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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환 작가의 DSLR 여행기 웨일즈 2편]
아더왕의 전설이 살아있는 곳, 웨일즈 북부
이 환


웨일즈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를까? 어릴 적 음악 시간에 배운 웨일즈 민요가 간혹 있었고 프로축구 선수 라이언 긱스가 이곳 출신이란 것 외에 달리 떠오르지 않는다. 그만큼 이 지역에 대한 정보가 우리나라에선 전혀 없다시피 한 낯선 지역이다. 국내 대형서점조차도 웨일즈를 단일 주제로 한 책도 거의 없다.


웨일즈는 일찍이 북해에서 진출한 켈트인의 땅이었다. 1~5세기 로마 지배당했고 그 후 작은 왕국들로 나뉘다가 1282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가 정복한다. 이때부터 장남을 ‘프린스 오브 웨일즈 (Prince of Wales)라 칭했는데 그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1536년엔 헨리 8세에 의해 완전히 합병된다. 한마디로 북방 켈트인들이 살던 곳이 앵글로 색슨이 주류인 잉글랜드에 정복된 나라다. 



오늘날 인구는 3백만 명이 조금 넘는다. 총면적은 20,798km²로 딱 전라도 크기다. 주민들도 인정이 많다. 찰스 다윈만큼 업적이 컸지만, 덜 알려진 진화론의 선구자 러셀 월리스, 인도와 히말라야 전역을 답사해 지도로 만든 에베레스트 경, 영화배우 안소니 홉킨스와 케서린 제타존스의 고향이 이곳이다. 양의 숫자가 사람 수보다 4배 많은 1,200만 마리다. 



해안의 요새,
카나번 성


서북쪽에 위치한 고성마을을 찾았다. 북부에서 가장 유명한 카나번 성이다. 이곳 역시 콘위성처럼 잉글랜드가 13세기 이 지역을 점령한 후 바닷가 바로 옆에 세워진 성채다. 웨일즈는 다른 유럽 나라처럼 특히 고성이 많다. 크고 작은 성이 이 작은 땅덩어리에 무려 641개나 된다.



1969년 찰스 왕자의 황태자 서임식도 이곳에서 거행됐다. 많은 나라로 생중계해 더더욱 유명해졌다. 물론 영국 유네스코 문화유산 중 하나다.



숙소인 블랙보이인(Black Boy Inn)을 찾았다. 성채의 옆문을 들어가자마자 오른쪽에 바로 붙어있는 유서 깊은 숙소다. 옛 해적들이 묵었을 만한 중세풍 인테리어가 인상적이다. 실제로 이 호텔은 16세기 만들어졌다. 조명도 희미하고, 벽 장식이며 테이블도 중세시대로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묵었던 유럽 숙소 중 가장 몽환적인 곳이다.



아더왕의 전설이 깃든
스노든 산



다음날 카나번 성 주변을 산책했다. 해자 역할을 하는 호수 건너 언덕이 있어 성 전체를 조망하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수많은 요트와 고깃배들이 즐비하다. 가장 아름답고 견고한 성채 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는 주변 마을 사람들은 행복할 것 같다. 

 


카나번 성에서 벗어나 산 쪽으로 한 시간 정도 이동했다. 위용 있는 산들이 산맥으로 이어져 통상적인 잉글랜드와 확연히 다른 거친 지형이다. 가장 높은 산은 북쪽에 자리한 스노든 산(1,085m).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에드먼드 힐러리 경도 이곳에서 등반 훈련을 했다고 한다. 



우리 설악산이나 지리산에 비하면 산세가 한참 떨어지지만, 이곳엔 유명한 전설이 숨어있다. 바로 아더왕의 이야기! 원탁의 기사 랜슬롯 경과 왕비 기네비아, 마법사 멀린과 '보검' 엑스칼리버 전설의 주인공인 아더왕이 바로 저 산에서 활동했다는 것. 어릴 적, 동화와 영화 등에서 수없이 듣고 보아 온 전설의 지역이 바로 이곳이다. 하지만 실제 아더왕의 존재 여부는 확인된 바 없다. 오늘날 잉글랜드 주류인 색슨인들을 물리쳤다는 영웅담이 윤색돼 웨일즈의 영웅으로 변신한 거다. 


 



입구에서 자전거를 타고 숲길로 이동했다. 이곳을 즐기는 데 최고는 산악자전거와 카약 타기다. 수천 년 원시림 사이로 피어난 꽃들을 감상하며 바람을 맞부딪혀 본다. 호수 위엔 가족 단위 관광객들과 청년들이 이미 여기저기 노 젓기에 분주하다. 




저 멀리 스노든 산 정상이 대장처럼 우뚝 서 있다. 호수 가장자리엔 나무들이 물속에 잠긴 채 생생히 살아있다. 나무숲 사이를 가로질러 여기저기 움직여본다. 탐험가가 따로 있으랴. 노젓기에 집중하고 자연에 취하다 보니 잠시 현실감을 잊었다. 웨일즈의 자연 속 한가운데다. 몽유도원이 따로 있으랴! 그저 마음 내려놓는 바로 이 자리가 천국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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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트의 리얼한 마케팅 이야기
가치를 다시 발견하는 일, 재발견 프로젝트
#최훈학마케팅담당



지역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브랜드로 'Made in Japan'


일본, 특히 도쿄는 가깝기도 하고 새로운 상품과 트렌드에 대한 정보를 얻기 용이해 자주 방문합니다. 최근 도쿄의 쇼핑몰들을 방문해보면 ‘Made in Japan’, ‘Japan made를 강조한 상품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작년 여름 도쿄를 방문했을때 ‘Nest Robe’라는 남성 편집숍을 들어가서 하얀 린넨 셔츠 하나가 마음에 들어 살펴보니 상당히 고가여서 구매를 망설였습니다. 그때 점원이 다가와서 셔츠에 대해 설명해주는데 교토 산 마로 만든 셔츠라며 아주 자랑스럽게 말하던 것이 기억납니다. 상품에 Japan made 로고를 붙이는 것을 넘어 숍 하나를 일본산 제품으로만 꾸민다던가 아니면 ‘도쿄 교통회관’처럼 일본 각 지역 현 들의 특산품만을 모아서 쇼핑몰을 구성하기도 합니다. 


도쿄 kitte 쇼핑몰


도쿄 교통회관


▍시간이 증명해주는 의미있는 것들의 아름다움 ‘D&Department’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많은 분들도 알고 있는 일본의 디자이너 나가오카 겐메이가 운영하는 ‘D&Department’ 였습니다. ‘D&D’는 단순히 팬시하고 아름다운 것이 디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Long life design’ 즉 시간이 증명해주는 오래 사용해온 의미 있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강조하였습니다. 또한 나가오카 겐메이는 제품을 수집하고 리디자인하는데 그치지 않고 ‘D&D travel magazine’을 만들어 일본의 각 지역을 직접 방문하여 사용해보고 먹어보고 체험해 본 것을 바탕으로 지역다움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궁금하여 나가오카 겐메이의 저작과 인터뷰들을 수집하여 확인해보니, 일본 역시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도쿄에 지나치게 모든 것이 집중되고 지역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이 잊히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디자이너로서 이런 부분을 개선하는데 기여하고자 트래블 매거진 사업과 여행사업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지역 토산품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일, 이마트 '재발견 프로젝트'

재발견스토어 사진


나가오카 겐메이의 글을 읽고 저는 국내 여행을 다니며 보았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강원도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고 식사를 위해 찾은 어떤 항구의 토산품점은 베트남산, 중국산, 페루산 건어물들이 상당수였으며 강원도산 상품들은 보면서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상품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때 저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질 좋은 지역 토산품들이 제값을 인정받고,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상품화가 필요하고 바로 그것이 이마트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가치를 다시 발견한다는 의미에서 ‘재발견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이를 시작해보기로 했습니다.


< ‘재발견 프로젝트’ 상품화 과정 >


1. 각 지역, 도별로 지역의 주재료를 사용하여 만든 질 좋은 식품을 선별한다.


2. 각 지역의 특징은 살리되 ‘재발견 프로젝트’라는 공통 아이덴티티 하에 상품 디자인을 다시 한다.

   - 상품 패키지는 이마트 마케팅담당의 디자인팀 주관으로 하며 비용은 이마트에서 부담한다.

   - 상품의 용기를 변경할 경우 금형 비용 때문에 중소기업인 협력사에 부담이 될 수 있으므로 용기는 변경하지 않는다.


3. 상품을 구입하는 공간도 중요하므로 이마트 내에 ‘재발견 프로젝트 스토어’를 만들고 이 비용은 이마트가 주로 부담하되, 지역 상품을 활성화한다는 취지 하에 각 지역 지자체의 지원을 받는다.


이렇게 해서 재발견 프로젝트의 첫 스타트를 강원도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주요 상품 패키지



실제 프로젝트의 성과는 결국 매출로 판단해야 합니다. 비용을 더 투입한 만큼 더 많은 고객이 구입하고 만족한다면, 지역 토산품을 납품한 회사도 성장하고 저희도 보람이 있으니까요. 다행히 재발견 프로젝트 이전 대비 28% 매출이 신장하였습니다.


춘천점 재발견프로젝트 스토어 매출 그래프


물론 개선해야 할 부분도 있었습니다. 디자인 측면에서 기존 지역 토산품들이 갖고 있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니멀한 디자인을 선택했습니다. 작은 상품의 경우엔 별 문제가 없었지만, 볼륨이 큰 상품(황태, 다시마, 미역류 등)은 미니멀 한 디자인 컨셉으로 큰 포장재를 만들다 보니 밸런스가 맞지 않아 지나치게 단순해 보이는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강원도를 거쳐 제주도까지 입성한 이마트 '재발견 프로젝트'


따라서 두 번째 프로젝트 제주도에서는 아래와 같이 상품 디자인을 보완하였습니다. 재발견 프로젝트의 전체적인 디자인 아이덴티티는 유지하되 상단에 지역의 특징을 디자인화하여 반영하였고, 폰트 등 세세한 부분도 더 손을 보았습니다.


제주 주요상품 패키지


강원도와 제주도에 그치지 않고 각 지역별로 어느 정도 라인업이 형성되고 고객의 반응이 좋으면 수도권 대형점포 중심으로 확대해 갈 예정입니다. 또한 재발견 프로젝트는 단순히 지역 상품을 리디자인하는데 그치지 않고, 우리나라의 각 지역별 전통음식 중 잊혀 가고 있는 음식들을 복원하고 유지하는 것을 후원하고 나아가 더 많은 사람들이 접할 수 있도록 가정간편식으로 개발하는 것을 지원할 예정입니다.



어느 순간 우리는 글로벌 트렌드에 더 관심을 두고 세계에서 인정받는 해외 브랜드들에 더 열광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무조건 우리 것이 좋은 것이라는 자국 우월주의에 빠져서는 안되겠지만, 우리 땅에서 나고 자란 식품들의 가치를 바로 보고 알리는 것은 우리 세대뿐 아니라 이후 세대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식의 세계화를 이야기하지만, 우리 스스로 우리 식품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한식의 세계화를 이룰 수 있겠어요. 


재발견 프로젝트는 우리나라 모든 특산품의 가치를 다시 발견할 때까지 계속됩니다.





이마트 최훈학 마케팅 담당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IDEA와 MONEY의 사이에서,

회사와 고객의 사이에서

항상 방황하는 마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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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현 셰프의 음식을 쓰다
추억이 서린 곳, 종로의 노포를 말하다 
정동현
#정동현



종업원이 테이블을 흘깃 봤다. ‘왜 아직도 다 먹지 않았냐’는 무언의 메시지가 전해졌다. 시간은 저녁 9시 무렵이었다. 가게 영업시간은 오후 10시까지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종업원들은 이미 몸이 붕 뜬 듯 서로 떠들며 잡담을 했다. 


그곳은 오래된 가게, 노포(老鋪)였다.


“이래가지고는….”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졌다. 음식을 다 먹지 않고 나왔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뒷맛이 썼다.


 


낙원동과 익선동에는 이른바 ‘레트로’의 바람이 가장 거세게 몰아치고 있다. 1920~30년대 경성 건축왕이라고 불렸던 ‘정세권’이 개발하고 분양한 근대형 한옥 주택들은 여전히 낮은 키에 웅크렸다. 여전히 사람이 머무는 곳도 있지만, 태반이 뜯어고쳐 카페와 디저트 가게, 혹은 주점으로 형태를 바꿨다. 그 끝 무렵, 낙원상가로 이어지는 골목에는 ‘호반’이 있다. 



빛 바랜 골목의 40년 명성 호반


1961년 장사를 시작한 호반은 여러 차례 가게 자리를 옮겼다. 규모를 확장하기도 하고 개발 계획에 밀려 나가기도 했다. 그러다 2015년 6월에 잠시 문을 닫았다. 40년 넘게 가게를 이끌던 주인이 은퇴한 것이다. 1974년 호반에 들어와 막내 생활을 했던 지금의 주인장이 그 간판을 넘겨받았다. 그리고 그해 10월에 낙원동에 문을 열었다.  

 


이 집은 본래 이북음식을 전문으로 했다. 간간하게 맛이 오른 대창 순대, 선이 똑 떨어지는 수트처럼 잡내 하나 없이 삶아낸 우설을 먹으면 그 맥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 집을 이북음식에 한정 짓기에는 그 스펙트럼이 좁지 않다. 통통한 낙지를 살짝 매콤하게 볶아 참기름 조금 뿌려 또아리를 튼 소면을 곁들여 먹을 때, 직접 만든 두부를 밑에 깔고 감자, 무, 애호박을 올린 뒤 도톰한 병어를 센 불에 졸여낸 병어조림을 숟가락으로 퍼먹을 때, 찬 바람 부는 서해에서 올린 자잘한 강굴의 바닷내음을 느낄 때, 짤막한 한 줄로 소개할 수 있는 식당이 아닌 눈물과 땀이 흐르고 사랑과 우정이 맺힌 한 권의 긴 소설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든다. 



가게를 막 옮겼을 때는 휑한 빈자리에 마음이 쓰였으나 이제 예약을 하지 않고서는 자리 잡기가 쉽지 않게 되어 버렸다. 젊은이와 노인이 모두 함께 떠들고 노는 드문 집이다. 단품으로 보면 저렴하지 않지만 들어간 재료의 단가를 안다면 비싸다는 말을 할 수 없다. 손님을 하대하지 않고 늘 웃는 낯으로 대하는 것도, 시계처럼 정확한 맛을 유지하는 것도, 이 집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들이다.

 



노객들의 손때가 묻은 곳 OB낙원호프’ 


호반이 배를 가득 채우는 곳이라면 ‘OB 낙원호프’는 마른 목을 축이는 곳이다. 호프집이라고 하여 우습게 볼 개재가 아니다. 이 집의 역사도 40년을 넘는다. 그 시간의 길이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폭이 60cm 정도 되는 좁고 긴 나무 탁자가 학교처럼 세 줄로 늘어선 이 집에는 늘 낙원동과 인사동에 머무는 노객(老客)들이 가득 찬다. 붓을 들고 소리를 내어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도 이 집의 단골이다. 길가에 선 별 것 없는 호프집이지만 맥주 한잔을 시켜 목구멍으로 흘러내리면 새로운 세상이다. 열대과일 향이 살짝 풍기는 상쾌한 생맥주는 본래 마시던 맥주 맛이 맞는지 의심하게 한다. 종업원에게 물으면 그저 ‘관리를 잘해서’라고 말하며 살짝 웃고 만다. 그러면 그 맛을 확인하려고 다시 또 한잔을 시키게 된다. 



안주라고 치면 흔한 마른안주 등속이 전부다. 그러나 나무 그릇에 담긴 마른안주나 손수 구워주는 스팸을 시켜놓으면 상이 가득 차지 않아도, 캐비어니 푸아그라니 하는 것들로 값을 치르지 않아도 가슴이 가득 찬다. 그 뒤로 노란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조약돌 던지듯 서로 말을 톡톡 던지면 늘 바쁘게 흘러가는 시간은 작은 구름처럼 잠시 멈춰 지친 몸을 누인다. 


  



90년대의 추억이 흐르는 LP뮤직바 라커스


만약 밤이 깊다면, 만약 날이 춥다면, 음악을 들으며 몸을 녹이고 갈 곳 없는 마음을 쉬게 하고 싶다면 종로2가 ‘라커스’에 가야 한다. 오래전 흔했던 LP판을 틀어주는 이른바 ‘뮤직바’인 라커스는 1999년 문을 열었다. 스스로를 ‘디제이’라고 칭하는 주인장은 신청곡을 받지만 LP와 CD로 가진 음악만 튼다. 어차피 인터넷 연결이 되어 있지 않아 없는 곡을 틀 방법도 없다. 


이곳에 오는 사람은 근처 어학원의 학생들, 어학 강사 외국인들, 회사원들, 단골이라고 칭하는 중년들, 이제 막 단골이 된 20대 등 종잡을 수 없는 무리가 이 집에 드나든다. 이곳을 노포라고 부르기에는 연식이 길지 않지만 이런 종류의 술집이 도심 한복판에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도감이 든다.  



안주라고 부를 것은 별로 없다. 그저 마른 옥수수를 씹으며 맥주나 위스키 따위를 시켜 마신다. 그러다 옛날 아버지가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짐빔’을 즐겨 마셨다는 이야기가 떠오르면 ‘짐빔 콕’ 같은 것을 시키게 된다. 캐러멜의 진한 단맛, 옥수수로 빚은 버번 위스키의 희미한 단맛이 겹쳐 쌓인다. 차갑고 달달하며 독한 액체가 몸으로 퍼져 나간다. 나의 아버지가 마셨고 취했던 그 술이다. 20년 전에도 30년 전에도 듣던 음악이 허공에 맴돈다. 눈을 감고 앞으로만 달려가던 몸이 멈춘다. 쌓인 시간 위에 앉아 작은 잔을 만지작거린다. 오래전 그때처럼, 그 사람처럼, 오래된 가게에서.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 정동현 셰프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에서 '먹고(FOOD) 마시는(BEVERAGE)'일에 몰두하고 있는 셰프,
오늘도 지구촌의 핫한 먹거리를 맛보면서 혀를 단련 중!
저서로는 <셰프의 빨간 노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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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가깝고도 먼 동물 ‘돼지’를 찾아서
김 석

왜 제가 돼지를 가깝고도 먼 동물이라고 했을까요. 이유는 이렇습니다. 옛 그림을 감상하고 공부하면서 저는 특별히 ‘동물’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옛 그림에서 동물을 찾으면 학창 시절 생물 수업 시간에 배운 어류-양서류-파충류-조류-포유류 분류법에 따라 목록을 만들어서 정리를 해놓는 거죠. 옛 그림에는 정말 온갖 동물들이 다 있습니다. 한데 워낙에 보기 힘든 동물들이야 그렇다 쳐도 돼지 그림은 정말 드뭅니다. 이상하죠?


왜 그럴까, 이유를 따져봤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인간과 가장 가깝게 지낸 동물로 크게 네 종류가 있지요. 개, 소, 닭, 그리고 돼지입니다. 이 중에서도 개와 소, 닭은 옛 그림에 굉장히 많이 보입니다. 제가 2017년 이맘때 닭을, 작년엔 개를 묘사한 옛 그림을 소개해 드린 적이 있는데, 그때는 재료가 차고 넘쳐서 쓸 그림을 선별해야 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돼지는 아무리 뒤져봐도 옛 그림에서 보이지 않더라는 겁니다.


 2018년 무술년 개 이야기, 2017년 정유년 닭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옛 그림에 돼지가 안 보이는 까닭은?


그래서 제 나름대로 추측을 해봤지요. 네 가지 동물 다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돼지에게만 없는 건 뭘까. 개와 소, 닭은 각기 인간에게 이로움을 주는 장기를 하나씩 갖고 있습니다. 개는 짖어서 집을 지켜주고, 소는 힘들여 밭을 갈아주고, 닭은 울어서 새날을 알려주죠. 그런데 돼지는 아무 재주가 없어요. 먹고 싸고 자는 게 전부니까요. 그래서 옛 화가들이 유독 그렇게 돼지에게만은 인색했던 걸까 싶기도 합니다.


김준근 <산제>, 종이에 수묵, 23.2×16.0cm,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그래서 더욱 이 그림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답니다. 조선 시대 유일의 돼지 그림이라고 하면 과장이겠지만, 돼지를 주인공으로 그린 조선 시대 유일의 그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 작품은 조선 말기의 화가 기산 김준근(金俊根, 미상)의 <산제>입니다. 멧돼지 두 마리가 사이좋게 내달리는 장면을 그렸어요. 등에 날카로운 털이 수북한 것이나 날카로운 어금니를 보더라도 영락없는 멧돼지입니다.


김준근이라는 화가는 베일에 싸인 인물입니다. 언제나 태어나고 언제 돌아갔는지 남아 있는 기록이 없거든요. 조선 말기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대표적인 개항장이었던 원산을 근거지로 그림을 그려 팔았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을 뿐이지요. 생애에 대해선 알려진 게 없는데, 특이하게도 김준근의 그림은 전 세계에서 무려 1,800점이 넘게 확인됐습니다.


외국인들의 방문이 활발해지던 시기에 김준근은 조선 풍속화를 그려 팔았습니다. 그렇게 판매한 그림들이 훗날 세계 각국의 박물관에 소장되면서 이 물음표 같은 화가의 이름은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됐지요. 그래서 김준근의 그림을 ‘수출 풍속화’라 부르고, 김준근을 ‘미술 한류의 원조’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제가 아는 한 김준근의 <산제>는 돼지가 주인공인 조선 유일의 그림입니다.



 동물 그림의 ‘끝판왕’ <수렵도>와 <호렵도>


그래도 설마 이게 끝은 아니겠지 하던 차에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죠. 혹시 사냥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에 멧돼지가 있지 않을까? 조선 시대에는 사냥 그림이 꽤 많이 그려졌습니다. 그중에서도 <수렵도>, <호렵도>는 동물 그림의 ‘끝판왕’이라 할 만큼 갖가지 동물들이 그야말로 총출동합니다. 물론 여기서 멧돼지가 빠질 리 없고요.


 

<수렵도 12폭 병풍>, 조선 17세기 후반~18세기 전반, 비단에 수묵채색, 각 132×52cm


조선 후기의 12폭짜리 병풍 수렵도의 가장 오른쪽 제1폭입니다. 가운데 말 탄 사냥꾼이 시커먼 네발짐승을 향해 창을 내리꽂는 모습이 보이지요. 어떤 동물 인가 했더니 멧돼지였습니다. 이 병풍의 세 번째 폭에도 사냥꾼을 피해 달아나는 멧돼지 한 마리가 그려져 있습니다. 누군지 몰라도 이 정도면 꽤 실력 있는 화가가 그렸을 겁니다.


 

<호렵도 8폭 병풍>, 조선 19세기, 종이에 채색, 78.5×351cm


그보다 훨씬 뒤에 그려진 이 병풍에도 멧돼지가 등장하는데요. 세 번째 폭을 보면 사냥꾼의 화살을 피해 달아나는 짐승들이 바로 멧돼지입니다. 이번엔 세 마리가 떼로 도망치고 있군요. 위의 <수렵도>에 비하면 수준이 좀 떨어지지만, 쫓고 쫓기는 팽팽한 긴장감을 해학으로 승화시킨 화가의 재치가 돋보입니다. 조선 후기에는 <수렵도>나 <호렵도>가 유행했으니 굳이 확인해보지 않아도 대부분 멧돼지가 그려져 있을 겁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합니다. 옛 그림에 등장하는 돼지는 모두 ‘멧돼지’라는 것을요. ‘집에서 기르는 돼지’는 없습니다. 먹고 싸고 자는 것밖에 몰라서 안 그린 게 아니라는 거예요. 만에 하나 어딘가에 집돼지가 숨어 있다면? 글쎄요. 그런 게 있었다면 진즉에 알려졌겠죠. 먹고 싸고 자는 게 특기인 집돼지는 그림의 모델이 된 적이 없습니다. 조선 시대 이전 그림이나 유물에 등장하는 모든 돼지는 100% 멧돼지입니다.



 문헌 기록에 담긴 이런저런 돼지 그림


해마다 이맘때면 꼭 찾아가 보는 박물관이 있습니다. 경복궁 안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이에요. 어느 해부턴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열리는 띠 동물 전시 때문이랍니다. 돼지 그림을 워낙 찾기가 힘들다 보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올해도 가봤죠. 하지만 역시나 새로운 그림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당사주》에는 띠 동물 그림과 함께 그에 해당하는 점괘가 적혀 있습니다.


다만 돼지를 그린 흥미로운 책이 보이더군요. 당사주(唐四柱)라 해서 사람의 사주를 토대로 운세를 풀이한 책인데, 여기에 돼지띠 점괘를 풀이하면서 돼지 그림을 그려놓았습니다. 그냥 봐도 그림 수준은 상당히 떨어지긴 합니다만, 똑같은 돼지를 참 다르게도 그려놓은 것이 보고 있으니 절로 웃음이 나오더군요. 심지어 맨 오른쪽 것은 돌돌 말린 꼬리가 아니었다면 무슨 동물인지 알 수조차 없습니다.


 

이의조 《가례증해 家禮增解》, 1792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그런가 하면 돼지를 부위별로 설명해놓은 특이한 그림도 있답니다. 조선 후기의 학자인 이의조(李宜朝, 미상)가 주자의 《가례(家禮)》를 보충해서 쓴 《가례증해(家禮增解)》란 책에 이런 그림이 실려 있더군요. 요즘 정육점에 가면 볼 수 있는 부위별 고기 설명서와 비슷하지요. 조선 시대에 제사 지낼 때 돼지고기의 어떤 부위를 쓰고, 어디에 어떻게 올려놓는지 설명한 내용입니다. 다른 데선 보기 힘든 그림이에요.



  

 <시정 豕鼎>, 조선시대, 높이 37.4cm,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제사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돼지고기는 심지어 담은 그릇도 따로 있었더군요. 놋쇠로 만든 이 그릇의 이름은 <시정>입니다. 풀이하면 ‘돼지 솥’이에요. 뚜껑에 돼지 시(豕) 자가 새겨져 있지요. 상당한 위엄과 격조가 엿보이는 이 그릇은 종묘 제례에서 삶은 돼지를 담은 그릇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몸체를 지탱하는 세 발의 모양마저 돼지입니다. 이런 곳에 돼지가 숨어 있을 줄이야.



돼지는 본디 인간의 수호신이었다!


조선 왕실의 가장 크고 중요한 제사였던 종묘 제례에 돼지 모양 그릇이 쓰였다! 여기서 돼지는 ‘신성성’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그저 먹고 싸고 자는 집돼지가 아니라 멧돼지라면 그럴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저 지체 높은 궁궐 지붕 위에 올라앉아 망을 보고 있을 수 있는 거 아닐까요. 궁궐에 가면 지붕 위에 까만 조각상이 줄지어 있는 걸 볼 수 있지요. 잡상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경복궁 경회루 추녀마루의 저팔계 잡상


잡상은 궁궐 건물을 지키는 수호신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녔습니다. 궁궐마다 잡상의 개수나 배열 형식은 조금씩 다릅니다. 같은 궁궐이라도 건물에 따라 또 다르고요. 하지만 일반적인 순서는 맨 앞에 있는 것이 저 유명한 《서유기》의 삼장법사, 그 뒤가 손오공, 그리고 다음 선수가 바로 저팔계예요. 돼지입니다. 고개를 뒤로 젖힌 모습이 특징이지요. 잡상이 11개로 가장 많다고 알려진 경복궁 경회루 지붕에는 저팔계가 두 개입니다.



 

불국사 극락전 앞과 처마 밑의 돼지는 어느 돼지띠 해에 화재예방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전해집니다.


이게 궁궐에만 있었느냐? 유서 깊은 사찰에서도 돼지를 만날 수 있습니다. 경주 불국사 극락전 앞에 놓인 황금돼지를 본 적 있으신가요? 마침 올해가 황금돼지다 뭐다 해서 요란하게들 떠들더군요. 돼지가 뜬금없이 왜 사찰 마당에 떡 하니 앉아 있을까요.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화재가 워낙 걱정이 되다 보니 어느 돼지띠 해에 만들어서 저렇게 ‘화재 예방’을 상징하는 의미로 두었답니다. 


그런데 불국사에는 돼지 한 마리가 더 있습니다. 불국사 극락전 처마 밑에 저렇게 돼지가 꼭꼭 숨어 있었더군요. 제아무리 불국사를 많이 가본들 처마 밑까지 샅샅이 살피지 않는다면 저 돼지를 어떻게 찾아내겠어요. 불에 대한 염려가 얼마나 컸으면 저렇게까지 했을까 싶습니다. 여기서 확인한 사실, 돼지는 불을 막아주는 존재로 여겨졌다는 겁니다. 화재로부터 절을 지켜주는 수호신이었던 거죠.



풍성하고 넉넉한 한 해가 되길 바라며


이렇듯 유교 문화에서건 불교 문화에서건 돼지가 ‘인간의 수호신’으로 여겨진 건 아주 오래전부터였답니다. 나쁜 기운으로부터 궁궐을 보호하고, 화마(火魔)로부터 사찰을 지키는 신성한 존재로 인식돼온 것이죠. 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그런 의미를 찾기 힘들어졌어요. 도리어 천덕꾸러기 신세가 돼버렸죠. 실제로 얼마 전엔 멧돼지가 사람을 해친 사건도 있었으니까요.


그럼에도 사람들은 지금도 돼지 저금통에 한 푼 두 푼 동전을 모읍니다. 저금통이 가득 차서 잔뜩 배가 부르면 그만큼 풍요와 행운이 깃들 거라 믿고 싶은 마음 때문이겠지요. 게다가 돼지꿈은 좋은 꿈이라고도 하잖아요. 해가 바뀐다고 해서 사는 일이 벼락처럼 좋아지는 건 아닐 테지만, 새해에는 부디 몸도 마음도, 또 기왕이면 주머니 사정도 퉁퉁하고 튼실한 돼지처럼 넉넉해지길 마음속으로 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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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건국 1,100년 고려 예술의 정수를 엿보다
김 석

‘고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뭘까요? 누가 이렇게 묻는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전 세계에 코리아(Korea)라는 이름을 각인시켰다는 사실? 아니면 유교를 국가 경영의 근본이념으로 삼은 조선과 달리 불교국가였다는 점? 전 세계를 매혹시킨 고려청자의 나라? 외세의 침략 앞에서 각고의 노력으로 완성한 팔만대장경의 나라? 대답은 천차만별이겠지요. 솔직히 잘 모르겠다는 답이 가장 많지 않을까요. 시기로 보나 기록으로 보나 조선은 가깝고 고려는 멀었던 것이 현실이니까요. 


고려가 건국한지 올해로 꼭 1,100년이랍니다. 따져보니 태조 왕건이 나라를 세운 것이 918년이었습니다. 혹시 이 시기를 다룬 추억의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 기억하시나요? 저도 굉장히 열심히 본 기억이 납니다. 기록을 들춰보니 이 드라마가 남긴 자취들이 참으로 놀랍더군요. 2000년 4월부터 2002년 2월까지 무려 200편이 방송됐습니다. 역사 드라마 최장기 방송 기록이었지요. 게다가 시청률 60%를 돌파한 마지막 드라마란 기록까지 남겼습니다. ‘전설 같은 시대’를 다룬 ‘전설 같은 드라마’였던 겁니다. 


방영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모은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


드라마까지 들먹이며 새삼스레 그 시대를 들추는 까닭이 있습니다. 고려 건국 1,100주년을 맞아 국립중앙박물관이 마련한 특별전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 때문이에요. 상당히 멀게만 느껴지던 고려시대를 딱딱한 역사책이 아닌 박물관 전시실에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온 겁니다. 게다가 전시를 앞두고 과연 북한이 자기네 국보인 <고려 태조상>을 보내올 것이냐 말 것이냐 비상한 관심이 쏠리기도 했지요. 남과 북이 유물을 교환 전시한 사례는 전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는 뭔가 될 것 같은 기대감이 더 컸던 게 사실입니다. 



 보고도 믿기 힘든 극사실주의 조각 


처음 이 조각상을 본 순간, 차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세상에나,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거든요. 저 눈동자는 대체 뭐란 말인가. 코며 입이며 귀도 그렇지만, 입가와 미간과 이마의 잔주름까지 어쩌면 저리도 생생하게 살아있을 수 있는가. 현대 조각품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극사실적인 표현이 자못 섬뜩함마저 느끼게 합니다. 솔직히 가짜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어요. 우리 미술사에 이런 조각상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심지어 교과서에서조차 본 일이 없었으니까요. 


<희랑대사상 乾漆希朗大師坐像>, 고려 10세기, 건칠과 나무에 채색, 높이 82.4cm, 합천 해인사, 보물 제999호 


이 조각상의 주인공은 고려 건국 시기에 유명했던 승려 희랑대사(希朗大師)입니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을 막후에서 도왔고, 건국 이후에는 왕의 스승이 된 인물이었다고 하지요. 합천 해인사를 근거로 화엄종을 크게 일으킨 고승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었으니 그 모습을 조각으로 새겨 후대에 남겼겠지요. <희랑대사상>은 10세기 중반 조각 분야 최고 걸작이자, 국내 유일의 고승 초상 조각으로 평가됩니다. 나무를 깎아 만든 조각품이 그 오랜 세월 동안 이토록 온전하게 보존돼 왔다는 사실 자체도 놀라울 뿐입니다. 


그래서 천 년도 넘은 조각상이란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더군요. 그런 스님이 천 년 세월 동안 가야산 해인사에 기거하다 이번에 처음 절 밖으로 나들이를 했습니다. 이것 자체만도 엄청난 사건이에요. 만약 북에서 태조 왕건의 조각상이 내려와 둘의 극적인 만남이 성사됐다면 “스승과 제자, 천 년만의 해후”가 됐을 겁니다. 두 분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시라고 박물관에서 미리 널찍하고 조용한 공간까지 마련해 놓았더군요. 전시 기간이 아직 넉넉하니 기적 같은 만남이 성사될지 혹시 또 모를 일입니다. 


  

<고려 태조상 高麗太祖像>, 고려, 개성시 해선리 현릉, 높이 138.3cm, 조선중앙역사박물관, 북한 국보 



 국내에 있어도 보기 힘든 희대의 유물들 


<희랑대사상>과 같은 귀한 유물은 국내에서도 참 보기가 어렵지요. 웬만한 규모의 박물관급 전시가 아니면 사실 평생에 한 번 만나기도 힘듭니다. 고려 건국 1,100년이란 확실한 계기가 아니었다면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을 유물들을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다는 건 굉장한 행운이에요. 전문가가 아닌 다음에야, 아니 전문가라 할지라도 전시장에 있는 모든 유물을 속속들이 보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애써 본들 그 많은 유물이 전부 각별한 감동을 주거나 기억에 남는 것도 아니고요. 골라보기가 필요한 이유이지요. 


 

(1) <장곡사 금동약사불좌상 長谷寺 金銅藥師佛坐像>, 고려 1346년, 금동, 높이 88.0cm, 청양 장곡사, 보물 제337호

(2) <대승사 금동아미타불좌상 大乘寺 金銅阿彌陀佛坐像>, 고려 14세기, 금동, 높이 87.5cm, 문경 대승사, 보물 제1634호


이 불상을 한 번 보세요. 박물관과 사찰을 드나들면서 숱하게 많은 불상을 봐왔지만, 이렇게 잘 생긴 불상은 좀처럼 만나기 어렵습니다. 저만 그런가 싶어 주변에 물어보니 전시회에 다녀온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 불상에 유독 끌리더라고 하더군요. ‘고려의 대표 미남’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는 반응들이었지요. 충남 청양군 칠갑산에 있는 사찰 장곡사(長谷寺)에 있는 이 불상은 난생 처음 절 바깥에 나온 귀한 유물입니다. 나란히 전시된 또 다른 보물 <대승사 금동아미타불좌상> 역시 처음으로 절 밖에 나와 전시되는 불상이에요.  


 

(1) <안향초상>, 전(傳) 이불해, 조선 16세기 중엽, 비단에 색, 88.8×53.3cm, 안동 소수서원, 국보 제111호

(2) <이색초상>, 작가미상, 조선 18세기, 비단에 색, 28.2×24.8cm, 기탁1157 한산이씨대종회, 보물 제1215호


여기 초상화 두 점이 있습니다. 왼쪽은 원나라에서 이 땅에 주자성리학을 최초로 들여온 안향(安珦, 1243~1306), 오른쪽은 고려 말의 대학자로 정몽주와 정도전 등의 스승이기도 했던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입니다. 두 초상화 모두 조선시대 작품이긴 합니다만 고려시대 인물 초상화로는 워낙 희귀한 그림들이어서 나란히 국보와 보물로 지정돼 있지요. 전시장 후반부에 단연 두드러지는 이 초상화들 역시 이만한 규모의 대형 전시가 아니면 만나기 힘든 귀한 작품들입니다. 


어떤 유물이 오래 보존되고 않고를 좌우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재료’입니다. 돌이나 금속으로 만들어진 유물은 잘 변하지 않기 때문에 멀게는 구석기 시대 물건까지도 온전하게 남아 전하는 것들이 많지요. 청자와 같은 도자기류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그림’이에요. 종이나 비단을 재료로 삼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오래 보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만 해도 임진왜란 이전 그림은 손에 꼽을 정도로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은 거고요. 그러니 더 앞선 고려시대의 그림은 더 말할 것도 없겠지요.  


<기마도강도 騎馬渡江圖>, 전(傳) 이제현, 고려 14세기 전반, 비단에 색, 28.7×38.5cm, 국립중앙박물관 


그래서 실은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라 해도 과언이 아닐 고려시대의 그림에 더 주목하게 되나 봅니다. 왼쪽 위는 고려 후기의 대학자인 익재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작품으로 전하는 그림입니다. 오른쪽 상단에 ‘익재’라는 글씨와 ‘이제현인’이란 도장이 찍혀 있지요. 눈 덮인 겨울에 말을 타고 강을 건너는 장면을 묘사했습니다. 먼저 건넌 두 사람이 일행을 돌아보는데, 뒤따른 이들은 어떻게 건너야 하나 고민이 꽤 많은 모양입니다. 비단이 많이 해지긴 했지만 이만한 상태로 전해지는 것만도 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엽기도 獵騎圖>, 전(傳) 공민왕, 고려 14세기(추정), 비단에 색, 25.0×22.2cm, 국립중앙박물관

(2) <출렵도 出獵圖>, 전(傳) 공민왕, 고려 14세기(추정), 비단에 색, 25.0×21.0cm, 국립중앙박물관


위의 세 그림은 모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인데요. 특히 왼쪽과 가운데는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었다는 고려 31대 임금 공민왕(恭愍王, 1330~1374)의 작품으로 전해집니다. 말 타고 사냥에 나선 모습을 역동적으로 포착한 그림이지요. 화풍도 크기도 비슷하다보니 연구자들은 같은 두루마리에서 따로따로 분리된 그림으로 보고 있습니다. 보존 상태는 썩 좋지 않지만 고려시대 그림이 워낙 희귀하다보니 존재 자체만으로도 귀하고 감사한 작품들입니다. 두 그림을 한데 묶어서 <천산대렵도 天山大獵圖>라 불러 왔지요. 


 

 

(1) <염소 羊圖>, 작가미상, 고려 14세기(추정), 비단에 색, 23.5×14.9cm, 국립중앙박물관

(2) <이양도 二羊圖>, 공민왕, 고려 14세기, 비단에 엷은 색, 22.0×15.7cm, 간송미술관


동물 그림을 유난히 좋아하는 제게 더 특별하게 다가온 작품입니다. 염소 네 마리를 털 한 올 한 올까지 세세하게 그려냈을 뿐 아니라, 위에 소개한 다른 그림들에 비해 보존 상태도 훨씬 좋습니다.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간송미술관에 이와 유사한 <이양도 二羊圖>란 그림이 남아 있습니다. 화풍과 크기가 비슷한 이 그림 역시 공민왕의 작품으로 전하고 있지요. 공민왕이 그렸건 아니건 간에 고려시대 것으로 여겨지는 이런 그림들을 전시장에서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가 결코 흔하지 않다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외국인도 극찬을 아끼지 않은 고려의 예술  


그런가 하면 멀리 바다를 건너와 잠시 고국 땅을 밟은 우리 유물들도 있습니다. 해외 유수의 박물관(미술관)에서 한국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는 귀한 존재들이지요. 일부러 해외까지 나가서 찾아가보지 않는 한 일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것들. 전시 기획자들이 어렵게 섭외해서 모셔왔으니만큼 더 관심을 가지고 눈여겨볼 수밖에요. 고려를 대표하는 3대 문화유산으로 흔히들 금속활자, 팔만대장경, 청자를 꼽습니다. 어떤 이는 청자, 불화, 사경을 들기도 하고요. 


굳이 세 가지로 국한할 이유는 없습니다만 저는 청자, 불화, 나전 이 세 가지에 주목합니다. 먼저 고려시대를 넘어 우리 역사를 대표하는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손꼽히는 고려청자입니다. 1123년에 고려를 다녀간 송나라의 사신 서긍(徐兢, 1091~1153)은 귀국한 이듬해에 보고서를 작성해 황제에게 바칩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宣和奉使高麗圖經》이란 이름의 이 보고서는 고려의 제도와 문물, 풍습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자료인데요. 이 책이 특히 더 유명해진 것은 바로 아래 구절 때문입니다. 


"고려인은 도기의 푸른 빛깔을 비색이라고 하는데, 요 몇 년 사이에 도기 만드는 솜씨와 빛깔이 더욱 좋아졌다."


저 유명한 ‘비색 청자’라는 말이 바로 여기서 나온 겁니다. 세상의 수많은 청자 가운데 오로지 고려의 청자의 저 신비롭기 그지없는 빛깔에만 허락된 ‘비색’이란 표현을 황제에게 바치는 공식 문서에 적어놓은 것이지요. 그런가 하면 일제강점기에 청자에 눈이 먼 일본인들은 고려시대 무덤을 마구잡이로 파헤쳐서 국보급 청자를 무더기로 약탈해갔습니다. 청자를 향한 일본인의 광적인 집착이 낳은 쓰라린 역사의 단면이죠. 하지만 분명한 건 일찍이 청자를 극찬한 것도, 청자에 집착한 것도 ‘외국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1) <청자 구름․학․구화무늬 피리 靑磁象嵌雲鶴菊花文笛>, 고려 13세기, 길이 36.5cm, 메트로폴리탄박물관

(2) <청자 동자모양 연적 靑磁童子形硯滴>, 고려 12세기, 높이 11.0cm,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실생활에서 쓰는 그릇 하나에도 예술혼을 불어넣은 고려 도공의 수준은 대체 어느 정도였을까요. 재미있는 건 청자 가운데 간혹 악기가 보인다는 겁니다. 대개는 장구가 흔한데 이번에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서 모셔온 물건은 특이하게도 피리입니다. 이걸 실제로 연주하려고 만들었을까요. 아니면 감상용일까요. 뭔가 자꾸만 상상을 하게 만드네요. 또 하나는 동자가 오리를 가만히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의 연적입니다. 손바닥에 쏙 들어올 만큼 작은 물건인데도 어쩌면 저토록 사랑스러운지. 국보니 보물이니 다 제쳐놓고 이것만 내내 바라보며 흐뭇했답니다.


 

(1) <나전 국화넝쿨무늬 경함 螺鈿菊唐草文經函>, 고려 13세기, 나무에 칠, 높이 25.5cm, 너비 47.4cm, 영국박물관

(2) <나전 대모 국화넝쿨무늬 합 螺鈿玳瑁菊唐草文三葉形盒>, 고려 12세기, 나무에 칠, 높이 4.1cm, 너비 10.2cm,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앞에서 소개한 송나라 사신 서긍이 홀딱 반한 게 하나 더 있습니다. 흔히 나전칠기라고 부르는 공예품이에요. 얇게 갈아서 만든 조개껍데기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오려서 장식하는 기법을 나전(螺鈿)이라고 하는데요. 청자와 마찬가지로 나전 역시 중국에서 건너왔겠지만, 고려 나전은 한중일 3국을 통틀어 최고 수준의 예술적 성취를 이뤘습니다. 위의 왼쪽에 있는 것은 나전으로 만든 경함(經函), 즉 불교 경전을 보관하던 상자입니다. 이 자랑스러운 보물은 영국박물관(흔히 대영박물관이라고 부르지요.) 소장품으로 이번 전시를 위해 먼 길을 날아왔습니다. 


오른쪽에 보이는 독특한 형태의 물건 역시 저 유명한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품입니다. 특이하게도 대모(玳瑁), 즉 바다거북의 등껍질을 장식 재료로 썼는데요. 너비 10센티미터에 불과한 작은 공간에 저리도 세밀하고 꼼꼼하게 재료를 갈고 깎아 붙였을 장인들의 솜씨에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눈썰미 좋은’ 송나라 사신 서긍도 이걸 놓치지 않았던 거고요. 


나전 일은 세밀하여 귀하다고 할 만하다.” 


 세밀가귀(細密可貴). 얼마나 절묘한 표현인가요. 나전을 비롯한 고려 예술의 핵심을 중국의 사신은 그토록 정확하게 꿰뚫어본 것이지요. 그래서 삼성미술관 리움이 2015년에 연 전시회에 바로 이 제목을 그대로 붙였고, 우리 미술의 ‘품격’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관람객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습니다. 이렇듯 예리한 안목을 지닌 한 외국인 덕분에 고려 예술은 그 시대에 이미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겁니다. 



“다음 생에는 부디 남자로 태어나게 하소서” 


하나하나 귀하고 아름다운 고려의 문화유산을 돌아보던 중에 뜻밖의 기록을 만났습니다. 1302년에 조성된 아미타불상 안에서 나온 복장물(腹藏物) 가운데 발원문(發願文)인데요. 불상을 만들려면 당연히 돈이 필요하겠지요?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십시일반 시주를 받아 불상 제작비를 충당합니다. 대신 시주한 이들의 이름과 소원을 적은 문서를 불상 안에 넣어주는 거고요. 개중에 거액을 시주한 이의 경우 별도로 격을 갖춘 발원문을 따로 써서 불상에 봉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1302년 아미타불상에서 나온 아래의 발원문이 바로 그 예입니다.


 

<주성미타복장입안발원문 鑄成彌陀腹藏入安發願文>, 고려 1302년, 종이에 먹, 44.6×103.7cm, 온양민속박물관 


꽤 긴 내용을 글씨도 가지런하게 정성껏 적어 내려간 이 발원문의 주인공은 ‘창녕군부인’이란 분이랍니다. 발원문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서원하건대 인간의 생을 잃지 않고 중국의 바른 집안에서 태어나되 남자의 몸을 얻게 해주소서.” 


세 가지를 빌었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게 해 달라, 중국에서 태어나게 해 달라, 남자로 태어나게 해 달라. 전체 발원문의 맥락 속에서 살펴야 하겠지만, 이 구절이 왠지 모르게 가슴을 때리더군요. 기왕 사람으로 태어날 거라면 중국에서 남자로 태어나게 해달라니…. 오죽했으면 이런 소원을 빌었을까요. 그런데 비슷한 소원을 빈 사람이 또 있습니다.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 복장물> 중 발원문(白雲景閑發願文), 고려 1346년, 47.8×1,058cm, 청양 장곡사  


위의 사진은 앞에서 소개한 장곡사 불상에서 나온 발원문인데요. 가로 10미터가 넘는 비단에 천 명이 넘는 시주자의 이름과 소원이 빼곡하게 적혀 있습니다. 군데군데 소원을 적어 붙인 천 조각도 보이고요. 요즘으로 치면 포스트잇에 사연을 적어 붙인 거지요. 그 중에 작은 쪽지에서 이런 내용이 확인됩니다.


“태어나는 때마다 널리 중생을 일깨우고, 여자는 남자가 되게 하소서.” 


여기서도 남자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빌고 있습니다. 전시 기획자도 이게 특별하게 보였는지 유물 설명에 이렇게 적었더군요. 


화려하고 아름다운 유물들이 그득한 전시장을 돌아보는 내내 아득했습니다. 청자도 좋고, 불상도 불화도 다 좋은데 뭔가 결정적인 게 빠진 것만 같은 허전함. 고려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살았을까. 그 시대에 무엇을 고민했고, 무엇이 힘들었으며, 무엇을 바랐을까. 그러던 차에 고려 여인들이 적은 비슷한 내용의 소원이 마음에 와 닿더군요. 고려 사람의 생각과 일상을 엿볼 수 있는 작지만 소중한 기록. 이번 전시에서 인간적으로 가장 큰 울림을 준 장면이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가 옛 사람들이 남긴 발자취를 따라 더듬어보는 이유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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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임진왜란 때 원숭이 기병대가 있었다고?
김 석


지난 6월의 어느 날이었지요. 습관처럼 뉴스를 뒤적거리다 퍽 흥미로운 기사 한 편을 만났습니다. 한 일간신문이 6월 13일 자로 <임진왜란 때 왜적 혼 빼놓은 ‘원숭이 기병대’ 실제 있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이야기일까요. 제목만 딱 보면 황당하기도 하고 솔깃하기도 하죠. 기사를 읽어봤더니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기사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의 《택리지 擇里志》를 번역하던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책의 여러 이본(異本)을 비교 조사하는 과정에서 임진왜란 당시에 ‘원숭이 부대’가 실제 전투에서 활약했다는 기록이 거의 빠짐없이 수록됐을 뿐 아니라 내용에도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택리지》에 등장하는 원숭이 부대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이 쓴 인문지리서 《택리지》



“(명나라 장수) 양호는 (중략) 중무장한 기병 4,000명과 교란용 원숭이(弄猿) 기병 수백 마리를 이끌고 가서 소사하 다리 아래 들판이 끝나는 곳에 매복하게 하였다. 왜군이 숲처럼 빽빽한 대오를 이루어 직산으로부터 북상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거리가 100여 보가 되기 직전에 먼저 교란용 원숭이를 풀어놓았다. 원숭이는 말을 타고 채찍을 잡고서 말에 채찍을 가해서 적진으로 돌진하였다.


(왜군들은) 원숭이를 처음으로 보게 되자 사람인 듯 하면서도 사람이 아닌지라 모두 의아해하고 괴이하게 여겨 발을 멈추고 쳐다만 보았다. 적진에 바짝 다가서자 원숭이는 말에서 내려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왜적들은 원숭이를 사로잡거나 때려잡으려 하였으나 원숭이는 몸을 숨기고 도망 다니기를 잘해서 진영을 꿰뚫고 지나갔다.”



이 장면은 평양전투, 행주산성전투와 더불어 임진왜란 당시 육상에서 거둔 3대첩의 하나로 꼽히는 ‘소사전투’를 묘사한 대목인데요. 소사(素沙)는 지금의 충남 천안 일대입니다. 소사전투는 1597년의 일이고, 그로부터 150여 년이 흐른 뒤에 이중환은 《택리지》를 저술하면서 ‘팔도론․충청도’ 항목에 이 기록을 남깁니다. 할리우드 영화 <혹성탈출>의 한 장면이 실제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놀랍고도 흥미로운 대목이지요.


위 기록이 알려주는 사실들을 다시 정리해 봅니다. ① 전투 초기에 적진을 교란하기 위해 원숭이를 투입했다. ② 원숭이가 사람처럼 말을 탈 줄 알았다. ③ 사람인 것 같았지만 사람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당시 원숭이 기병대가 실제 전투에 투입돼 쏠쏠한 활약을 했다는 겁니다. 그냥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치부하기에는 묘사가 꽤 구체적이고 생생하죠? 진짜일까요? 만약 이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실로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겠지요?



소사전투에서 활약한 원숭이 기병대의 실체


이 대목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 안대회 교수는 원숭이 부대에 관한 다른 기록들을 찾아내 논문을 씁니다. <소사전투에서 활약한 원숭이 기병대의 실체>란 제목의 논문은 《역사비평》 2018년 가을 호에 수록됩니다. 궁금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이번엔 논문을 찾아 읽었습니다. 안대회 교수가 찾아낸 기록 몇 가지가 있더군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연암 박지원의 <경리 양호 치제문(楊經理鎬致祭文)>. 명나라 장수 양호의 죽음을 애도한 글인데, 여기에 이런 구절이 있답니다.



弄猿三百 농원 삼백이

一時鞭馬 한꺼번에 말을 달렸지.

狡彼倭奴 저 교활한 왜적들을

悉殲蹄間 모조리 말굽 아래서 섬멸했네.



이 짧은 구절에 새로운 사실이 등장합니다. 교란용 원숭이가 ‘3백’이었다고 써놓았습니다. 연암은 대체 뭘 근거로 이렇게 쓴 걸까요. 틀림없이 뭔가를 보고 썼을 텐데요. 하지만 안대회 교수도 그 정확한 근거까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자료가 더 없나 여기저기 찾아보다가 원숭이 부대에 관한 또 다른 기록을 발견하지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의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이런 내용이 보입니다.



“왜적을 베어 죽일 때 군사들이 모두 붉은 옷이나 비단옷을 입고 등에는 원숭이 한 마리를 업었다. 원숭이는 채찍을 휘둘러 말을 내달렸다. (중략) 원숭이가 좌충우돌하니 왜적이 처음 보고서 놀라고 혼란스러워 완전히 패하여 남은 이가 없었으니 원숭이 또한 전공을 세웠다고 하겠다.”



위에서 본 내용과는 조금 다릅니다. 말을 탄 병사가 등에 원숭이를 업었고, 그 원숭이가 채찍으로 말을 몰았다는 겁니다. 원숭이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부분은 앞에서 소개한 기록과 일치하고요. 이것 말고도 안대회 교수가 찾아낸 또 다른 기록이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무인이자 의병장으로 활약한 조경남(趙慶男, 1570~1641)이 쓴 《난중잡록(亂中雜錄)》은 임진왜란에 관한 한 가장 자세한 기록물로 평가되는데요. 이 책에는 조경남이 사명대사 유정(劉綎, 1544~1610)의 부대를 직접 목격하고 쓴 흥미로운 대목이 나옵니다.



“초원(楚猿) 4마리가 있어 말을 타고 다루는 솜씨가 사람과 같았다. 몸뚱이는 큰 고양이를 닮았다.”



사람이라면 굳이 ‘사람과 같았다.’고 표현할 까닭이 있었을까요. 게다가 ‘큰 고양이를 닮았다.’고까지 했습니다. 안대회 교수에 따르면, 유정의 부대에 원숭이가 있었다는 기록은 임진왜란 당시 신녕현감으로 전투에도 참가한 손기양(孫起陽, 1559~1617)이란 분의 일기에도 살짝 등장합니다.



“원숭이는 능히 적진으로 돌진할 수 있고…”



하지만 안대회 교수로 하여금 원숭이 부대가 실제로 있었음을 믿게 해준 결정적인 기록은 따로 있었습니다. 경상북도 안동에 터를 잡고 살아온 풍산김씨 문중에 대대로 전해오는 화첩, 그러니까 그림 모음집 안에서 원숭이 기병대를 묘사한 그림이 있다는 것이었죠. 《세전서화첩(世傳書畫帖)》이라 불리는 이 화첩에는 그림 32점이 실려 있는데요. 이 가운데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란 제목의 그림 2점 가운데 한 점을 주목해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천조장사전별도>에 그려진 원숭이 병사?


풍산김씨 가문에 대대로 전해오는 《세전서화첩》에 수록된 <천조장사전별도>



이 귀중한 화첩이 2012년에 번역 출간됐더군요. 궁금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화첩을 구해다가 문제의 그림을 직접 확인해보았습니다. 그림의 내용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명나라 원군을 전송하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그림에 붙은 설명을 보면 당시 풍산김씨 문중의 김대현(金大賢, 1553~1602)이란 분이 명나라 부대를 여러모로 살뜰하게 챙긴 모양입니다. 명나라 장수가 조선을 떠나면서 특별히 김대현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하지요.



“지난 두 해 동안 힘든 일을 겪으면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돌보아 준 것을 참으로 잊을 수 없다. 지금 서로 이별하게 되니 그동안의 감회가 구름처럼 떠오른다. 귀국의 유명 화가인 김수운(金守雲)이 그린 전별도를 길이 기념할 수 있도록 그대에게 주겠다.”고 하면서 그림을 건네주었다.



밑줄 친 부분에서 이 그림을 그린 화가가 조선의 김수운이란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화첩의 그림이 그때 그 그림은 아닐 개연성이 크지요. 명색이 조선의 유명 화가가 이 정도 수준의 그림을 그렸으리라곤 생각하기 어려우니까요. 김수운이 그렸다는 원본이 남아 있지 않으니, <천조장사전별도>는 후대의 화가가 상상력을 발휘해 다시 그린 것으로밖엔 볼 수 없습니다.



<천조장사전별도>에 그려진 포르투갈 출신의 용병 해귀(海鬼)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이 그림의 왼쪽 아래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퀴 달린 수레에 아주 이국적인 외모의 병사 네 명이 타고 있지요. 다른 병사들을 묘사한 것과 비교하면 몸집이 훨씬 큰 데다 피부색은 까무잡잡하고 머리털은 붉은 색으로 그려졌습니다. 가운데 삐죽 솟아나온 병사의 머리 오른쪽 위로 글자가 보이지요? 해귀(海鬼)입니다. 해귀는 포르투갈 출신의 해군 용병입니다. 


임진왜란에 포르투갈 용병이 참전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게 그냥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닌 것이, 바로 이 그림을 근거로 현재 주한 포르투갈 대사관에서 풍산김씨 후손들에게 해마다 연하장을 보낸다지 뭡니까. 제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임진왜란에 참전한 다국적 군대를 묘사한 것으로는 이 그림이 유일무이하지 않나 싶어요. 그러니 잘 그리고 못 그리고는 둘째고, 이런 귀중한 그림을 화첩에 묶어 대대로 전해온 정성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런 그림을 만날 수 있었을까요.



<천조장사전별도>에 그려진 원병(猿兵)



이제 해귀들 오른쪽 아래로 시선을 옮기면 짐승의 탈을 쓴 사람인 것도 같고 짐승인 것도 같은 털 복숭이 병사들이 보이죠. 생김새를 보면 신체의 모양이나 서 있는 모습은 사람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몸을 잔뜩 뒤덮고 있는 털의 묘사라든가 짐승처럼 주둥이가 뾰족한 머리 모양을 보면 사람과는 또 딴판으로 보이기도 하고요. 그림만 봐선 딱 잘라서 뭐라 단정 짓기가 어렵지요.


깃발에는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원병삼백(猿兵三百)’. 원숭이 병사 3백이라고 적었습니다. 앞에서 본 연암 박지원의 글 내용과 일치하는 숫자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걸 실제 원숭이로 볼 것이냐, 아니면 단지 변장을 한 사람으로 볼 것이냐, 헷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세전서화첩》을 연구해서 2012년에 번역본을 낸 두 연구자는 이들을 “여진족 출신 투항자들로 구성된 군인들”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이것까지 포함해서 안대회 교수는 원숭이 기병대에 관한 해석이 크게 네 가지로 이뤄지고 있다고 논문에 소개합니다.



① 원숭이처럼 민첩한 병사

② 털이 많이 난 중국 주변 국가의 소수민족 병사

③ 원숭이의 탈을 써서 변장한 병사

④ 원기(猿騎), 곧 마상재(馬上才)



역사,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로 안내하다


자, 여기까지 읽고 난 여러분은 위의 보기 넷 가운데 어느 쪽에 더 가깝다고 보시나요. 사실 이 논문은 충분히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임에도 언론들이 크게 주목하지는 않았습니다. 언뜻 봐선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처럼 들리니까요. 제가 여기에 소개한 내용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죠. 그래도 궁금하다면 안대회 교수의 논문을 직접 찾아 읽어야 합니다.


그럼 제 생각은 어떠냐고요? 논문을 찾아 읽고 화첩까지 구해 본 저로서는 원숭이 부대가 실재했다는 쪽을 조금 더 믿어보고 싶습니다. 이런 흥미로운 역사의 한 장면이 진짜라고 한다면 훗날 대하역사극의 한 대목에서 원숭이 기병대가 활약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될 날이 오지 않을까요. 역사라는 건 분명 흘러간 과거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지만 수백 년이 흐른 지금 우리를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로 안내하곤 한답니다.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