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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속 백화점
근대 자유와 낭만의 상징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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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 1편을 통해 근대 문학 속 백화점을 만나보았는데요, 이를 통해 백화점은 근대 유통 산업의 중심, 모던보이와 신여성 사이의 낭만, 자유를 향한 비상의 공간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근대의 우리에게 백화점은 또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요? 우리 근대문학 세 편을 더 살펴보며 일상에서 백화점이 어떠한 의미의 공간으로 자리잡았는지 그 변화를 알아보겠습니다.



이효석, 모던보이의 일상을 묘사하다 (1938년)


“난로는 새빨갛게 타야 하고, 화로의 숯불은 이글이글 피어야 하고 주전자의 물은 펄펄 끓어야 한다. 백화점 아래층에서 커피의 알을 찧어 가지고는 그대로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전차 속에서 진한 향기를 맡으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는 내 모양을 어린애답다고 생각하면서, 그 생각을 즐기면서 이것이 생활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싸늘한 넓은 방에서 차를 마시면서, 그제까지 생각하는 것이 생활의 생각이다…”

-이효석, ‘낙엽을 태우면서’ 中




지난 시간 이효석의 작품 ‘수난’을 소개했는데요. 그가 1938년 12월 『조선문학독본』에 발표한 <낙엽을 태우면서>의 한 구절에서 백화점이라는 새로운 문물이 어떻게 일상인들에게 비쳐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효석은 경성제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모던보이였죠. 빵과 버터, 커피, 모차르트와 쇼팽의 연주곡, 프랑스 영화를 즐기던 그는 서양 화초가 가득한 붉은 벽돌집에서 생활했습니다. 이 벽돌집에 사는 동안 그는 평양의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였습니다. 욕실과 지하실이 있고, 거실에는 피아노가, 방에는 침대가 놓인 산장 같은 집이었죠. 이효석은 당시 1935년 12월에 개관한 화신 평양지점에서 커피를 사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채만식, 근대를 만나는 상징적 공간을 그리다 (1938년)



|백화점 옥상공원 전경



기자로 일하던 채만식이 기자직을 버리고 발표한 중편소설 『태평천하』와 장편 『탁류』는 그의 대표작입니다. 그중 『태평천하』는 역설적인 풍자 기법이 돋보이는 작품이죠. 소설 속 등장하는 속물적인 만석꾼 부자 윤직원 영감은 그의 애첩 열다섯 살 기녀 춘심이와 혼마치의 진고개(현재 충무로) 번화가를 오가며 이런 수작을 나눕니다.



“저어 참, 영감님?” “왜야?” “우리 저기 미쓰꼬시 가서, 난찌(런치) 먹구 가요?”

“난찌? 난찌란 건 또 무어다냐.”

“난찌라구, 서양 즘심(점심) 말이에요.”

“서양 즘심?”

”내애, 퍽 맛이 있어요!”

“아서라! 그놈의 서양밥, 말두 내지 마라!”

“왜요?”

“내가 그년의 것이 좋다구 히여서, 그놈의 디 무어라더냐 허넌 디를 가서, 한번 사먹다가 돈만 내버리구 죽을 뻔히였다!”

“하하하, 어떡허다가?”

“아, 그놈의 것 꼭 소시랑을 피여 논 것치름 생긴 것을 주먼서 밥을 먹으라넌구나! 허 참…….” 

-채만식, ‘태평천하’ 中



이 대목을 통해 무엇을 느끼셨나요? 당시의 백화점은 일반 백성이 근대를 눈과 손으로 느끼는 생생한 현장이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유진오, 변화하는 근대 여성의 일상을 서술하다 (1939년)

 


유진오의 『화상보』는 1939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장편소설입니다. 작품의 주인공인 시영의 누이인 보순은 당시 여학교를 졸업한 후에 백화점에 취직하게 되죠. 당시 백화점 종업원의 7할은 일본인, 3할은 조선인이었습니다. 보일러공, 전기공 등 일부 기술직을 제외하고 조선인 종업원의 대부분은 청소부나 배달부 등 하층 잡부로 일했다고 해요, 하지만 소설 속 보순은 매장에서 물건을 파는 판매사원으로 일한 것으로 보입니다.


누이 보순은 여학교를 졸업한 후 삼월백화점 점원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취직을 하는 것 보다 시집을 가라고 시영은 말했으나 「여태 오빠 장등이에 매달려 공부를 해왔으니까 인제 나두 좀 오빠 힘을 도아 들여야지 안허요」 그것도 그것이어니와 여학교를 졸업했다고 바로 시집을 가라는 것도 너무 젊은 처녀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어서 시영은 보순이가 하는대로 내버려둔 것이다”

-유진오, ‘화상보’ 中



흥미로운 변화 아닌가요? 새로운 문물의 상징이던 백화점이 이제 일상속 공간이 되어 가는 변화가 느껴지는데요, 문화작품 속의 백화점 3편을 통해 현대의 백화점을 만나볼까 합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백화점과 가장 가까운 시각일 텐데요, 여러분이 바라보는 백화점과 문학의 시선을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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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속 백화점
근대 자유와 낭만의 상징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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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작품의 공간은 그 시대를 담는 세계로 이야기됩니다. 때로는 작품 속 인물의 성격을 대변하기도 하죠. 1930년 10월 24일 우리나라 최초의 미스코시 백화점 경성점. 일제시대에 등장한 백화점이라는 공간은 당시 생활사적 면에서 일대 전환점이 될 만큼 새로운 공간이었습니다. 그만큼 당시 문학작품의 좋은 소재가 된 곳인데요, 우리 민족에게 있어 격변의 시기인 20세기 초의 문학에서는 백화점을 어떻게 그리고 있었을까요? 오늘부터 3편에 걸쳐 우리 근대 문학 속 백화점을 모습을 시대순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서춘(徐椿), 미스코시 백화점의 유통혁명을 논하다 (1931년)


“상업을 하더라도 가령 미스코시 같은 데를 가보십시오. 그 사람들은 많은 돈을 들여서 상품을 여러 가지로 또 많이 사다 놓고 팝니다. 그러니 상품 한 두 가지나 조금씩 내놓고 파는 상점보다 손님이 많이 옵니다. 또 파는 물건뿐 아니라 설비에도 많은 돈을 들였습니다.”

-서춘, ‘조선사람 빈궁의 실지적 7대 원인’ 中


서춘은 일제와 운명을 같이한 경제평론가입니다. 그는 1931년 4월 발간한 잡지 『혜성(彗星)』에 ‘조선사람 빈궁의 실지적 7대 원인’이라는 글을 게재하였죠. 이 글에는 미스코시 백화점이 일으킨 유통 혁명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국내 최초 백화점인 미스코시백화점 경성점 전경 칼라엽서


미스코시 백화점은 전근대적인 상품판매 방식의 변화를 요구했습니다. 이와 함께, 진열장 판매, 정찰제 및 자유관람제, 철저한 교환환불제, 다량 구매에 따른 가격 책정, 갤러리와 옥상공원 운영 등을 시행하죠. 이렇게 미스코시 백화점이란 이름은 우리 근대 유통사뿐 아니라 식민지 일제기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각문화와 근대 인식을 뒤바꾼 전환기적인 상징어로 역사에 남게 됩니다.



이효석, 근대의 낭만을 표현하다(1934년)


“검은 빛깔에 붉은 줄이 은은히 섞인 사치하면서도 결코 속되지 않은, 몸에 조화되고 취미에 맞는 넥타이”

-이효석, ‘수난’ 中


우리나라 대표적 단편소설 작가 이효석은 우리 근대의 작가이자, 언론인, 수필가, 시인입니다. 그의 작품 『수난』(1934년)에서도 백화점은 중요한 배경이죠. 여자 주인공이 백화점에서 넥타이를 골라주자 남자 주인공은 그녀의 예민한 미적 감각과 세련된 안목을 칭찬합니다.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넥타이라는 근대 문물을 통해 모던 보이와 신여성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죠.



미스코시백화점 경성점 3층에 위치한 넥타이(네쿠다이라 표기) 코너





이상, 근원을 향한 자유를 담다 (1936년)


“나는 어디로 들입다 쏘다녔는지 하나도 모른다. 다만 몇 시간 후에 내가 미스꼬시 옥상에 있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거의 대낮이었다. … 나는 거기 아무 데나 주저앉아서 내 자라 온 스물 여섯 해를 회고하여 보았다. … 이때 뚜우 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이상, ‘날개’ 中



미스코시백화점 경성점 옥상에서 본 충무로, 좌측에는 한국은행, 정면에는 구 상업은행 본점, 우측에는 중앙우체국이 보인다.


박제된 천재라 불리는 이상. 그의 수많은 작품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인 『날개』 후반부에 등장하는 독백이 있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은 일상에서 외출과 귀환, 자유와 억압의 수평적 왕복 운동을 계속하죠. 그러다 집으로의 귀환을 접고 미스코시 백화점 옥상으로 향합니다. 그곳에서 주인공은 억압적인 세계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미스코시 백화점의 옥상은 본질을 추구하는 자유와 해방의 세계를 향한 비상 의지가 담긴 공간인 것이죠.



미스코시백화점 경성점 옥상 및 전망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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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코시 백화점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근대의 아이콘, 한국 최초의 백화점(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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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백화점(미스코시백화점 경성점)은 지금으로부터 약 85년 전,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본점 자리에 위치해있었습니다. 사람들을 근대문화의 신세계로 안내하던 한국 근대사의 아이콘, 미스코시백화점 경성점은 그 곳에서 과연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을까요?



미스코시백화점의 매장 구성



1931년도에서 미스코시백화점 경성점에서 제작한 ‘경성삼월신관안내’를 보면 지하층에서부터 옥상에 이르기까지 층별 매장 구성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미스코시의 매장구성은 15년간(1930∼1945) 거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층별 구성 안내




상품과 라벨의 구성


(1) 상품





미스코시는 당시 상류층을 상대로 운영하였습니다. 상류층은 일본 현지 상품의 매입과 한국의 고급 토산품 직매가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일본 상품의 경우 매일 매입했으며, 한국 특산품의 활발한 매입과 판매는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또한, 미스코시 경성점 물산부에서는 각 도의 도지사나 산업국장에게 편지를 띄워 지역별 특산품이나 희귀품을 추천받아 판매하였습니다. 이 중에서 나전칠기나 도자기 등은 당시 미술관에서 전시한 이후에 주력 판매상품으로 개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당시 백화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상품은 양말, 넥타이, 화장품, 오복이었습니다.




(2) 라벨 및 상표




미스코시백화점 경성점은 다양한 상품구성과 함께 경영면에서도 철저한 정찰제 및 반품제 실시, 근대적인 판매관리 등을 도입하여 기존의 유통체계와 판매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상품을 진열해 놓고 파는 데 생소했던 당시의 한국인들에게 쇼케이스와 상품 진열을 위주로 한 미스코시백화점의 영업 방식은 신기하기만 한 새로운 세계였습니다. 쇼윈도와 진열장에 멋지게 진열된 상품들, 선진문화의 전시장 역할을 담당해 온 미술관, 각층을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 상류층의 휴식공간으로 이름이 높았던 옥상정원, 오전이면 ‘모닝커피’ 손님으로 가득한 커피숍 등 미스코시의 모든 공간은 당시 사람들이 ‘근대’를 만나는 현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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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 광복 70주년 맞아 광복의 역사적 의미 알리기 나서
대한민국 광복의 역사, 백화점에서 만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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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계, 광복 70주년 맞아 광복의 역사적 의미 알리기 나서





신세계백화점이 광복 70주년을 맞아 전국민과 함께 광복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깁니다.

 

신세계는 13일부터 24일까지 본관 3층에서 ‘광복 전후 근대 생활 사진전’을 열어 광복 전 1920년대 사진부터 광복 직후 1940년대 서울의 풍경과 서민생활상을 담은 귀한 사진 20점이 소개됩니다.

 

신세계는 이외에도 광복 70주년을 맞아 대통령 기념 우표로 보는 대한민국 공화국 변천사 전시, 본관 미디어 파사드 쇼, 태극기와 태극 바람개비 무료 증정 등 광복절의 의미를 일깨울 대대적인 애국 캠페인을 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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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백화점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근대의 아이콘, 한국 최초의 백화점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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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백화점이 탄생한 날

우리는 근대를 만질 수 있었고 볼 수 있었다.



미스코시백화점의 개점과 외관



미스코시백화점 경성점 신축장면(왼) / 조명으로 장식한 미스코시 경성점 외관 야경(오)


미스코시백화점 경성점 신관 낙성 포스터 및 건축 낙성문(왼) / 조선일보 개점 광고(오)


우리나라 최초의 백화점은 신세계백화점의 전신인 미스코시(三越)백화점 경성점입니다. 1930년 10월 24일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본점 자리에 지하 1층, 지상 4층의 대규모 신관을 만들어 근대적 백화점으로서 첫발을 내디뎠죠. 대지 730평, 건평 435평, 연건평 2,300평, 종업원 360여 명으로 당시 조선과 만주를 통틀어 최고 및 최대 규모의 백화점이었습니다.



백화점 개점 당일 1층 중앙로터리와 중앙 계단에 인산인해를 이룬 고객 모습


미스코시백화점 경성점 외부 쇼윈도우(왼) / 미스코시백화점 경성점 후면 전경(오)


 사진 엽서에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 미스코시백화점 경성점


당시 미스코시 경성점은 단순히 물건을 판매하는 백화점이 아니었습니다. 선진 문화를 흡수, 전파하는 ‘문화 살롱’이자, 근대를 직접 느낄 수 있는 경성 최고의 명물이었죠. 그래서 경성의 근대 문물을 소개하거나 경성 관광 기념엽서에 미스코시 경성점의 외관이 자주 등장하였습니다.



한국 최초의 백화점은 어떻게 운영됐을까?



미스코시백화점 동경 본점의 자동차 및 자전거 배달 장면, 경성점도 이와 비슷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백화점은 모든 매장이 직영 체제로 운영되었습니다. 관리가 어려운 귀금속이나 식품류 정도가 임대였고, 매출의 10% 정도의 수수료를 적용하였습니다. 경영면에서도 철저한 정찰제와 반품제 실시, 영수증 발급 등 근대적인 백화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미스코시 경성점의 또 다른 특징은 철저한 고객 서비스입니다. 매일 개점 시간 전에 전직원을 대상으로 인사부서에서 그날의 교육을 실시한 후 매장을 열었습니다. 판매원들은 한국인에겐 한국말로, 일본인에겐 일어로 정중하게 인사를 했습니다. ‘매장만 둘러보아도 왜 구경만 하느냐’는 눈치를 받지 않는 것도 당시의 고객에게는 생소한 경험이었죠. 그래서 이는 차별화된 고객 응대였습니다. 이와 함께 고객이 매장이 직접 방문하게 어려운 경우에는 전화로 주문을 받아 배달을 해주었습니다. 배달을 위해 한국인 자전거 배달부가 별도로 조직되었고, 지방의 경우 미스코시 배달차가 매일 오전에 상품을 배달하였습니다.



<근대의 아이콘, 한국 최초의 백화점 미스코시 경성점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