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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환 작가의 DSLR 여행기 웨일즈 3편]
웨일즈의 전통을 듬뿍 간직한 곳,
웨일즈 서북부
이 환

전편에서 웨일즈의 고성 마을들과 책마을 헤이온와이, 아서 왕의 전설을 가진 스노도니아를 여행했다. 마지막으로 지중해 이탈리아를 흠모해 만든 포트메리온과 아기자기한 이야기가 있는 방고와 앵글시 섬을 둘러본다. 그리고 아일랜드로 건너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서북쪽 끝 항구도시 홀리헤드를 소개한다.







전에 백화점 그릇가게에서 포트메리온(Portmerion www.portmeirion-village.com)이란 브랜드를 발견하고 이렇게 예쁜 도자기를 만드는 마을은 얼마나 멋질까 상상해본 적이 있다. 이곳을 만든 주인공은 잉글랜드 출신으로 어릴 적에 이주한 건축가 윌리엄스 엘리스(Sir Williams Ellis·1894~1978)다.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마을 포르트피노를 동경한 나머지 1926년부터 이곳을 지중해풍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아흔이 되도록 고치고 짓고 또 만드는 일을 계속했다고 하니 그의 열정에 숙연해진다. 입구의 조각장식 문을 들어서면 천국의 정원에 온 듯한 느낌이다. 



원색으로 칠해진 벽과 지붕들, 우아한 정원과 분수, 대리석상 수십 개가 여행자를 맞는다. 포트메리온 도자기도 알고 보니 그의 딸 수잔이 만든 브랜드다.






 

웨일즈 서북쪽 본토의 마지막 큰 도시는 방고(Bangor)다. 웨일즈대학이 있어 젊은 기운이 가득하다. 로마군이 침공했을 때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전투지여서 유적들도 많고 고풍스럽다. 이 도시에서 브리타니아 다리를 건너가면 앵글시 섬에 다다른다. 이 섬은 웨일즈와 잉글랜드를 통틀어 가장 큰 섬이다. 


방고에서 다리를 건너 5분정도 차로 달리면, 작은 마을 기차역이 있다.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단 하나! 기차역 푯말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서다. 1848년 앵글시 섬에서 첫 번째로 생긴 이 기차역 이름은 숨이 찰 정도로 길다. 



세계적으론 모르겠지만, 최소한 영국에서 가장 길다. 뜻은 ’빠른 물살 소용돌이 옆 흰 개암나무의 구덩이 속 성 마리아 교회와 붉은 굴의 성 티실리오 교회‘라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간단히 ’Llanfair PG‘라고 부른다.








웨일즈 본토에서 앵글시 섬을 가는 데는 두 개의 다리가 있다. 하나는 메나이 현수교(Menai Suspension Bridge·1826년 건설), 다른 하나는 브리타니아교(Britania Bridge·1850년)다. 브리타니아교 아래로는 기차 철길이 있다. 


모터보트를 타고 메나이 해협을 둘러보았다. 섬 주변을 둘러보는 데는 가장 효율적인 교통수단이다. 물개들이 한가로이 모여 햇볕을 쬐는 바위자락이 가장 인기 있어 보인다.


이 지역은 옛 드루이드교의 흔적과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고대 켈트족의 믿음으로 알려진 이 종교는 드루이드라는 사제들이 지도자 역할을 했는데 신전을 만들지 않았고 문헌도 남기지 않았다. 다신교에 영생불멸을 믿었고 마법과 주술이 발달했다. 숲 속에 모여 제사를 지내는데 사람을 죽여 피를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 


이런 제의식 때문에 로마군이나 잉글랜드군이 침입했을 때 많은 핍박을 받았다. 잉글랜드 남부의 거석유적인 스톤헨지(Stonehenge)도 이들이 만들었고 할로윈이란 서양풍습도 여기서 비롯됐다고 한다.







앵글시 섬에서 아일랜드로 넘어가는 관문이 바로 홀리헤드(Holyhead) 항구다. 페리로 3시간 15분, 쾌속선으로 1시간 20분이면 더블린에 도착한다. 대합실에서 아일랜드로 수학여행 가는 전통 옷을 입은 웨일즈 여학생들을 만났다. 


앙증맞은 모자와 레이스 자수로 장식된 숄에 체크치마를 단정히 입은 모습이 정감 있다. 검정색의 기다란 ‘웰시 모자’는 체크무늬 앞치마와 함께 이곳 전통의상의 특징. 시골 아낙네들이 주로 입었던 옷 양식이 전통의상으로 정착했다고 한다.








여행(旅行)의 한자말은 ‘사람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며 간다’라는 의미다. 영어 ‘travel’의 어원은 좀 다르다. ‘travail’에서 나왔는데 노동, 고생을 뜻한다. 여행 장비와 교통수단이 부족했던 먼 옛날 바깥나들이는 고행 길이었을 것이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를 거쳐 여기까지 오는 데는 쉽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땅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한편으로 기쁨이었다. 이제 포크음악의 본고장, 아이리시펍과 기네스의 나라 아일랜드로 향해간다.





영국관광청 웹사이트   

www.visitbritain.com  


웨일즈관광청 웹사이트 

www.visitwal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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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새로운 광화문 현판, 언제 볼 수 있을까?
김 석
#김석


얼마 전에 텔레비전을 보다가 우연히 <물괴>(2018)란 영화를 봤습니다. 괴수 영화에 사극을 버무린 흥미로운 작품이었죠. 영화 자체는 그다지 좋은 평가를 못 받았던 것 같더군요. 흥행에도 실패했고요. 그런데 영화가 끝나갈 즈음 아주 흥미로운 장면 하나가 보였습니다. 주인공들이 괴수와 최후의 대결을 벌인 장소가 경복궁인데요. 밤을 새운 처절한 사투가 끝이 난 뒤 동이 터올 무렵, 궁궐 밖에 있던 이들이 하나 둘 광화문으로 향합니다. 여기서 제 눈을 확 뜨이게 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광화문 현판이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광화문 현판(왼쪽)의 색깔은 지금의 현판(오른쪽)과 정반대입니다.



이 장면은 실제로 광화문에서 촬영했을 겁니다. 자세히 보면 현재의 광화문과 그 모습이 똑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다른 게 있죠. 현판입니다. 지금 광화문에 걸린 현판과 비교해볼까요. 현판 크기는 물론 글씨까지 똑같죠. 하지만 색깔이 다릅니다. 영화 속 현판은 짙은 바탕에 흰 글씨로 돼 있습니다. 지금의 광화문 현판과 정반대인 거죠. 제작진이 현판 색깔만 일부러 바꾼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영화의 배경은 조선시대입니다. 당시 광화문 현판 색깔은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짙은 바탕에 흰 글씨’였습니다. 실제 현판이 틀리고, 영화 속 현판이 맞는 겁니다.





광화문 현판에 얽힌 ‘흑역사’를 되짚어보기 위해선 2010년 8월 15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그날, 광화문 광장에서 요란하게 치러진 광복절 기념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새롭게 복원된 광화문을 공개한 일이었습니다. 일제가 고의로 틀어버린 광화문의 위치를 경복궁 중심축에 맞춰 원래 자리로 옮기고, 덕지덕지 붙어 있던 콘크리트를 모두 뜯어낸 뒤 석축과 문루를 옛 모습에 가깝게 되살렸죠. 해방된 지 65년이 지나서야 광화문이 어엿하게 제자리를 찾은 감격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광화문은 공개되자마자 구설수에 휘말렸습니다. 문제는 현판이었죠. 현판 글씨를 본 사람들이 비난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생동감이 하나도 없는 죽은 글씨라는 것이었죠. 이 글씨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1916년 유리원판에 있는 것을 그대로 살린 겁니다. 유리원판이란 오늘날 사진 필름에 해당하는 감광판을 뜻합니다. 다른 말로 유리건판(琉璃乾板, glass dry-plate)이라고도 하죠. 플라스틱으로 만든 필름이 보편화하기 전에 주로 사용된 것으로,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유리원판은 문화재 복원에 결정적인 근거 자료가 됩니다.



1916년 광화문 유리원판 사진(왼쪽)과 디지털로 복원된 광화문 현판 글씨(오른쪽) 



광화문 현판 복원도 마찬가지였죠. 2005년에 문화재청은 바로 이 유리원판을 디지털로 정밀 분석해서 당시 현판을 70%가량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며 복원된 광화문 현판 글씨를 공개했습니다. 위 사진이 바로 그겁니다. 경복궁 복원의 기준 시점은 임진왜란 이후 폐허로 방치됐던 경복궁을 대대적으로 중건한 1888년입니다. 1867년에 시작된 공사가 1888년에 마무리되기 때문에 이 해를 기준점으로 봅니다. 사진 속에 보이는 광화문 현판 글씨는 중건 당시 훈련대장이었던 임태영(任泰瑛. 1791∼1868)이 쓴 겁니다.


설왕설래하는 와중에 또 하나의 변고가 일어나게 됩니다. 복원된 광화문을 공개한지 불과 며칠도 안 돼 현판에서 균열이 발견된 겁니다. ‘부실 졸속 복원’이라는 비난이 빗발치듯 쏟아졌죠. 논란이 커지자 결국 현판을 다시 제작해서 거는 것으로 결론이 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현판 글씨를 한글로 바꾸자, 한자로 하되 한석봉 글씨로 하자, 아니다 원래대로 가자, 아예 현대 서예가에게 맡기자… 온갖 요구와 주장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옵니다. 말 그대로 광화문의 수난이자, 광화문 현판의 수난이었습니다.






그렇게 또 5년여가 흐른 2016년 2월. 저는 한 시민단체로부터 뜻밖의 사진 한 장을 받았습니다. 광화문을 찍은 오래된 흑백사진이었죠. 무슨 영문인지 몰라 왜 사진을 보낸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현판을 자세히 보라고 하더군요. 흐릿하긴 해도 광화문이란 세 글자가 보였습니다. 그것도 짙은 바탕에 밝은 글씨로 말이죠. 만약 사진에 담긴 모습이 사실이라면 새로 제작하는 현판을 어쩌면 다시 만들어야 할지도 모를 결정적인 자료가 될 것이었죠. 따라서 가정 먼저 확인해야 했던 건 사진의 출처가 믿을 만한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사진을 보내온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의 혜문 대표와 머리를 맞대고 사진의 출처를 찾아 국내외 검색 사이트란 사이트는 샅샅이 훑어 나갔습니다. 과연 출처를 확인할 수 있을까. 자꾸만 조바심은 나는데 단서가 잡히질 않더군요. 그렇게 한참을 헤매고 헤매다가 어느 외국 사이트에 다다랐습니다.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미국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홈페이지였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스미스소니언 홈페이지 자료실에서 그토록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문제의 광화문 사진을 찾아냈습니다.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의 ‘국가 인류학 자료보관소’ 홈페이지에 등록된 광화문 사진(위)과 현판 확대 이미지(아래)



또렷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광화문 세 글자 가운데 ‘광’ 자와 ‘화’ 자는 얼른 알아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짙은 바탕에 밝은 글씨죠. 광화문 세 글자가 이렇게 육안으로 보이고 게다가 현판 색깔까지 확인할 수 있는 사진이 발견된 건 당시로서는 처음이었습니다. 게다가 공신력 있는 박물관 소장품이니 믿을 만한 출처까지 확인됐습니다. 이 사진이 촬영된 시기는 적어도 1895년 이전입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경복궁 복원 기준 시점은 1888년. 광화문 복원의 근거가 된 유리원판이 촬영된 시기는 1916년. 이제 어느 사진이 경복궁 복원 기준 시점에 가까운지는 분명해졌습니다.





《경복궁 영건일기》는 일본 와세다대학 도서관에 9책 9권이 소장돼 있습니다.



이 사진 한 장으로 광화문 현판의 고증이 잘못됐다는 사실이 입증됩니다. 문화재청도 이를 인정하고 면밀한 조사를 거쳐 2018년 1월 결국 현판 색상을 바꾸기로 합니다. 그리고 그해 12월 또 하나의 결정적인 근거가 확인됩니다. 국립고궁박물관이 발간하는 학술지 《고궁문화》 11호에 실린 논문 <경복궁 영건일기와 경복궁의 여러 상징 연구>에서 광화문 현판의 색상을 명확하게 알려주는 문헌 자료의 존재를 밝힌 겁니다. 


동국대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연구자 김민규 씨가 일본 와세다대학에 소장된 《경복궁 영건일기》를 확인해보니, 광화문 현판의 색상은 흑질금자(黑質金字), 즉 검은 바탕에 금색 글자였습니다. 광화문 현판 색상의 오류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문헌 자료입니다. 사진에 이어 문서까지 나온 겁니다. 이로써 광화문 현판 색상에 대한 오랜 논란에 마침표를 찍게 됩니다.



안중식 <백악춘효도>, 1915년 여름, 가을, 비단에 엷은 색, 197.5×63.6cm, 202.0×65.3cm, 

등록문화재 485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의 특별전 <근대서화, 봄 새벽을 깨우다>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일부러 이 전시회를 찾아간 이유는 조선왕실의 마지막 화원(畵員), 즉 왕실 화가였던 심전 안중식(安中植, 1861∼1919)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백악춘효>(1915)를 보기 위해서였답니다. 경복궁의 전경을 그린 <백악춘효>는 ‘여름본’과 ‘가을본’ 두 점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 있습니다. 세부 묘사에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같은 구도로 그린 그림이죠. 두 점이 전시장에 나란히 걸린 건 극히 드문 일이라 더 유심히 들여다보게 되더군요.


 

두 그림에서 광화문 현판 부분을 확대해 보면 바탕색이 짙다는 걸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광화문 현판 색상에 관한 단서가 들어 있습니다. 현판 색깔을 자세히 볼까요. 광화문이라는 세 글자는 없습니다만 바탕은 분명 검정입니다. 기와 색깔과 비교하면 짙은 색이라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죠. 위에서 정리했듯이 지금 광화문에 걸려 있는 현판의 색이 잘못됐다는 사실은 사진과 문헌 자료를 통해 거듭 입증된 바 있습니다. 화가가 현판 색깔을 일부러 잘못 칠했을 가능성이 적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그림이야말로 현판의 원래 색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작품일 겁니다. 그래서 더 흥미롭기도 하고요.


얼마 전 시민단체가 국무총리실에 청원서를 제출했습니다. 광화문 현판을 교체한다면 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년이 되는 올해가 가장 좋은 시기라는 겁니다. 따라서 기왕이면 올해 광복절 기념식에서 새로운 현판을 공개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정부도 분명 적절한 시점을 조율하고 있겠죠. 경복궁의 얼굴이자 조선 왕실 문화의 상징으로 오늘도 수많은 외국인 관광객이 찾는 광화문에 제대로 된 현판이 걸리는 그날을 기다립니다.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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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이순신 신화’와 ‘이순신 리더십’
김 석
#김석


“이순신 장군은 인격이나 장수의 그릇, 모든 면에서 한 오라기의 비난도 가하기 어려운 명장이다.”


“조선을 지켜 국운의 쇠락을 만회한 것은 실로 조선의 넬슨, 이순신의 웅대한 지략이었다.”


“이순신은 담대하고 활달함과 동시에 정밀하고 치밀한 수학적 두뇌를 지녔다. (…) 조선의 안녕은 이 사람의 힘 덕분이었다.”



이순신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수로 찬양한 문구들입니다. 누가 한 말일까요? 조선시대 사람이었을까요? 아니면 우리 시대의 군인이나 역사학자? 유감스럽게도 아닙니다. 그럼 누굴까? 놀랍게도 일본인들입니다. 첫 문장은 메이지 시대(1868~1912) 일본 해군의 대표 이론가였던 사토 데쓰타로, 둘째 문장은 같은 시대의 일본 작가 세키코세이, 마지막 문장은 동시대 일본 해군을 대표하는 문필가 오가사와라 나가나리가 쓴 겁니다.




세계 최초의 이순신 전기를 쓴 일본인


몰랐던 사실 하나. 세계 최초의 이순신 전기를 쓴 사람은 일본인이었습니다. 위에 소개한 일본 작가 세키코세이는 1892년에 《조선 이순신전》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발표합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한 일본 수군의 활동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조선 수군의 지휘관 이순신의 업적을 조명한 글인데요. 이 소책자가 중요한 건 메이지시대 일본에서 이순신 신화가 만들어지는 기폭제가 됐기 때문입니다.


한국인이 쓴 최초의 이순신 전기인 단재 신채호의 《수군제일위인 이충무공전》(1908)이 나오기까지는 16년을 더 기다려야 했죠. 《조선 이순신전》이 중요한 이유는 또 있습니다. 이순신을 영국의 해군 영웅 넬슨 제독과 비교한 최초의 기록이란 점입니다. 일본인들은 왜 이렇게 이순신 연구에 열을 올렸을까요. 의외로 답은 간단합니다. 대동아 패권을 획득하기 위해선 군사력 강화, 특히 해군력 증강이 무엇보다 절실하다고 본 겁니다.


결국 이순신을 영웅으로 추앙하고 더 나아가 신(神)으로까지 받든 데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던 거죠. 그렇다고 이런 평가와 기록들을 부정하거나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재평가하고 민족의 영웅으로 존숭하기까지 일본인들의 연구가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다는 것도 인정할 필요가 있고요. 그런다고 해서 이순신 장군의 업적이 조금이라도 퇴색되는 건 결코 아니니까요.


《충무공이순신전서》(1795)에 수록된 통제영 거북선의 모습 




세계 최초의 돌격용 철갑전선‘거북선’


일본인들의 기록에서 흥미로운 것 가운데 하나는 ‘거북선’에 대한 언급이 꽤 많다는 점입니다. 사토 데쓰타로는 이순신 장군이 “독창적 천재성을 지닌 사람”이라며 그 대표적인 근거로 “거북선이라고 일컫는 신식 전함을 건조”한 점을 꼽았습니다. “오늘의 전투함의 효시”라면서 거북선의 제원과 운용 원리를 설명한 뒤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지금부터 4백 년 전에 장갑전함을 만든 것은 세계의 누구라도 놀랄 일이다.”


《조선 이순신전》에도 거북선에 관한 설명이 나옵니다. “이순신은 임지로 부임하자마자 필생의 생각을 응축하여 거북선을 창제하였다.” 앞의 글보다 조금 더 자세하게 거북선의 외형과 운용 방식을 소개하면서 “앞으로 뒤로 옆으로 움직이는 신속함이 나는 새와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 수군이 조선 수군에 패배한 이유 가운데 하나로 거북선을 꼽았습니다. “거북선을 창제하여 공격의 이기(利器)를 교묘히 활용하였다.”


이순신에 관한 일본인들의 글을 묶은 책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가갸날, 2019)


오가사와라 나가나리도 거북선을 언급했습니다. “그(이순신)가 일찍이 창조해 만든 거북선을 선두에 세우고 좌우에서 협공하였다. 그리하여 일본군 함대는 사분오열해 다시 결집할 틈도 없이 크게 격파당하였다.” 지금은 거북선을 이순신 장군이 처음 만든 것은 아니라는 게 정설이죠.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일본인들은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었다고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거북선 창제’라는 업적이 ‘이순신 신화’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겁니다.


일본인이 쓴 글 세 편을 묶은 책이 얼마 전 국내에서 출간됐습니다.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라는 제목이 붙은 이 책의 번역자 김해경 씨는 여러 경로로 자료를 찾고 모으는 우여곡절 끝에 메이지 시대 일본인들이 쓴 이순신에 관한 글 세 편을 찾아냅니다. 이 글들이 우리 독자들에게 온전한 번역으로 선보이는 건 처음이 아닌가 싶군요. 그런 만큼 책을 읽는 내내 왜 진작 이런 글들이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을까 의문이 들기도 했죠.


     

(좌)월전 장우성 화백의 이순신 장군의 표준영정 (현충사 소장)

(우)《증정 중등조선역사》(1946)에 실린 이순신 장군 초상화 (서울교육박물관 소장)


혹시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를 본 적 있으신가요? 아마 이순신 초상 하면 바로 이 모습을 대번에 떠올리실 겁니다. 월전 장우성 화백이 1952년에 그린 이순신 장군 표준영정입니다. 충남 아산 현충사에 가면 사당 안에 바로 이 영정이 걸려 있죠. 우리의 기억에 자리하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장우성 화백의 과거 친일 행적 때문에 표준영정을 교체하라는 요구가 끊이지 않고 있기도 합니다.




이순신 장군의 진짜 얼굴은 어디에?


이순신 장군의 얼굴을 찾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수많은 연구자가 혹시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 모를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를 백방으로 수소문했죠. 2013년에 한 언론이 이순신의 진짜 얼굴을 찾았다는 기사를 대서특필한 적도 있습니다. 서울교육박물관이 소장한 《증정 중등조선역사》라는 책에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가 흑백사진으로 실려 있다는 거였죠. 중요한 사료이긴 하지만 워낙 사진이 흐릿해서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동아대 박물관이 소장한 <충무공이순신상>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로 전하는 그림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한 <충무공이순신상>입니다. 이 그림은 동아대학교 정재환 초대총장이 1958년 4월 16일에 구입했다고 합니다. 정 총장으로부터 구입 경위를 들었다는 당시 대학 직원의 증언에 따르면, 이순신 장군을 따라다니던 어느 승려가 처음 그렸고 이후에 여러 번 다시 그렸다는 겁니다. 이 그림은 후대에 다시 베껴 그린 것으로 그 시기는 조선 말기로 추정된다는 내용입니다.


고려대 박물관 소장 《북관유적도첩》에 수록된 <수책거적(守柵拒敵)>


궁금증이 또 일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의 일화를 묘사한 그림은 없을까? 놀랍게도 그런 그림이 딱 한 점 있습니다. 고려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북관유적도첩 北關遺蹟圖帖》입니다. 이 책은 고려 예종 때부터 조선 선조 때까지 북관, 즉 지금의 함경도 지방에서 용맹과 기개를 떨친 장수들의 업적을 그린 역사화 여덟 폭을 묶은 화첩인데요. 이 중에서 수책거적(守柵拒敵)이란 이름의 일곱 번째 그림에 바로 이순신의 무훈이 그려져 있습니다.


선조 20년인 1587년, 함경도 지방의 녹둔도에 여진족이 침입해 노략질을 하자 당시 이곳을 지키는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이 전투에 나섰습니다. 병사들이 들에 나가 있는 틈을 타 여진족이 목책을 공격합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이 목책 안으로 들어오려는 여진족을 활로 쏘아 죽이고 달아나는 여진족을 추격해 붙잡혀간 농민을 데려왔다는 것이 이 그림의 내용입니다. 이순신에 관해 지금까지 확인된 유일한 조선시대 역사기록화입니다.


영화 <명량>(2014)


‘이순신 신화“는 끝없이 다시 쓰이고 있습니다. 2000년 이후만 보더라도 텔레비전 드라마로 KBS의 역사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2004년부터 이듬해까지 104부작으로 방송됐죠. 소설가 김탁환이 8권으로 집필한 동명의 소설이 같은 해에 출간됐습니다. 앞서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가 2001년에 선보였습니다. 그리고 2014년에 개봉한 영화 <명량>은 관객 1761만 명을 동원하며 한국 영화 역사상 최다 관객 동원 기록을 세웁니다.




소설가 김훈이 말하는 이순신의 ‘리더십’


시간이 흐를수록 ‘이순신 신화’는 오히려 더 단단해지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순신 장군이 보여준 리더십을 이 시대가 간절하게 요구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얼마 전에 출간된 소설가 김훈의 산문집 《연필로 쓰기》에 ‘내 마음의 이순신’이란 글 두 편이 실려 있더군요. 이순신에 관한 소설을 쓴 작가로서 분명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을 겁니다. 무엇보다 이순신의 ‘리더십’을 면밀하게 들여다봤습니다. 여러 대목 가운데 하나를 인용해 봅니다.


“그가 받아들이고 긍정했던 ‘사실’들은 압도적으로 열세인 군사력, 물량 부족으로 인한 굶주림과 추위, 부하들의 이탈과 명령 불복종, 전쟁을 지원해야 할 행정 관료들의 부패와 무능, 당쟁의 틈바구니에서 짓밟혀야 하는 자신의 정치적 불운과 같은 시련과 역경이었다. 그리고 그의 지도자 된 자질은 이 절망적인 역경을 희망으로 전환시키는 데 있었다. 전 생애를 통해서 그의 리더십에 가장 강력하고도 아름다운 대목은 이 전환의 국면 속에서 작동되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구절로 글을 마무리합니다. 


“이순신의 탈정치적인 생애와 죽음에서 삶으로 전환하는 지휘 스타일은 리더십의 본질이 정치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리더십’에 대한 시대적 요구나 갈망이 아니라면 ‘이순신 신화’가 갈수록 더 확대 재생산되는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죠. 4월 28일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입니다. 최근에 우연히 읽은 두 권의 책에서 다시 만난 이순신. 새삼 의문이 들더군요. 우리는 이순신을 안다고 철석 같이 믿어 왔지만, 사실 우리는 이순신에 대해 잘 모르는 게 아닐까. 그래서 다시 《난중일기》를 펼쳐듭니다. 474년 전에 이 땅에 온 한 위대한 영혼이 써내려간 그 숱한 나날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 말이죠.


김훈의 새 산문집 《연필로 쓰기》(문학동네, 2019)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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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현 셰프의 음식을 쓰다
아날로그 감성 소환, 을지로 가봤니?
정동현
#정동현




을지로는 곧 사라진다. 이름은 남지만 최소한 알고 지내던 을지로 거리는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사라진 곳도 있다. 새롭게 높은 빌딩도 많이 들어섰다. 오래된 거리는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건물이 노후되면, 도시에 새로운 쓰임이 생겨나면 세월에 산이 깎이듯 새로운 건물, 새로운 거리가 생긴다. 그럼에도 잊혀지는 것들, 사라지는 것들은 모두 그리워지고 그리움은 슬픔을 남긴다. 시간이 날 때마다 을지로로 가는 이유는 곧 떠나보내야 하는 오랜 친구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이름처럼 옛스런

사랑방 칼국수


을지로1가에서 5가 너머까지 가야 할 곳은 많다. 하지만 문화유산을 답사하는 듯한 의무감을 떨친다면 또 마음에 담아둔 곳은 몇 되지 않는다. 그중 을지로3가 ‘사랑방칼국수’는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친구의 집에 가는 듯한 곳이다. 인쇄소가 펼쳐진 좁은 골목 사이, 인부들이 인쇄물이 잔뜩 올라간 카트를 밀고 퀵 오토바이가 곡예 운전을 하며 빠져나가는 곳에 ‘사랑방칼국수’가 있다. 



을지로3가에서 충무로 쪽으로 걸어 올라오다 보면 1968년에 문을 열었다는 문구가 맨 앞, 그 옆에 쓰인 ‘어머니의 손맛을 전수재현’했다는 문구가 적힌 간판이 보이면 제대로 찾은 것이다. 옛날 길바닥에 나붙던 대자보처럼 글자가 잔뜩 써 있는 간판은 정신 사납기보단 옛 자취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간다. 



문을 열면 나무로 짠 의자와 테이블이 빼곡하다. 여기저기 초록빛 식물이 자란 화분도 놓였다. 삐걱거리는 의자에 엉덩이를 올리면 ‘보신과 보양에 으뜸 통닭 백숙’, ‘내용있는 음식, 실속있는 식사 백숙 백반’ 같은 옛투에 옛글자체로 쓴 메뉴판이 보인다. 



가게 이름에 ‘칼국수’가 붙은 만큼 멸치육수 향이 진득한 칼국수 한 그릇에 점심을 때우는 이들도 적지 않다. 달걀 투하 여부에 따라 값은 200원 정도 차이가 난다. 김가루와 송송 썬 파, 통깨를 국물에 훌훌 풀고 미끈한 면발을 목구멍으로 넘기는 폼새만 봐도 단골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주변을 두리번 거리지 않고 빠르게 면을 먹고 냄비째 들고 국물을 마시는 이는 100퍼센트 단골이다. 무채색의 점퍼를 입었다면 확률은 120퍼센트로 치솟는다. 몸에 낀 먼지를 저 밑으로 쓸어내릴 듯 시원한 국물과 배가 부른 칼국수 면을 마시듯 먹는 이들은 점심 나절에 붐빈다. 



닭 반 마리를 국물, 공깃밥과 내놓는 백숙 백반도 점심 메뉴로 빼놓을 수 없다. 절반으로 잘라 스테인레스 접시 위에 척하고 올려 내놓는 백숙 백반은 ‘단백질 한 상’이라고 해도 될 만큼 영양이 충분하다. 



이 골목에서 온종일 무거운 것을 어깨 위에 지고 땀을 흘리는 사람들이 수십 년간 먹어왔을 음식이다. 피보다 진한 땀을 흘리고 허기가 졌을 때 기름이 동동 뜬 닭 국물에 흰밥을 말고 뼈에서 살결대로 떨어지는 닭고기를 먹으며 다시 이어질 한나절을 준비했을 것이다.



야들야들 부드러운 닭고기는 평범하게 소금 후추에 찍어도 좋지만 따로 준비된 초고추장에 살짝 찍어도 별미다. 시큼한 산미가 닭고기의 기름진 맛과 어우러져 풍미를 끌어올린다. 칠이 군데 군데 벗겨진 탁자 위에 한 상 차려 먹어도 값은 크게 나가지 않는다. 대신 빨간 김치, 양파 같은 것을 우적우적 씹고 닭다리를 뜯어야 한다. 그래서 배가 부르지 않으면 이 집에 온 기분이 나지 않는다. 또 그래야만 할 것 같다. ‘산업역군’이란 말을 들으며 먼지를 밥처럼 마시고 땀을 물처럼 흘렸던 이들을 추억하노라면 더욱 그렇다. 



           

술 잔 기울이기 좋은

황평집


‘사랑방칼국수’를 나와 을지로4가 쪽으로 걸어가면 역시 닭으로 유명한 ‘황평집'이 있다. ‘사랑방칼국수’에 비해서 유명세는 더 하다. 유명세 때문에 일찍 가서 자리를 잡지 않으면 짧지 않은 줄이 선다. 점심에는 역시 닭곰탕 한 그릇에 끼니를 때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닭을 수십 마리 한꺼번에 삶아 낸 국물은 논리적으로 한 마리 넣은 육수와 다를 게 없지만, 또 ‘역시 많이 해야 맛이나’라는 말을 주억거리게 하는 맛이 있다. 



마늘을 듬뿍 넣어 마늘 향이 깊게 벤 육수는 감칠맛이 짝짝 달라붙어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나서도 입맛을 다시게 된다. 밥 한 그릇 뚝딱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일터로 나가는 이들은 뒷모습을 바라보면 괜히 애잔해진다. 저 이들도 어느 집의 생계를 책임질 사람일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다. 



그들은 저녁 무렵이 되면 다시 이 집으로 몰려든다. 고개를 탁자에 처박고 숟가락질만 하던 점심 풍경은 없다. 대신 어깨를 쫙 펴고 의자에 기대어 앉아 느긋이 술잔을 주고받는다. 냄비에 부르스타를 받쳐 놓고 끓여가며 먹는 닭 전골과 닭 내장탕은 여럿이 어울리기 좋은 메뉴다. 닭 내장탕은 수량이 얼마 되지 않아 금방 매진이 되니 부지런한 사람만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집의 대표 메뉴라면 역시 닭찜과 닭 무침이다. 삶았다가 한 소금 식힌 뒤 손으로 쭉쭉 찢어 가지런히 쌓아 손님에게 내는 닭찜은 별 것 아닌 메뉴인데도 계속 손이 간다. 



이유는 먹기 좋게 찢어놓은 정성이 첫째요, 살짝 식혀 쫄깃한 식감을 살린 노하우 덕이 둘째다. 무엇보다 이에 찰싹 감겨 씹히는 닭 껍질을 먹어야 한다. 기름기가 뽀얗게 올라오는 껍질 한 조각이면 앞에 앉은 이와 떠드는 웃음이 한 소쿠리 늘어난다. 



사과를 썰어 넣은 닭 무침은 새콤달콤하다는 수식어가 브랜드 라벨처럼 딱 달라붙어 있는 음식이다. 살짝 강하다 싶은 양념도 이 거리 풍경과 가게 안에 가득 찬 사람들의 열기와 밀도를 보면 또 감내할 만 하다. 여기에 인당 한 그릇씩 퍼주는 닭 육수를 마셔가며 먹으면 그 양념도 역시 계산된 수였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마성의 보양식 초계탕

평래옥



다시 을지로3가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역시 닭 무침이 메뉴에 올라간 ‘평래옥’이 있다. 오이를 어슷어슷 썰어 고추가루 양념에 닭고기를 버무린 닭 무침은 반찬으로도 나온다. 하지만 리필은 안 되고 그러다 보니 맛이 그리워 단품을 시키게 되는 게 순서다. 



이 집은 닭으로 하는 초계탕이 또 유명한 집이다. 얼갈이배추를 어슷어슷 썰고 메밀면에 새콤한 동치미 국물을 말아 먹는 초계탕은 아무래도 여름에 먹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날씨가 따뜻해지는 이즈음 미리 초계탕을 먹으며 여름을 예비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아삭한 배가 큼직하게 썰려 들어가 있고 겨자를 살짝 풀어 코를 뻥 뚫리게 하는 매운맛이 감도는 국물을 들이켜면 빨리 여름이 오기를 바라게 된다. 노릇하게 부친 빈대떡도 웬만한 전문점보다 나은 솜씨다. 




담백한 맛이 입안에 감돌고 익숙한 사람들의 말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좋은 시간은 늘 그렇듯 빠르게 흐른다. 넓게 폈던 한 상도 또 치우고 거둬야 하는 때가 찾아온다. 이 거리도 그럴 것이다. 이 거리를 걷던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 정동현 셰프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에서 '먹고(FOOD) 마시는(BEVERAGE)'일에 몰두하고 있는 셰프,
오늘도 지구촌의 핫한 먹거리를 맛보면서 혀를 단련 중!
저서로는 <셰프의 빨간 노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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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북에서 온 현대 판화를 소개합니다!
김 석
#김석






“판에 새겨서 찍은 그림.” 판화(版?)의 사전적 의미입니다. 그런데 왜 뜬금없이 판화 얘기냐고요? 제가 이번에 소개해드릴 것이 바로 판화이기 때문이죠. 그것도 흔하게 볼 수 없는 북한 판화입니다. 북한에도 당연히 화가들이 있습니다. 북한에서 최고의 기량을 지닌 화가들을 모아놓은 단체가 바로 ‘만수대창작사’라는 곳인데요. 정기적으로 전람회를 열어 우수한 작품을 가려 시상도 합니다. 


2010년 북한 국가미술전람회 도록


공훈예술가 김봉주의 판화 작품 


얼마 전에 북한에 출장을 다녀온 한 후배가 북한에서 사왔다며 제법 구색을 갖춘 양장본 도록을 한 권 건네더군요. 2010년 북한의 국가미술전람회 도록이었습니다. 책을 펴낸 주체는 ‘만수대해외개발회사그룹’입니다. 이름만 보면 만수대창작사가 생산한 미술품의 해외 수출을 염두에 두고 만든 곳이 아닐까 싶더군요. 아무튼 도록을 넘기다 보니 북한 현대미술이 이 정도였나 싶어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그중에 판화가 어엿한 한 분야로 포함돼 있는 게 눈에 띄었지요. 



처음 대규모 공개되는 북한 현대 판화 

하지만 이런 작품을 직접 볼 기회가 없으니 그저 답답할 뿐이었죠. 더군다나 남북이 평화의 큰 길로 나아가는 시대에 말이에요. 그러던 차에 국내에서 북한 현대 판화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간헐적으로 북한 판화 작품이 국내에 소개된 적은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번처럼 100점이 넘는 북한의 현대 판화가 공식적으로 우리 미술관에서 관람객들에게 선보이는 건 처음입니다. 


홍춘웅 <백두의 봄>(2011) 


백두산의 봄을 그린 판화 작품입니다. 화면을 분할해 보면 맨 아래 들판에 진달래가 여기저기 피었고, 그 위로 초록빛을 한껏 머금은 자작나무 숲이 펼쳐집니다. 그 배경에 멀리 산자락은 파란색으로 물들었고, 그보다 더 멀리로 보이는 눈 덮인 봉우리가 푸른 하늘과 이마를 맞대고 있습니다. 이념과 무관하게 자연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이런 작품, 참 좋죠? 



 

1. 김영광 <총석정의 저녁>(2011) 

 2. 김도선 <해금강의 파도>(2008) 


그리운 ‘금강산’을 그린 작품도 눈길을 붙듭니다. 해질녘의 총석정과 해금강을 아련한 색으로 표현해 놓았습니다. 하늘도 바다도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드는 시간.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와 자유롭게 비상하는 갈매기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습니다. 저는 한창 남북이 화해 무드였던 2007년 한 해에만 네 차례나 금강산을 다녀오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해금강의 낙조를 본 적은 없었죠. 언젠가 다시 금강산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면 저 멋진 낙조를 꼭 보고 와야겠습니다. 



판화로 보는 북녘 사람들의 생활상 


1. 류상혁 <명절날의 민속거리>(2008)

2. 황보신 <추석날>(2013) 


이번에 선보이는 북한 판화를 몇 가지 주제로 구분해볼 수 있습니다. 먼저 위에 소개해드린 것처럼 자연이나 역사 유적을 묘사한 일련의 작품들이 있지요. 하지만 이보다 더욱더 흥미를 자아내는 건 북한 사람들의 일상을 묘사한 그림들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명절을 쇠는 북한 주민들의 모습을 그린 <명절날의 민속거리>와 <추석날>입니다. 명절이 되면 야외로 나들이 나가 흥겨운 민속놀이도 즐기고, 온 가족이 모여 떡을 만들어 나눠 먹는 정경입니다. 북한의 요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명절이 주는 풍성함과 행복감은 북한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진 않겠지요. 


길은경 <일요일의 하루>(2010)


같은 맥락에서 북한의 휴일 풍경을 묘사한 작품들도 꽤 흥미롭습니다. <일요일의 하루>라는 제목의 판화를 한 번 보세요. 대동강변인지 어딘지는 몰라도 강가에 낚시꾼들이 그득하죠. 우리의 휴일 풍경과 다를 게 없습니다. 북한 사회가 우리의 고정관념과 달리 꽤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최근 북한에서 공개하는 여러 영상에서 여실히 확인됩니다. 진짜 저럴까 싶을 정도로 휴일이면 놀이공원이나 식당이 온통 손님들로 북적거리는 모습은 우리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니까요. 


1. 김옥선 <탈곡장에서>(1999)

2. 인성진 <사랑을 싣고>(2016) 


북한 사람들의 일상과 생활상을 보여주는 이런 작품과 달리 노동의 가치를 강조하는 다분히 선전적 성격의 작품들도 보입니다. 대규모 건설 현장을 묘사한 작품들도 같은 맥락이에요. 힘들고 괴롭고 찌푸리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죠. 이런 점은 대단히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예술이 순수하게 예술로서 존재할 수 없는 북한 사회의 특수한 조건이 반영된 것이죠. 그걸 감안하면서 작품을 해석하고 감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1. 김영호 <북부철길건설장> 

2. 황병균 <건설장의 야경>(2014) 



“남녘의 판화도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기를” 

 근래 보기 드물게 북한의 미술 작품, 그것도 엔간해선 접하기 힘든 북한의 현대 판화를 직접 볼 수 있는 이 전시회는 1년여 동안 치밀하게 준비한 끝에 성사됐다고 합니다. 사실 정치와 외교 무대의 담판이 물론 중요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민간 차원의 남북 교류는 앞으로 더욱더 활성화돼야 합니다. 앞장서서 전시를 준비한 판화가 김준권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남녘의 판화도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빨리 오기를 기대한다. 판화작품을 통해 서로의 생각도 읽어보고, 그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귀한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이번 전시를 통해 그동안 단절됐던 남북한 판화문화 환경의 상호이해를 도모하는 출발점이 되었으면 한다.”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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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문화로 나라를 지킨 선각자 간송 전형필
김 석


수백 미터나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름난 맛집일까요? 아닙니다. 뜻밖에도 사람들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어느 미술관이었어요. 도대체 왜? 무얼 보려고 그 길고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을 저리도 묵묵히 감내하는 걸까. 무척 궁금했습니다. 더구나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진풍경이 해마다 어김없이 봄, 가을 한 차례씩 펼쳐진다고 했지요.

 

2011년 가을이었어요. 미술 담당 기자가 되어 처음 그곳을 찾았을 때만 해도 우리나라에 그런 미술관이 있으리라곤 꿈에도 몰랐답니다. 나지막한 산자락 중턱에 서 있는 고색창연한 미술관 건물이 주는 첫인상은 그다지 강렬하지도 않았고요. 세월의 때가 켜켜이 내려앉은, 그것 자체가 문화재처럼 보이는 오래된 전시장은 심지어 편안한 관람조차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미술관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린 까닭은?


간송미술관이 자랑하는 보물 중 하나인 신윤복의 <미인도>



그럼에도 사람들이 미술관 앞에 줄을 서는 까닭은 이 미술관에서만 볼 수 있는 희대의 보물들 때문이었습니다. 워낙에 이름난 문화재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 만한 이들은 다 알았지만, 간송미술관을 더 유명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지요. 2008년에 방송된 드라마 <바람의 화원>이었습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미인도>를 실제로 볼 수 있대! 직접 가서 봐야겠군! 

 

그렇게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죠. 어느 틈엔가 저 또한 긴 줄 한 가운데 서서 기다리기 시작했답니다. 간송의 보물을 보기 위해서 말이에요. 간송미술관 전시회를 여러 번 취재해서 방송도 했고, 미술관이 펴내는 도록 《간송문화》도 꾸준히 구해다 읽었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사실들을 배우고 알아가면서 미술관의 설립자인 간송은 대체 어떤 분이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간송이 1938년에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박물관 보화각(葆華閣)은 이후 간송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마침 간송 전형필의 삶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책이 있더군요. 전기 작가 이충렬 선생이 쓴 《간송 전형필》입니다. 간송은 한 마디로 시대의 거인이었습니다. 문화로 나라를 지킨 거인. 일제강점기에 대한독립을 부르짖으며 싸운 것만 독립운동이요 애국이 아니었음을 간송의 삶은 감동적으로 보여줍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엄청난 재산을 뜻있는 일에 쓰고자 했던 간송은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고 보존하는 일에 한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합니다. 그것도 20대에 말이에요. 이때부터 간송이 우리 문화재를 모아들이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드라마도 그런 드라마가 없습니다. 그렇게 목숨을 걸고 필사적으로 지켜낸 문화재를 보기 위해 후손들은 기꺼이 몇백 미터씩 긴 줄을 서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거고요. 감동은 이렇게 또 다른 감동으로 이어집니다. 



 불쏘시개가 될 뻔했던 겸재 정선의 화첩


(좌)해악전신첩_ 겸재가 72세 때인 1727년에 그린 화첩 《해악전신첩》(보물 제1949호)   

(우)금강내산_ 정선, 《해악전신첩》 중 <금강내산>, 비단에 채색, 32.5×49.5cm, 간송미술관 소장



간송미술관에 수장된 조선 시대 회화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것은 겸재 정선의 작품입니다. 겸재가 72살 때 만든 《해악전신첩》은 그중에서도 특히 더 반짝반짝 빛나는 보물이지요. 금강산을 비롯해 강원도와 동해안의 명승지를 그린 그림 21점이 수록된 이 화첩이 구출되는 과정은 간송이 지켜낸 그 어떤 보물보다도 더 극적이었습니다.



사랑채 한쪽에 붙은 변소엘 가다 보니까 머슴이 군불을 때고 있는데 무슨 문서 뭉치를 마구 아궁이에 처넣고 있단 말예요. 그런데 문득 들여다보니 초록색 비단으로 귀중하게 꾸민 책이 하나가 눈에 띄었어요. 나는 반사적으로 그 책을 보자고 했지요. 그리고 펼쳐보니 겸재 정선의 화첩이란 말예요. 내가 그 시각에 변소엘 가지 않았거나 한 발짝만 늦었어도 그 화첩은 아궁이 속에서 불타서 영원히 사라졌을 테지요.

 

그걸 들고 사랑방으로 들어가 주인에게 펴 보이며 조금 전의 위기일발을 말하자 그저 그랬느냐는 반응일 뿐이었어요. 그래 내가 말했지요. ‘불에 타 없어질 뻔했던 거니 내게 파시오.’라고. 그러자 주인은 순순히 그러자는 거예요. 내가 ‘값을 얼마나 드릴까요?’ 하고 물었더니, 생각해서 내라는 거예요. 그래 몇 마디 시세 얘기를 하다가 그때 돈으로 20원을 지불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다음날 용인에서 ≪겸재화첩≫을 갖고 서울에 올라와 이순황 씨를 만나 적당한 곳에 팔아달라고 부탁했었지요. 그 바람에 간송댁을 방문하게 되었고, 또 그분을 처음으로 뵙게 됐던 거지요. 듣던 대로 아주 부드럽고 따뜻하더군요. 늘 미소를 짓는 인상이었고, 나보다 나이가 대여섯 살 아래인 청년이었는데 아주 품위가 있어 첫눈에 반했어요.


- 장형수 <간송 수장의 비화> ≪보성 75호≫ 1975년


경기도 용인에 살고 있었던 친일파의 거두 송병준의 집에서 불쏘시개가 될 뻔한 겸재의 화첩은 이렇듯 극적으로 당시 골동품 거간이었던 장형수 씨에 의해 구출돼 간송의 품으로 들어갔던 겁니다. 이 무슨 인연이고 운명이었을까요. 아궁이 땔감으로 그대로 불태워졌다면 70대의 노장이 그린 만년의 걸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을 겁니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고려 13세기, 높이 41.7cm, 국보 제68호

 


고려청자가 이룬 최고의 예술적 성취가 집약된 명품 중의 명품 <청자상감운학문매병>입니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도 실렸던 이 청자는 고려청자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강력하게 각인된 것이었으니, 훗날 간송미술관 소장품이란 사실을 알고 나서 역시나 하고 무릎을 쳤던 기억이 납니다. 그저 아름답다 감탄할 수밖에 없는 이 귀중한 물건에도 잊지 못할 사연이 숨어 있답니다.

 


이 물건은 발굴되기가 무섭게 골동 거간의 손에 넘어갔으며 그 거간은 자기 단골손님이었던 일본인 거물급 수장가에게 팔기 위하여 대구로 가지고 갔으나 가는 날이 장날이었던지 공교롭게도 목표로 삼았던 사람이 일본으로 떠나고 없었기 때문에 허탕 치고 말았다. 만약 그 일본인 수장가가 있었다면 이 물건은 영원히 일본으로 건너가 버리고 말았으리라. 


이 거간은 생각 끝에 하는 수 없이 꿩 대신에 닭 격으로 골라잡은 상대가 대구에서 치과의원을 개설하고 있던 신창재 씨였으며 가까스로 사천 원에 넘기고 한숨을 내쉬었던 것 같다. 신창재 씨는 그 얼마 후 박재표 씨 손을 거쳐 서울 필동에 살던 일본인 골동상 마에다 사이이치로 씨 손에 넘겼는데 그 가격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신 씨가 두둑이 얹었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간다.


총독부박물관에서도 이 물건이 탐나서 일만 원까지 내겠다고 교섭이 왔으나 엄청난 가격 차 때문에 결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수장가들을 비꼬아가며 비웃던 일본인 골동계 인사들의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놀라운 일이 장안 한복판에서 일어났다. 총독부박물관도 값이 엄청나게 비싸 손을 대지 못하고 군침만 꿀떡꿀떡 삼키고 있던 고려청자 희대의 명품 천학매병을 그들이 식민지 백성이라고 깔보던 삼십도 채 안 된 새파란 청년이, 마치 청과시장에서 사과 몇 알 사듯이 가격도 한 푼 깎지 않고 냉큼 사버리고 만 것이다.


- 이영섭 <내가 걸어온 고미술계 삼십년> ≪월간 문화재≫ 16호(1973년 11월) 




반드시 지켜야 할 물건이라는 판단이 서면 통 크게 쓸 줄 알았던 간송의 배포와 결단력을 숨김없이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러니 상대인 일본인도 그만 두 손 다 들 수밖에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큰 손을 상대로 거둔 쾌거에 식민치하에서 억눌리고 숨죽여 살던 이들의 속이 잠시나마 얼마나 후련했을까요. 문화재를 지키는 것은 이렇듯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영국인 수집가로부터 고려청자를 사들인 집념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 12세기 중기, 높이 9.9cm, 국보 제270호

 



어미 원숭이가 새끼를 살포시 품에 안았습니다. 새끼는 한쪽 손을 들어 어미의 볼을 더듬고 있고요. 모자의 애틋한 정이 담긴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작품이지요. 연적 하나에도 이렇게까지 따뜻한 정감을 담아낼 줄 알았던 고려 도공의 마음자리는 얼마나 고왔을까요.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집니다.

 

훗날 국보로 지정된 이 귀한 물건의 주인은 일본에서 활동하던 존 개스비(Sir John Gadsby)라는 영국인 변호사였습니다. 남다른 안목으로 모아들인 한국과 일본의 도자기 수집품은 당대에도 명성이 자자해서 ‘꿈의 컬렉션’으로 불렸다지요. 간송은 이 물건들을 꾸준히 눈여겨봅니다. 개스비가 언젠가 고국으로 돌아가면 그 전에 수집품을 정리할 것으로 보고 때를 기다린 겁니다.


 

국보 제74호로 지정된 <청자오리형연적> 역시 간송이 사들인 개스비의 수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때가 옵니다. 간송은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존 개스비와 세기의 담판을 벌이지요. 개스비가 20년 동안 모은 고려청자 22점을 놓고 치열한 밀고 당기기를 했지만, 사흘간의 치열한 협상에도 소득이 없었답니다. 빈손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하지만 결국 청자의 주인이 될 운명이었을까요. 이번엔 개스비가 경성으로 날아와 간송을 만납니다.

 

간송은 개스비를 성북동의 보화각 공사 현장으로 데려갑니다. 사재를 들여 박물관을 짓는 간송의 뜻을 헤아린 개스비는 고개를 끄덕였고, 자신이 내놓은 청자 22점 가운데 20점을 간송에게 넘겨줍니다. 자그마치 기와집 400채 값에 말이에요. 끈질긴 인내심과 태산 같은 배포가 아니었다면 개스비의 수집품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에게 오랫동안 많은 한국 미술품을 수집해준 것을 치사하고, “나도 귀하의 애써 모은 수집품을 인수하여 귀하에게 지지 않도록 정성껏 보존하겠다”고 말한 후 그의 수집품을 즉석에서 인수하였다.


(중략)


작별할 때, 나는 “오랫동안 애장하였던 수집품들과 헤어지게 되니 대단히 섭섭하시겠습니다. 고려자기가 보고 싶거든 언제든지 오십시오” 하였더니, 그는 “암, 가고말고요. 꼭 가보겠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자기를 한국의 수집가인 귀하가 한국으로 도로 가져가게 되니 정말 기쁩니다” 하는 그의 대답에는 정말 기쁨이 넘쳐 흐르는 듯하였다.


- 전형필 <고미술품수집비화> 《신태양》 1957년 9월호



 간송 전형필의 문화 보국 정신을 되새기다

 

그렇게 피와 땀과 눈물을 쏟아 모은 우리 문화재가 수천 점에 이른다고 하지요. 이 가운데 국보가 12점, 보물이 31점이나 된다고 하니 개인이 이런 엄청난 역사적 소명을 감당했다는 사실이 좀체 믿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구절절 사연이 깃든 간송의 보물들을 찬찬히 돌아보며 참 고마웠습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을 우리 문화재를 수집하는 데 아낌없이 쏟아부은 선구적 정신의 소유자가 있었음을. 간송이야말로 문화로 나라를 지킨 독립운동가였음을. 100년 뒤 미래를 내다본 그 탁월한 안목 덕분에 지금 우리가 간송의 보물들을 마음껏 감상하고 즐길 수 있음을.

 

간송 전형필의 문화광복(文化光復)에 향한 간단없는 열망과 문화 보국(文化保國) 정신을 돌아볼 수 있는 뜻깊은 전시가 3ㆍ1운동 100주년에 즈음해 열리고 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지요. 많은 분이 전시장을 찾아 간송의 보물들을 만나는 기쁨과 행복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 유물 하나하나에 쏟아부은 간송의 피와 땀과 눈물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습니다.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