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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미식,편식:정동현의 三食일기
이런 완벽한 밥은 어떻게 짓는거죠?
정동현
#정동현




배가 불러 더 이상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뒷 주방을 바라보며 디저트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다찌에 앉아 스시를 먹은 지 1시간 남짓 흐른 때였다. 광어로 시작해 도미, 전복, 성게알, 제철을 맞은 방어까지, 갖가지 생선을 올린 스시에 쉴 틈이 없었다. 느긋한 포만감이 찾아왔다. 그 후에는 자리를 뜨고 싶은 성급한 마음이 들었다. 간만의 부산이었다. 해운대 인근에 있는 스시집에 앉아 시간을 보내기는 아까웠다.


“서비스 괜찮으십니까?”


실장이란 배지를 단 요리사가 나에게 갑자기 물었다. 나는 얼떨결에 “네”라고 답했다. 안경을 쓰고 팔뚝이 굵었던 그는 주방에서 제일 나이가 많아 보였다. 아마 50대 중 후반쯤 되었을까?


“솥밥이 조금 남아서요.”


부산 사투리로 혼잣말을 하듯 웅얼거리던 그는 솥을 앞에 두고 손바닥을 가볍게 쳤다. 스시를 쥐기 전 요리사들이 으레 하는 몸동작이었다. 그다음 그는 얼음물에 두꺼운 두 손을 담그더니 바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솥 속에 손을 넣었다. 갓 지은 밥을 쥐기 위해 얼음물로 손을 차갑게 식힌 것이었다. 그리고 흔히 보는 삼각형으로 밥 모양을 잡고 김으로 밑을 받쳐 나에게 건넸다.





“소금물로 지은 오니기리(주먹밥)입니다.”


그는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밥과 김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주먹밥이었다. 편의점에서 파는 주먹밥에 비해 크기도 꽤 컸다. 나는 그 주먹밥을 잠시 바라봤다. 밥알 깨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밥과 밥 사이를 잇는 전분기도 없었다. 자세히 보니 하얀 쌀눈도 보였다. 더 살펴보고 싶었지만, 습기에 김이 눅눅해질 것 같았다. 그대로 밥을 입에 넣었다. 한 입을 베어먹고 나는 다시 그 밥을 바라봤다. 놀라운 식감이었다. 소금물로 밥을 지어서일까? 살짝 단단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밥알에 탄력이 있었다. ±1의 오차도 없이 간은 완벽했다. 뭉쳐진 밥은 입속에서 밥알 하나하나로 자연히 흩어졌다. 솥에서 익힌 밥이 버금은 구수한 향이 코로 빨려 들어갔다. 식감과 향, 간이 모여 하나의 감각으로 변했다. 쾌감이었다. 나는 놀라서 요리사를 바라봤다. 그는 다른 손님과 이야기 하며 웃고 있었다.


“이 밥을 어떻게 지은 거죠?”


나는 굳이 그 요리사를 불러 물었다. 그는 여전히 웃으며 답했다.


“쌀 종류는 고시히카리입니다. 쌀도 중요하지만 프로세스도 중요합니다. 씻기, 불리기, 물기 제거, 밥물 잡기, 불 세기, 뜸 들이기, 이 모든 게 딱 맞아떨어져야 합니다.”


그는 우문에 현답을 하듯 답했다. 맞는 말이었다. 세세한 노하우가 모여야 사람의 감각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결과물이 나온다. 나는 더 설명을 청하지 않았다. 대신 그 주먹밥을 묵묵히 씹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생각했다. 밥이란 무엇일까? 한국 식당과 일본 식당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밥맛이라고 한다. 일본 식당에 가면 밥맛 없는 곳이 드물다. 우리가 식사하는 것을 '밥' 먹는다라고 말하듯이 한국인의 식단에서 여전히 밥은 제일 중요하다. 영양소 측면에서는 주된 탄수화물 공급처이며, 맛의 구성에 있어서도 가장 기본이 된다. 그림으로 치자면 하얀 캔버스와 같다. 특별한 맛이 없는 듯 보이지만, 밥맛이 없으면 전체 그림이 제대로 나올 수가 없다. 그래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하려면 밥이 제일 중요하다. 그럼 어떤 쌀을 골라야 할까? 그것을 알기 위해선 쌀의 가공 방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쌀 겉면은 하얗다. 이유는 도정을 하면서 겉을 깎아내서 그렇다. 쌀 외피는 쌀 내부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그 외피를 깎아내는 순간부터 순수한 탄수화물에 가까운 '쌀'은 쉽게 산화된다. 오래된 쌀로 밥을 하면 맛이 산뜻하지 않고 쉰 맛이 나는 게 바로 그것 때문이다. 좋은 쌀을 고르기 위해서는 첫째, 도정일이 가까워야 하고, 둘째 부서진 쌀이 없는 완전미의 비율이 높아야 한다. 쌀이 부서져 있으면 속의 전분이 쉽게 빠져나와 밥을 지으면 입에서 풀어지지 않고 떡져서 식감이 떨어진다. 쌀의 품종도 중요하다. 사실 어떤 품종을 고르는가는 기호의 문제다. 그보다 ‘혼합미’라고 적힌 쌀을 고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품종의 구분 없이 종합미곡처리장에서 쌀을 섞어 가공했다는 뜻이다. 애초에 품종 따위 신경 쓰지 않는 과정을 거친 쌀이 좋기는 쉽지 않다. 이제 정말 밥을 지어보자.





요즘 나오는 전기밥솥은 첨단 과학의 산물이다. 굳이 가마솥 타령을 하지 않아도 가정에서는 차고 넘친다. 그보다는 밥을 짓는 과정이 중요하다. 쌀은 차가운 물에 세 번 정도 씻는다. 이때 너무 박박 씻으면 겉면에 상처가 나서 좋지 않다. 예전처럼 불순물이 섞이는 경우도 적어 혼신의 힘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 쌀은 한 시간 정도 불려서 쓰는 게 가장 좋다. 그보다 오래 불리는 것도 좋지 않다. 목욕을 오래 하면 피부가 불듯이, 쌀도 마찬가지다. 오래 놔두면 잘 익기야 하겠지만, 표면이 뭉개져서 밥의 식감이 좋지 않다. 드디어 밥물을 맞출 차례다. 밥물 맞추는 게 가장 어렵게 느껴지겠지만 불리지 않은 쌀은 1:1.2, 불린 쌀은 1:1로 밥물을 맞추면 실패하는 법이 없다. 이것은 손맛이 아니라 화학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화학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어떤 레시피를 보면 밥을 지을 때 소금을 넣거나 물 대신 육수를 쓰기도 한다. 분명히 소금을 넣거나 다시 국물을 쓰면 맛이 달라진다. 특히 소금을 넣게 되면 쓴맛이 덜해지고 잡맛을 제거해준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인도 쌀의 경우에는 소금을 넣는 레시피가 많다. 그 이유는 한국 쌀보다 기름기가 훨씬 적기 때문에 밥이 심심하게 느껴지기 쉽기 때문이다. 뜸을 들일 때 코코넛 밀크를 섞는 레시피가 많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 중에서 밥을 맛있게 먹는 방법 하나만을 말하라고 한다면 답이 있다. 바로 그때그때 밥을 짓는 것이다. 식당 밥이 맛없는 이유는 쌀이 너무 익어서 그런 것이다. 식은 밥을 낼 순 없으니 밥을 보온기에 넣어두는데 그 열에 밥은 계속 익는다. 그 시간 동안 신선함과 윤기, 수분은 사라지고 찰기만 남아서 마치 군내 나는 떡이 되고 만다. 무엇보다 갓 지은 밥의 향기가 사라진다. 쌀이 아무리 좋지 않아도 그때 그때 밥을 짓는다면 최소한 몇 시간 지은 밥보다는 맛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뜸을 들이고 밥이 완성되면 바로 밥을 잘 섞어주자. 밥 속에 갇혀 있던 여분의 수증기가 밖으로 나와 밥이 뭉치는 것을 막는다. 이것으로 밥 짓기는 끝이 난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은 아니다. 우리가 전기밥솥 스위치 한번 누르고 마는 그 행위 속에 무수한 디테일이 숨어 있다. 일본에서는 밥을 제대로 지을 때 쌀을 100번 씻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쌀에 붙은 전분기를 확실히 제거한다. 그래야 쌀알과 쌀알이 붙지 않고 낱알이 살아 있다. 솥 위에 엄청난 무게를 더해 압력을 높이기도 한다. 그러려면 깨진 쌀알이 없는 완전미여야 한다. 그러지 않을 때 오히려 전분이 쉽게 새어 나와 밥 전체를 망치게 된다. 계절에 따른 쌀알의 건조 정도도 밥물 잡기에 영향을 미친다. 이 모든 조건, 레시피와 조리 예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디테일이 합쳐졌을 때, 우리는 밥 한 숟가락에 눈을 뜨고 기뻐하게 된다. 깊이 알면 알수록, 몰입할수록,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하얀 쌀밥, 우리가 삼시 세끼 먹는 그 밥에도 깊고 넓은 신비가 담겨 있다. 그래서 알면 알수록 입이 무거워진다. 알면 알수록 고개가 숙어진다. 알면 알수록 부끄러움이 많아진다. 이는 밥뿐만이 아닐 것이다.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 정동현 셰프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에서 '먹고(FOOD) 마시는(BEVERAGE)'일에 몰두하고 있는 셰프,
오늘도 지구촌의 핫한 먹거리를 맛보면서 혀를 단련 중!
저서로는 <셰프의 빨간 노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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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미식,편식:정동현의 三食일기
냉정과 열정으로 완성한 한 장의 레시피
정동현
#정동현


비 오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하루에 사계절을 모두 볼 수 있다는 멜버른이었다. 해가 떴다가 소나기가 내리고 심지어 우박이 떨어질 때도 있었다. 남극에서 올라오는 차가운 공기와 호주 대륙에서 내려오는 뜨거운 공기가 만나 기층이 불안정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직 점심이 되지 않은 오전, 눈을 비비고 일어나니 방안 공기가 눅눅하게 몸을 감싸 안았다. 두꺼운 이불 속에 몸을 말고 다시 눈을 감았다. 휴일이었다. 간밤 자정까지 일하고 기절하듯 누워 잔 것이 몇 시간 전이었다. 휴일 아침이니 더 잘 수 있다는 느긋한 희망과 잠으로 휴일을 보낼 수 없다는 아쉬움에 갈등했다.


몇 분 후 나는 애벌레가 고치에서 기어나오듯 느릿하게 침대 밖으로 나왔다. 목이 말랐다. 아래층 주방 냉장고 문을 열고 맥주를 꺼냈다. 다시 방에 와 침대에 하반신을 묻고 맥주를 마셨다. 탄산이 목구멍을 간지럽혔다. 차가운 기운이 내장을 훑고 알코올은 혈관을 타고 올라왔다. 살짝 올라오는 취기에 잠 기운이 가셨다. 멍하니 창 밖을 바라봤다. 창 밖으로 들려오는 소리, 그리고 살짝 비릿한 비 냄새를 맡았다. 해가 높게 뜬 날에는 있는 것조차 몰랐던 내 마음은 비가 오면 그 존재를 알리는 양 잔잔히 흔들렸다.


비가 오면 이 시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시를 읽으면 간밤의 뜨거운 순간이 다 헛것 같았다. 악다구니를 쓰며 팬을 돌리고 얼굴 위로 흐르는 땀을 훔쳐가며 지낸 밤, 날아오는 총알처럼 무수히 쏟아지던 주문을 쳐내며 허둥대던 시간이 가고, 패잔병처럼 텅 빈 주방 구석에 앉아 차가운 맥주를 마시며 몸을 식히던 자정 언저리의 풍경. 그 모든 것이 몇 시간 전이건만 가만히 침대 위에 앉아 빗소리를 들으면 다 꿈만 같았다. 그렇게 흔들리던 마음을 바라보다 정신이 드는 것은 얼마간 후였다.


침대 맡에 둔 요리책을 들어올려 무릎 위에 올리고 책장을 넘겼다. 그 종이 위에는 전쟁의 기록들이 냉정한 숫자로 기록되어 있었다. 나는 g(그램)으로 대표되는 중량이 아니라 한 스푼, 한 컵과 같은 부피로 계량을 한 요리책을 싫어한다. 아예 사지를 않는다. 왜냐하면 부피로 계량을 한 레시피는 부정확하기 때문이다. 밀가루 한 컵을 계량하더라도 수분과 밀도에 따라 약 1.5배까지 무게 차이가 날 수 있다. 그럼에도 부피 계량을 여전히 많은 요리책에서 쓰는 까닭은 오래된 습관일 뿐이요, 게으른 타성일 뿐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1g까지도 정확하게 파고드는 집요한 레시피였다. 내가 또 싫어하는 말 중 하나는 요리는 손맛이란 격언 아닌 격언이다. 한식은 계량할 수 없다며 손맛이 중요하다고 외치는 구호를 들을 때마다 측정하지 않고 기록하지 않는 게으름을 합리화 하는 행태에 당혹감을 느낀다. 모든 요리는 화학이고 물리학이다. 열 에너지와 운동 에너지가 결합되고 그것이 각 분자의 물성과 시간의 변화에 맞춰 작용할 때 우리가 지각하는 맛과 향이 나온다. 과학은 측정할 수 있다. 이 말인즉슨 모든 조리법 역시 계량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애매모호한 부피 계량과 조리법이 적힌 요리책을 덮었다. 그리고 측정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세세하게 적어놓은 요리책을 찾아 펼쳤다.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매일 요리를 하는 주방은 레시피를 검증하기 좋은 무대다. 모든 요리책이 정확한 레시피를 적어놓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 레시피가 부정확할 때가 많다. 그 레시피를 믿고 조리를 하다보면 어느 순간 표정이 일그러진다. 모든 조건을 정확하게 맞춰도 맛이 제대로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럴 땐 시간과 노력을 쓰레기통에 버리게 된다. 잘못된 지도를 펼쳐든 셈이다. 셰프들은 그 지도에 선을 죽죽 긋고 새롭게 측량하여 길을 낸다.


나는 누더기에 가까운 레시피 한 장을 볼 때마다 선조의 오랜 유물을 보는 것 같이 감상에 빠질 때가 잦았다. 1g의 차이를 기록하고 1분의 간극을 조정하며 만들어낸 레시피는 집념의 산물이요 지극한 정성으로 쓰인 연애편지 같았다. 누군가 적어내린 요리에 대한 연애편지를 읽으며 나는 오래전 처음 칼을 잡았을 때를 떠올렸다.


해군 이등병 시절, 주방에 일손이 달려 칼을 처음 잡았다. 예리한 칼날이 손등에서 1mm 간격을 두고 위 아래를 오고갔다. 초짜 북재비가 북을 치듯 엉성한 리듬에 비뚤비뚤한 간격으로 도마를 내리치던 시간은 잠깐이었다.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용기를 내면, 그제서야 칼은 주인을 만난 듯 시원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심장이 두근 거렸다. 전진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내 몸이 악기가 된 것처럼 즐거운 소리가 들렸다.





그날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빨리 다음 날이 오기를 기도했다. 아침부터 나는 칼 주변을 서성거렸다. 주방의 모든 일에 먼저 달려들었다. 그러다보면 칼은 내 차지였다. 밤이 되면 잠을 자지 않고 주방 구석 작은 의자에 앉았다. 조리 하사가 보던 요리책을 펼쳤다. 지난 낮의 순간이 요리책에 담겨 있었다. 재료를 손질하고 칼로 썰고 몇 g(그램)의 조미료를 넣고 몇 분간 끓이고 볶는다는 문장 속에 잘 벼린 칼날과 뜨거운 불길이 녹아 있었다. 그이는 그 한장의 레시피를 완성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들여 기록하고 다듬었을 것이다. 나는 홀로 그이가 보낸 시간에 조용히 감탄하고 감사했다.


비오는 소리에 맞춰 책장을 넘기길 몇 시간이었다. 마지막 책장을 덮었을 때 문득 방 안이 환해져 있음을 깨달았다. 그새 비가 그쳐 해가 떠 있었다. 멜버른의 날씨다웠다. 나는 그제야 침대 밖으로 나와 주방으로 내려갔다. 냉장고에서 먹다 남은 재료를 꺼내 별 것 없는 파스타를 만들었다. 홀로 앉아 파스타를 깨작이며 창문 너머를 보면 새파랗게 푸른 하늘을 배경에 비현실적으로 풍성한 구름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나는 찬란하게 밝은 멜버른의 오후를 좋아했다. 휴일 오후 멜버른의 맛있는 커피를 마시며 망중한을 즐기는 것은 사치스러운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밝음을 피해 어두운 주방으로 도망가고 싶었다. 반쯤 미친 사람들이 칼과 냄비를 붙잡고 서서 허리를 굽히고 하루를 보내는 지옥 같은 그곳은 어떤 거짓말도 없는 순수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비가 오기를 바랐다. 빗소리를 들으며 거두지 않고 바라지 않는 사랑을 노래하는 시를 생각하고, 숫자와 건조한 지시어로 쓰인 요리책 보는 시간을 나는 사랑했다. 차분히 쌓아올린 숫자 더미, 그 속에 담긴 시간과 땀, 그것은 시끄러운 구호가 아닌 조용한 열정이었다.


회색빛 사무실 구석에 앉아 있는 지금, 나는 빗소리를 들으며 요리책을 보던 그 시절처럼 오전 적막한 가운데 들리는 키보드 소리에 마음이 뭉클해질 때가 있다. 누군가는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그 숫자, 단어 하나 하나, 가득히 쌓인 A4 종이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실히 쌓아올린 하루하루가 무엇보다 진실된 것이 아닌가. 쉽게 이야기 하고 쉽게 강요하는 그 열정은 잔잔히 들리는 키보드 소리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