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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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북에서 온 현대 판화를 소개합니다!
김 석
#김석






“판에 새겨서 찍은 그림.” 판화(版?)의 사전적 의미입니다. 그런데 왜 뜬금없이 판화 얘기냐고요? 제가 이번에 소개해드릴 것이 바로 판화이기 때문이죠. 그것도 흔하게 볼 수 없는 북한 판화입니다. 북한에도 당연히 화가들이 있습니다. 북한에서 최고의 기량을 지닌 화가들을 모아놓은 단체가 바로 ‘만수대창작사’라는 곳인데요. 정기적으로 전람회를 열어 우수한 작품을 가려 시상도 합니다. 


2010년 북한 국가미술전람회 도록


공훈예술가 김봉주의 판화 작품 


얼마 전에 북한에 출장을 다녀온 한 후배가 북한에서 사왔다며 제법 구색을 갖춘 양장본 도록을 한 권 건네더군요. 2010년 북한의 국가미술전람회 도록이었습니다. 책을 펴낸 주체는 ‘만수대해외개발회사그룹’입니다. 이름만 보면 만수대창작사가 생산한 미술품의 해외 수출을 염두에 두고 만든 곳이 아닐까 싶더군요. 아무튼 도록을 넘기다 보니 북한 현대미술이 이 정도였나 싶어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그중에 판화가 어엿한 한 분야로 포함돼 있는 게 눈에 띄었지요. 



처음 대규모 공개되는 북한 현대 판화 

하지만 이런 작품을 직접 볼 기회가 없으니 그저 답답할 뿐이었죠. 더군다나 남북이 평화의 큰 길로 나아가는 시대에 말이에요. 그러던 차에 국내에서 북한 현대 판화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간헐적으로 북한 판화 작품이 국내에 소개된 적은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번처럼 100점이 넘는 북한의 현대 판화가 공식적으로 우리 미술관에서 관람객들에게 선보이는 건 처음입니다. 


홍춘웅 <백두의 봄>(2011) 


백두산의 봄을 그린 판화 작품입니다. 화면을 분할해 보면 맨 아래 들판에 진달래가 여기저기 피었고, 그 위로 초록빛을 한껏 머금은 자작나무 숲이 펼쳐집니다. 그 배경에 멀리 산자락은 파란색으로 물들었고, 그보다 더 멀리로 보이는 눈 덮인 봉우리가 푸른 하늘과 이마를 맞대고 있습니다. 이념과 무관하게 자연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이런 작품, 참 좋죠? 



 

1. 김영광 <총석정의 저녁>(2011) 

 2. 김도선 <해금강의 파도>(2008) 


그리운 ‘금강산’을 그린 작품도 눈길을 붙듭니다. 해질녘의 총석정과 해금강을 아련한 색으로 표현해 놓았습니다. 하늘도 바다도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드는 시간.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와 자유롭게 비상하는 갈매기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습니다. 저는 한창 남북이 화해 무드였던 2007년 한 해에만 네 차례나 금강산을 다녀오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해금강의 낙조를 본 적은 없었죠. 언젠가 다시 금강산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면 저 멋진 낙조를 꼭 보고 와야겠습니다. 



판화로 보는 북녘 사람들의 생활상 


1. 류상혁 <명절날의 민속거리>(2008)

2. 황보신 <추석날>(2013) 


이번에 선보이는 북한 판화를 몇 가지 주제로 구분해볼 수 있습니다. 먼저 위에 소개해드린 것처럼 자연이나 역사 유적을 묘사한 일련의 작품들이 있지요. 하지만 이보다 더욱더 흥미를 자아내는 건 북한 사람들의 일상을 묘사한 그림들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명절을 쇠는 북한 주민들의 모습을 그린 <명절날의 민속거리>와 <추석날>입니다. 명절이 되면 야외로 나들이 나가 흥겨운 민속놀이도 즐기고, 온 가족이 모여 떡을 만들어 나눠 먹는 정경입니다. 북한의 요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명절이 주는 풍성함과 행복감은 북한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진 않겠지요. 


길은경 <일요일의 하루>(2010)


같은 맥락에서 북한의 휴일 풍경을 묘사한 작품들도 꽤 흥미롭습니다. <일요일의 하루>라는 제목의 판화를 한 번 보세요. 대동강변인지 어딘지는 몰라도 강가에 낚시꾼들이 그득하죠. 우리의 휴일 풍경과 다를 게 없습니다. 북한 사회가 우리의 고정관념과 달리 꽤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최근 북한에서 공개하는 여러 영상에서 여실히 확인됩니다. 진짜 저럴까 싶을 정도로 휴일이면 놀이공원이나 식당이 온통 손님들로 북적거리는 모습은 우리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니까요. 


1. 김옥선 <탈곡장에서>(1999)

2. 인성진 <사랑을 싣고>(2016) 


북한 사람들의 일상과 생활상을 보여주는 이런 작품과 달리 노동의 가치를 강조하는 다분히 선전적 성격의 작품들도 보입니다. 대규모 건설 현장을 묘사한 작품들도 같은 맥락이에요. 힘들고 괴롭고 찌푸리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죠. 이런 점은 대단히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예술이 순수하게 예술로서 존재할 수 없는 북한 사회의 특수한 조건이 반영된 것이죠. 그걸 감안하면서 작품을 해석하고 감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1. 김영호 <북부철길건설장> 

2. 황병균 <건설장의 야경>(2014) 



“남녘의 판화도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기를” 

 근래 보기 드물게 북한의 미술 작품, 그것도 엔간해선 접하기 힘든 북한의 현대 판화를 직접 볼 수 있는 이 전시회는 1년여 동안 치밀하게 준비한 끝에 성사됐다고 합니다. 사실 정치와 외교 무대의 담판이 물론 중요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민간 차원의 남북 교류는 앞으로 더욱더 활성화돼야 합니다. 앞장서서 전시를 준비한 판화가 김준권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남녘의 판화도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빨리 오기를 기대한다. 판화작품을 통해 서로의 생각도 읽어보고, 그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귀한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이번 전시를 통해 그동안 단절됐던 남북한 판화문화 환경의 상호이해를 도모하는 출발점이 되었으면 한다.”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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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임진왜란 때 원숭이 기병대가 있었다고?
김 석


지난 6월의 어느 날이었지요. 습관처럼 뉴스를 뒤적거리다 퍽 흥미로운 기사 한 편을 만났습니다. 한 일간신문이 6월 13일 자로 <임진왜란 때 왜적 혼 빼놓은 ‘원숭이 기병대’ 실제 있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이야기일까요. 제목만 딱 보면 황당하기도 하고 솔깃하기도 하죠. 기사를 읽어봤더니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기사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의 《택리지 擇里志》를 번역하던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책의 여러 이본(異本)을 비교 조사하는 과정에서 임진왜란 당시에 ‘원숭이 부대’가 실제 전투에서 활약했다는 기록이 거의 빠짐없이 수록됐을 뿐 아니라 내용에도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택리지》에 등장하는 원숭이 부대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이 쓴 인문지리서 《택리지》



“(명나라 장수) 양호는 (중략) 중무장한 기병 4,000명과 교란용 원숭이(弄猿) 기병 수백 마리를 이끌고 가서 소사하 다리 아래 들판이 끝나는 곳에 매복하게 하였다. 왜군이 숲처럼 빽빽한 대오를 이루어 직산으로부터 북상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거리가 100여 보가 되기 직전에 먼저 교란용 원숭이를 풀어놓았다. 원숭이는 말을 타고 채찍을 잡고서 말에 채찍을 가해서 적진으로 돌진하였다.


(왜군들은) 원숭이를 처음으로 보게 되자 사람인 듯 하면서도 사람이 아닌지라 모두 의아해하고 괴이하게 여겨 발을 멈추고 쳐다만 보았다. 적진에 바짝 다가서자 원숭이는 말에서 내려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왜적들은 원숭이를 사로잡거나 때려잡으려 하였으나 원숭이는 몸을 숨기고 도망 다니기를 잘해서 진영을 꿰뚫고 지나갔다.”



이 장면은 평양전투, 행주산성전투와 더불어 임진왜란 당시 육상에서 거둔 3대첩의 하나로 꼽히는 ‘소사전투’를 묘사한 대목인데요. 소사(素沙)는 지금의 충남 천안 일대입니다. 소사전투는 1597년의 일이고, 그로부터 150여 년이 흐른 뒤에 이중환은 《택리지》를 저술하면서 ‘팔도론․충청도’ 항목에 이 기록을 남깁니다. 할리우드 영화 <혹성탈출>의 한 장면이 실제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놀랍고도 흥미로운 대목이지요.


위 기록이 알려주는 사실들을 다시 정리해 봅니다. ① 전투 초기에 적진을 교란하기 위해 원숭이를 투입했다. ② 원숭이가 사람처럼 말을 탈 줄 알았다. ③ 사람인 것 같았지만 사람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당시 원숭이 기병대가 실제 전투에 투입돼 쏠쏠한 활약을 했다는 겁니다. 그냥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치부하기에는 묘사가 꽤 구체적이고 생생하죠? 진짜일까요? 만약 이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실로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겠지요?



소사전투에서 활약한 원숭이 기병대의 실체


이 대목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 안대회 교수는 원숭이 부대에 관한 다른 기록들을 찾아내 논문을 씁니다. <소사전투에서 활약한 원숭이 기병대의 실체>란 제목의 논문은 《역사비평》 2018년 가을 호에 수록됩니다. 궁금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이번엔 논문을 찾아 읽었습니다. 안대회 교수가 찾아낸 기록 몇 가지가 있더군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의 <경리 양호 치제문(楊經理鎬致祭文)>. 명나라 장수 양호의 죽음을 애도한 글인데, 여기에 이런 구절이 있답니다.



弄猿三百 농원 삼백이

一時鞭馬 한꺼번에 말을 달렸지.

狡彼倭奴 저 교활한 왜적들을

悉殲蹄間 모조리 말굽 아래서 섬멸했네.



이 짧은 구절에 새로운 사실이 등장합니다. 교란용 원숭이가 ‘3백’이었다고 써놓았습니다. 연암은 대체 뭘 근거로 이렇게 쓴 걸까요. 틀림없이 뭔가를 보고 썼을 텐데요. 하지만 안대회 교수도 그 정확한 근거까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자료가 더 없나 여기저기 찾아보다가 원숭이 부대에 관한 또 다른 기록을 발견하지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의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이런 내용이 보입니다.



“왜적을 베어 죽일 때 군사들이 모두 붉은 옷이나 비단옷을 입고 등에는 원숭이 한 마리를 업었다. 원숭이는 채찍을 휘둘러 말을 내달렸다. (중략) 원숭이가 좌충우돌하니 왜적이 처음 보고서 놀라고 혼란스러워 완전히 패하여 남은 이가 없었으니 원숭이 또한 전공을 세웠다고 하겠다.”



위에서 본 내용과는 조금 다릅니다. 말을 탄 병사가 등에 원숭이를 업었고, 그 원숭이가 채찍으로 말을 몰았다는 겁니다. 원숭이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부분은 앞에서 소개한 기록과 일치하고요. 이것 말고도 안대회 교수가 찾아낸 또 다른 기록이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무인이자 의병장으로 활약한 조경남(趙慶男, 1570~1641)이 쓴 《난중잡록(亂中雜錄)》은 임진왜란에 관한 한 가장 자세한 기록물로 평가되는데요. 이 책에는 조경남이 사명대사 유정(劉綎, 1544~1610)의 부대를 직접 목격하고 쓴 흥미로운 대목이 나옵니다.



“초원(楚猿) 4마리가 있어 말을 타고 다루는 솜씨가 사람과 같았다. 몸뚱이는 큰 고양이를 닮았다.”



사람이라면 굳이 ‘사람과 같았다.’고 표현할 까닭이 있었을까요. 게다가 ‘큰 고양이를 닮았다.’고까지 했습니다. 안대회 교수에 따르면, 유정의 부대에 원숭이가 있었다는 기록은 임진왜란 당시 신녕현감으로 전투에도 참가한 손기양(孫起陽, 1559~1617)이란 분의 일기에도 살짝 등장합니다.



“원숭이는 능히 적진으로 돌진할 수 있고…”



하지만 안대회 교수로 하여금 원숭이 부대가 실제로 있었음을 믿게 해준 결정적인 기록은 따로 있었습니다. 경상북도 안동에 터를 잡고 살아온 풍산김씨 문중에 대대로 전해오는 화첩, 그러니까 그림 모음집 안에서 원숭이 기병대를 묘사한 그림이 있다는 것이었죠. 《세전서화첩(世傳書畫帖)》이라 불리는 이 화첩에는 그림 32점이 실려 있는데요. 이 가운데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란 제목의 그림 2점 가운데 한 점을 주목해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천조장사전별도>에 그려진 원숭이 병사?


풍산김씨 가문에 대대로 전해오는 《세전서화첩》에 수록된 <천조장사전별도>



이 귀중한 화첩이 2012년에 번역 출간됐더군요. 궁금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화첩을 구해다가 문제의 그림을 직접 확인해보았습니다. 그림의 내용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명나라 원군을 전송하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그림에 붙은 설명을 보면 당시 풍산김씨 문중의 김대현(金大賢, 1553~1602)이란 분이 명나라 부대를 여러모로 살뜰하게 챙긴 모양입니다. 명나라 장수가 조선을 떠나면서 특별히 김대현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하지요.



“지난 두 해 동안 힘든 일을 겪으면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돌보아 준 것을 참으로 잊을 수 없다. 지금 서로 이별하게 되니 그동안의 감회가 구름처럼 떠오른다. 귀국의 유명 화가인 김수운(金守雲)이 그린 전별도를 길이 기념할 수 있도록 그대에게 주겠다.”고 하면서 그림을 건네주었다.



밑줄 친 부분에서 이 그림을 그린 화가가 조선의 김수운이란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화첩의 그림이 그때 그 그림은 아닐 개연성이 크지요. 명색이 조선의 유명 화가가 이 정도 수준의 그림을 그렸으리라곤 생각하기 어려우니까요. 김수운이 그렸다는 원본이 남아 있지 않으니, <천조장사전별도>는 후대의 화가가 상상력을 발휘해 다시 그린 것으로밖엔 볼 수 없습니다.



<천조장사전별도>에 그려진 포르투갈 출신의 용병 해귀(海鬼)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이 그림의 왼쪽 아래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퀴 달린 수레에 아주 이국적인 외모의 병사 네 명이 타고 있지요. 다른 병사들을 묘사한 것과 비교하면 몸집이 훨씬 큰 데다 피부색은 까무잡잡하고 머리털은 붉은 색으로 그려졌습니다. 가운데 삐죽 솟아나온 병사의 머리 오른쪽 위로 글자가 보이지요? 해귀(海鬼)입니다. 해귀는 포르투갈 출신의 해군 용병입니다. 


임진왜란에 포르투갈 용병이 참전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게 그냥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닌 것이, 바로 이 그림을 근거로 현재 주한 포르투갈 대사관에서 풍산김씨 후손들에게 해마다 연하장을 보낸다지 뭡니까. 제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임진왜란에 참전한 다국적 군대를 묘사한 것으로는 이 그림이 유일무이하지 않나 싶어요. 그러니 잘 그리고 못 그리고는 둘째고, 이런 귀중한 그림을 화첩에 묶어 대대로 전해온 정성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런 그림을 만날 수 있었을까요.



<천조장사전별도>에 그려진 원병(猿兵)



이제 해귀들 오른쪽 아래로 시선을 옮기면 짐승의 탈을 쓴 사람인 것도 같고 짐승인 것도 같은 털 복숭이 병사들이 보이죠. 생김새를 보면 신체의 모양이나 서 있는 모습은 사람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몸을 잔뜩 뒤덮고 있는 털의 묘사라든가 짐승처럼 주둥이가 뾰족한 머리 모양을 보면 사람과는 또 딴판으로 보이기도 하고요. 그림만 봐선 딱 잘라서 뭐라 단정 짓기가 어렵지요.


깃발에는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원병삼백(猿兵三百)’. 원숭이 병사 3백이라고 적었습니다. 앞에서 본 연암 박지원의 글 내용과 일치하는 숫자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걸 실제 원숭이로 볼 것이냐, 아니면 단지 변장을 한 사람으로 볼 것이냐, 헷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세전서화첩》을 연구해서 2012년에 번역본을 낸 두 연구자는 이들을 “여진족 출신 투항자들로 구성된 군인들”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이것까지 포함해서 안대회 교수는 원숭이 기병대에 관한 해석이 크게 네 가지로 이뤄지고 있다고 논문에 소개합니다.



① 원숭이처럼 민첩한 병사

② 털이 많이 난 중국 주변 국가의 소수민족 병사

③ 원숭이의 탈을 써서 변장한 병사

④ 원기(猿騎), 곧 마상재(馬上才)



역사,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로 안내하다


자, 여기까지 읽고 난 여러분은 위의 보기 넷 가운데 어느 쪽에 더 가깝다고 보시나요. 사실 이 논문은 충분히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임에도 언론들이 크게 주목하지는 않았습니다. 언뜻 봐선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처럼 들리니까요. 제가 여기에 소개한 내용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죠. 그래도 궁금하다면 안대회 교수의 논문을 직접 찾아 읽어야 합니다.


그럼 제 생각은 어떠냐고요? 논문을 찾아 읽고 화첩까지 구해 본 저로서는 원숭이 부대가 실재했다는 쪽을 조금 더 믿어보고 싶습니다. 이런 흥미로운 역사의 한 장면이 진짜라고 한다면 훗날 대하역사극의 한 대목에서 원숭이 기병대가 활약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될 날이 오지 않을까요. 역사라는 건 분명 흘러간 과거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지만 수백 년이 흐른 지금 우리를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로 안내하곤 한답니다.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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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그림으로 피어난 우리 땅 ‘독도’
김 석

그 섬에 화가가 있었습니다. 하늘은 푸르렀고, 바다의 푸름은 그보다 더 깊었지요. 파도 소리, 새 소리 가득한 섬. 벗인 양, 연인인 양 서로를 마주보며 웃음 짓는 모습이 얼마나 정겨웠던지. 육지에서 멀찍이 떨어진 외딴 섬은 화가의 가슴을 한없이 요동치게 했습니다. 이렇게 작은 두 섬이 그토록 오랜 풍파를 꿋꿋이 견뎌온 어엿한 우리 땅이었으니까요. 동도에서 서도를 바라보는 화가의 붓은 그림 속에서 아련한 메아리를 불러냅니다.


류인선, <독도-동도에서 서도를 바라보다>, 23.3×40.9cm,  캔버스에 아크릴과 오일 파스텔, 2015



언제나 시릴 그 바다와 또 언제나 맑고 신선할 그 공기와 괭이갈매기 소리…! 제가 본 독도는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아주 오래 전 울릉도로 갈 때 본 동해는 그 깊이가 얼마나 아득한 건지 검은 돌 같기도 했는데, 하얀 파도와 어울린 독도의 물빛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푸른빛이었습니다. 괭이갈매기(독도의 주인인 듯한)의 배설물이 척박한 환경을 비옥하게 만들어주었는지 소리쟁이와 방가지똥은 바람에도 꺾이지 않을 만큼 튼실해 보였습니다. 철 이른 연보랏빛 해국 꽃이 드문드문 보이고 개갓냉이 노란 꽃은 무리를 이뤄 독도에 노란 옷을 입혀주고 있었습니다. 바위채송화와 갯제비쑥도 곱게 연초록 융단을 짜고 있을 즈음, 잊지 못할 2015년 5월 16일이었습니다. 

- 작가의 말


화가가 독도에 첫 발을 내디딘 건 한창 꽃피는 5월이었습니다. 소리쟁이, 방가지똥, 개갓냉이, 갯제비쑥… 정겨워서 더 고마운 꽃들이 뿌리 내리고 번성한 섬. 육지에서 그렇게도 먼 곳에서 어쩌면 그렇게 살뜰하고 의젓하게 뭇 생명들의 싹을 틔워 올렸을까요. 그 대견함에 문득 가슴이 뭉클해지는 건 비단 화가뿐이었을까요. 긴 세월 모진 풍파를 말없이 견뎌낸 저 꽃들이야말로 독도의 어엿한 주인이 아닐는지요.


류인선 <독도-풀꽃 사이로 보다 1, 2, 3>, 116.8×91cm, 면천에 한지와 채색, 2015


이 땅의 온갖 꽃에 남다른 애정을 품은 화가가 독도의 꽃들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겠지요. 동양화가인 류인선 작가가 2015년에 완성한 그림 <독도-풀꽃 사이로 보다>입니다. 세 그림이 하나의 작품을 이루고 있는데요. 화폭 아래 배꼼 고개를 내민 풀꽃들이 마치 독도를 바라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 같지요.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가의 시선이 풀꽃들의 시선과 겹쳐져 있어요. 생명으로서의 꽃을 존중할 줄 아는 화가의 바로 그 ‘눈높이’ 덕분에 이 작품은 독도를 묘사한 그 어떤 그림보다도 따뜻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류인선 <독도수호바위 풍경>, 91×182cm, 면천에 한지와 채색, 2015



화가들, 독도를 그리다


독도를 그린 화가는 꽤 많습니다. 독도를 주제로 한 미술 전시회 또한 그리 드물지 않고요. 위에 소개한 류인선 작가의 작품들도 2015년 10월 28일부터 12월 13일까지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개최된 특별기획전 <독도 오감도>란 전시회에서 대중에 선보였는데요. ‘문화를 통한 독도사랑’을 표방한 예술가들이 뜻을 모아 꾸린 라메르에릴(바다와 섬)이란 이름의 사단법인이 기획한 첫 전시였지요.


우리 화가들에게 독도는 단순한 풍경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잊힐 만하면 불거지는 일본의 도발에 화가들은 붓으로 답했습니다. <독도 오감도>를 시작으로 같은 주제로 전시회가 모두 네 차례 열립니다. 가장 최근 전시는 지난해 11월 29일부터 12월 17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한국의 진경 – 독도와 울릉도>였습니다. 일부러 찾아가긴 멀지만 가까이서 독도를 볼 수 있었던 건 화가들의 그림 덕분이었죠.


3,200개가 넘는 우리나라의 섬 가운데 가장 많이 그려진 섬. 이 땅의 자연지형 가운데 가장 많이 그려진 대상물. 독도는 지금까지도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화가들에 의해 그려지겠지요. 그러니 그 많은 독도 그림을 역사라는 틀 안에만 꽁꽁 가둘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림은 무엇보다 그림으로 보면 되는 거니까요. 그렇게 본다면 어떤 그림들은 더 특별한 예술적 감동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김선두 <독도-작은 리조트>, 145×112cm, 장지에 분채, 2017


정일영 <독도>, 97×162cm, 캔버스에 아크릴, 2017


하태임 <독도>, 91×116.8cm, 캔버스에 아크릴, 2017


임만혁 <독도 17-1>, 75×213cm, 한지에 목탄, 2017


김덕기 <원더풀 독도>, 193.9×259.1cm, 캔버스에 아크릴, 2015



‘용의 기운’을 품은 신비의 섬 독도


독도만 그리는 화가가 과연 있을까요. 글쎄요. 과문한 탓인지 아직 그런 화가를 만나보진 못했습니다. 그럼 독도를 주제로 개인 전시회를 연 화가는 있었을까요. 찾아보니 실제로 있더군요. 모르긴 몰라도 처음 만난 독도는 화가에게 말할 수 없이 깊은 예술적 영감을 주었을 겁니다. 그래서 다시는 못 올 것처럼 동도에서 서도까지 독도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눈과 가슴에 한가득 담아가는 것도 모자라 붓을 들었겠지요.


2015년 6월, 서울 대학로 혜화아트센터에서 아주 특별한 전시회가 열립니다. 전시 제목은 <조광기 독도 아크릴 드로잉 전>. 엿새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 화가가 독도 그림만을 모아 대중에 선보인 건 아마도 처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당시 전시회 포스터를 보면 독도의 두 섬 가운데 동도 그림이 보이고 그 아래 이런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조금 떨어진 바다에서 본 동도의 모습은 한 마리 용이 꿈틀거리는 듯…”


조광기 <독도의 꿈>, 77×107cm, 메트지에 아크릴 드로잉, 2015


그런데 참 묘하게도 독도의 모습에서 용을 떠올린 화가가 또 있었답니다. 한국화가 소산 박대성 화백의 <독도>입니다. 올해 2월 7일부터 3월 4일까지 서울 인사아트센터에서 개최된 박 화백의 개인전 <수묵에서 모더니즘을 찾았다>에서 공개된 그림인데요. 가로 8미터로 전시장 한 쪽 벽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장대한 규모의 이 작품은 압도적인 힘으로 관람객을 사로잡는 대작입니다. 독도 그림으로 이보다 큰 작품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어요. 붉은 여의주를 움켜쥔 신성한 해룡(海龍)의 대갈일성이 그림 밖으로 생생하게 전해져오는 것만 같습니다.


박대성 <독도>, 218×800cm, 종이에 잉크, 2015


예술가들만 감지해낼 수 있는 어떤 강한 에너지가 전해진 걸까요. 2015년의 어느 하루 8시간 동안 독도를 만나고 돌아온 화가는 곧바로 독도를 그리는 일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습니다. 그렇게 완성한 그림 12점을 대중 앞에 선보입니다. 독도가 아니었다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그림이었고 전시회였을 겁니다. 독도 그림으로 처음 개인전을 연 서양화가 조광기 화백의 독도 그림은 지금까지 보아온 다른 화가들의 작품과 또 다릅니다. 독특하게 아크릴 물감을 드로잉의 재료로 활용했는데, 바탕 재질에 따라 질감의 차이가 도드라지는 게 특징이지요. 


조광기 <독도의 꿈>, 90×71cm, 캔버스에 아크릴, 2015


(좌) 조광기 <독도의 꿈>, 107×77cm, 메트지에 아크릴 드로잉, 2015    (우) 조광기 <독도의 꿈(일출)>, 90×71cm, 캔버스에 아크릴, 2015





조광기 <청산사유(독도)>, 60×50cm, 혼합재료, 2018


시인이 뜨거운 우리 말글로 그려낸 독도. 아마 독도를 노래한 시인 역시 꽤 많겠지요. 그 중에서 독도 하면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시는 아마도 도종환 시인의 <독도>일 겁니다. 때론 감상적이면서도 때론 유장한 시어들이 빚어내는 깊은 울림에 가슴이 먹먹해져 오는데요. 조광기 화백이 최근에 그려낸 독도 그림 한 점은 마치 도종환의 시를 붓으로 풀어낸 것처럼 강렬한 이미지로 다가왔습니다. 하늘이며 땅이며 온통 푸른 빛 안에서 한 덩어리가 된 독도, 푸름 안에 깃든 독도였지요.



그림 속에서 독도가 말을 걸어왔다



김준권 <山韻-0901>, 400×160cm, 수묵목판, 2009


얼마 전 벼르고 별렀던 한 전시회에 다녀왔습니다. 아마 기억하실 겁니다. 올해 4월 27일 판문점에서 개최된 남북정상회담 당시 회담 못지않게 화제가 된 미술품이 있었지요. 두 정상의 뒤로 멋들어진 첩첩 산줄기가 장대하게 펼쳐진 이 판화 작품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목판화가 김준권의 <산운(山韻)-0901>입니다. 어떻습니까. 굽이굽이 이어지는 산줄기 너머에서 산의 소리가 들리시나요?


하지만 전시장을 가만 돌아보던 제게는 그보다 더 눈에 띄는 작품들이 있었답니다. 바로 독도 그림이었어요. 며칠 동안 독도에 관해 생각하고 자료를 찾고 글을 써오던 차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공간에서 또 다른 독도를 만난 겁니다. 얼마나 반가웠던지 전시장을 돌면서 몇 번이고 독도를 눈에 담았지요. 독도를 그린 꽤 많은 작품을 봐왔어도 ‘독도의 아침’을 담아낸 작품은 처음 만났습니다. 바로 이 작품입니다.


김준권 <독도의 아침>, 30×40cm, 유성목판, 2018


이 작품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잠시 판화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는데, 목판으로 찍어냈다는 걸 알고 다시 보면 정말 믿기지 않는 그림입니다. 화면 중앙을 가로지르는 수평선을 기준으로 하늘은 하늘대로, 바다는 바다대로, 저토록 미세한 색의 변화를 판화로 표현해냈다는 데 놀랐습니다. 아침 해가 서서히 고개를 내밀면서 자욱했던 해무가 조금씩 걷히는 그 순간의 독도를 참으로 절묘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전시장에는 이 그림 양쪽 옆에 독도의 동도, 서도가 나란히 걸려 있었어요. 작가의 솜씨인지, 전시기획자의 감각인지는 몰라도 색이 입혀진 독도 그림이 그렇게 동쪽과 서쪽에서 독도의 아침을 호위하듯 서 있는 모습마저도 퍽 특별해 보이더군요. 작품을 본 사람들은 판화라는 사실 자체를 믿기 어렵다는 반응이었지요. 붓으로 그렸다고 해도 고개를 끄덕일 만큼 섬세한 선과 결의 묘사라든가 색채의 조화가 돋보이는 그림이었습니다.


(좌) 김준권 <독도-서도>, 89×60cm, 채묵목판, 2014    (우) 김준권 <독도-동도>, 89×54cm, 채묵목판, 2014



독도가 전하는 메시지


꽤 많은 독도 그림을 찾아보고 살피는 내내 책 한 권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소설가 김탁환의 <독도평전>인데요. 제목이 참 독특하지요? 사람도 아닌 섬의 평전을 쓴다니, 그 발상이 참 남다릅니다. 독도가 품은 이야기는 또 얼마나 많은지요. 책이 발간된 2005년까지 독도의 생애를 적어나간 작가는 그 이후의 삶을 여생(餘生)이라는 제목 아래 짧게 기록합니다.


까맣게 모른 채 그냥 지나갈 것 같아 적어둡니다. 10월 25일은 ‘독도의 날’입니다. 독도는 멀지만 그림은 가깝잖아요. 그래서 독도 그림을 애써 찾아다니고 수없이 다른 얼굴로 다가오는 독도를 만나보려 했던 겁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진실은 유행가 가사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독도는 소중한 우리 땅입니다.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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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추억의 ‘플란다스의 개’와
위대한 ‘루벤스’ 이야기
김 석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시골 마을의 작은 오두막에서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었지요. 소년과 할아버지는 몹시도 가난했습니다. 온종일 굶는 날도 많았거든요.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웃집 젖소에서 짜낸 우유를 작은 수레에 싣고 가까운 도시로 배달하는 것뿐이었어요. 하지만 나이 들어 몸이 불편한 할아버지에겐 수레를 끄는 일조차 버거웠답니다. 그래도 소년은 행복했습니다. 언제나 밝은 웃음을 잃지 않았지요.

마을에서 떠들썩한 축제가 열리던 날이었어요. 웃고 떠드느라 여념이 없는 사람들 사이를 할아버지는 힘없이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풀숲에 쓰러진 커다란 개를 발견하게 되지요. 그 옆에는 작은 금발 머리 아이가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반짝거리며 서 있었고요. 할아버지는 개를 집으로 데려와 정성껏 보살핍니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던 개는 기적처럼 다시 일어섭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소년의 둘도 없는 가족이 됩니다.

1975년 일본에서 TV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플란다스의 개>는 국내에서도 방영돼 큰 인기를 모았습니다.

소년, 위대한 화가를 꿈꾸다

기억하시나요. 어린 시절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이 따뜻한 동화를 말이에요. 197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분들은 그래 그거야 하실 겁니다. 저 역시 아주 어렴풋하게 본 기억은 있지만, 주인공 소년의 이름이 뭔지 줄거리가 어떻게 되는지는 까맣게 잊고 말았답니다.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머리 희끗희끗한 중년이 되어서야 문득 그때 그 이야기를 다시 펼쳐보고 싶어지더군요. 넬로와 파트라슈의 따스한 우정을 담은 동화 <플란다스의 개>를 말입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사실 소년에겐 아주 큰 꿈이 있었습니다. 루벤스 같은 위대한 화가가 되는 것이었어요. 루벤스가 누구냐고요?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는 익히 알려진 것처럼 미술의 역사에서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입니다. 루벤스가 태어난 고향은 플랑드르 지방입니다. 지금의 벨기에에 속한 지역이지요. 동화의 주인공 넬로가 사는 곳이 바로 이 플랑드르입니다. 루벤스는 플랑드르의 자랑이었어요. 넬로는 그런 루벤스를 한없이 동경합니다. 나도 언젠가는 루벤스처럼 위대한 화가가 될 거야! 넬로는 그런 간절한 꿈을 무럭무럭 키워갑니다.

‘루벤스의 도시’ 안트베르펜에는 루벤스가 살던 집이 있고 죽은 뒤에 잠든 묘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에서 가장 높은 첨탑이 있는 성당에는 루벤스가 남긴 거대한 그림들이 걸려 있지요. 소년은 그 그림들을 몹시도 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돈이 없으면 그림을 볼 수 없었어요. 아무에게나 보여주지 않겠다는 듯 언제나 커다란 천이 그림을 가리고 있었거든요. 우유를 배달하러 갈 때마다 넬로는 어김없이 성당으로 달려갔습니다. 루벤스의 그림을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면서요.

“가난해서 돈을 못 낸다는 이유만으로
그림을 볼 수 없다니 정말 너무해! 그분은 분명 가난한 사람들은
못 보게 하겠다는 생각으로 저 그림들을 그리진 않았을 거야.
우리가 언제라도 매일 그림을 보길 바랐을 거라고.

그런데도 사람들은 저 아름다운 그림을 천으로 덮어
어둠 속에 가둬 놓고 있어! 부자가 와서 돈을 내지 않으면
빛도 들지 않고 아무도 못 보게 말이야.
난 저 그림들을 볼 수만 있다면 죽어도 좋아.”

이미지 출처: 김지혁 그림, <플란다스의 개>(인디고, 2012)

그림의 신, ‘루벤스’를 만나다

넬로에게 루벤스는 ‘신’이었습니다. 소년은 천국 같은 꿈에 빠져들었지요. 주체할 수 없는 열망에 사로잡힌 소년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소년은 그림을 그립니다. 물감을 살 돈이 없었기에 돌 위에 석필로 그림을 그렸지요. 소나무 널빤지에 숯으로도 그렸고요. 꿈을 꿀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년은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어요. 넬로에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 티 없이 해맑고 착한 소년에게 세상은 한없이 가혹하기만 합니다. 가난한 것도 모자라 화가가 되겠다고 하느냐며 둘도 없는 친구 알루아의 아버지는 둘 사이를 강제로 떼어놓습니다. 심지어 아무 잘못도 없이 하루아침에 방화범으로 몰리자 마을 사람들은 등을 돌려 버리지요. 유일한 혈육이었던 할아버지는 지독한 가난과 병마를 못 이기고 결국 넬로만 남겨둔 채 쓸쓸히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이미지 출처: 김지혁 그림, <플란다스의 개>(인디고, 2012)

집세를 감당할 수 없어 끝내 정든 오두막을 떠나야 하는 넬로와 파트라슈의 가련한 운명이란…. 한겨울 추위 속에서 둘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루벤스의 그림이 걸려 있는 성당이었어요. 문이 열린 성당 안으로 들어가 긴 복도를 지나자 천장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달빛에 비친 루벤스의 그림이 마침내 그 찬란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슬픈 동화는 소년의 꿈이 이뤄지는 이 극적인 순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넬로가 일어서더니 그림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창백한 얼굴에서 기쁨에 찬 눈물이 반짝거렸다.
“드디어 그림을 봤어! 오, 하느님, 이제 됐습니다!”

그렇게 둘은 죽음을 맞습니다. 루벤스의 그림을 올려다보며 죽은 넬로의 얼굴엔 미소가 피어 있었지요. 저 나이 어린 소년이 목숨과 맞바꿀 만큼 대단한 그림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저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라기엔 너무나도 가슴 시린 이야기입니다. 저 착하고 순수한 영혼들을 기어이 죽음에 이르게 만든 작가가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몰라요. 죽는 순간에도 넬로를 미소 짓게 만든 루벤스의 그림은 대체 무엇일까요?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바로 그 그림들

벨기에 안트베르펜에 있는 ‘루벤스의 집’

‘루벤스의 도시’라 불리는 안트베르펜은 사실 루벤스의 어머니의 고향이었습니다. 루벤스가 태어난 곳은 안트베르펜이 아니라 독일의 지겐이었지요.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 때문에 독일로 이주해 살던 루벤스 가족이 안트베르펜으로 돌아간 것은 루벤스가 12살 때였습니다. 이곳에서 성장기를 보낸 루벤스는 스물한 살 나이에 화가가 됩니다. 그리고 1600년, 그토록 꿈에 그리던 이탈리아 여행길에 오른 루벤스는 그리스와 로마, 르네상스의 위대한 유산을 통해 화가로서의 자질을 탄탄하게 다집니다.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귀국길에 오른 루벤스는 이후 안트베르펜에 정착합니다. 뛰어난 그림 솜씨를 인정받아 귀국한 지 1년 만에 당시 남부 네덜란드를 다스리고 있던 알브레흐트 대공 부부의 궁정화가로 임명됐지요. 루벤스의 명성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갑니다. 당시는 전통적인 가톨릭 구교와 종교개혁을 부르짖는 신교 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무척이나 심했어요. 성상 파괴 운동이란 것이 벌어져 가톨릭 성당치고 성한 곳이 없을 정도였지요.

전쟁이 끝나고 다시 성당을 재건해야 했을 때 루벤스는 그림 주문을 받습니다. 마침내 완성된 제단화가 성당에 걸리자 루벤스는 단숨에 플랑드르 지방 최고의 화가로 찬사를 받게 되지요. 안트베르펜의 성모 성당에는 루벤스의 제단화 세 폭이 남아 전하는데요. 넬로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바로 그 그림들입니다. <십자가에 올려지는 그리스도>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입니다.

(좌) 십자가에 올려지는 그리스도, (우)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넬로, 둘도 없는 친구 파트라슈를 꼭 끌어안다

거룩하고 신성한 성당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이 그려진 거대한 그림 앞에 서면 어떤 기분일까요. 단순히 그림 자체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놀라운 영적 감동이 보는 이를 가슴 떨리게 하고 눈물짓게 하지 않았을까요. 감히 그 앞에 무릎 꿇고 고개 숙여 기도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한 번이라도 그림을 본 이들은 그 주체하기 힘든 감동에 벅차올라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을 겁니다. 루벤스 그림 봤어? 봤냐고?

그림의 명성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빠르게 퍼져나갔을 겁니다. 어린 넬로도 그렇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위대한 루벤스의 위대한 그림을 너무나도 보고 싶었지요. 그림 한 점을 본다는 것이 목숨과 맞바꿀 만한 것이었을까. 한낱 동화로만 치부하기에는 너무도 가슴 시린 이야기를 읽으며 마음속으로 얼마나 울었던가요. 다시 <플란다스의 개>의 마지막 장면을 펼쳐 봅니다. 넬로가 둘도 없는 친구 파트라슈를 꼭 끌어안으며 이렇게 말하지요.

“거기 가면 그분의 얼굴을 볼 수 있어.
그분은 우리를 갈라놓지 않을 거야.”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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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왜 우리는 유독 파란색에 매혹되는 걸까?
김 석

어떤 그림을 보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은 전율을 느껴본 적 있으신가요? 미술에 까막눈이었던 제겐 그런 강렬한 첫 만남의 추억이 있답니다. 아, 그때 기분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림 앞에 발걸음을 멈춘 순간 심장이 마구 쿵쾅거리던 그 신비로운 경험을 말이지요. 그림의 내용을 이해하는 건 부차적인 일이었습니다. 광선처럼 스쳐가는 찰나의 감성이랄까요. 마치 나를 위한 그림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진 기분이었습니다.

2011년 봄, 서울 한남동에 있는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열린 <코리안 랩소디>라는 기획전시를 취재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주요 미술 작품으로 조망해보는 야심만만한 전시회였는데요. 손에 꼽히는 걸작들이 즐비한 속에서 유독 제 눈이 번쩍 뜨이게 만드는 그림이 한 점이 있었지요. 난생 처음 들어본 화가의 이름은 강요배. 그림 제목은 <한라산 자락 사람들>이었습니다.

강요배, <한라산 자락 사람들>, 1992년, 캔버스에 아크릴, 112×193.7cm

제주 4·3 사건 연작의 하나인 이 작품에서 저를 단박에 사로잡은 건 다름 아닌 푸르른 한라산이었습니다. 물감으로 저런 색을 만들어낼 수 있다니! 감탄하고 또 감탄했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세상에는 수많은 색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파랑이 있고요. 하지만 강요배의 파랑은 그때고 지금이고 제게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단 하나의 파랑이에요. 그 모든 걸 안다는 듯 저 혼자 의연하게 오롯한 푸름을 간직한 산. 파랑은 그렇게 강렬하게 제 마음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파랑은 언제부터 각광받기 시작했을까?

여러분이 가장 좋아하는 색깔은 뭔가요? 아마 사람마다 대답은 천차만별일 겁니다. 그 이유도 각양각색일 테고요. 다섯 살 난 제 첫째 아이는 저만큼, 아니 저보다 몇 배는 더 파랑을 좋아합니다. 옷부터 가방, 식기류에 장난감까지 온통 파랑 일색이지요. 심지어 과자를 살 때도 포장지가 파랑이냐 아니냐를 가장 먼저 따집니다. 이 아이는 어떻게 파랑을 그토록 사랑하게 된 걸까요. 부모인 저도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무척 궁금할 때가 많거든요.

작가 미상, <영국의 왕 리처드 2세를 위해 그려진 두 폭 패널화>,
1395~1399년, 패널에 템페라, 각 53×37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사실 인류가 수많은 색 가운데 파랑을 지금처럼 널리 사랑하게 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랍니다. 지구가 탄생하는 순간부터 파랑은 도처에 널려 있었어요. 고대인들도 지금의 우리처럼 파란 하늘, 파란 바다를 보며 살았을 겁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와 로마는 물론 중세에 들어서까지도 파랑은 전혀 주목받지 못한 색깔이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기간 천대받던 파랑이 색채의 세계에서 급부상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지요. 바로 성모 마리아 그림입니다.

프랑스의 저명한 중세사 연구자 미셸 파스투로(Michel Pastoureau)는 <파랑의 역사>란 흥미로운 책에서 12세기부터 성모의 푸른 옷이 그림에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이걸 계기로 과거에 홀대받던 파랑이 성모 마리아와 결부된 ‘신성한 푸른색’으로 탈바꿈하게 되지요. 청색에 대한 중세인의 인식은 성모 숭배와 더불어 획기적으로 달라집니다. 이 신성한 색은 더 나아가 왕의 색으로도 각광받게 됩니다. 경건함과 고귀함의 상징이 된 거죠.

(좌)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1665년, 캔버스에 유채, 44.5×39cm,
네덜란드 헤이그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소장

(우) <편지를 읽는 푸른 옷의 여인>, 1663~1664년, 캔버스에 유채, 49.6×40.3cm,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레이크스 국립박물관 소장

유구한 서양 미술의 역사에서 진정 ‘청색의 화가’라 불릴 만한 이는 과연 누구일까요. 파스투로는 17세기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1632~1675)를 첫손으로 꼽습니다. 페르메이르가 누구냐고요? 저 유명한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그린 바로 그 화가입니다. 파스투로는 이렇게 단언하죠. 그 어떤 뛰어난 화가도 페르메이르처럼 청색을 섬세하게 다루지는 못했다고.

“안료(청금석, 남동석, 산화코발트)들에 대한 화학적 분석을 통해 청색 계통에 관해서는 페르메이르가 동시대 다른 화가들에 비해 아무 혁신도 일으키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색칠을 물리적으로 분석해 보면, 재료를 굉장히 까다롭게 다뤘다는 것과 청색의 대담한 터치에 흰색이나 회색 또는 노란색의 섬세한 붓놀림을 통해 ‘옷을 번쩍거리게’ 장식하는 독창적인 방식을 구사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자, 이제 페르메이르의 그림을 다시 봅니다. 어떠신가요? 특히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는 수없이 복제되고 대중화된 덕분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지요. 그 시대에 저토록 세련된 푸른색을 화폭에 그려낼 줄 알았던 화가에게 위대하다는 수식어는 조금도 아깝지 않아 보입니다. <편지를 읽는 푸른 옷의 여인>은 또 어떻고요. 그 어떤 색으로 대신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창조할 줄 알았던 페르메이르는 진정 ‘청색의 화가’였습니다.

혜원 신윤복의 그림에서 만난 파랑의 매혹

그렇다면 우리 옛 그림은 어떨까요. 조선시대에도 ‘청색의 화가’라 불릴 만한 이가 있었을까요.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청색을 유달리 잘 구사한 화가는 없었을까요. 저도 그게 궁금해서 옛 그림에 관한 숱한 자료를 뒤적거려 봤습니다. 하지만 과문한 탓에 우리 옛 그림의 색채만을 따로 떼어서 연구한 책은 아직 못 만났습니다. 특히 파랑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고요.

국보로 지정된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 중에서 주유청강(舟遊淸江)

그럼에도 우리 옛 그림 가운데 기억할 만한 파랑을 구사한 화가를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 혜원 신윤복을 들고 싶습니다. 지난해였던가요.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특별전 <바람을 그리다: 신윤복 정선>을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동안 간송미술관에서 몇 차례 본 적 있는 신윤복의 그림이 그날은 전혀 다르게 보였거든요. 그림이라는 것이 볼 때마다 다른 감동을 주곤 한다는데, 그때는 유독 혜원 풍속화에서 ‘색’이 자꾸만 눈에 밟히는 겁니다.

저 시대에 저토록 색을 모던하게(!) 사용할 줄 알았다니. 넋을 놓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혜원의 풍속화에는 파란색이 의외로 참 많이 쓰였습니다. 채색에 주목하지 않으면 잘 눈여겨보게 되지 않는 부분인데요. 기회가 된다면 혜원 풍속화를 색깔 위주로만 찬찬히 들여다보셨으면 합니다. 전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을 받으실 거예요. 신윤복의 여러 작품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주유청강(舟遊淸江)이란 작품을 눈여겨보게 됩니다.

이 그림의 기조를 이루는 색은 보시다시피 파랑입니다. 기생들의 치마 색깔을 보세요. 같은 파랑인데도 농담을 조금씩 달리했지요. 햇볕을 가리기 위해 천막처럼 설치한 차일 가장자리에도 푸른 물을 들여놓았네요. 심지어 배경을 이루는 커다란 바위에도 전체적으로 푸른빛이 감돕니다. 이 작품을 실제로 보면 어쩜 그렇게 긴 세월에도 파랑의 신선함이 도드라지는지 모릅니다.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옛 사람들은 파랑 물감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조선 시대 궁중 회화부터 불교 회화에 이르기까지 청색은 채색화에서 널리 쓰였습니다. 청색은 오방색의 하나로 예로부터 궁궐의 목조건물 단청에도 절대 빠질 수 없는 색깔이었죠. 그렇다면 옛사람들은 형형색색 다양한 채색 물감을 대체 어떻게 만들어 썼을까요. 궁금증을 품고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던 차에 한양대 국문과 정민 교수가 쓴 <책벌레와 메모광>이란 흥미진진한 책에서 이런 대목을 만났습니다.

“이덕무의 <앙엽기>는 주로 역사에 관한 내용이 많다. 하지만 화가가 사용하는 그림물감의 각종 빛깔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에 대해 적은 기록도 보인다. <철경록(輟耕錄)>이란 책을 읽다가 여러 빛깔의 물감 제조 방법에 관한 내용에 흥미를 느껴 메모장을 만들어두었다. 그 뒤에 <개자원화보(芥子園畫譜)>에서 비슷하지만 설명이 훨씬 구체적인 대목을 하나 더 찾았다. 그래서 이 두 메모를 합쳐서 한 항목으로 정리한 것이다. 두 자료가 한데 묶이고 보니, 동양화의 물감 제조법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었다. 아주 요긴하고 귀한 자료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조선 후기의 유명한 실학자로 조선 시대에 둘째가라면 서러울 독서광으로도 굉장히 유명한 분이지요. 위 인용문에 소개된 <앙엽기>는 이덕무가 펴낸 기념비적인 백과사전 《청장관전서》에 수록된 글입니다. 총 8장으로 이뤄져 있는데 온갖 시시콜콜하고 자질구레한 지식을 모아 놓은 일종의 잡학사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여기에 그림물감 제조법에 관한 글도 있습니다. ‘화가(畫家)에게 소용되는 그림물감(畫家顔色)’이란 제목으로 <앙엽기> 제7장에 스물한 번째로 실려 있지요.

위 인용문에서 이덕무가 읽었다는 <철경록>은 중국 원나라 말기의 저술가인 도종의(陶宗儀)라는 분이 펴낸 수필집입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원나라의 법률 제도 및 서화문예(書畵文藝)의 고정(考訂) 따위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 많아 원나라 때의 사료로서 가치가 높다.”고 돼 있습니다. 1366년에 완성했고, 모두 30권인데요. 이덕무가 이 책에서 물감 제조법에 관한 대목을 읽고 적어두었다가 자신의 책에 수록한 겁니다.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정말 별의별 색깔이 다 있더군요. 그중에서 청색과 관련한 대목만 추려 보겠습니다.

남청색(藍靑色)은 삼청(三靑)에다 고삼록(高三綠)을 넣어 조제하고,
아청색(鵝靑色)은 소청(蘇靑)에다 나청(螺靑)을 곁들여 조제하고,
대저 물감을 조제 사용하는 데 섬세한 색상으로는
두청(頭靑)·이청(二靑)·삼청(三靑)·심중청(心 中靑)·천중청(淺中靑)·
나청(螺靑)·소청(蘇靑)…

채색 물감을 만드는 데 ‘조제’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사실 그 옛날의 그림물감 재료는 상당 부분 약재(藥材)였습니다. 그래서 물감을 만드는 것이 병을 낫게 하는 약을 조제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거지요. 그러니 정성도 정성이었겠지만 가격도 만만치 않았을 겁니다. 위에 열거된 용어들을 전부 다 이해하는 건 전문가가 아니고서야 절대 무리입니다. 다만 청색을 만드는 데 널리는 쓰인 석청(石靑)이라는 재료만 설명해 보겠습니다.

조선시대에 청색을 만드는 데 널리 쓰인 재료는 구리 산화물의 일종인 남동석(Azurite)입니다.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해왔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세종실록>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을 보면 국내에서도 삼청의 재료인 토삼청(土三靑)을 캤다는 기록이 더러 남아 있기도 합니다. 이 남동석을 가루로 만든 것이 바로 석청이라는 물감 재료입니다. 옛사람들은 이걸 적절히 가공해서 다양한 청색을 만들어 썼습니다.

이덕무의 <앙엽기>를 보면 바로 그 물감 제조법을 <개자원화보>(‘개자원화전’이라고도 합니다.)란 책에서 읽고 옮겨 놓았습니다. <개자원화보>는 청나라 화가 왕개(王槪)가 지은 회화 입문서인데요. 그림을 배우는 데 꼭 필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어서 당시 청나라뿐 아니라 조선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미술책이었습니다. 이 책에 그림물감의 재료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석청(石靑)은 이른바 매화편(梅花片)과 같은 일종(一種)만이 여기에 소용되는데, 그 모양이 조각(片)으로 되어 매화편과 비슷하므로 이른 말이다. 석청을 조제할 적에는 사기그릇에 담고 맑은 물을 조금 부어 휘저은 다음 채취하는 데 맨 위에 자리 잡은 가루는 유자(油子)란 것으로 의복에 들이는 물감으로 쓰이고, 중간에 자리 잡은 것은 가장 좋은 석청으로 정면(正面)으로 된 청록색(靑綠色)의 산수(山水)를 그리는 물감으로 쓰이고, 맨 밑에 자리 잡은 것은 협엽(夾葉)을 상감(象嵌)하거나 견첩(絹帖)의 후면(後面)에 바르는 데 쓰이는데, 이것을 두청(頭靑)·이청(二靑)·삼청(三靑)이라 한다.
물을 부어서 잘 저은 다음 높이에 따라 상중하로 나눠 재료를 채취해서 각각의 용도에 따라 사용한다는 겁니다. 맨 밑에 가라앉은 것을 채색 물감 재료로 썼다는 거지요. 기록에 따르면 조선시대 가장 널리 쓰인 청색 물감 재료는 위에 보이는 삼청(三靑)과 청화(靑花)였다고 합니다. 조선 최고의 화가 김홍도와 신윤복을 나란히 등장시켜 엄청난 화제를 모은 이정명의 소설 <바람의 화원>에도 물감에 관한 이야기가 꽤 많이 나오는데요. 그 가운데 한 대목을 옮겨봅니다.

“(도화서) 화원들이 색을 쓰지 못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것은 색을 내는 안료를 구하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쪽과 함께 푸른색을 내는 석청(石淸)은 중국에서도 멀리 서역 너머에서 들여왔다. 황색을 내는 등황은 안남(베트남)에서 배를 타고 더 들어가는 섬나라의 나무에서 채취해야 했다. 구하기도 힘들지만,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가격도 천정부지였다. 돈 많은 양반의 초상화나 어진을 그릴 때는 그나마 구하기 쉬운 황색 계통의 안료가 쓰일 따름이었다.”
그만큼 채색 물감은 참으로 구하기 힘든 귀한 재료였던 겁니다. 게다가 병을 고치는 약재를 제조하듯 만드는 데도 갖은 정성을 들였으니 말이에요. 그렇게 어렵사리 구한 재료로 곱게 색을 입혔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옛 그림을 더 깊이 음미하고 사랑할 수밖에요. 다시 혜원 신윤복의 그림으로 돌아가 봅니다. 혜원은 ‘파랑’을 즐겨 쓴 화가였습니다. 그것도 아주 세련된 방식으로 말입니다. 지금 보아도 저 색채 감각은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서울의 랜드마크 인왕산을 물들인 ‘풍류 블루’

지금이야 물감 자체가 워낙 구하기도 쉽고 종류도 다양해졌잖아요. 찢어지게 가난해서 아예 돈이 없다면 모를까 물감 못 구해서 그림 못 그린다는 화가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파랑을 주로 사용하는 화가들은 의외로 굉장히 많습니다. 오로지 파란색만을 고집하는 화가도 꽤 있고요. 그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그림이 있습니다. 전시장에서 작품 앞에 서는 순간, ‘와’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만든 어느 화가의 파랑은 무척이나 매혹적이었습니다.

한국화가 조풍류 화백은 근래에 왕성하게 활동하는 작가들, 특히 한국화가 중에서 파란색을 가장 즐겨 쓰면서도 남다른 깊이를 보여주는 화가입니다. 2015년 겨울, 서울 인사동의 한 전시장에서 화가를 처음 만났는데요. 전시장에 걸린 그림들 가운데 유독 제 눈길을 사로잡은 건 인왕산 그림이었습니다.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인왕산의 야경에 넋을 잃을 정도로 빨려 들어갔지요. 실로 눈부신 블루였습니다.

조풍류, <인왕산>, 2017년, 캔버스에 먹 호분 분채 석채, 140×220cm

제가 아는 한 조풍류 화백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인왕산 화가이기도 합니다. 푸른 인왕산 하면 대번에 조풍류라는 화가를 떠올릴 정도이지요. 사실 인왕산을 그리는 화가는 의외로 꽤 많습니다. 인왕산 기슭에 깃들어 사는 화가도 많고요. 하지만 인왕산의 야경을 이토록 아련하고 깊이 있게 그려낸 화가는 일찍이 본 적이 없습니다. 조 화백의 인왕산 그림은 보시는 것처럼 파랑이 주조를 이룹니다. 그래서 어느 미술사학자는 그 파랑에 이름을 붙여주었답니다. ‘풍류 블루’라고.

사진으로는 잘 구분이 안 되지만 직접 그림 앞에 서면 한 덩어리처럼 보이는 저 파랑 속에서 무수한 색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지요. 이 그림의 멋을 제대로 느끼려면 열 일 제쳐두고 가까이 다가가서 찬찬히 살펴야 합니다. 산 아래로 점점이 불을 밝힌 인왕산 어귀 마을이 마치 반딧불처럼 깜빡이는 아련한 풍경. 겸재 정선의 저 유명한 <인왕제색도>가 그 시대의 인왕산이라면, 조풍류의 <인왕산>은 바로 우리 시대의 인왕산입니다.

파랑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사랑받는 색깔이 된 이유를 두고 여러 가지 해석들을 하지요. 가장 큰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오래 봐도 지루하지 않고 눈이 피로하지 않다는 걸 테고요. 금방 식상해지지도 않을뿐더러 보는 이에게 안정감을 준다고도 하고요. 심지어 최근에는 파랑이란 색을 주제로 한 전시회가 열리기도 합니다. 이유야 어찌 됐든 한 번 빠져들면 헤어 나오기 힘든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단 하나의 색, 그 이름은 ‘파랑’입니다.

조풍류, <인왕산>, 2017년, 한지에 먹 호분 분채 석채, 60×30cm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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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어느 거지패 왕초, 조선 최고 광대가 되다
김 석
#김석기자


아주 오래전, 국어 수업 시간에 배운 글 한 편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글의 제목이 <광문자전(廣文者傳)>이고, 지은이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란 사실은 물론 까맣게 잊었죠. 하지만 기이하기 이를 데 없는 주인공의 흥미진진한 삶은 희미한 조각으로나마 기억에 남아 있었더군요. ‘이야기’란 녀석은 심지어 까마득하게 먼 어린 시절에 주워들은 것도 그냥 지워지는 법이 없었습니다. 가장 또렷하게 기억나는 건 대단히 못생긴 주인공의 ‘외모’였지요.


광문은 외모가 극히 추악하고, 말솜씨도 남을 감동시킬 만하지 못하며, 입이 커서 두 주먹이 들락날락했다.


바로 뒤에 이어지는 구절은 이렇습니다.


만석중놀이를 잘 하고, 철괴무(鐵拐舞)를 잘 추었다.
우리나라 아이들이 서로 욕을 할 때면 "니 형은 달문(達文)이다."라고 놀려댔는데,
‘달문’이란 광문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만석중놀이는 해마다 음력 4월 8일 개성지방에서 행해진 무언 인형극입니다. 

당대 최고의 기생 황진이의 미모에 홀려 파계를 하고 말았다는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조롱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속설도 있고, 

불공 비용을 만석이나 받아먹은 지족선사의 탐욕을 경계하기 위해 놀이로 꾸몄다는 이야기도 전해 옵니다.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은 ‘기억할 만한’ 추한 외모와 달리 너무나도 사려 깊고 인간적인 달문의 됨됨이를 설명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외모로 섣불리 사람을 평가하지 말라! 학창 시절에 배운(외운!) 이 글의 교훈이지요. 30년이나 묵은 저 머나먼 기억창고에서 느닷없이 이 글을 꺼내든 건 바로 그 달문을 주인공 삼아 써 내려간 한 편의 소설 때문이었습니다. 소설가 김탁환이 쓴 <이토록 고고한 연예>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소설에서 바로 그 못생긴 달문을 30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 겁니다.



당대 최고의 만능 엔터테이너, 달문


달문은 조선 후기의 실존 인물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성은 이 씨로 1707년에 세상에 났고, 돌아간 해는 물음표로 남아 있습니다. 달문은 청계천 수표교 거지 패 왕초였습니다. 소설의 화자인 ‘나’는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름만 들어온 ‘거지 광대’ 달문을 열여섯 나이에 수표교에서 처음 만나게 됩니다. 소설은 바로 그 첫 만남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큼지막한 탈을 쓰고 북을 두드리면서 다리 가장자리를 절름거리며 휘저었다.
왼손에 든 철봉은 북을 칠 땐 북채고 땅을 짚을 땐 지팡이였다.
또한 그 봉을 기둥처럼 다리 위에 세우고 몸을 날려 앞으로 돌고 뒤로 돌고 옆으로 돌았다.
반보만 헛디뎌도 개천으로 곤두박질칠 만큼 위태로웠다.

웃통은 천 조각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고, 바지도 갈가리 찢겨 허벅지와 무릎과 종아리가 훤하게 드러났다.
쪽박 쓰고 손뼉 쳐 대는 아이들과 똑같은 몰골이었다.

거지 광대! 묵은 김치 같은 이름 하나가 내 가슴을 화살처럼 꿰뚫었다.


철봉을 들고 춤을 추었다고 했지요. 소설을 읽다 보면 뒤에도 여러 번 다시 나오는 이 춤의 정체는 ‘철괴무’입니다. 철괴무를 얼마나 잘 췄던지 ‘철괴무의 달인’으로 불렸을 정도랍니다. 거지꼴을 하고 추기에 딱 알맞은 춤이 아니었을지요. 남루하다 못해 꾀죄죄하기 이를 데 없는 달문의 몰골에 그보다 더 어울리는 춤이 달리 또 있었을까요. 그도 그럴 것이 ‘철괴무’의 유래를 살펴보면 답이 명확해집니다.



(좌) 심사정, <철괴>, 비단에 엷은 채색, 29.7×20.0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 김명국, <철괴>, 종이에 엷은 채색, 20.2×29.5cm, 간송미술관 소장


위의 두 작품의 제목은 모두 ‘철괴’입니다. 조선 최고의 화가로 꼽히는 현재 심사정(沈師正, 1707~1769)과 연담 김명국(金明國, ?~?)이 나란히 ‘철괴’를 그렸습니다. 머리와 수염은 삐죽삐죽 듬성듬성, 옷은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 가슴을 활짝 풀어헤친 품새 하며, 지팡이에 기대 절뚝거리는 모습이 영락없는 거지꼴이지요. 모르긴 몰라도 어느 화가가 달문의 초상화를 그렸다면 꼭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달문과 마찬가지로 성이 이 씨인 철괴가 이런 모습이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습니다. 산속 동굴에서 수행을 하던 철괴가 어느 날 노자(老子)를 만나러 갈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제자에게 신신당부를 하지요. 몸은 이곳에 두고 혼만 다녀올 텐데, 만일 7일 안에 혼이 돌아오지 않으면 몸을 태우라고. 그런데 아뿔싸, 스승의 혼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곁에서 몸을 지키던 제자에게 별안간 늙은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이 옵니다. 제자는 어떻게 했을까요? 끝내 기다릴 수 없어 스승의 혼이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 몸을 불에 태우고 떠납니다.


뒤늦게 혼이 돌아와 보니 몸은 이미 불에 타 사라지고 없었지요. 철괴는 어쩔 수 없이 꾀죄죄한 거지 몸속에 들어가 살게 됩니다. 여기서 끝났다면 극적 효과가 덜 했을 겁니다. 거지 몸이 마음에 안 들었던 철괴는 다른 몸으로 이사를 가려 합니다. 그런데 이때 노자가 나타나 한마디 하죠. 진정한 도는 외모가 아닌 마음에 있나니…. 그러곤 금테와 철 지팡이를 주고 사라집니다. 이렇게 해서 철괴는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는 진정한 도인의 상징이 되어 도교의 신선으로 떠받들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그 철괴의 탈을 쓰고 추는 춤이 바로 철괴무입니다.


내 두 눈이 광대의 콧잔등에 얹힐 정도로 들러붙었다.
그 순간 나는 그의 탈에서, 이마로부터 뺨을 지나 커다란 입술을 통과하고
턱에서 발등으로 뚝뚝 흐르는 땀을 똑똑히 보았다.

내가 못나디 못났다고 믿었던 탈은 거지 신선 이철괴(李鐵拐)의 탈이 아니라 거지 광대의 맨 얼굴이었다.


외모뿐만 아니라 극적인 사연조차 어쩌면 ‘달문’과 그렇게 딱 맞아떨어지는 것일까요. 철괴의 현신이 바로 달문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말이에요. 게다가 달문의 철괴무는 당대의 으뜸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의 백성들이 달문을 ‘철괴무의 달인’이라 부른 까닭을 짐작할 만합니다. 비단 철괴무만 잘 춘 것이 아니었습니다. 달문은 뛰어난 춤 솜씨로 사람들을 들었다 놨다 했던 만능 연예인이었어요.


소설의 전반부에 좌우 두 날개, 즉 좌익과 우익으로 편을 나눠 대결하는 산대놀이 장면이 나옵니다. 산대놀이는 우리나라 민속 가면극의 하나로, ‘산대’는 특별한 시설이 필요하지 않은 임시 가설무대를 뜻합니다. 연원을 따지면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전통을 자랑하지요. 조선시대에는 궁중이나 중국 사신을 맞을 때 공연되기도 했는데, 차차 민간으로 퍼져나가 백성의 놀이가 되고 자연스럽게 양반 계급을 풍자하는 내용이 담기게 됩니다.


달문은 이 대결에서 우익의 으뜸 광대가 되어 공연의 총연출자로 나섭니다. 심장이 쫄깃해지는 이 흥미진진한 놀이 대결을 묘사한 대목을 읽다 보니 숨 막히는 무대의 긴장감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지더군요.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우리 옛 그림 중에서 혹시 산대놀이를 그린 작품은 없을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조선 회화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조선의 산대놀이를 묘사한 그림은 분명 있습니다! 우리 그림이 아니라 중국 그림입니다.



《봉사도(奉使圖)》 제7폭, 1725년, 비단에 채색, 51×40cm, 베이징 중앙민족대학 소장


《봉사도(奉使圖)》는 조선 영조 1년(1725)에 조선을 다녀간 청나라 사신 아극돈(阿克敦, 1685~1756)이 조선의 각종 의례 절차와 풍속 등을 담은 그림 20장을 묶어 펴낸 화첩입니다. 위 그림은 그 가운데 7번째 작품으로 중국 사신 일행을 영접하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화면 왼쪽 중앙의 건물 안에 푸른 옷을 입은 이가 바로 중국의 사신이지요. 이 그림에는 중국 사신을 위해 광대들이 펼친 각종 연희가 생생하게 묘사돼 있습니다.


먼저 사신이 타고 온 가마 앞에서 한 광대가 접시를 돌리고 있지요. 마당 한가운데선 두 사람이 물구나무를 서고, 양옆으로 두 명씩 서서 탈춤을 추고 있습니다. 왼쪽 아래에선 줄타기 공연이 한창이고, 화면 오른쪽에는 두 바퀴 달린 장치가 보이고요. 예산대(曳山臺)라 부르는 이동식 공연무대입니다. 기암괴석 모양의 무대 사이사이에 난 작은 구멍마다 공연을 위한 작은 인형들이 숨어 있네요. 산대에 설치한 인형들을 움직이며 즐기는 이런 놀이를 ‘잡상놀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소설에서는 산대놀이 장면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을까요.


사내는 꼭대기에서 빠르게 미끄러져 내려오며 꽃다발을 여인들에게 내밀었다.
여인들은 그것을 받지 않고 펑펑 폭죽 소리와 함께 피어오르는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마지막 장미와 함께 등장했던 붉은 치마저고리 여인은 사라지는 대신 팔을 뻗어 꽃다발을 받았다.
그녀가 장검을 뽑아 휘두르자 사내가 허리를 숙이며 피했다.
그리고 둘은 동시에 산대에서 몸을 날려 공중제비를 돌며 땅으로 내려섰다.

잡상인 줄로만 여겼던 그들은 사람이었다.
여인은 검무의 달인 운심이었고 검은 얼굴의 사내는 이 모두를 설치하고 조종한 달문이었다.


《봉사도》의 예산대를 자세히 보면 갖가지 인물 형상을 한 잡상들이 보이지요. 그런데 달문은 잡상 대신 광대들을 직접 출연시켜 전무후무한 산대놀이를 만천하에 선보입니다. 연출의 달인이라고 해야 할까요. 조선 후기에 성행했던 산대놀이를 이렇게 구체적인 묘사한 그림은 전에도 후에도 없습니다. 참고로 이 화첩의 제11폭에도 광대가 등장합니다. 기다란 장대 위에 올라가 갖가지 재주를 펼치는 놀이인데요. 솟대 타는 장면은 불교 그림에도 제법 남아 있습니다. 19세기 말에 활동한 유명한 풍속화가 기산 김준근(金俊根, ?~?)도 솟대놀이 장면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좌) 《봉사도(奉使圖)》 제7폭, 1725년, 비단에 채색, 51×40cm, 베이징 중앙민족대학 소장

(우) 김준근, <솟대장이 놀고>, 조선 말기, 종이에 엷은 채색, 28.5×35cm, 독일 함부르크인류학박물관 소장



최고의 산대놀이 대결을 위한 비장의 카드, 서포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


소설 속에서 매설가(賣說家), 즉 소설가를 꿈꾸는 ‘나’는 달문의 공연을 보다가 깜짝 놀라게 됩니다. 달문이 산대에 펼쳐 놓은 이야기가 다름 아닌 당대 최고의 인기 소설 <구운몽>이었기 때문이지요. 달문의 완벽한 승리로 끝나는 산대놀이를 보며 ‘나’는 왜 그토록 소설가가 되려 했는지를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결국 모든 예술은 뿌리로부터 하나로 통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려면 자고로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는 걸 말입니다.


각자의 골방에 틀어박힌 수천 혹은 수만 명의 독자가
문장에 담긴 이야기를 통해 울고 웃으며 각자의 삶을 뜨겁게 뒤돌아보는 것이다.

벌떡 일어나서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달문의 산대여! 모독의 소설이여! 달문과 모독의 이야기여! 무궁무진 나아가라! 활짝 꽃피어라!


김탁환의 소설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2002)의 주인공이 바로 <구운몽>의 저자인 서포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이었지요. 서포의 다른 소설 <사씨남정기>의 집필에 얽힌 이야기이긴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 소설의 화자 이름이 바로 <이토록 고고한 연예>의 화자인 ‘나’의 필명과 똑같은 ‘모독’입니다. 같은 작가의 두 소설은 16년의 시간차를 두고 이렇듯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달문은 최고의 산대놀이 대결을 압승으로 이끈 바로 그 무대에서 <구운몽> 이야기를 펼쳐 보인 데 이어 본의 아니게 역모 사건에 휘말려 유배됐다가 돌아와 마지막 산대놀이에서 다시 한번 <구운몽>을 재현합니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결국 <구운몽>이었던 것이지요. 모든 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아득해져만 가는 최후의 산대놀이를 지켜보며 ‘나’는 이렇게 묻습니다.


"병신인 척하는 것이 아니라 병신이 되어 버린 자의 몸부림도 과연 춤인가.
춤이 될 수 있는가. 아름다울 수 있는가."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던 서포의 <구운몽>은 얼마나 유명했던지 심지어 영조 임금조차 읽고 “아주 좋다(極好矣)”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하지요. 그래서 화가들의 그림으로도 굉장히 많이 그려집니다. 이런 그림을 <구운몽도>라고 부르는데요. 지금까지 발견된 <구운몽도>가 30편이 넘고, 심지어 일본에도 그림이 남아 전해질 정도랍니다. 이 가운데 가회민화박물관에 소장된 8폭짜리 병풍을 보면, 여덟 번째 그림에 칼춤을 추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가회민화박물관에 소장된 8폭 병풍 <구운몽도>의 제 8폭 그림 부분


양손에 칼을 든 채 추는 쌍검무(雙劍舞)입니다. 이 그림에서 쌍검무를 추는 여인은 소설 <구운몽>에서 주인공 양소유의 다섯째 첩인 심요연입니다. 심요연은 어릴 때부터 익힌 무술 솜씨로 토번국의 자객이 돼 토번을 정벌하러 나선 당나라 장수 양소유를 찾아갑니다. 소설 후반부에서 월왕과 가무 대결을 펼칠 때, 뛰어난 검무 솜씨로 양소유를 돕게 되지요. 심요연의 신들린 검무를 본 월왕은 인간이 아닌 신선의 춤사위라며 감탄을 쏟아냅니다.


김탁환의 소설에는 달문과 같은 시대에 검무로 천하제일이란 명성을 얻은 밀양 기생 ‘운심’의 춤사위가 여러 차례 자세하게 나옵니다. 내키지 않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 춤을 추지 않겠다고 버티던 당대 최고의 기생 운심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 달문뿐이었지요. 당대 최고의 광대가 치는 북소리에 맞춰 운심은 보는 이의 혼을 빼앗는 검무를 선보입니다. 소설은 이 대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해 놓았습니다.


방 한가운데로 돌아온 운심의 다리와 팔이 따로 놀았다.
다리가 동쪽으로 향할 때 칼끝은 서쪽을 향했고, 다리가 서쪽으로 뻗을 때 칼끝은 동쪽을 노렸다.

팔다리가 따로 놀았지만, 운심의 몸은 흐트러지지 않고 흐름을 탔다.
어디로도 가지 않지만 어디로도 갈 수 있는 기운이 넘쳤다.

일곱 왈자뿐만 아니라, 방금까지 언성을 높였던 망둥이도
대문에서 앞을 막아섰던 태식도 또 울며 나를 찾아왔던 혜정까지도
달문의 북과 운심의 검무에 취했다.


도대체 어떤 춤이었기에 넋을 잃게 만들었을까요. 달문이 유랑단을 꾸려 흉년이 가장 심한 고을만 돌며 일종의 지방 순회공연을 펼칠 때도 운심은 끝까지 함께 합니다. 일편단심 달문을 향한 마음을 간직한 채 말이지요. 유랑단의 공연 역시 평생토록 한 번 볼까 말까 한, 운 나쁘면 돈 주고도 못 본다는 운심의 화려한 검무로 시작됩니다. 아마도 혜원 신윤복의 저 유명한 그림 <쌍검대무>에 보이는 곱디고운 자태가 아니었을까요.


<쌍검대무>, 신윤복, 비단에 채색, 28.2×35.6cm, 간송미술관 소장



그토록 아름다웠던 ‘사람’ 이야기


달문은 천의 얼굴을 가진 기인(奇人)이었을 겁니다. 그 이름 두 자에 붙은 수많은 수식어가 증명하듯 말이지요. 거지 달문, 광대 달문, 점원 달문, 조방꾸니 달문…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끝에 ‘사람 달문’이 있습니다. 사람 자체가 가장 큰 담보가 되는 ‘신뢰’의 인간 달문은 소설 속에서 몇 번이고 평범한 이들을 넘어서는 ‘큰 그릇’으로 묘사됩니다. 유랑단을 꾸려 스스로 구휼에 나선 것이 대표적인 일화이지요.


당대 제일의 광대라는 자부심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앞에서 소개한 산대놀이 대결에서 큰돈을 번 달문은 이제는 늙고 병들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선배 원로 재인들을 찾아가 돈을 모두 나눠줍니다. 광대로 태어나 뼛속까지 광대였던 달문이었지요. 소설의 화자인 나 ‘모독’이 그렇게 돈을 죄다 써버린 까닭을 묻자 달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돈을 많이 지닌 자가 부자가 아니라, 그 돈을 남에게 많이 준 자가 부자입니다.
오늘 밤, 저보다 더 많은 돈을, 그 돈이 꼭 필요한 이들에게 나눠 준 사람은 없겠죠?
그러니까 오늘은 이 나라에서 제가 제일 부자인 겁니다."


그런 달문이 당시 백성의 영웅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겁니다. 그만큼 저잣거리에 명성이 자자했으니 조수삼의 <추재기이>, 유재건의 <이향견문록> 같은 기록에도 빠지지 않고 이름을 올렸겠지요. 광대로서 뛰어난 재주뿐이었다면 글쎄요, 이 정도로 옛사람들이 각별하게 기억하고 기록하진 않았을 겁니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됨됨이로 많은 이를 웃고 울게 했고 진한 감동을 주었기에 인구에 회자되고 오랜 세월 기억될 수 있었던 것 아닐까요.



홍익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작가 미상의 <회혼례도> 병풍 부분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작가 미상의 8폭 병풍 <회혼례도>를 보면 큰 잔치에서 노는 광대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요. 특히 왼쪽 그림을 자세히 보면 독특한 옷차림을 한 채 흥에 겨운 춤사위를 풀어내는 광대의 동작이 무척 생동감 넘칩니다. 소설을 읽는 내내 광대 달문의 표정과 눈빛, 몸짓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습니다. 온 세상을 다 끌어안을 것처럼 힘차게 두 팔을 벌린 채 더덩실 흥겨운 춤사위에 빠진 달문의 모습을 말이에요.


소설의 화자인 나 모독은 정말 간절하게 소설가의 길을 꿈꿉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모독에게 ‘정말 가슴 뛰는 일’이어서, 이야기를 쓰고 있으면 심장이 요동을 친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소설에 빠지는 것을 담배 중독에 비유하기까지 합니다. “석 달 세책방 출입을 금지당한다는 것은 손가락을 자르는 것보다 끔찍한 고통이었다.”고 말이지요. 그런 그에게 상상할 수 없었던 자극을 준 것이 바로 달문이었습니다.


"간, 쓸개, 내장 다 드러내 놓아야 이야기할 맛이 나는 법입니다."


달문은 호기심이 넘치는 거지였지요. 글을 읽지는 못해도 말하는 재주가 남달랐습니다. 특히 다른 사람의 가슴 속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묘한 재주를 지닌 것으로 그려집니다. 재담꾼 달문이 매설가를 꿈꾸는 모독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배고픈 건 참아도 이야기 고픈 건 못 참겠습니다.
오늘 밤엔 이야기 한 바가지 푸짐하게 먹었으면 싶습니다."


모독은 13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단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그렇게 해서 몇 줄 안 되는 기록에서 확인한 어느 광대의 아름다운 삶을 오늘의 이야기로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이지요. 달문이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지금, 다시, 할 수 있는 건 말할 수 없이 강한 인간의 체취 때문 아니었을까요. 그것이 매설가 모독과 소설가 김탁환에게 쓰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든 동기가 아니었을까요.





몹시 더운 어느 여름날, 달문의 이야기를 가만히 떠올리며 수표교 언저리를 잠시 두런두런 거닐었습니다. 그 옛날 달문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을 만큼 많은 것이 변했지요. 하지만 소설과 소설 속 소설을 모두 읽은 뒤에 문득 깨달았습니다. 사람은 떠나도 이야기는 진하게 남는다는 것을 말이에요.




김 석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