두량, <긁는 개>, 조선 18세기, 종이에 먹, 23.1×26.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 이경윤, <화하소구>, 비단에 옅은 채색, 17.7×15.5cm, 간송미술관 소장


조선 전기에 이암이 있었다면 후기에도 개 그림으로 이름을 날린 또 한 명의 화가가 등장하는데요. 영조 때 직업 화가로 활약한 남리 김두량(金斗樑, 1696~1763)입니다. 위에 소개해드리는 <긁는 개>는 김두량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명품입니다. 나무 아래에서 개가 어디가 그렇게 간지러운지 몸을 잔뜩 구부린 채 몸을 긁적이고 있습니다. 털을 정말 한 올 한 올 정성 들여 사실적으로 그렸지요. 알쏭달쏭한 눈빛이며 입 모양까지 얼마나 생동감이 넘치는지 모릅니다. 특히 개의 몸체에서 보이는 생생한 입체감은 서양 화법을 수용한 결과로 보고 있습니다.


긁는 개라는 소재는 그 전에도 그려졌습니다. 오른쪽 작품은 조선 중기 문인화가 낙파 이경윤(李慶胤, 1545~1611)의 그림인데요. 역시 몸을 외로 꼰 채 몸을 긁고 있는 개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그려냈지요. 덥수룩한 털을 한 올 한 올 정성껏 묘사해 현장에서 보고 그린 듯 사실감이 도드라집니다. ‘나무 아래에서 가려운 곳을 긁고 있는 개’라는 구도는 김두량의 그림과 같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이게 그냥 보기 좋아서 그린 게 아닙니다. 여기에는 아주 깊은 뜻이 숨어 있거든요.


한자로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개는 戌(술), 나무는 樹(수)이지요. 戌은 지킬 무(戍)와 글자 모양이 비슷합니다. 지킬 무(戍)는 지킬 수(守)와 음이 같을 뿐 아니라 나무 수(樹)와도 음이 같습니다. 결국 나무 밑 개 그림에는 “지킨다”는 뜻이 담기게 됩니다. 긁는 개는 복을 긁어 들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둘을 종합하면 나무 밑 긁는 개는 집안을 지키고 복을 들여오는 좋은 의미의 그림인 거지요. 비슷한 구도의 그림이 반복해서 그려진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김두량, <삽살개>, 1743년, 종이에 옅은 채색, 35×45cm, 개인 소장


김두량의 또 다른 대표작으로 꼽히는 <삽살개>입니다. 삽살개를 한 번이라도 봤다면 이게 무슨 삽살개인가 싶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삽살개와는 생김새가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요. 이 그림이 중국, 일본을 거쳐서 1995년 7월 부산의 진화랑에서 처음 공개됐을 때도 논란이 엄청나게 뜨거웠다고 합니다. 급기야 MBC <PD수첩>에서까지 보도됐을 정도였다니까요. 논란의 출발점은 이 그림의 옛 소장자가 다른 화가들의 그림과 함께 묶은 화첩에다가 “내가 방(尨) 그림 한 본을 구했더니 필세가 발랄하고 묘하다”고 적어놓은 대목입니다. 방(尨)이 삽살개를 뜻하기 때문이었지요.


삽살개든 아니든 이 개는 처음부터 유명해질 팔자를 타고 난 것 같습니다. 그림 위쪽의 글씨를 쓴 이가 바로 당시 임금이었던 영조였으니까요. 실제로 영조는 김두량을 무척이나 아낀 걸로 알려져 있는데요. 남리(南里)라는 호를 직접 지어주고, 도화서 화원 최고위직인 별제까지 내려줍니다. 게다가 그림이 마음에 들었던지 직접 글씨까지 써줬지요.




(좌) 전(傳) 장조, <견도 犬圖>, 51.8×86.5cm,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우) 전(傳) 장조, <견도 犬圖>, 51.7×75.5cm,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기왕 영조 이야기가 나왔으니 혹시 왕이나 왕세자가 그린 개 그림은 없을까 궁금해집니다. 실제로 있어요. 우리가 흔히 사도세자로 알고 있는 장조(莊祖, 1735∼1762)가 그린 걸로 전해지는 개 그림 두 점입니다. 전문 화가의 솜씨는 아니지만, 붓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거침없이 쓱쓱 그려낸 것이 꽤나 매력적이지요. 어찌 보면 굉장히 현대적인 드로잉 작품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조선 최대의 문예 군주로 불리는 아들 정조의 재능은 아마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좌)작가 미상, <삽살개>, 18세기, 종이에 옅은 채색, 30.9×29.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중)장승업, <쌍구도>, 19세기, 종이에 옅은 채색, 68×68㎝,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우)어유봉, <삽살개>, 18세기, 종이에 옅은 채색, 63.5×37cm, 개인 소장


다시 삽살개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삽살개는 우리나라 토종으로 유명하지요. 순우리말로 ‘삽’은 쫓는다는 뜻이고 ‘살’은 귀신, 액운이란 뜻입니다. 이름 자체가 귀신 쫓는 개란 뜻이니, 그리 이름 지은 까닭도 자연스레 짐작이 됩니다. 삽살개 그림도 여러 폭이 남아 있는데요. 화가에 따라 삽살개를 어쩌면 저렇게 다르게 그릴 수 있을까요. 특히 어유봉의 <삽살개>는 과연 저 동물이 삽살개는커녕 개가 맞나 싶을 정도로 상상 속의 동물로 그려졌습니다. 귀신 물리치는 개의 특성을 부각시키려다 보니 닮게 그리기보다는 표현을 일부러 과장한 게 아닌가 여겨집니다.



(좌)김홍도, <경작도>, 1796년, 종이에 옅은 채색, 26.7×31.6cm, 보물 제782호,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우)김홍도, <점심>, 《단원풍속도첩》, 종이에 옅은 채색, 28×23.9cm, 보물 제527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럼에도 최고의 삽살개 그림을 딱 하나만 꼽으라면 저는 좌측의 작품을 고르겠습니다. 저 유명한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의 그림인데요. 삽살개가 아주 작게 그려져 있지요. 여기서 중요한 건 개의 뒷모습을 그렸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개 그림은 모두 앞모습이나 옆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김홍도는 풍속화에다가 지금껏 본 적 없는 개의 뒷모습을 그려놓았어요. 주인이 밭 가는 모습을 멀뚱히 서서 지켜보고 있는 거예요. 자세가 예술이에요. 저 강아지 한 마리 때문에 그림 전체가 확 살아나는 느낌이랄까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 최순우 선생도 이 그림에 반했던지 “밭갈이하는 주인의 얼굴을 멀찌감치서 바라보는 설멍한 삽살개의 뒷맵시”라는 기가 막힌 표현을 남깁니다.


김홍도의 유명한 그림 한 점을 더 볼까요. 보물로 지정된 《단원풍속도첩》 안에 있는 오른쪽 그림은 점심을 먹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개 한 마리가 앉아서 사람들 밥 먹는 걸 지켜보고 있습니다. 실로 절묘한 위치에 개를 그려 넣었어요. “게걸스럽게 밥을 먹는 인간들을 부러운 눈빛으로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개의 모습이 그림을 더욱 박진감 있게 한다.”는 유홍준 교수의 평가가 딱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만약 이 그림에 개가 없었다고 상상해 보세요. 저렇게 참 작게 그렸는데도 시각적인 효과는 정말 대단하지요. 역시 대가는 뭐가 달라도 다른가 봅니다.



김홍도, <모구양자도>, 18세기, 비단에 옅은 채색, 90.7×39.6cm, 간송미술관 소장


김홍도는 개를 등장시킨 그림을 여러 점 남겼는데요. 그중에서도 대표작이라 할 것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모구양자도>입니다. 어미와 새끼가 다정하게 어울려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지요. 여기서 다시 한번 김홍도라는 화가의 위대함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저 어미개의 당당하고 우아한 자태에서 보게 되는 건 바로 고결한 선비의 모습이에요. 개의 모습에다가 사람의 온기,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었다고 할까요. 그래서 어느 연구자는 김홍도만큼 세상을 따스한 시선으로 본 화가는 없다고 했습니다. 앞에서 보신 이암의 <모견도>와 함께 개 가족을 묘사한 가장 따스한 옛 그림으로 꼽을 만합니다.



작가 미상, <맹견도>, 19세기, 종이에 채색, 44.2×98.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한편 꽤 오랫동안 김홍도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진 그림도 한 점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맹견도>인데요. 1910년대에 서울 북촌의 어느 가정집에서 발견됐다고 합니다. 당시 미술계의 권위자였던 본 고희동, 안중식 등 화가들이 김홍도의 작품으로 결론을 냈어요. 그러곤 김홍도의 도장을 임의로 파서 찍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그림은 김홍도의 작품으로 알려졌지요. 하지만 나중에 가짜 도장이란 사실이 밝혀져 누가 그렸는지 확인되지 않은 작품으로 남게 됩니다.


우리나라 화가의 그림이 맞는지도 의문스럽습니다. 일단 쇠사슬에 묶인 채 어눌한 표정으로 엎드려 있는 저 개는 우리 토종개가 아닙니다. 게다가 개를 묘사한 방식이나 바닥을 포함한 배경에 표현된 원근법과 명암법 등은 우리 전통 기법이 아니라 전형적인 서양화법이거든요. 만일 이 그림이 우리 화가의 솜씨라면 조선 후기에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서양화법을 수용한 작품일 테고, 그게 아니면 서양화법을 익힌 청나라 화가의 그림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맹견이라기엔 너무도 해맑고 순하게 보이는 저 눈동자 때문에라도 오래 기억에 남을 그림이에요.


(좌) 신윤복, <나월불폐도>, 비단에 수묵, 25.3×16.0cm, 간송미술관 소장

(중) 김득신, <성하직구>, 종이에 옅은 채색, 22.4×27.0cm, 간송미술관 소장

(우) 신광현, <초구도>, 조선 19세기, 종이에 옅은 채색, 35.1×29.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름난 화가들의 개 그림 몇 점을 더 소개해 드립니다. 왼쪽은 조선 최고의 풍속화가로 이름을 날린 혜원 신윤복(申潤福, 1758~?)의 그림입니다. 상념에 잠긴 개의 자세와 표정이 예사롭지 않은 작품이에요. 그 옆에 긍재 김득신(金得臣, 1754∼1822)의 그림은 한여름에 삼대가 모여 짚신 삼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의 표정만 봐서는 한 여름 무더위가 그다지 실감 나지 않지요. 그런데 개의 표정을 한 번 보세요. 혀를 쭉 내민 채 헉헉대는 모습입니다. 표정이 정말 예술이에요. 이것 하나로 그림이 확 살아나지요.


애완견을 사람 못지않게 끔찍하게 아끼고 보살피는 반려동물의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어떤 개들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힘겹지요. 주인으로부터 버림받고 떠돌이개 신세가 되거나 먹을거리로 제 한 몸 바치는 일도 다반사입니다. 최근에는 대형견이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사례까지 잇따르기도 했고요. 그래도 부인할 수 없는 건 여전히 개는 인간과 살 부비며 함께 살아가는 고마운 존재라는 겁니다. 그래서인지 사람과 개가 교감하는 따뜻한 모습을 담은 마지막 그림, 신광현의 <초구도>에 더 눈길이 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김 석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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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참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닭이야기
김 석
#김석기자




정유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닭 띠의 해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영 편치가 않네요. 닭들의 모진 수난 때문이지요. 조류 인플루엔자라는 몹쓸 바이러스에 수많은 닭이 차디찬 땅속에 묻혔습니다. 나란히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 닭에게 정말 큰 빚을 진 것 같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참 오랜 세월 우리와 함께 살아왔는데 말이지요. 예나 지금이나 닭은 우리 인간에게 퍽 중요한 식량 공급원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닭은 대단히 신성하고 상서로운 존재였어요.



서쪽에서 올려다본 경복궁 근정전 계단. 앞쪽 월대 기둥머리 위에 닭 한 쌍이 앉아 있습니다.



경복궁 근정전은 돌로 쌓은 두 단의 월대 위에 우뚝 서 있습니다. 대개 관람객들은 근정전 건물에만 눈길을 주게 마련인데, 실은 월대를 찬찬히 둘러보는 맛이 정말 각별하거든요. 위아래 월대 곳곳을 지키는 예쁜 돌조각들 때문이랍니다. 사신상과 십이지신상들이지요. 이 가운데 근정전 서쪽 계단의 아래쪽 월대 기둥 위에 닭 한 쌍이 다소곳이 앉아 서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 임금이 앉았던 자리에서 보면 왼쪽이 수탉, 오른쪽이 암탉입니다.





닭이 울면 귀한 존재가 태어났다!


닭이 궁궐 계단을 지키고 있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닭은 십이지의 열 번째 동물이지요. 방향으로는 서쪽, 시간으로는 오후 5시에서 7시, 달로는 음력 8월을 지키는 방위의 신이자 시간의 신입니다. 닭이 신성한 동물로 여겨진 역사적 유래는 아주 깁니다.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배웠듯 일연의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나지요. 게다가 혁거세 왕의 왕후가 탄생한 과정은 더 흥미롭습니다.


“그날 사량리(沙梁里) 알영정(閼英井) 가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를 낳았다. 여자아이의 얼굴과 용모는 매우 아름다웠으나 입술이 닭 부리와 같았다.”


“처음에 왕이 계정(鷄井)에서 태어났으므로 계림국(鷄林國)이라고도 했는데 이것은 계룡이 상서로움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일설에는 탈해왕(脫解王) 때 김알지(金閼智)를 얻자, 숲 속에서 닭이 울었으므로 국호를 고쳐 계림이라 했다고 한다.”


신라 김 씨의 시조로 여겨지는 김알지의 탄생설화에도 닭이 등장합니다.


“하늘에서 땅까지 자줏빛 구름이 드리워지고 구름 속으로 보이는 나뭇가지에 황금 상자가 걸려 있었다. 상자 안에서 빛이 나오고 있었고 나무 밑에는 흰 닭이 울고 있었다. (중략) 왕이 숲으로 가 상자를 열어 보니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바로 일어났는데, 혁거세의 고사와 같았기 때문에 알지(閼智)라는 이름을 붙였다.”



조속 <조속필금궤도>, 비단에 채색, 105.5×56.0cm, 1635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숲 속에서 닭이 울어서 나라 이름을 고쳤다 했을 정도로 우리 옛 시조 설화에서 닭은 위대한 인물의 탄생과 건국에 신성함을 부여하는 동물로 여겨졌습니다. 바로 이 김알지 설화를 그림으로 남긴 이가 있었지요. 조선 후기의 사대부 화가인 창강 조속(趙涑, 1595∼1668)이 그린 <금궤도>란 그림인데요. 보시는 것처럼 커다란 나무에 금궤가 걸려 있고 그 아래에서 흰 닭이 목을 빼 울고 있습니다.



(좌) 고구려 무용총 천장 그림 / (우) 경복궁 근정전 주작상



닭을 신성시하고 숭배했던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로 오면 구체적인 유물들이 등장하는데요. 고구려 고분 무용총 천장에는 긴 꼬리를 가진 닭이 그려져 있습니다. 닭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은 주작입니다. 닭의 모습을 본떠서 그려냈기 때문이겠지요. 아시다시피 주작은 남쪽을 지키는 동물입니다. 경복궁 근정전을 정면에서, 다시 말해 남쪽에서 바라보면 위쪽 월대 기둥머리에 닭의 모습을 한 돌조각이 놓여 있어요. 닭으로 여기기 쉽지만 주작입니다.



(좌) <계형토기>, 백제시대, 높이 19.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 <닭>, 통일신라시대, 전(傳) 민애왕릉 출토,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백제의 유물로는 닭 모양 토기가 남아 있어요. 생김새는 비교적 단순하지만 질그릇 특유의 소박한 멋이 참 아름답지요. 섣부른 감은 있지만 닭의 이미지가 생활 속 물건에 반영된 가장 오래된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른쪽에 있는 유물은 신라의 44대 왕인 민애왕의 것으로 전해지는 무덤에서 출토된 겁니다. 1980년대 발굴조사 당시 무덤 안에서 십이지상 가운데 쥐ㆍ돼지ㆍ소ㆍ닭 4개만 발견됐다고 해요. 높이 10cm로 아담한 이 조각들은 무덤의 바깥쪽을 보며 서 있었다고 합니다.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이었던 거지요.



<김유신묘 십이지 유상 탁본>, 통일신라, 가로 71×세로 159,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무덤까지 함께하는 동반자! 닭은 그런 존재였습니다.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김유신 장군의 묘에도 십이지신상 가운데 닭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요. 그 탁본 중 하나가 단국대 석주선 기념 박물관에 소장돼 있습니다. 닭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하고 두 손에는 각각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이지요. 무덤을 지켜야 하니까요. 박물관 유물 해설에 따르면 김유신묘의 십이지상은 현존하는 십이지상 가운데 예술적인 면이나 규모 면에서 가장 뛰어난 것으로 꼽힌다고 해요.



조선시대 닭 그림의 대가 변상벽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로 넘어오면 이제 본격적으로 그림에 닭이 등장합니다. 조선의 닭 그림 하면 단 하나의 이름을 떠올릴 수밖에 없지요. 그 주인공은 바로 조선 후기의 화원화가 변상벽(卞相壁, ?~?)입니다. 두 차례나 영조의 초상화를 그렸을 정도로 그림 솜씨로는 당대 최고였던 변상벽을 더 유명하게 만든 건 바로 고양이와 닭 그림입니다. 얼마나 귀신같이 잘 그렸으면 변 고양이(卞古羊), 변 닭(卞鷄)이란 별명으로 불렸을까요.



변상벽, <모계영자도>, 비단에 수묵담채, 100.9×50.0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전설적인 닭 그림이라고 불러도 좋은 변상벽의 작품은 대표적으로 두 점이 거론됩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많은 이의 사랑을 받는 그림이 바로 위에 보시는 <모계영자도(母鷄領子圖)>에요. 어미닭의 부리를 자세히 보면 벌레를 물고 있지요. 귀엽고 앙증맞은 새끼 병아리들에게 먹이를 줄 참입니다. 어미와 새끼들이 다정하게 어울린 모습에서 살뜰한 모정(母情)과 따스한 가족애(家族愛)가 느껴져 마음이 다 푸근해지네요.


그래서 이 그림은 우리 옛 그림을 소개하는 여러 미술 책에 꽤 자주 등장합니다. 그중에서도 작고한 미술사학자 오주석 선생의 글을 빼놓을 수 없어요. 그 감동이 어찌나 컸던지 각기 다른 자신의 책에 두 번씩이나 이 작품에 대한 깊고도 진한 애정을 토로했습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미술 강연에서 절대 빼놓지 않았던 그림으로 바로 이 <모계영자도>를 꼽으면서 이런 상찬의 말을 남겼지요.


“세상에 원, 외국 박물관에서도 여기저기서 닭 그림을 많이 보시겠지만 이렇게 정답고 살가운 그림은 다시없어요!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이런 선한 작품을 그리고, 또 그것이 좋아서 벽에 걸어 두고 흐뭇해했던 우리 조상들의 삶이 얼마나 순박하고 착한 것이었는지 절로 느껴집니다.”



변상벽, <자웅장추>, 종이에 채색, 30.0×46.0cm, 간송미술관 소장



여기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닭 그림이 있습니다. 화면 오른쪽에 잘 생긴 수탉과 암탉 한 쌍이 있고, 왼쪽으로는 암탉 주위로 병아리들이 종종 모여 있군요. 닭 가족의 평화롭고 단란한 한때를 그렸습니다. 소재도, 구도도 평범하지요. 하지만 닭과 병아리를 묘사한 솜씨만큼은 정말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놀랍거든요. 아주 가는 붓으로 닭의 깃털을 한 올 한 올 그어냈을 화가의 집착에 가까운 육체노동이 빚은 경탄스러운 극사실의 세계가 여기에 있습니다. 백인산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은 “초상화로 다져진 숙련된 기량이 닭을 그리면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으니, 가히 닭의 초상이라 할만하다.”라고 썼습니다. 절묘한 그림에 걸맞은 절묘한 표현입니다.


백인산 선생의 책 <간송미술 36 회화>를 보면 조선 후기의 대학자 다산 정약용이 변상벽의 그림을 품평한 흥미로운 글이 소개돼 있습니다. 당시에 변상벽이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를 이보다 더 잘 알려주는 글은 없지 싶어요.


“변상벽이 변 고양이로 불리는 것은 고양이를 잘 그린다고 사방에 이름이 나서이다. 이젠 또 닭과 병아리를 그려내니, 마리 마리가 털이 살아 있는 것 같다. (중략) 형형색색 세밀하여 실물과 똑같고, 도도한 기상 또한 막을 수 없다. 듣자 하니 이 그림을 막 그렸을 때, 수탉이 잘못 알고 울어 댔다 한다. 그가 고양이를 그렸을 때도 쥐들이 겁을 먹었으리라. 기예의 지극함이 여기까지 이르니, 만지고 또 만져도 싫지가 않다. 되지 못한 화가들은 산수화를 그린다며 이리저리 휘두르니 거칠기만 할 뿐이다.”


예로부터 닭은 다섯 가지 덕을 지니고 있다 했지요. 머리에 벼슬을 이고 있는 것은 벼슬자리, 즉 입신출세를 상징한다 해서 문(文), 발에 달린 발톱은 무기로 쓰이니 무(武), 적 앞에서 물러섬이 없이 싸운다 하여 용(勇), 먹이가 생기면 서로 알려주고 먹여주는 것은 인(仁), 때를 놓치지 않고 정시에 꼬끼오 하며 정확하게 제 할 일을 한다 해서 신(信)입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닭을 사랑했고, 그림으로도 그렸던 겁니다.



정선, <등롱웅계>, 비단에 채색, 30.5×20.8cm, 간송미술관 소장



조선의 위대한 화가들이 그린 닭


조선 최고의 화가들도 한두 점씩은 닭 그림을 남겼지요. 진경산수의 대가로 추앙받는 겸재 정선의 그림 가운데 <등롱웅계(燈籠雄鷄)>란 작품이 있습니다. ‘꽈리와 수탉’이란 뜻입니다. 겸재 하면 워낙에 산수화 걸작이 많다 보니 상대적으로 낯설게 보일 정도인데요. 이 그림에서 우리는 가장 기세등등하고 호전적인 장닭의 위용을 보게 됩니다. 자세를 한껏 낮춰 당장이라도 돌격 앞으로 할 것만 같은 자세에서 생생한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나요. 더욱이 흰 벼슬은 바로 토종닭의 징표이기도 하니, 참 장하고 자랑스러운 토종닭 그림입니다.



김득신, <야묘도추>, 종이에 담채, 22.4×27.0cm, 간송미술관 소장



너무나도 유명한 그림이니 따로 소개해 드리지 않아도 될 겁니다. 그린 이는 조선 후기의 화원화가인 긍재 김득신(金得臣, 1754~1822)입니다. 마치 움직이는 동영상의 정지 화면을 보듯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이며 동물들의 자세, 표정 하나하나에 사실감이 넘칩니다. 선배 김홍도와 후배 신윤복, 두 대가 사이에서 작아질 수밖에 없는 김득신이었다지만, 이 그림만큼은 화가의 유명세와 관계없이 걸작으로 우뚝 서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의 눈길은 닭에게 가닿습니다. 새끼 병아리를 물고 달아나는 고양이를 따라가보려고 홰를 치는 어미닭의 자세에서 자식을 잃을지 모르는 어미의 절박함이 뚝뚝 묻어나지요. 어미닭 주위로 놀라서 혼비백산 달아나느라 여념이 없는 병아리들의 모습은 또 어떻고요. 병아리 절도 사건이란 심각한 내용을 다뤘지만,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절로 떠오르는 미소까지야 어쩌겠어요. 기분 좋은 해학이 깃든 그림입니다.



신윤복, <닭>, 비단에 채색, 23×23.8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혜원 신윤복의 것으로 전하는 닭 그림도 한 점 있습니다. 두 마리 모두 발 뒤에 뾰족한 칼날을 달고 있지요. 싸움닭입니다. 자세를 보면 한 판 붙기 전에 치열한 탐색전을 벌이고 있는 모양새에요. 그런데 자세를 보아하니 승부의 추는 이미 기울어진 것 같기도 합니다. 닭의 다섯 가지 덕 가운데 무(武)와 용(勇)을 드러낸 이 그림의 오른쪽 위에 있는 글귀는 중국 당나라를 대표하는 문장가였던 한유의 글을 인용한 겁니다.


高行若矜豪 (고행약긍호) 고상한 행동은 거만하고 호방한 듯

側睨如伺殆 (측예여사태) 곁눈질로 허점을 살피네.



닭에게서 각별한 깨달음을 얻다


그런 닭이 어떤 선비에게는 삶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주기도 했습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성호 이익(1681∼1763)은 자신의 문집 <성호사설(星湖僿說)>에 닭에 관한 글을 여럿 남겼는데요. 병아리(鷄雛)란 글을 보면 어쩜 그렇게 병아리의 생태를 면밀하게 관찰해 놓았는지요. 배고픔과 추위에 곧잘 죽는 병아리를 먹여 살리는 방법이라든가, 먹이 경쟁에서 밀려난 병아리를 돌보는 요령, 심지어 병아리 똥구멍이 막혔을 때 뚫어주는 방법까지 적어놓았으니 말입니다. 학문의 실질적 쓸모에 관심을 기울였던 실학자답습니다. 이 글의 마지막 단락을 함께 읽어볼까요.


“백성들이 여러 가지로 고통을 겪는 모습 또한 잘 살고 귀한 지위에 있는 자들은 깨닫지 못한다.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백성들이 온갖 고통을 겪고 또 배도 곯게 되니 어찌 떠돌아다니다가 도랑과 구렁에 엎어져 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장승업, <계도(鷄圖)>, 19세기 후반, 종이에 담채, 140×43.5cm, 개인 소장



그런가 하면 축계지편당(祝鷄知偏黨)이란 제목의 글도 있습니다. ‘닭을 키워보면 당파에 치우치는 걸 알 수 있다.’는 뜻인데요. 서로 먹이를 차지하기 위해 아웅다웅 싸우는 닭들의 생태에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출세를 탐하는 인간 사회의 추악한 이면을 본 겁니다. 요즘도 닭의 특정한 신체 부위를 들어 상대를 비꼬고 폄하하는 말이 심심찮게 쓰이지요. 닭으로서는 억울할 만도 하겠습니다. 심지어 그런 닭만도 못한 사람에 대한 비유까지 나오는 마당이니 말입니다.


“사람에겐 닭보다 못한 것도 있다. 닭들이 먹을 것을 다툴 때는 날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면서 싸우다가도 그 일만 끝나면 서로 다투던 일은 잊은 채 언제 그랬냐는 듯 사이좋게 지낸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도 폭포의 물이 용솟음치듯 노여운 모습을 가라앉히지 않는다. 그리하여 반드시 상대를 죽여 없애 버리고자 하면서 자신의 잘못은 결코 뉘우치지 않으니, 이야말로 차마 못할 일이다.”


번잡한 도시의 삶은 꼬끼오 우렁찬 닭 울음소리를 속절없이 앗아갔지요. 그래서 이제는 식탁 위 먹을거리로 제 한 몸 내준 닭이 우리에겐 더 친숙합니다. 뜻하지 않게 닭 값, 계란 값이 오르는 초유의 상황을 겪고 나니 아낌없이 주고 또 주는 닭의 존재가 새삼 고맙게 느껴집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새해가 밝았습니다. 닭의 해인 2017년에는 부디 여느 해보다 기쁘고 행복한 일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심전 안중식 <쌍계도>(1900년) 부분



※ 이 글은 아래 책과 글에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김흥식 엮음, 정종우 해설 <조선동물기>(서해문집, 2014)

백인산 <간송미술 36 회화>(컬처그라퍼, 2014)

오주석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솔, 2003)

오주석 <그림 속에 노닐다>(솔, 2008)

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민음사, 2008)

천진기 ‘여명과 축귀의 계명성’ <정유년 닭띠 학술 토론회 자료집>(국립민속박물관, 2016)

탁현규 <고화정담>(디자인하우스, 2015)

<간송문화 : 간송미술문화재단 설립 기념전>(간송미술문화재단, 2014)

<간송문화 90 화훼영모 – 자연을 품다>(간송미술문화재단,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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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옛 그림에서 음악 소리가 들리네…
김 석
#김석



점잖게 생긴 선비가 가만히 앉아서 악기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당비파(唐琵琶)란 이름을 가진 네 줄짜리 현악기인데요. 그 역사가 제법 깊어서 이미 신라 시대부터 널리 연주되었다고 합니다. 왼손가락으로 줄을 누르고 오른손으로 뜯는 모습이 요즘으로 치면 기타 치는 모습과 참 비슷하지요. 맨발인 걸 보면 누구 눈치 볼 것도, 스스럼도 없이 혼자서 조용히 음악을 연주하며 한가로운 멋을 즐기고 있습니다. 마침 그림 왼쪽에 이런 내용의 시구가 적혀 있군요.



| <포의풍류도>, 김홍도, 종이에 수묵 담채, 27.9×37cm, 개인 소장





이런 멋스런 시구를 붙인 걸 보면 그림 속 인물은 그 시절에 한 풍류 했던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포의풍류도>라는 제목이 붙은 이 그림은 조선 최고의 화가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의 작품입니다. 실제로 김홍도는 그림 뿐 아니라 음악에도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었다고 해요. 본인 스스로 음악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여러 악기를 능숙하게 다뤘다는 기록도 남아 있지요. 우리 미술의 역사를 통틀어 음악과 악기에 관한 그림을 가장 많이 남긴 화가가 바로 김홍도였습니다.



| 당비파 모양, 연주모습



김홍도의 음악 사랑

그림을 본 사람들은 당비파를 연주하는 주인공이 바로 김홍도였을 거라고 여겼습니다. 일종의 자화상으로 본 거지요. 연주자 앞에 또 하나의 악기가 있는데요. 입으로 불어서 소리를 내는 관악기인 생황(笙簧)입니다. 가느다란 대나무 관 17개가 둥그렇게 박혀 있는 악기로, 화음을 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우리 악기여서 예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해요. 김홍도 역시 생황을 잘 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이 생황 연주자를 따로 묘사한 그림이 어엿하게 남아 있습니다.



| <월하취생도>, 김홍도, 종이에 수묵 담채, 23.2×27.8cm, 간송미술관 소장


달빛 아래에서 맨발 차림으로 유유자적 생황을 부는 모습을 그렸지요. 그림 오른쪽에 이런 시구가 적혀 있습니다. “달빛이 비쳐드는 방 안에서 생황소리는 용의 울음보다 더 처절하다.” 중인 출신의 화가였던 김홍도의 울분이 담겨 있다고도 해석되는 구절입니다. 김홍도는 이 밖에도 소나무 아래에서 동자가 생황 부는 모습을 그린 그림을 한 점 더 남겼습니다. 그런가 하면 조선 최고의 풍속화가로 꼽히는 혜원 신윤복(申潤福, 1758~?)의 그림 중에도 생황을 들고 있는 기생을 그린 작품이 남아 있어요.



| (좌) <송하선인취생도>, 김홍도, 비단에 수묵 담채, 109×55cm, 고려대박물관 (우) <연당의 여인>, 신윤복, 비단에 채색, 29.7×24.5cm,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의 음악사랑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김홍도의 진짜 장기는 거문고와 퉁소라고 전하는데요. 조선 후기의 문신인 성대중(成大中, 1732∼1809)이란 분이 자신의 문집 <청성집>에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습니다. “찰방 김씨(김홍도)가 퉁소를 잘하므로 한번 놀아볼 것을 권하였다. 그 곡조는 소리가 맑고 가락이 높아 위로 숲의 꼭대기까지 울렸는데 뭇 자연의 소리가 모두 숨죽이고 여운이 날아오를 듯해서, 멀리서 이를 들으면 반드시 신선이 학을 타고 생황 불며 내려오는 것이라 할 만하였다.”



| (좌) <단원도>, 김홍도, 1784년, 종이에 수묵 담채, 135.3×78.5cm, 개인 소장 (우) <선동취적도>, 김홍도, 비단에 채색, 130.7×57.6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얼마나 퉁소를 잘 불었으면 이렇게까지 극찬을 했을까요. 오른쪽 그림에는 작지만 거문고 타는 김홍도 자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악기를 연주하는 이는 한 결 같이 김홍도 자신입니다. 이쯤 되면 김홍도가 얼마나 음악을 사랑했는지 능히 짐작하고도 남을 정도이지요. 그래서 뛰어난 김홍도 연구자였던 오주석 선생은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단원은 화가이면서 취미로 음악을 즐긴 아마추어 정도가 아니라 당당한 음악가로서 명성이 자자했던 것이다.”



조선 최고 연예인(?)을 화폭에 담은 신윤복



| (좌) <주유청강>, 신윤복, 비단에 채색, 28.2×35.6cm, 간송미술관 소장 (우) <청루소일>, 신윤복, 비단에 채색, 28.2×35.6cm, 간송미술관 소장


당시 최고의 연예인이었던 기생이 생황을 들고 있거나 연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그림들이 더 있습니다. 국보 제135호로 지정된 신윤복의 풍속화 모음집 <혜원전신첩>에 수록된 ‘청루소일’과 ‘주유청강’이란 작품인데요. 기녀가 생황을 든 장면은 위에서도 보았고, 양반 댁 자제들의 럭셔리한 뱃놀이를 묘사한 오른 쪽 그림에선 한 기생이 뱃머리에 앉아 생황을 불고 있습니다. 그 자태를 어쩜 저리도 매력적으로 그렸는지요. 자고로 예로부터 먹고 노는 데 가무가 빠질 수 있나요. 악사 한 명을 더 태웠습니다. 한 젊은이가 배 한 가운데 서서 불고 있는 저 악기는 바로 대금(大笒)입니다.



| 이생강 - 대금 <이생강류 대금 산조>



| (좌) <무동>, 김홍도, 종이에 엷은 채색, 26.8×22.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 <쌍검대무>, 신윤복, 비단에 채색, 28.2×35.6cm, 간송미술관 소장


신윤복의 그림에는 조선 후기의 소비 향락 문화와 남녀 간의 사랑이 실로 적나라하게 담겨 있지요. 음주가무가 주를 이루는 그림에 음악이 빠질 수 없었으니, 신윤복 역시 김홍도 못지않게 음악가들의 모습을 많이 그린 화가였습니다. 기생 둘이 칼춤을 추는 그림 ‘쌍검대무’에는 악공이 여섯 명이나 동원됐네요. 춤추는 기생들을 돋보이게 하려고 아래 악공들은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그렸지만, 북 치고 장구 치고 대금 부는 이들의 활기 넘치는 움직임은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전해져 옵니다.


그런데 김홍도의 그림에도 여러 악공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는 작품이 있습니다. 보물 제527호로 지정된 <단원풍속도첩>에 수록된 이 그림은 ‘무동’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아주 친숙합니다. 춤추는 소년을 중심으로 여섯 악사가 빙 둘러 앉아 한 판 신명나게 노는 모습을 보면 절로 흥이 나지요. 피리 둘에 대금, 해금, 장구, 앉아서 연주할 수 있도록 북을 틀에 넣어 만든 좌고(座鼓)까지 동원된 춤판에 밝고 건강한 기운이 가득합니다.



| (좌) <청금상련>, 신윤복, 비단에 채색, 28.2×35.6cm, 간송미술관 소장, (우) <노상탁발>, 신윤복, 비단에 채색, 28.2×35.6cm 간송미술관 소장


승려들이 민가를 돌며 탁발(구걸)하는 데 절에서 쓰는 북인 법고(法鼓)가 동원됐는가 하면, 청중들을 음악의 매력 속에 흠뻑 빠지게 한 거문고 가락이 금방이라도 울려나올 듯합니다. <혜원전신첩>에 수록된 30점을 일일이 확인해보니 악공이나 악기가 등장하는 그림은 모두 8점이더군요. 앞에서 소개해 드린 김홍도의 작품과는 정신도 내용도 확연히 다르지만, 조선 후기의 유흥과 향락 문화 속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컸던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참으로 소중한 그림들입니다. 그래서 조선 회화로는 드물게 당당히 국보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이고요.




먼 옛날 귀하디 귀한 대접을 받은 음악



  

| (좌) 반구대 암각화 (우) 반구대 암각화 세부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의 형상을 그리고 새긴 역사는 실로 유구합니다. 선사시대부터 전해오는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예를 보여주는 것은 국보 제285호 반구대 암각화입니다. 울산의 젖줄인 태화강 상류 반구대 일대의 인공 호수 서쪽 기슭 암벽 위에 놀라운 그림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가로 약 8미터, 세로 약 2미터 바위 위에 사람부터 동물까지 갖가지 형상이 새겨진 희대의 보물이지요. 한반도의 먼 조상이 그 옛날에 이런 그림을 남겼다는 것도 경이롭지만, 그 속에서 우리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바로 선사시대의 음악가들입니다. 오른쪽 아래에 빨간 동그라미로 표시한 부분을 자세히 보세요. 길쭉한 무언가를 입에 대고 부는 사람의 형상이 새겨져 있지요. 이걸 확대해서 좀 더 가까이서 보면 영락없이 피리 부는 사람입니다.



| <백제 금동대향로>, 백제 6세기, 금동, 높이 62.5cm,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국가가 어느 정도 틀을 갖추는 삼국 시대에 이르면 악기의 제작과 구성도 한층 세분화되고 정교해집니다. 1993년 충남 부여 능산리의 백제 고분에서 출토된 국보 제287호 백제 금동대향로는 교과서에도 실린 기념비적인 유물입니다. 하지만 이 유물을 자세하게 뜯어본 일은 아마 없으실 거예요.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할 부분은 바로 향로의 뚜껑 윗부분입니다. 여기에 악기를 연주하는 음악가 5명이 새겨져 있거든요.



| 시계방향으로 배소, 북, 피리, 완함, 현금 (출처: 위례백제연구원 블로그)


왼쪽부터 첫 번째는 대나무를 옆으로 나란히 묶어서 만든 배소(排簫)라는 관악기입니다. 두 손으로 양 옆을 잡고 불었을 겁니다. 다음은 북이지요. 무릎 위에 올려놓고 왼손으로 잡은 채 오른손으로 두드리는 모습입니다. 가운데 보이는 현악기는 완함(阮咸)이라 부릅니다. 앞에서 소개한 비파의 일종인데, 여기엔 줄이 세 가닥만 그려져 있군요. 네 번째는 피리, 마지막 것은 현금(玄琴)이라는 악기입니다. 흔히 거문고라고 불리는 바로 그 악기이지요. 금동대향로에 새겨진 다섯 악사는 백제의 귀족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 먼 옛날에 이토록 귀하디귀한 대접을 받았던 걸 보면 음악은 예나 지금이나 아주 품격 높은 예술임에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기나긴 잠에 빠져버린 옛 악기ᆢ그러나 죽은것은 아니다



| (좌) <목양취소>, 이인문, 비단에 채색, 30.8×41.5cm, 간송미술관 소장 (우) <여동빈도>, 김득신, 종이에 수묵담채, 115.5×55.5cm


왼쪽은 양들이 들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목가적 풍경을 담은 그림입니다. 양치기 소년은 커다란 너럭바위에 올라 앉아 단소를 불고 있군요. 참으로 평화롭고 고요한 정경이지요. 조용한 숲속에 가만히 울려 퍼져 메아리를 이루는 피리 소리를 가만히 떠올려 봅니다. 때 묻지 않은 동심의 세계를 연상시키는 따뜻한 그림이지요. 오른쪽은 조선 후기의 화가 긍재 김득신(金得臣, 1754∼1822)의 <여동빈도>란 작품입니다. 2013년 6월 KBS의 TV쇼 <진품명품>에 등장해서 감정가가 2,000만 원으로 나와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요. 그림의 주인공 여동빈은 중국 도교의 여덟 신선 중 한 명으로, 소원을 들어주는 신선이라 해서 가장 인기가 많았다고 해요. 옆에서 한 명은 퉁소를, 다른 한 아이는 생황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 <사계풍속도 8폭>, 김득신, 1815년, 비단에 수묵담채


김득신의 그림을 한 점 더 만나볼까요? 사계절의 변화에 맞춰 일상의 풍속을 여덟 폭 연작으로 그린 병풍 그림입니다. 이 가운데 가장 왼쪽에 있는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갓 쓴 선비가 거문고를 뜯고 있군요. 기생 둘에 술병까지 놓인 걸 보면 양반들이 야외로 나들이를 나간 모양입니다. 거문고 역시 옛 그림에 참 많이도 등장하는 악기인데요. 위에서 소개해 드렸던 신윤복의 그림도 그렇고 거문고는 꼭 기생과 함께 그려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 풍류 하면 거문고를 빼놓을 수 없다는 뜻이겠지요.



| 국립국악원 목요풍류: 오경자 신쾌동류 거문고 산조 전바탕



| <탄금야흥>, 백은배, 비단에 수묵담채, 23.0×30.3cm, 간송미술관 소장


조선 말기의 화가 임당 백은배(白殷培, 1820~1901)의 그림에도 곰방대를 문 남자 옆에서 기생이 거문고를 뜯는 모습이 보입니다. 김홍도와 신윤복에서 활짝 꽃을 피운 풍속화의 전통은 이렇게 조선 말기까지 도도한 흐름으로 이어졌지요. 그런 풍속화들이 남아 있기에 오늘날 우리가 음악 소리 들리는 옛 그림들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것이고요. 물론 지금은 그림으로만 그 자취를 확인할 수 있는 악기들도 있습니다. 이 글의 첫머리에 소개해드린 ‘당비파’가 대표적이지요. 이제는 박제가 되어버린 악기의 운명에 대해 소설가 김훈은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소리를 내지 않고, 단지 진열되어 있는 악기들도 인간에게 안겨서 소리를 내고 싶어 하는 그 운명만으로도 아름답다. (…) 이미 연주법이 전승되지 않은 현악기들도 있다. 당비파가 그러하다. 악기는 남아 있지만 그 연주법이 전하지 않아서, 악기는 더 이상 인간에게 안기지 못하고 더 이상 소리도 내지 않는다. 이런 악기들도 그 속에 소리의 잠재 태와 소리의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는 한 죽은 악기는 아니다. 악기는 살아서, 기나긴 잠에 빠져 있다. 그러나 죽은 것은 아니다.”


그림에서 노랫소리가 들리고 아름다운 곡조가 흘러나와 우리의 가슴을 촉촉하게 적셔 줍니다. 옛 그림 속으로 들어가 그 음악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는 건 어떨까요.



| <아악의 리듬>, 김기창, 1967, 비단에 수묵채색, 86×9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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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조선시대부터 #먹스타그램이 있었다!
김석
#김석기자



옛말에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지요.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금강산 여행은 평생의 꿈이었습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버킷리스트,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 가운데서도 첫 손에 꼽힐 정도였어요. 그래서 수많은 시인과 화가가 금강산을 유람하고 주옥같은 시와 그림들을 남겼습니다. 그런 금강산인데도 허기 앞에선 장사 없나 봅니다. 일단 좋은 구경도 밥 먹고 하자는 속담이 전해져올 정도니까요. 삶이란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일입니다. 먹어야 살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먹을거리를 장만하고 음식을 해먹는 모습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화가들의 단골 소재였습니다. 얼마 전 <풍미 갤러리>라는 책을 읽었는데요. 서양의 명화 중에서 음식과 관련된 그림만을 골라 묶은 미술책입니다. 다 읽고 나니 궁금해졌어요. 우리 조상이 남긴 옛 그림 속에는 어떤 음식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까 하고 말이지요.



#아이스타그램, 아이의 첫 음식 모유를 담은 자모육아



|신한평 <자모육아>, 종이에 담채, 23.5×31.0cm, 간송미술관 소장



올해 놓쳐서는 안 될 미술 전시회가 있습니다.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8월 28일까지 이어지는 <간송문화전 6부: 풍속인물화 - 일상, 꿈 그리고 풍류>입니다. 저 유명한 신윤복의 <미인도>를 비롯해 보석처럼 빛나는 우리 옛 그림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지요.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소재로 한 풍속인물화에는 음식과 관련된 그림들이 제법 많은데요. 위의 그림은 신윤복의 아버지인 신한평(申漢枰, 1735~1809)이란 분이 그린 자모육아(慈母育兒)란 작품입니다. 자애로운 어머니가 아이를 기른다는 뜻이지요. 자녀 셋을 둔 어머니가 막내인 갓난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습니다. 엄마 품에 폭 안겨 젖을 빠는 아기, 그 모습을 한없이 자애로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을 어쩜 저리도 사랑스럽게 그렸을까요. 모유(母乳)는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 먹는 음식입니다. 젖을 떼고 나면 다시는 맛볼 수 없는 귀하디귀한 음식이기도 하고요.




#술스타그램, 신윤복이 화폭에 담은 주막의 풍경



|신윤복 <주사거배>, 종이에 담채, 28.2×35.6cm, 국보 제135호, 간송미술관 소장



기왕 말 나온 김에 신윤복의 그림도 하나 살펴보겠습니다. 국보 제135호로 지정된 신윤복의 <혜원전신첩>에 실린 그림 30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술집 풍경이군요. 신윤복이 즐겨 그린 기생은 보이지 않고 가마솥 뒤 부뚜막에 앉은 주모가 국자로 술을 떠서 잔에 따르고 있습니다. 갓 쓴 손님네들이 다들 서 있는 걸 보면 요즘 말로 딱 선술집이지요. 예나 지금이나 술은 어쩔 수 없이 술인 모양입니다. 오른쪽 위에 한자로 된 글귀 내용이 또 절묘합니다. “술잔 들어 밝은 달 맞아들이고, 술항아리 안은 채 맑은 바람 대하네.” 화가의 풍류가 이랬습니다.




#회식스타그램, 강가에서 즐기는 풍류 넘치는 회식



|김득신 <강상회음>, 종이에 담채, 22.4×27.0cm, 간송미술관 소장



이번엔 강가에 조촐한 밥자리가 마련됐군요. 조선 후기에 풍속화가로 이름을 날린 김득신(金得臣, 1754~1822)의 작품입니다. 옛날 옛적엔 뜻 맞는 사람끼리 강에 나가 고기도 잡고, 잡은 고기를 요리해서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고 하는데요. 주로 삼복에 일손 없는 날을 골라 이른바 천렵(川獵)을 즐기는 것도 옛 사람들에겐 빼놓을 수 없는 놀이였다고 합니다. 가운데 생선 요리를 놓고 둘러앉은 네 사람이 밥을 먹고 있는데, 한 명은 그 뒤에서 혼자 술병을 독차지하고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네요. 한 소년이 나무 뒤에서 지켜보며 뭐라도 좀 얻어먹을 수 있을라나, 기회를 엿보는 것만 같아 웃음을 줍니다.




#일상스타그램, 김홍도가 담은 일상의 풍경들



아주 오래 전부터 정물화를 그려온 서양과 달리 우리 옛 그림에는 정물화의 전통이 없습니다. 먹거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그림이 없다는 뜻이지요. 음식을 먹거나 요리를 준비하는 모습, 더 넓게 잡아도 고기 잡고 농사짓는 풍습 정도를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나라 회화사를 대표하는 풍속 화가를 딱 한 사람만 꼽으라면 단연 김홍도가 되겠지요.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조선시대의 이미지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김홍도의 풍속화 25점을 수록한 기념비적인 화첩 <단원풍속도첩>(보물 제527호)에도 어김없이 음식과 관련된 그림들이 있습니다.



|왼쪽부터 김홍도 <점심> <주막>, 종이에 엷은 채색, 28.0×23.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너무나도 유명한 그림들이지요. <점심>은 말 그대로 점심 식사 장면을 그린 겁니다. 화면 한가운데 숟갈로 밥을 떠먹는 인물을 중심으로 조촐한 서민들의 야외 식사 모습이 정감 있게 묘사돼 있습니다. 하루하루 팍팍하고 고단한 삶을 살았을 백성들의 먹고 사는 일상을 참 따뜻한 시선으로 그렸어요. 위에서 술집 그림을 잠시 보았지만 사실 백성들이 밥 먹고 술 마시던 곳은 <주막>이지요. 평상도 아닌 댓돌에 걸터앉아 밥그릇을 한쪽으로 기울여 숟갈로 음식을 뜨는 모습을 보세요. 그릇에 음식을 담는 주모의 표정은 또 어떤가요. 이런 백성들의 소박한 건강함이야말로 김홍도의 풍속화가 갖는 진정성의 힘이 아닐까요.




#요리스타그램, 세계에서 사랑받는 김준근이 담은 우리의 풍속



|<국수 누르는 모양> 김준근b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화가로 김준근(金俊根, ?~?)이란 분이 있습니다. 원산 지역 토박이 출신의 지방 화가인데, 놀라운 건 김준근의 작품이 해외 미술관과 박물관에 꽤 많이 소장돼 있다는 점입니다. 미국, 캐나다,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덴마크, 오스트리아, 영국, 일본까지 전 세계 각지에 퍼져 있거든요. 1890년대에서 1990년대 초반에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 가운데는 한국의 풍속을 잘 보여주는 그림을 구하려는 사람이 꽤 많았다고 해요. 김준근의 그림은 그런 외국인 고객들의 취향을 만족시킨 겁니다. 오죽했으면 ‘수출 풍속화’로 불렸을까요.



|왼쪽부터 <떡매질> <두부 짜기>, 김준근


|왼쪽부터 <밥 푸고 상차리기>, <방아찧는 모양>, <엿 만들기>, 김준근



당시의 풍속과 생활상 치고 ‘없는 게 없는’ 김준근의 풍속화는 지금까지 파악된 수량만 자그마치 1600점이 넘는다고 합니다. 게다가 김준근의 작품에는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대단히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들이 제법 많습니다. 위의 그림 여섯 점을 차례대로 살펴보면 <국수 누르는 모양>, <두부짜기>, <떡매질>, <밥 푸고 상차리기>, <방아찧는 모양>, <엿 만들기>입니다. 정말 다채롭지 않나요? 조선시대 어떤 풍속화가도 이토록 세세한 것까지 그림으로 남기진 않았습니다. 가히 살아 있는 생활사 교과서라 할 만하지요.





#여행스타그램, 외국인의 시선에 비친 우리의 모습


|엘리자베스 키스 <맷돌 돌리는 여인들 Women at Work>, 종이에 구아슈, 1919년



그렇다면 낯선 이방인의 눈에 비친 한국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일제강점기에 한국을 여행하며 다양한 풍속을 그림으로 남긴 영국의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1956)의 그림 중에도 음식과 관련된 작품이 두 점 있습니다. <맷돌 돌리는 여인들>이란 제목의 수채화는 두 여인이 마당 한가운데서 맷돌로 뭔가를 갈고 있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이런 모습이 외국인 화가의 눈에는 분명 이국적으로 다가왔겠지요.



|엘리자베스 키스 <금강산 절 부엌 A Temple Kitchen, Diamond Mountains>, 채색 목판화, 1920년



이번에는 <금강산 절 부엌>이란 제목이 붙은 채색 목판화인데요. 아주 깔끔하게 정돈된 어느 절 부엌에서 한 남자가 부뚜막에 올라앉아 아궁이 밥을 짓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구수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장면까지 정말 생생하게 그려놓았네요. 그러고 보니 금강산 이야기로 시작한 우리의 그림 여행은 묘하게도 이렇게 다시 금강산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 옛 그림에서는 결코 본 적 없었던 ‘밥 짓는 남자’와 함께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