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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한국에도 괴물이?! 한국 괴물의 역사
김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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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본 ‘괴물’의 사전적 의미입니다. 흔히 괴물이라고 하면 사람도 아니고 동물도 아닌, 말 그대로 괴상하게 생긴, 그러면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를 떠올리게 되죠. 영화에서 이미 숱하게 보아온 괴물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세요. 작게는 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작은 괴물부터 크게는 인류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거대 괴수까지 긴 역사 속에서 인간은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괴물들을 지어내고 또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괴물이 아니라 물괴(物怪)라고?


영화 <물괴> 포스터


본 영화는 조선왕조실록 중종 22년에 실린 본문을 바탕으로 창작된 작품임을 알려드립니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물괴> 보셨습니까.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이런 자막이 나옵니다.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근거해서 만들었다는 거죠. 괴수 영화와 사극을 융합한 새로운 장르의 탄생을 기대했지만 안타깝게도 영화는 처참한 실패로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주목을 받았던 건 우리 역사에 남아 있는 우리 괴물을 소재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실록에는 도대체 뭐라고 적혀 있을까요?


밤에 개 같은 짐승이 문소전(文昭殿) 뒤에서 나와 앞 묘전(廟殿)으로 향하는 것을, 전복(殿僕)이 괴이하게 여겨 쫓으니 서쪽 담을 넘어 달아났다. 명하여 몰아서 찾게 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


≪중종실록≫ 1511년 5월 9일 기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밤에, 개처럼 보이는 짐승이, 궁궐에 나타났기에, 쫓아갔더니, 달아나서, 찾아봤지만, 못 찾았다는 겁니다. 이 정체 모를 짐승이 개와 비슷하다며 수류견(獸類犬)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짐승은 16년 뒤에 또 나타납니다.


간밤에 소라 부는 갑사(甲士) 한 명이 꿈에 가위눌려 기절하자, 동료들이 놀라 일어나 구료(救療)하느라 떠들썩했습니다. 그래서 제군(諸軍)이 일시에 일어나서 보았는데 생기기는 삽살개 같고 크기는 망아지 같은 것이 취라치(吹螺赤) 방에서 나와 서명문(西明門)으로 향해 달아났습니다. 그리고 서소위 부장(西所衛部長)의 첩보(牒報)에도 ‘군사들이 또한 그것을 보았는데, 충찬위청(忠贊衛廳) 모퉁이에서 큰 소리를 내며 서소위를 향하여 달려왔으므로 모두들 놀라 고함을 질렀다. 취라치 방에는 비린내가 풍기고 있었다.’ 라고 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물괴의 모습


≪중종실록≫ 1527년 6월 17일의 기록입니다. 궁궐에 다시 나타난 이 짐승을 생김새가 삽살개(厖狗) 같고 크기는 망아지(兒馬) 같다고 묘사해 놓았습니다. 달리면서 큰 소리를 냈고, 머물던 방에선 비린내가 풍겼다고도 했습니다. 병사들조차 벌벌 떨 정도였다니 이 낯선 존재가 주는 공포감이 얼마나 컸는지 알 만하죠? 이 괴이한 짐승에 대한 흉흉한 이야기가 궐 밖까지 일파만파 퍼져나가면서 조정에선 대책 마련에 분주합니다. 꿈에 가위눌린 일을 가지고 경거망동하지 말라! 함부로 떠드는 자가 있으면 엄벌에 처하리라! 6월 25일의 기록은 계속됩니다.


삼가 살피건대 근일 궐내에서 숙직하던 군사가 괴물(怪物)이 있다는 헛소리를 전하자, 한 사람이 부르면 백 사람이 부동하듯이 휩쓸렸습니다. 그래서 심한 자는 놀래 나자빠지기도 하는 등 와언(訛言)이 마구 전파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미혹되는 것은 괴이할 것이 없지만, 유식한 자들 또한 덩달아 날조하여 요설(妖說)을 부연(敷衍), 혹은 형적이 있다고도 하고 혹은 소리와 냄새가 났다고도 하니, 근거 없는 괴설(怪說)이 어쩌면 이렇게 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 난리법석을 야기한 최초 괴담 유포자를 잡아다가 처벌해야 민심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임금에게 호소하죠. 바로 여기에서 마침내 영화 제목으로 쓰인 물괴(物怪)란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어지는 실록의 내용을 보면 그 당시 민심이 얼마나 흉흉했는지 잘 알 수 있는데요. 심지어 임금은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잠시 창덕궁에 가 있겠다고 말합니다. 신하들은 극구 만류하지만, 임금은 끝끝내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좌) 영화의 물괴 글씨 (우) 실록의 물괴 글씨
옥에 티. 영화에 등장하는 실록의 기록 장면을 보면 물괴의 괴를 ‘怪’로 쓰고 있지만, 실록에는 같은 뜻과 음을 지닌 ‘恠’로 적혀 있습니다.


괴담은 시절이 어지럽다는 증거입니다. 반대로 혼란스러운 시대가 괴담을 만들어내기도 하고요. 중종 연간은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답지 못했던, 한 마디로 나라가 나라답지 못했던 극도의 혼란기였습니다. 물괴, 다시 말해 괴물은 그런 어지러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불안감과 두려움이 응어리진 하나의 ‘상징’이었던 겁니다. 여러모로 영화의 소재로 딱 그만이죠. 영화가 덧없는 실패로 끝나고 만 것이 생각할수록 아쉽기만 합니다.



어느 SF 작가의 ‘이유 있는’ 괴물 탐구


뜬금없이 웬 괴물 타령이냐고요? 제가 최근에 읽은 책 때문입니다. 제목이 무려 《한국 괴물 백과》랍니다. 이름난 SF 작가인 곽재식 씨가 무려 11년 동안 18세기 이전의 문헌에 기록된 괴상한 존재들을 샅샅이 조사해서 만든, 말 그대로 백과사전입니다. 돌이켜 보건대 일찍이 우리에게 이런 책이 있었던가요? 도대체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SF 작가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희한한 책을 썼을까요? 저자의 서문에 그 답이 있습니다.


곽재식 《한국 괴물 백과》(워크룸 프레스, 2018). 표지부터 뭔가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깁니다.


나는 괴물 백과사전 같은 자료가 그 문화권만의 특색 있는 이야기나 예술 작품을 만드는 데 무척 귀중한 바탕이라 생각해왔다.


이 한마디로 모든 것이 명쾌하게 설명됩니다. 쓸 만한 이야깃감을 찾기 위해 라는 거죠. 소재가 고갈된 할리우드 영화가 그리스 신화부터 심지어는 북유럽 신화까지 끌어들여 영화의 소재로 삼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신화가 그 모든 이야기의 ‘뿌리’이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우리 역사에서 우리는 어떤 이야깃거리들을 찾아낼 수 있을까. 이 고민에 대한 결과물이 바로 괴물 백과인 겁니다. 실제로 수류견(獸類犬)에 관한 기록은 영화 <물괴>를 탄생시킨 밑천이 된 거고요.


저자가 백과사전에 담은 한국의 괴물이 무려 282종이나 된답니다. 그저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치부해버리기엔 진지한 기록들이 많죠. 가령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엄청난 독서광이었던 청장관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앙엽기 盎葉記》에 ‘강철(强鐵)’이란 괴물 이야기가 나옵니다. 망아지 정도 크기에 얼굴은 사자나 용 같고 사납게 날뛰어 농가에 큰 피해를 끼친다는 괴물인데요. 얼마나 큰 피해를 끼쳤으면 ‘강철이 간 데는 가을도 봄’이란 속담이 있을 정도죠. 흥미로운 건 조선 시대도 아닌 20세기에 강철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신문에까지 실렸다는 사실입니다.


깡철의 마력 / 양산군 금산부락 앞 물 들판에는 홍수가 휘몰아치던 지난 3일 깡철이란 동물 두 마리가 나타나 가산과 가족을 잃은 이재민들은 깡철 구경에 한창 법석댔는데 깡철의 움직임에 따라 그 지대 수면이 약 5미터가량 높았다 얕았다 동요하더라…(동아일보, 1957년 8월 11일)


(좌) 강철 (우) 천록
이 책에는 일러스트 작가 이강훈의 그림이 하나하나 붙어 있어서 괴물들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읽는 재미가 남다릅니다.


천록(天祿)이라는 상상 속 동물도 있습니다. 강철과는 반대로 나쁜 사람만 골라 벌을 주는 ‘권선징악’의 존재로 묘사되죠. 크기는 작은 사슴 정도에 얼굴은 호랑이나 사자 같이 사납고 뿔이 하나 있으며 온몸이 비늘로 덮여 있다고 합니다. 한국에만 있는 강철과 달리 천록은 중국에서 유래한 것인데,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벽사(僻邪)의 의미 덕분에 궁궐 안에도 천록을 새긴 조각상이 남아 있습니다. 2017년 9월에 제가 <경복궁, 어디까지 가봤니?>라는 글을 통해서 자세하게 소개해 드린 적이 있는데요.



간단하게 내용을 정리해드리면, 광화문을 지나 경복궁 안으로 들어서면 흥례문이 보이죠? 이 문을 지나면 ‘영제교’ 또는 ‘금천교’라 불리는 다리가 하나 있습니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냇물이 금천(禁川)이고요. 다리 위에서 양 옆을 보면 돌짐승 네 마리가 물길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이 녀석들이 바로 천록(天鹿)입니다. 조선 태조 때 경복궁을 창건하면서부터 있었던 이 천록상들은 일제강점기에 다리가 철거되는 와중에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옛 모습 그대로 전해지고 있으니 보물 중의 보물이라 할 만하죠.



마음껏 괴물을 상상하라!


책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이 가슴 한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다는 희랑(希郞)입니다. 이 이야기 역시 제가 올해 1월에 <건국 1,100년 고려 예술의 정수를 엿보다>라는 글에서 소개해드린 바 있습니다. 바로 태조 왕건의 스승이었던 불교 승려 희랑대사(希朗大師)가 그 주인공입니다. 실제로 희랑대사상을 보면 가슴 한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흉승(穿胸僧, 가슴에 구멍이 뚫린 승려)이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하죠.


희랑대사상을 자세히 보면 가슴 한가운데 진짜로 구멍이 보입니다.



일일이 다 소개해드릴 순 없지만, 이 밖에도 재미난 이야기가 굉장히 많습니다. 이를테면 서양에만 있을 법한 인어(人魚)도 나오고, 흔하게는 도깨비나 구미호 이야기도 있고요. 말이 괴물이지 위에 소개한 희랑처럼 전혀 괴상하게 생기지 않은, 괴물 같지 않은 괴물도 많습니다. 중요한 건 이런 수많은 괴물 이야기가 돌고 돌아 이런저런 문헌에 기록돼서 오늘날까지 전한다는 점이겠죠.


그것이 사실인지 허구인지를 따지는 건 무의미합니다. 요는 흔히 말하는 콘텐츠죠. 알맹이 있는 이야기 말입니다. 괴물 백과를 탐독하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결국 이야기를 가진 자, 이야기를 만드는 자가 살아남는 법이라고. 이야기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힘이 아니겠느냐고. 그래서 그 풍부한 이야기들을 밑천 삼아 자유롭게 상상의 날개를 펼쳐보는 것, 생각만 해도 흥미진진합니다.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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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건국 1,100년 고려 예술의 정수를 엿보다
김 석

‘고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뭘까요? 누가 이렇게 묻는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전 세계에 코리아(Korea)라는 이름을 각인시켰다는 사실? 아니면 유교를 국가 경영의 근본이념으로 삼은 조선과 달리 불교국가였다는 점? 전 세계를 매혹시킨 고려청자의 나라? 외세의 침략 앞에서 각고의 노력으로 완성한 팔만대장경의 나라? 대답은 천차만별이겠지요. 솔직히 잘 모르겠다는 답이 가장 많지 않을까요. 시기로 보나 기록으로 보나 조선은 가깝고 고려는 멀었던 것이 현실이니까요. 


고려가 건국한지 올해로 꼭 1,100년이랍니다. 따져보니 태조 왕건이 나라를 세운 것이 918년이었습니다. 혹시 이 시기를 다룬 추억의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 기억하시나요? 저도 굉장히 열심히 본 기억이 납니다. 기록을 들춰보니 이 드라마가 남긴 자취들이 참으로 놀랍더군요. 2000년 4월부터 2002년 2월까지 무려 200편이 방송됐습니다. 역사 드라마 최장기 방송 기록이었지요. 게다가 시청률 60%를 돌파한 마지막 드라마란 기록까지 남겼습니다. ‘전설 같은 시대’를 다룬 ‘전설 같은 드라마’였던 겁니다. 


방영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모은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


드라마까지 들먹이며 새삼스레 그 시대를 들추는 까닭이 있습니다. 고려 건국 1,100주년을 맞아 국립중앙박물관이 마련한 특별전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 때문이에요. 상당히 멀게만 느껴지던 고려시대를 딱딱한 역사책이 아닌 박물관 전시실에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온 겁니다. 게다가 전시를 앞두고 과연 북한이 자기네 국보인 <고려 태조상>을 보내올 것이냐 말 것이냐 비상한 관심이 쏠리기도 했지요. 남과 북이 유물을 교환 전시한 사례는 전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는 뭔가 될 것 같은 기대감이 더 컸던 게 사실입니다. 



 보고도 믿기 힘든 극사실주의 조각 


처음 이 조각상을 본 순간, 차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세상에나,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거든요. 저 눈동자는 대체 뭐란 말인가. 코며 입이며 귀도 그렇지만, 입가와 미간과 이마의 잔주름까지 어쩌면 저리도 생생하게 살아있을 수 있는가. 현대 조각품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극사실적인 표현이 자못 섬뜩함마저 느끼게 합니다. 솔직히 가짜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어요. 우리 미술사에 이런 조각상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심지어 교과서에서조차 본 일이 없었으니까요. 


<희랑대사상 乾漆希朗大師坐像>, 고려 10세기, 건칠과 나무에 채색, 높이 82.4cm, 합천 해인사, 보물 제999호 


이 조각상의 주인공은 고려 건국 시기에 유명했던 승려 희랑대사(希朗大師)입니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을 막후에서 도왔고, 건국 이후에는 왕의 스승이 된 인물이었다고 하지요. 합천 해인사를 근거로 화엄종을 크게 일으킨 고승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었으니 그 모습을 조각으로 새겨 후대에 남겼겠지요. <희랑대사상>은 10세기 중반 조각 분야 최고 걸작이자, 국내 유일의 고승 초상 조각으로 평가됩니다. 나무를 깎아 만든 조각품이 그 오랜 세월 동안 이토록 온전하게 보존돼 왔다는 사실 자체도 놀라울 뿐입니다. 


그래서 천 년도 넘은 조각상이란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더군요. 그런 스님이 천 년 세월 동안 가야산 해인사에 기거하다 이번에 처음 절 밖으로 나들이를 했습니다. 이것 자체만도 엄청난 사건이에요. 만약 북에서 태조 왕건의 조각상이 내려와 둘의 극적인 만남이 성사됐다면 “스승과 제자, 천 년만의 해후”가 됐을 겁니다. 두 분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시라고 박물관에서 미리 널찍하고 조용한 공간까지 마련해 놓았더군요. 전시 기간이 아직 넉넉하니 기적 같은 만남이 성사될지 혹시 또 모를 일입니다. 


  

<고려 태조상 高麗太祖像>, 고려, 개성시 해선리 현릉, 높이 138.3cm, 조선중앙역사박물관, 북한 국보 



 국내에 있어도 보기 힘든 희대의 유물들 


<희랑대사상>과 같은 귀한 유물은 국내에서도 참 보기가 어렵지요. 웬만한 규모의 박물관급 전시가 아니면 사실 평생에 한 번 만나기도 힘듭니다. 고려 건국 1,100년이란 확실한 계기가 아니었다면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을 유물들을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다는 건 굉장한 행운이에요. 전문가가 아닌 다음에야, 아니 전문가라 할지라도 전시장에 있는 모든 유물을 속속들이 보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애써 본들 그 많은 유물이 전부 각별한 감동을 주거나 기억에 남는 것도 아니고요. 골라보기가 필요한 이유이지요. 


 

(1) <장곡사 금동약사불좌상 長谷寺 金銅藥師佛坐像>, 고려 1346년, 금동, 높이 88.0cm, 청양 장곡사, 보물 제337호

(2) <대승사 금동아미타불좌상 大乘寺 金銅阿彌陀佛坐像>, 고려 14세기, 금동, 높이 87.5cm, 문경 대승사, 보물 제1634호


이 불상을 한 번 보세요. 박물관과 사찰을 드나들면서 숱하게 많은 불상을 봐왔지만, 이렇게 잘 생긴 불상은 좀처럼 만나기 어렵습니다. 저만 그런가 싶어 주변에 물어보니 전시회에 다녀온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 불상에 유독 끌리더라고 하더군요. ‘고려의 대표 미남’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는 반응들이었지요. 충남 청양군 칠갑산에 있는 사찰 장곡사(長谷寺)에 있는 이 불상은 난생 처음 절 바깥에 나온 귀한 유물입니다. 나란히 전시된 또 다른 보물 <대승사 금동아미타불좌상> 역시 처음으로 절 밖에 나와 전시되는 불상이에요.  


 

(1) <안향초상>, 전(傳) 이불해, 조선 16세기 중엽, 비단에 색, 88.8×53.3cm, 안동 소수서원, 국보 제111호

(2) <이색초상>, 작가미상, 조선 18세기, 비단에 색, 28.2×24.8cm, 기탁1157 한산이씨대종회, 보물 제1215호


여기 초상화 두 점이 있습니다. 왼쪽은 원나라에서 이 땅에 주자성리학을 최초로 들여온 안향(安珦, 1243~1306), 오른쪽은 고려 말의 대학자로 정몽주와 정도전 등의 스승이기도 했던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입니다. 두 초상화 모두 조선시대 작품이긴 합니다만 고려시대 인물 초상화로는 워낙 희귀한 그림들이어서 나란히 국보와 보물로 지정돼 있지요. 전시장 후반부에 단연 두드러지는 이 초상화들 역시 이만한 규모의 대형 전시가 아니면 만나기 힘든 귀한 작품들입니다. 


어떤 유물이 오래 보존되고 않고를 좌우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재료’입니다. 돌이나 금속으로 만들어진 유물은 잘 변하지 않기 때문에 멀게는 구석기 시대 물건까지도 온전하게 남아 전하는 것들이 많지요. 청자와 같은 도자기류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그림’이에요. 종이나 비단을 재료로 삼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오래 보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만 해도 임진왜란 이전 그림은 손에 꼽을 정도로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은 거고요. 그러니 더 앞선 고려시대의 그림은 더 말할 것도 없겠지요.  


<기마도강도 騎馬渡江圖>, 전(傳) 이제현, 고려 14세기 전반, 비단에 색, 28.7×38.5cm, 국립중앙박물관 


그래서 실은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라 해도 과언이 아닐 고려시대의 그림에 더 주목하게 되나 봅니다. 왼쪽 위는 고려 후기의 대학자인 익재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작품으로 전하는 그림입니다. 오른쪽 상단에 ‘익재’라는 글씨와 ‘이제현인’이란 도장이 찍혀 있지요. 눈 덮인 겨울에 말을 타고 강을 건너는 장면을 묘사했습니다. 먼저 건넌 두 사람이 일행을 돌아보는데, 뒤따른 이들은 어떻게 건너야 하나 고민이 꽤 많은 모양입니다. 비단이 많이 해지긴 했지만 이만한 상태로 전해지는 것만도 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엽기도 獵騎圖>, 전(傳) 공민왕, 고려 14세기(추정), 비단에 색, 25.0×22.2cm, 국립중앙박물관

(2) <출렵도 出獵圖>, 전(傳) 공민왕, 고려 14세기(추정), 비단에 색, 25.0×21.0cm, 국립중앙박물관


위의 세 그림은 모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인데요. 특히 왼쪽과 가운데는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었다는 고려 31대 임금 공민왕(恭愍王, 1330~1374)의 작품으로 전해집니다. 말 타고 사냥에 나선 모습을 역동적으로 포착한 그림이지요. 화풍도 크기도 비슷하다보니 연구자들은 같은 두루마리에서 따로따로 분리된 그림으로 보고 있습니다. 보존 상태는 썩 좋지 않지만 고려시대 그림이 워낙 희귀하다보니 존재 자체만으로도 귀하고 감사한 작품들입니다. 두 그림을 한데 묶어서 <천산대렵도 天山大獵圖>라 불러 왔지요. 


 

 

(1) <염소 羊圖>, 작가미상, 고려 14세기(추정), 비단에 색, 23.5×14.9cm, 국립중앙박물관

(2) <이양도 二羊圖>, 공민왕, 고려 14세기, 비단에 엷은 색, 22.0×15.7cm, 간송미술관


동물 그림을 유난히 좋아하는 제게 더 특별하게 다가온 작품입니다. 염소 네 마리를 털 한 올 한 올까지 세세하게 그려냈을 뿐 아니라, 위에 소개한 다른 그림들에 비해 보존 상태도 훨씬 좋습니다.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간송미술관에 이와 유사한 <이양도 二羊圖>란 그림이 남아 있습니다. 화풍과 크기가 비슷한 이 그림 역시 공민왕의 작품으로 전하고 있지요. 공민왕이 그렸건 아니건 간에 고려시대 것으로 여겨지는 이런 그림들을 전시장에서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가 결코 흔하지 않다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외국인도 극찬을 아끼지 않은 고려의 예술  


그런가 하면 멀리 바다를 건너와 잠시 고국 땅을 밟은 우리 유물들도 있습니다. 해외 유수의 박물관(미술관)에서 한국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는 귀한 존재들이지요. 일부러 해외까지 나가서 찾아가보지 않는 한 일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것들. 전시 기획자들이 어렵게 섭외해서 모셔왔으니만큼 더 관심을 가지고 눈여겨볼 수밖에요. 고려를 대표하는 3대 문화유산으로 흔히들 금속활자, 팔만대장경, 청자를 꼽습니다. 어떤 이는 청자, 불화, 사경을 들기도 하고요. 


굳이 세 가지로 국한할 이유는 없습니다만 저는 청자, 불화, 나전 이 세 가지에 주목합니다. 먼저 고려시대를 넘어 우리 역사를 대표하는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손꼽히는 고려청자입니다. 1123년에 고려를 다녀간 송나라의 사신 서긍(徐兢, 1091~1153)은 귀국한 이듬해에 보고서를 작성해 황제에게 바칩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宣和奉使高麗圖經》이란 이름의 이 보고서는 고려의 제도와 문물, 풍습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자료인데요. 이 책이 특히 더 유명해진 것은 바로 아래 구절 때문입니다. 


"고려인은 도기의 푸른 빛깔을 비색이라고 하는데, 요 몇 년 사이에 도기 만드는 솜씨와 빛깔이 더욱 좋아졌다."


저 유명한 ‘비색 청자’라는 말이 바로 여기서 나온 겁니다. 세상의 수많은 청자 가운데 오로지 고려의 청자의 저 신비롭기 그지없는 빛깔에만 허락된 ‘비색’이란 표현을 황제에게 바치는 공식 문서에 적어놓은 것이지요. 그런가 하면 일제강점기에 청자에 눈이 먼 일본인들은 고려시대 무덤을 마구잡이로 파헤쳐서 국보급 청자를 무더기로 약탈해갔습니다. 청자를 향한 일본인의 광적인 집착이 낳은 쓰라린 역사의 단면이죠. 하지만 분명한 건 일찍이 청자를 극찬한 것도, 청자에 집착한 것도 ‘외국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1) <청자 구름․학․구화무늬 피리 靑磁象嵌雲鶴菊花文笛>, 고려 13세기, 길이 36.5cm, 메트로폴리탄박물관

(2) <청자 동자모양 연적 靑磁童子形硯滴>, 고려 12세기, 높이 11.0cm,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실생활에서 쓰는 그릇 하나에도 예술혼을 불어넣은 고려 도공의 수준은 대체 어느 정도였을까요. 재미있는 건 청자 가운데 간혹 악기가 보인다는 겁니다. 대개는 장구가 흔한데 이번에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서 모셔온 물건은 특이하게도 피리입니다. 이걸 실제로 연주하려고 만들었을까요. 아니면 감상용일까요. 뭔가 자꾸만 상상을 하게 만드네요. 또 하나는 동자가 오리를 가만히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의 연적입니다. 손바닥에 쏙 들어올 만큼 작은 물건인데도 어쩌면 저토록 사랑스러운지. 국보니 보물이니 다 제쳐놓고 이것만 내내 바라보며 흐뭇했답니다.


 

(1) <나전 국화넝쿨무늬 경함 螺鈿菊唐草文經函>, 고려 13세기, 나무에 칠, 높이 25.5cm, 너비 47.4cm, 영국박물관

(2) <나전 대모 국화넝쿨무늬 합 螺鈿玳瑁菊唐草文三葉形盒>, 고려 12세기, 나무에 칠, 높이 4.1cm, 너비 10.2cm,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앞에서 소개한 송나라 사신 서긍이 홀딱 반한 게 하나 더 있습니다. 흔히 나전칠기라고 부르는 공예품이에요. 얇게 갈아서 만든 조개껍데기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오려서 장식하는 기법을 나전(螺鈿)이라고 하는데요. 청자와 마찬가지로 나전 역시 중국에서 건너왔겠지만, 고려 나전은 한중일 3국을 통틀어 최고 수준의 예술적 성취를 이뤘습니다. 위의 왼쪽에 있는 것은 나전으로 만든 경함(經函), 즉 불교 경전을 보관하던 상자입니다. 이 자랑스러운 보물은 영국박물관(흔히 대영박물관이라고 부르지요.) 소장품으로 이번 전시를 위해 먼 길을 날아왔습니다. 


오른쪽에 보이는 독특한 형태의 물건 역시 저 유명한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품입니다. 특이하게도 대모(玳瑁), 즉 바다거북의 등껍질을 장식 재료로 썼는데요. 너비 10센티미터에 불과한 작은 공간에 저리도 세밀하고 꼼꼼하게 재료를 갈고 깎아 붙였을 장인들의 솜씨에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눈썰미 좋은’ 송나라 사신 서긍도 이걸 놓치지 않았던 거고요. 


나전 일은 세밀하여 귀하다고 할 만하다.” 


 세밀가귀(細密可貴). 얼마나 절묘한 표현인가요. 나전을 비롯한 고려 예술의 핵심을 중국의 사신은 그토록 정확하게 꿰뚫어본 것이지요. 그래서 삼성미술관 리움이 2015년에 연 전시회에 바로 이 제목을 그대로 붙였고, 우리 미술의 ‘품격’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관람객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습니다. 이렇듯 예리한 안목을 지닌 한 외국인 덕분에 고려 예술은 그 시대에 이미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겁니다. 



“다음 생에는 부디 남자로 태어나게 하소서” 


하나하나 귀하고 아름다운 고려의 문화유산을 돌아보던 중에 뜻밖의 기록을 만났습니다. 1302년에 조성된 아미타불상 안에서 나온 복장물(腹藏物) 가운데 발원문(發願文)인데요. 불상을 만들려면 당연히 돈이 필요하겠지요?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십시일반 시주를 받아 불상 제작비를 충당합니다. 대신 시주한 이들의 이름과 소원을 적은 문서를 불상 안에 넣어주는 거고요. 개중에 거액을 시주한 이의 경우 별도로 격을 갖춘 발원문을 따로 써서 불상에 봉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1302년 아미타불상에서 나온 아래의 발원문이 바로 그 예입니다.


 

<주성미타복장입안발원문 鑄成彌陀腹藏入安發願文>, 고려 1302년, 종이에 먹, 44.6×103.7cm, 온양민속박물관 


꽤 긴 내용을 글씨도 가지런하게 정성껏 적어 내려간 이 발원문의 주인공은 ‘창녕군부인’이란 분이랍니다. 발원문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서원하건대 인간의 생을 잃지 않고 중국의 바른 집안에서 태어나되 남자의 몸을 얻게 해주소서.” 


세 가지를 빌었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게 해 달라, 중국에서 태어나게 해 달라, 남자로 태어나게 해 달라. 전체 발원문의 맥락 속에서 살펴야 하겠지만, 이 구절이 왠지 모르게 가슴을 때리더군요. 기왕 사람으로 태어날 거라면 중국에서 남자로 태어나게 해달라니…. 오죽했으면 이런 소원을 빌었을까요. 그런데 비슷한 소원을 빈 사람이 또 있습니다.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복장물> 중 발원문(白雲景閑發願文), 고려 1346년, 47.8×1,058cm, 청양 장곡사  


위의 사진은 앞에서 소개한 장곡사 불상에서 나온 발원문인데요. 가로 10미터가 넘는 비단에 천 명이 넘는 시주자의 이름과 소원이 빼곡하게 적혀 있습니다. 군데군데 소원을 적어 붙인 천 조각도 보이고요. 요즘으로 치면 포스트잇에 사연을 적어 붙인 거지요. 그 중에 작은 쪽지에서 이런 내용이 확인됩니다.


“태어나는 때마다 널리 중생을 일깨우고, 여자는 남자가 되게 하소서.” 


여기서도 남자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빌고 있습니다. 전시 기획자도 이게 특별하게 보였는지 유물 설명에 이렇게 적었더군요. 


화려하고 아름다운 유물들이 그득한 전시장을 돌아보는 내내 아득했습니다. 청자도 좋고, 불상도 불화도 다 좋은데 뭔가 결정적인 게 빠진 것만 같은 허전함. 고려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살았을까. 그 시대에 무엇을 고민했고, 무엇이 힘들었으며, 무엇을 바랐을까. 그러던 차에 고려 여인들이 적은 비슷한 내용의 소원이 마음에 와 닿더군요. 고려 사람의 생각과 일상을 엿볼 수 있는 작지만 소중한 기록. 이번 전시에서 인간적으로 가장 큰 울림을 준 장면이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가 옛 사람들이 남긴 발자취를 따라 더듬어보는 이유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