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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조선의 희망’이었던 비운의 왕세자 
효명을 만나다
김 석


효명세자의 얼굴을 아십니까? 아신다고요? 드라마에서 보셨다고요? 그렇습니다. 효명세자는 박보검이었습니다. 박보검이 곧 효명세자죠. <구르미 그린 달빛>이란 드라마가 그리 만든 겁니다. 박보검이란 배우의 얼굴로 각인된 효명세자의 이미지는 그래서 더 오래 기억되겠죠. 18살 효명세자를 그린 초상화가 불에 타버려 눈썹 끝자락만 간신히 남았으니, 화마에 사라진 그 얼굴은 그저 상상으로 채울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효명세자는 자기 초상화를 보고 이런 글을 남겼죠.




<효명세자 초상화> 부분, 조선 1826년, 비단에 채색, 잔존부분 147.0×44.0cm, 국립고궁박물관



이름은 이영(李旲). 클 영(旲)이란 이름자처럼 크게 되었을 사람. 자는 덕인(德寅). 호는 경헌(敬軒), 학석(鶴石), 담여헌(淡如軒) 등등. 할아버지는 정조, 아버지는 순조. 1809년 8월 9일 순조와 순원왕후 김 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조선왕조 500년 내내 그토록 귀했다는 적장자(嫡長子, 정실에게서 난 장자)였으니 얼마나 귀한 자식이었겠어요. 효명은 4살에 왕세자가 되었고, 9살에 문묘(文廟)에서 입학례(入學禮)를 행했으며, 11살에 경희궁에서 관례를 치르고 그해 풍양 조 씨 조만영의 딸과 결혼합니다.




미래의 군왕이 될 재목으로 자라난 

왕세자


효명세자는 어릴 때부터 출중한 문학적 재능을 보였습니다. 왕이 되기 위한 수업을 차근차근 밟아나가며 아버지 순조의 못다 이룬 꿈을 실현시켜줄 미래의 군왕으로 무럭무럭 커나갔다고 하죠. 한창 배움에 매진하던 시절 효명세자가 쓴 글씨가 여러 점 남아 있는데요. 효명세자에 관련된 다른 유물도 물론 한 점 한 점 소중하겠지만, 그중에서도 저는 효명의 글씨를 가장 눈여겨봤습니다.


<효명세자 글씨>, 조선 1816년, 종이에 먹, 60.0×50.3cm, 국립중앙박물관



딱 8살 어린이의 글씨죠. 크기도, 굵기도 제각각인 글자들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야무진 입을 앙다물고 한 자 한 자 정성을 다해 써 내려갔을 8살 세자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조선시대에는 왕세자를 위한 별도의 교육 제도가 갖춰져 있었습니다. 서연(書筵)이라고 하는데요. 8살의 세자는 서연에 참여한 홍희조라는 관리에게 세 번 글씨를 써서 내려줍니다. 그래서 사진에 보이는 글씨가 줄마다 조금씩 다른 겁니다. 맨 오른쪽의 수복다남자(壽福多男子)는 말 그대로 장수하고 부자 되고 아들 많이 낳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구절입니다. 


그 다음의 거재자팔원팔개(擧才子八元八愷)는 팔원팔개처럼 재능 있는 사람을 뽑아 쓰라는 구절이고요. 셋째, 넷째 줄은 중국 요순시대 시구에서 발췌한 것으로 ‘해와 달이 밝게 빛나고 남풍이 때에 맞게 불어오도다.’란 뜻입니다.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은 표현이겠지요. 초등학교 1학년 공책에서 볼 수 있는 어린이다운 천진난만함이 깃든 글씨. 획 하나하나 마음속에 새기며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내려가다 보니 절로 미소가 피어납니다.


<효명세자 글씨>, 조선 1819년, 종이에 먹, 28.7×24.8cm, 국립중앙박물관



무럭무럭 자라 11살이 된 효명 어린이의 글씨. 3년 전과 확실히 달라졌죠? 제법 격조도 있고 힘도 느껴집니다. 위 글씨와 마찬가지로 효명세자가 11살에 서연에 참여한 박영원이라는 관리에게 써서 내려준 글씨입니다. 이 구절은 《논어》의 <옹야(雍也)>에서 따온 것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고 어진 사람은 장수한다.’는 뜻입니다. 어린 세자의 영특함이 흐뭇했을 신하들은 이렇게 세자가 내려준 글씨를 고이 모셔뒀다가 훗날 책으로 만들어 간직합니다.




스물두 해를 살면서 이뤄놓은 업적


당시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도 사람들은 무척 아쉬워합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만약 효명세자가 스물두 살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모두가 꿈꾸던 대로 임금이 되어 할아버지 정조의 대를 이어 훌륭한 통치자가 되었다면, 이 땅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고작 22년을 살면서도 400여 편이나 되는 시(詩)를 남겼을 정도로 뛰어난 문학적 재능의 소유자였던 효명의 이른 죽음은 그래서 더 큰 안타까움을 부릅니다.


  

<효명세자의 편지글>, 조선 1814~1827년, 종이에 먹, 친환경농업박물관



특이하게도 친환경농업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는 효명세자의 편지글 가운데 석 점을 골라 봤습니다. 모두 큰외삼촌 김유근에게 보낸 편지들인데요. 왼쪽 것은 6살 때 큰외삼촌에게 당과(糖菓)를 보내 달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사탕이겠죠. 사탕 좀 보내주세요, 하고 조르는 6살 효명 어린이의 간절함이 눈에 선합니다. 현재 남아 있는 효명세자의 글씨로는 가장 어릴 때 쓴 글씨가 아닌가 합니다. 6살 어린이의 글씨답지 않게 참 단정하죠?


가운데 편지에는 효명이 18살 때 외조부의 생신을 축하하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그리고 오른쪽 편지는 정확히 스무 살 때 쓴 겁니다. 해가 갈수록 글씨도 날로 원숙하게 무르익어가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비교하면서 살필 수 있죠. 글씨에 문외한인 제가 봐도 열여덟, 스무 살 청년 효명의 글씨는 절도 있고 유려한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아래 글씨를 보면 더 실감이 나실 겁니다.


 

(좌)<효명세자가 글씨를 쓴 서희순의 호>, 조선 1829년, 종이에 먹(탁본), 35.3×24.7cm,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우)<춘방 현판>, 조선 1829년, 나무, 78.1×122.4cm, 국립고궁박물관



왼쪽 글씨는 효명세자가 관료였던 서희순에게 그의 호인 우란(友蘭)이라는 글씨를 써서 내려준 것을 탁본한 겁니다. 오른쪽 상단의 두 글자는 예필(睿筆), 즉 세자의 글씨라는 뜻입니다. 왕의 글씨는 어필(御筆)이라고 하죠. 오른쪽 사진의 현판도 효명세자의 글씨입니다. 역시 오른쪽 위에 예필(睿筆)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죠. 수염도 나고 제법 군왕의 태가 갖춰지던 시기의 효명이 쓴 단정한 글씨에서 한창 물오른 ‘젊음’이 전해지는 것만 같습니다.




일찍이 아버지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며 한창 국가경영의 경험을 쌓아가던 효명은 안타깝게도 대리청정 4년만인 1830년 창덕궁 희정당에서 숨을 거두고 맙니다. 효명이란 이름은 사후에 아버지 순조가 내려준 시호(諡號, 사후에 붙이는 이름)입니다. 뜻을 이어 사업을 이뤘다는 뜻에서 효(孝), 사방에 빛을 비춘다는 뜻에서 명(明)이라 했다지요. 궁중의 큰 행사가 있으면 직접 행사에서 선보일 공연을 창작해서 새롭게 선보일 정도로 예술적 감각이 뛰어났습니다. 음악적 재능에 연출가로서의 재능까지 겸비했다고 할까요. 




죽어서야 왕이 되고, 황제가 되다


그 안타까운 죽음은 두고두고 미련을 남기죠. 살아생전에 왕이 되지 못한 효명은 아들 헌종(憲宗)이 왕이 된 뒤 익종(翼宗)으로 추존(推尊, 받들어 올림)하면서 죽은 뒤에 왕이 됩니다. 그 뒤에 효명세자의 양자였던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추존해 황제가 되죠. 사후에 추존된 임금 중에서 유일하게 종묘 정전에 위패가 모셔졌고, 열다섯 차례에 걸쳐 덕을 기리는 존호(尊號)를 받아 종묘에 모셔진 조선 임금 가운데 어보(御寶)와 어책(御冊)이 가장 많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문예 군주를 꿈꾼 왕세자 효명>은 그렇게 짧은 생을 살다간 효명세자의 삶과 업적을 돌아보는 아주 특별한 자리입니다. 얼굴이 불에 타 지워진 초상화 앞에 서서 오래도록 들여다보았죠. 얼굴이 남았다면 효명세자라는 한 사람의 생애를 그려보는 일이 훨씬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제가 주목한 것이 바로 효명의 글씨였습니다. 그 글씨들 속에서 여섯 살 효명, 열한 살 효명, 스무 살의 효명을 만났습니다.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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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용진 바이어의 와이너리티 리포트
와인! 이것만 알면 나도 와인 전문가
명용진 바이어




 






리포트 001

와인! 이것만 알면 나도 와인 전문가



혼술의 끝, 워라밸을 즐기고 싶은 잇님들을 위한 소확행의 끝판. 특별한 종교가 없어도 찾는 그분. '주님'의 피와 같은 와인에 대한 주절주절. 유튜브와 서적을 통해 소개되는 수많은 유익한 정보는 그분들께 위임하고, 있는 그대로 날것의 바잉 노하우...는 영업 비밀이라 알려줄 수 없고... 쉽게 와인을 즐길 수 있도록 이것만 알면 나도 와인 전문가의 포인트를 몇 가지 알려드립니다. 어려운 와인 용어는 안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프랑스의 명품종! 

피노누아 



갑분 피노누아!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품종은 아마도 까베르네쇼비뇽, 샤도네이, 모스카토입니다. 음... 최소한 이마트 데이터로 증명된 거니 믿어주시길. 그런데 갑자기 피노누아라! 피노누아는 너무나 예민한 품종이라 재배 시 관리가 매우 힘든 품종 중 하나입니다. 이 품종으로 만든 프랑스의 DRC(도멘드라 로마네 꽁띠)는 12병 1세트에 3천만원에 육박하지만 이미 대기 줄이 어마어마하다죠.


이렇게 예민한 품종이라 괜찮은 피노누아 품종의 와인은 가격대가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어떤 품종의 와인을 좋아하냐고 물어본다면, 피노누아’ 라고 한 번 해보세요. 특히 프랑스 지방인 부르고뉴는 가격대가 좀 세니까... 뉴질랜드 피노누아라고 한마디만 한다면, 와인 좀 아는 사람으로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섣불리 저렴이 피노누아를 선택한다면... 와인과 영영 멀어질 수 있으니 주의하세요.








미국 와인의 고장! 

나파밸리 



미국 프리미엄 와인의 대명사 나파. 나파밸리의 대표 품종은 국내에도 잘 알려진 까베르네쇼비뇽입니다. 나파 까베르네쇼비뇽. 미국 나파밸리에 가면 끝없이 펼쳐진 까베르네쇼비뇽 포도밭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나파에 까베르네쇼비뇽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여러 품종이 있었지만, 돈이 된다는 이유로 진판델과 같은 기존의 토착 품종은 뿌리채 뽑혀 버리고 그 자리에 까베르네가 심어졌죠. 그래도 지금 이 순간. 나파밸리의 까베르네는 돈이 되는 프리미엄 품종임에 틀림없습니다. 나파 까베르네가 라벨에 붙어있는 순간 5만원 이상이라고 봐야죠. 


혹시 마트에서 5만원 미만의 나파 까베르네를 본다면. 득템이니 일단 카트로 고고. 나파를 아는 그대는 이미 전문가. 







프리미엄 스파클링!

샴페인 



기포가 있는 모든 와인을 샴페인으로 부르는 당신은... 그러지 맙시다. 샴페인은 프랑스 상파뉴 지방에서 나온 스파클링 와인에만 사용할 수 있는 고유명사입니다. 와인을 좀 아는 분들은 뽀글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군대에서의 그것 아닙니다) 이 때문에 과거 3~4천 원에 구매할 수 있었던 국내 샴페인이 네이밍을 바뀐 사례도 있었죠. (지금은 샴페인을 빼고 영업중) 샴페인 역시 프리미엄 스파클링을 대표하는 대명사입니다.


모엣샹동, 돔 페리뇽이 잘 알려진 샴페인 브랜드죠. 그 때문에 볼품없는 라벨의 스파클링이라도 샴페인이라는 라벨이 붙는 순간 5만원이 넘는 가격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샴페인 마시고 싶다... 한마디 해보세요. 당신 곁에서 샴페인을 곁들이는 그분은 와인을 좀 아는 사람입니다. 


이제 샴페인을 흔들어 터트려서 버리는 일은 없겠죠? 참고로 전 ’ 소리도 안 나게 땁니다.









국내 와인 시장이 점점 커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와인은 어려운 술, 공부해야 하는 술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일부는 맞는 말이지만 굳이 공부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여러 사람들과 와인을 즐긴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정보들이니까요. 그래도 위에 언급한 대로 간단히 아는 할 수 있다면 아마도 그 이상의 대접(?)을 받을 수도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물론 스토리를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술이라고 하는 것은 그 시대 문화와 정서를 담고 있기에 아는 만큼 즐길 수 있는 영혼의 동반자 같은 존재입니다. 이제 오늘 저녁, 삼겹살에 와인 한잔 어떠세요?







명용진 바이어


치킨에 맥주 마시듯 

와인을 친근하게 알리고 싶은 와인 바이어. 

평범한 일상을 와인만으로 특별하게 만들길 원한다. 

새로운 형태의 프로모션과 혁신적인 가격, 

고품질 와인에 힘쓰고 있는 와인계의 이슈메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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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트의 리얼한 마케팅 이야기
역설의 광고
최훈학
#최훈학마케팅담당







오늘 쓰는 글은 와이너리 광고가 왜 좋은 광고이고 그래서 이런저런 상을 받았다는 자랑 보다는 좋은 광고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조직을 운영하고 대행사, 프로덕션들 파트너사와 어떻게 일하는 게 좋은지에 대해서 얘기해보고자 합니다.





광고가 만들어지는 과정



마케팅은 어느 회사든지 신입사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직종 중의 하나입니다. 누구나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좋은 광고, 프로모션을 기획해서 성공하는 것을 꿈꾸죠. 또한 광고회사는 수많은 광고동아리가 활동할 만큼 취업에 있어 최고 인기 회사기도 합니다. 그러나 입사하게 되면 생각과 다른 현실의 벽에 부딪히게 됩니다.


TV 광고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TV 커머셜은 기타 다른 매체와 함께 종합적인 캠페인으로 많이 하기 때문에 기간과 매체에 따라 다르지만, TV 광고 하나만을 놓고 봐도 3~40억은 들 정도로 굉장히 투자가 많이 되는 캠페인입니다. 광고주가 TV 광고를 하고 싶을 경우 아이디어에 대해서 경쟁입찰로 결정하기 때문에 광고 회사들이 수많은 날을 꼬박 밤을 새우며 아이디어를 짜내 준비하게 됩니다. 



광고회사가 PT에서 결정이 되면, (결정도 쉽게 되지 않습니다. 규모가 클 경우는 참여자 수를 줄여가며 1차, 2차, 3차 PT를 하기도 합니다.) 그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프로덕션과 함께 제작하고 광고주에게 선보이고 매체를 타게 되는데, 수많은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가장 먼저 PPM(Pre-Product Meeting)을 합니다. 어떤 광고를 만들 것인지 화면을 스케치해서 설명하는 거죠. 그 다음 광고 제작 과정에서 광고주 팀장 시사, 임원 시사, 그리고 경영진 시사를 통해 결정됩니다. 제작과 의사결정에 걸리는 시간이 최소 두 달에서 석 달 정도 걸리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문제는, 수많은 과정을 거치며 아이디어가 발전되고 더 나아지는 경우보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는 것입니다. 보고 과정에서 아이디어가 바뀌거나 (사전에 보고했는데도!) 중요하지 않은 부분에 대한 마이너한 수정으로 시간을 소요하거나, 광고의 타깃과 성별이나 연령대가 다른 경영진이 본인의 취향대로 수정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광고의 제작과정은 수직 계열화 되어있습니다.






스피디한 시대, 이마트의 광고 마케팅 과정!


이러한 구조가 필요한 경우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스피디한 시대에 마케팅 이슈가 있을 때 매번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이마트는 대형 할인마트입니다. 이렇게 많은 비용이 드는 광고를 제작해야하는 경우에는, 현장에서 필요한 이슈에 대해 빨리 아이디어를 내서 신속하게 실행하고, 고객에게 피드백을 받는 마케팅 조직체계를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이마트 와이너리는 글로벌대행사 TBWA와 함께 만들었습니다. 이마트는 일 년에 두 번 와인장터를 통해 좋은 양질의 와인을 저렴하게 판매하는 행사를 하고 있는데요. 이마트에서 주류를 구매하는 고객들의 데이터베이스를 보니 주류구매 고객의 단 22%만 와인을 구매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와인보다는 아직 소주나 맥주에 대한 선호도가 절대적이었다는 거죠. 그래서 와인장터에 맞춰 그동안 와인을 접하지 않았던 고객들이 쉽게 와인을 구매할 수 있도록 해보자는 것이 현업과 저희 마케팅팀의 니즈였습니다.


이마트, '와인 이즈 노말' 광고의 한 장면


TBWA는 이러한 저희의 니즈에 맞게 와인을 접해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너무 쉽게 와인을 즐기는 와이너리 아이디어를 제시했고, 담당했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남현우 CD가 모 인터뷰에서 밝혔던 것처럼 본인이 해본 것 중에 가장 빠른 의사결정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저는 신속하게 의사결정하고 이 프로젝트에 소요될 예산을 배정해주었으며, PPM은 이후의 진행과정에 대해서는 전혀 개입하지 않고 실무팀에 맡겨 두었습니다. 실무팀은 TBWA 직원들과 실제 촬영의 배경이었던 지리산 밑 구례에 내려가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닭을 잡아먹으면서 광고를 찍었습니다. 


이마트의 ‘와인 이즈 노말’ 광고는 내용적으로도 역설적이었고, 광고에 들인 시간과 비용에 비해 정말 큰 성과를 거둔 것도 역설적이었으며,  30억 이상 소요되는 TV 광고의 백 분의 일 매체비로 이런 성과를 거둔 것도 역설적이었습니다.


2018 서울영상광고제에서 그랑프리를 받고, 세계 3대 광고제인 뉴욕페스티벌에서 금상을 받게 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광고를 찍은 당촌리에 한번 다시 내려가서 마을 잔치를 하고, 그 과정을 콘텐츠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TBWA 역시 아이디어에 흔쾌히 동의해주었고, 최소한의 실비만 받고 콘텐츠를 제작해주기로 하였습니다. 




우리는 마을잔치에 쓸 와인 2백 병을 들고 당촌리를 다시 한번 찾아갔으며,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즐거운 하루를 보냈습니다. 와이너리 기념 라벨을 붙인 와인을 선물로 받은 어르신들은 진정으로 와인을 즐기시는 분들이었습니다. 이쯤되면 광고와 현실의 경계가 없어지는 것도 하나의 역설이 아닐까요?









최훈학 이마트 마케팅담당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IDEA와 MONEY의 사이에서,

회사와 고객의 사이에서

항상 방황하는 마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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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현 셰프의 음식을 쓰다
낡은 골목, 전통 깊은 '힙지로'의 맛집
정동현
#정동현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마치 목이 마르기 전에 물을 마셔야 한다는 말이 있듯 고기 생각이 나기 전에 이미 고기를 먹었어야 한다. 특히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혹한 혹서 기후 덕에 미국 해병대가 최적의 훈련 장소라고 밝힌 한반도에서 고기를 먹지 않고 여름을 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극기다. 


고기라고 하면 꼭 하얀 마블링이 박힌 한우 투뿔만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강남 어딘가에서 남이 구워주고 남이 사주는 고기를 먹는 이들이다. 세련된 건물과 흡족한 서비스, 고급스러운 재료를 보면 역시 돈값을 한다 싶다. 그러나 자주 먹을 수 있는 값은 아니다. 친구들끼리 모여 앉아 어깨를 툭툭 쳐가며 가볍게, 흥겹게 먹을 수 있는 분위기 역시 아니다. 


친구의 집에 온 것처럼, 그의 부모처럼, 익은 김치를 내어주고 반갑게 인사하며, 너와 내가 함께 보낸 시간보다 오래된 곳에 앉아 고기를 먹는 그 정취는 또 이길 수 없다. 친구가 보고 싶을 때, 그런데 마지막으로 보낸 메시지가 몇 주 전일 때, 나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을지로로 와라.”





 한여름의 동빙고가 되어주는 

백제정육점



시작은 종로5가의 ‘백제정육점’이다. 불판 앞에 앉는 것조차 짜증 나는 날, 백제정육점은 모두의 환영을 받는다. 북새통 같은 광장시장 육회 골목을 어슬렁거리지 말자. ‘정육점’이라는 든든한 이름을 단 이곳에 가면 입맛을 시원하게 돋우는 유일한 육회를 만날 수 있다. 



그렇다고 육회만 파는 집은 아니다. 육회를 시작으로 등심, 특수부위, 차돌박이 등 소의 전 부위를 먹을 수 있다. 하물며 설렁탕, 육개장 같은 식사 메뉴도 ‘일절’이다. 



이 모두가 평균 이상이지만, 동계올림픽이 열리면 전 경기를 다 챙겨보더라도 쇼트트랙은 꼭 사수하듯이 이 집의 육회는 충분이 아닌 필수 조건이다. 육회가 테이블 중앙에 놓이면 이 말이 괜한 헛소리가 아님을 알게 된다. 


산처럼 수북이 쌓인 육회 위에 올라간 달걀노른자를 모임의 주선자가 술술 살살 고기에 섞어주면 맛의 밀도가 한결 짙어진다. 이에 서걱서걱 씹히는 깨소금과 설탕의 조합은 육회 맛의 비결이자 포인트다. 혹자는 ‘너무 달다’고 불평하기도 하는데 입맛을 돋우는 용도로 생각하면 절대 나쁘다고 할 수 없다.


   


사각사각 얼음과자 같은 소고기의 낮은 온도에는 오히려 입자가 씹히는 설탕의 단맛이 조화가 나쁘지 않다. 온도가 낮을수록 미각이 둔해지기에 어느 정도 강한 단맛은 맛의 설계에 필요하다. 



더불어 짧게 치고 끝나는 설탕에 배의 진득한 단맛이 섞이고 파의 알싸한 맛까지 엮이면 오색단청처럼 맛이 화려해진다. ‘육회’라는 두 글자 아래 담긴 맛의 스펙트럼이 만만치 않다. 산더미 같은 한 접시에 차가운 맥주를 곁들여 먹노라면 여름을 피하는 동빙고라도 찾은 것 같다. 





노포에서 즐기는 연탄불의 맛, 

경상도집



비싼 돈을 내지 않더라도 남이 구워주는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곳도 있다. 종로5가에서 멀리 가지 않은 국립의료원 뒷골목에 가면 간판도 없는 작은 고깃집이 있다. 이름은 경상도집, 카드 결제도 되지 않는다. 제대로 된 좌석 없이 노상에 깔린 탁자에 요령껏 앉으면 된다. 


두 명이 오더라도 주문은 3인분으로 시작하는 것이 관례. 이유는 연탄불에 고기를 굽는 탓에 추가 주문은 시간이 걸린다. 일 인분은 아예 주문 받지도 않는다. 이렇게만 보면 욕쟁이 할머니가 떠오르지만, 욕먹으며 밥 먹을 일은 없다. 무심해 보여도 빈 국그릇을 그냥 보지 못하는 살뜰한 서비스를 겪게 된다. 


  


이곳에서 파는 메뉴는 돼지갈비 하나뿐. 단맛과 짠맛이 2:3 정도의 비율로 느껴지는 거뭇거뭇한 돼지갈비는 서울 어디에 내놔도 쳐지지 않는다. 없다시피 한 인테리어를 감안한 어드밴티지 없이도 충분히 먹어주는 맛이다. 


그 맛의 연유를 살핀다면 며느리도 모르는 양념, 좋은 원물 등이 손에 꼽히겠지만 뭐니 뭐니 해도 연탄불 화력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릴 적 방을 데우던 그 연탄불에 석쇠를 올려 고기를 구우면 인간이 좋아하는 ‘구운 맛’이 극대화된다. 155도 이상 열을 받으면 나타나는 마이야르(maillard) 현상에, 설탕과 간장이 열을 받아 캐러멜화되는 과정까지 거치면 몸에 좋은지 나쁜지 따질 겨를 없이 빠져들게 되는 맛이 탄생한다. 고기 한점, 한점 살펴가며 가위로 탄 부위를 잘라내는 정성까지 곁들여지고 사람들은 이름도 없는 이곳에 장사진을 편다. 






 달달한 서울식 옛날 불고기 

보건옥


누가 뭐래도 고기는 불판 위에 구워야 제맛이라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이들이 목소리를 높이면 나는 을지로4가 ‘보건옥’에 간다. 불고기로 한가락 하는 이 집은 이웃 우래옥에 비해서도 맛이 떨어지지 않는다. 물론 원물 고기의 등급 자체는 차이가 나지만 파김치, 멸치볶음 등 한 상 쫙 깔리는 밑반찬을 앞에 두면 마음이 푸근해지고 저절로 엉덩이가 무거워진다. 



위로 볼록한 구형 불판도 좋고 아래로 오목한 신형 불판도 좋다. 일단 불판을 가스 불 위에 달구며 국물 자작한 불고기를 휘적인다. 애교 섞인 말투처럼 은근한 단맛이 간장의 짭조름한 맛 뒤로 몸을 숨긴다. 버섯과 야채도 숨을 죽인다. 익은 불고기는 넉넉히 앞접시에 덜어 담는다. 고기가 줄어들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아마 ‘난 이제 됐어’라고 손사래치는 이도 생기리라. 그래도 조금 더 먹으라고 덜어주는 마음, 빈 잔이 보이면 말없이 따라주는 친구의 옆모습이 낯익다. 



불고기로 아쉽다면 김치찌개로 넘어가는 게 순서다. 고깃집 김치찌개라 들어간 고기양이 남다르다. 아닌 게 아니라 점심이면 김치찌개 먹는 사람이 태반이다. 김치 반 고기 반인 찌개를 약한 불에 뭉근히 익힌다. 고기와 김치의 결이 풀리고 말랑말랑 살캉살캉 해 질 무렵, 흰밥을 시킨다. 


하얀 쌀밥 위에 건더기를 한 국자 퍼 올린다. 숟가락으로 퍼서 입안 가득 넣는다. 시고 기름진 국물이 입안에 그득하다. 부른 배로 이야기를 나눈다. 넘치는 정을 나눈다. 무덥고 힘들지만 견딜만한 한국의 여름이다. 오래된 식당이 있고 오래된 벗이 있어 괜찮은 하루다.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 정동현 셰프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에서 먹고(FOOD) 마시는(BEVERAGE)일에 몰두하고 있는 셰프,
오늘도 지구촌의 핫한 먹거리를 맛보면서 혀를 단련 중!
저서로는 <셰프의 빨간 노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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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 속 독서 풍경 - 3편
책 읽는 기쁨을 그 무엇에 비하랴!
김 석

얼마 전에 출간된 김탁환 작가의 새 장편소설 <대소설의 시대>는 18세기 조선을 무대로 한 작품입니다. 여기서 대소설(大小說)이란 오늘날의 장편소설을 가리키는 말인데요. 흥미로운 것은 이 소설의 주인공이 ‘여성들’이란 사실입니다.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18세기는 여성들이 소설 창작의 주체이자 독서의 주체로 맹활약한 시기였답니다. 김탁환의 소설에서 조선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등장하는 임두라는 작가도 여성이고, 그 소설을 베껴 쓰는 이들도 여성이며, 다음 편이 나오길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가장 열성적인 독자들도 여성이죠.



 

(좌) 김탁환 <대소설의 시대>  (민음사, 2019)

(우) 윤덕희 <책 읽는 여인>, 비단에 담채, 20×14.3cm, 18세기, 서울대박물관 소장



그 시대 여성들이 그토록 이야기에 목말랐던 까닭을 짐작하긴 어렵지 않습니다. 제가 2016년 11월 칼럼에서 여성이 책을 읽는 장면을 담은 우리 옛 그림을 소개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위 그림은 ‘책을 읽는 행위’를 묘사한 옛 그림 중에서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당시에 이 그림을 설명하면서 저는 이렇게 썼습니다. 


“제아무리 풍속화가 만개한 18세기라 해도 당시에 이런 그림이 그려지고 전해졌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놀라움으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대소설의 시대>를 읽고 나니 이런 그림이 화가들에 의해 그려진 것이 아무 이상할 게 없더군요. 이 그림은 조선 후기의 유명한 사대부 화가 윤두서의 아들인 윤덕희(尹德熙, 1685~1776)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2017년 9월 한 고미술 경매에 이것과 아주 비슷한 그림이 한 점 출품됩니다. 같은 사람이 그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판박이 같은 그림이었죠. 무슨 연관성이 있는 게 아닐까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뭔가가 있었습니다.


윤두서 <미인독서 美人讀書>, 비단에 채색, 61×40.7cm



한 여인이,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습니다. 이 모습만 보면 위의 것과 같은 그림입니다. 심지어 왼손 검지로 책을 가리키는 자세까지 똑같죠. 이 그림을 남긴 화가는 윤두서(尹斗緖, 1668∼1715). <책 읽는 여인>의 화가 윤덕희의 아버지입니다. 이제 의문이 풀리죠. 아버지와 아들이 비슷한 구도의 독서하는 여인을 그렸다! 경위야 어찌 됐든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인 셈이죠. 이렇게 부자가 나란히 책 읽는 여인을 그림으로 남긴 것도 한국 미술의 역사에서 특기할 만한 부분입니다.


기나긴 독서의 역사에서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여성적인 삶의 형식으로 자리 잡은 것은 불과 300여 년밖에 안 됩니다. 다시 말해 여성들에게 독서는 그만큼 간절하고 절실한 것이었다는 뜻입니다. 남성이 책을 읽는 것만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었죠. 그래서 수많은 그림에 남성의 독서가 묘사됐지만, 십중팔구는 커다란 풍경의 일부로 그려졌을 뿐입니다. 독서하는 남성을 따로 떼어 그린 경우가 극히 드문 이유입니다.


 

정선 <모옥독서 茅屋讀書>, 종이에 수묵, 31.6×42.1cm



2017년 한 경매에 출품돼 관심을 모은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의 그림입니다. 화면 아래 띠풀로 지붕을 이은 정자에서 어느 선비가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군요. 이 그림에서 보듯 인물은 거대한 자연의 극히 작은 일부로 묘사돼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저 사람이 뭘 하고 있나 싶을 정도로 말이죠. 물론 예외도 있긴 하지만 대체로 옛 산수화 속에서 독서인은 이렇듯 아주 작게 그려져 있습니다.


얼마 전에 교보문고에서 상반기 독서 시장 통계를 발표했는데요. 상반기에 서점에서 책을 구매한 사람을 성별로 보면 여성이 60.7%였습니다. 연령대별로는 40대가 32.9%로 가장 많았고요. 두 통계를 합하면 책 구매자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40대 여성(21.5%)입니다. 더 재미있는 현상은 책과 관련한 책의 표지에서 ‘독서하는 여성’을 묘사한 그림이 차지하는 비중 또한 압도적으로 높다는 점입니다.



   

굳이 많은 예를 일일이 들 필요도 없습니다. 이 표지들은 제가 최근에 본 것들 몇 가지일 뿐입니다. 찾으려 들면 훨씬 더 많은 사례를 쉽게 발견할 수 있죠. 그것은 다시 말하면 ‘여성의 독서’가 그만큼 화가들에게 특별한 소재로 여겨졌다는 뜻입니다. 물론 가장 오른쪽 책의 표지처럼 남성의 독서도 있습니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이지만요.


다시 우리 그림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조선 후기에 시장이 크게 발달하면서 세책방(貰冊房)이라는 가게가 성황을 누리게 되는데요. 요즘 말로 하면 서점보다는 책 대여점에 가깝습니다. 김탁환의 소설에도 쥐 영감이라 불리는 당대 최고의 세책방 주인이 꽤 자주 등장합니다. 이들은 단순히 책을 빌려주는 것뿐만 아니라 새 소설 작품의 시장에 나갈 만한지 아닌지를 예리하게 가려낼 줄 아는 비평가이기도 했죠.


<태평성시도 太平城市圖>, 비단에 색, 8폭, 각 113.6×49.1cm, 국립중앙박물관



세책방이 등장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8폭짜리 병풍 그림 <태평성시도>인데요. 자그마치 2,170여 명이 등장하는 이 대작은 조선 후기 생활사 박물관이라 할 정도로 그 시절에 도심에서 번성한 시장의 모습이 참으로 다채롭게 그려져 있습니다. 이 병풍의 제4폭에 문제의 세책방이 보입니다.


<태평성시도> 제 4폭에 보이는 세책방의 모습



1층은 책은 빌려주는 곳입니다. 탁자 위에 책이 잔뜩 쌓여 있고 건물 안에서 한 명, 밖에서 한 명이 책을 들춰보고 있습니다. 가게 주인이 그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봅니다. 빌려 갈 거야 말 거야 하는 표정일까요. 그 위로 이층에선 누군가 열심히 붓을 놀리고 있죠. 책을 그대로 베끼는 필사(筆寫)에 여념이 없군요. 지금처럼 복사기나 프린터가 없던 시절에는 손으로 베껴 쓸 도리밖에 없었습니다. 여러 부를 만들어서 빌려주거나 파는 거죠. 영화 <음란서생>(2006)에도 세책가가 조연으로 등장합니다.


그런가 하면 책 욕심 있는 이들은 자기만의 근사한 서재를 꾸미기도 했습니다. 김탁환의 <대소설의 시대>에 어김없이 이 개인 서재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소설의 주인공인 김진이 산속에 마련한 자기만의 은밀한 서재! 그곳에는 세상에 없는 진기한 책들이 가득 쌓여 있습니다. 어느 책이 어디 있는지는 오로지 주인만 알 뿐이죠.



이광사 <이씨산방장서도 李氏山房藏書圖>, 종이에 수묵담채, 23.1×29.0cm, 선문대학교박물관



조선 후기에 서예가로 이름을 날린 원교 이광사(李匡師, 1705~1777)는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합니다. 험준한 바위 절벽이 강과 맞닿은 경치 좋은 골짜기 안에 호젓한 기와집이 보입니다. 바위산 사이에 움푹 들어간 공간에 보일 듯 말 듯 깃든 모습이 참 절묘하죠. 화면 아래 오른쪽에 보이는 세 사람이 그곳을 찾아가는 모양입니다. “저쪽으로 가면 된다네.”


산방(山房)은 산속 암자를 뜻합니다. 안에 책이 그득그득 쌓여 있는 게 보이죠. 이 그림은 중국의 어느 고사를 그린 겁니다. 흔히 소동파로 널리 알려진 중국 송나라 때 시인 소식(蘇軾, 1037~1101)의 <이군산방기 李君山房記>라는 글에 나오는 고사인데요. 요약하자면 소식의 친구가 산속 암자에서 공부를 하다가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이 구천여 권에 이르는 장서를 후대에 남겨 많은 이가 그 책으로 공부를 하게 했다는 이야기랍니다. 일종의 공공도서관 역할을 했던 것이죠. 책이 귀하던 시절에 그런 모범적인 사례가 있었다면 공부하는 이들은 얼마나 좋았을까요.



<평생도 平生圖> 부분, 19세기 말~20세기 초, 종이에 색, 8폭, 각 110.2×51.5cm, 국립중앙박물관



한 사람의 일생을 좌우했던 그 옛날의 독서. 출세하느냐 마느냐가 책에 달려 있었으니, 부모들의 교육열은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 그림은 <평생도>라는 이름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전하는 8폭 병풍 그림의 한 부분인데요. 평생도란 말 그대로 한 사람의 일생을 파노라마 형식으로 보여주는 그림이죠. 위에 보이는 장면은 그중에서도 사랑채에서 아버지로 보이는 이가 글 익히기에 여념이 없는 아이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글공부에 열심인 자식을 보며 마음 가득 차오르는 기쁨을 감출 수 없을 것이고, 아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보다 더 큰 효도가 또 어디 있을까요.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한 사람의 일생에 기억할 만한 행복의 순간이 ‘책’을 매개로 하고 있다는 점을 이 그림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독서라는 건 결국 ‘남’이 아닌 ‘나’를 가꾸고 살찌우는 일입니다. 옛사람들이 남긴 그림에서 ‘책 읽는 기쁨’을 만납니다.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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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환 작가의 DSLR 여행기 웨일즈 3편]
웨일즈의 전통을 듬뿍 간직한 곳,
웨일즈 서북부
이 환

전편에서 웨일즈의 고성 마을들과 책마을 헤이온와이, 아서 왕의 전설을 가진 스노도니아를 여행했다. 마지막으로 지중해 이탈리아를 흠모해 만든 포트메리온과 아기자기한 이야기가 있는 방고와 앵글시 섬을 둘러본다. 그리고 아일랜드로 건너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서북쪽 끝 항구도시 홀리헤드를 소개한다.







전에 백화점 그릇가게에서 포트메리온(Portmerion www.portmeirion-village.com)이란 브랜드를 발견하고 이렇게 예쁜 도자기를 만드는 마을은 얼마나 멋질까 상상해본 적이 있다. 이곳을 만든 주인공은 잉글랜드 출신으로 어릴 적에 이주한 건축가 윌리엄스 엘리스(Sir Williams Ellis·1894~1978)다.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마을 포르트피노를 동경한 나머지 1926년부터 이곳을 지중해풍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아흔이 되도록 고치고 짓고 또 만드는 일을 계속했다고 하니 그의 열정에 숙연해진다. 입구의 조각장식 문을 들어서면 천국의 정원에 온 듯한 느낌이다. 



원색으로 칠해진 벽과 지붕들, 우아한 정원과 분수, 대리석상 수십 개가 여행자를 맞는다. 포트메리온 도자기도 알고 보니 그의 딸 수잔이 만든 브랜드다.






 

웨일즈 서북쪽 본토의 마지막 큰 도시는 방고(Bangor)다. 웨일즈대학이 있어 젊은 기운이 가득하다. 로마군이 침공했을 때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전투지여서 유적들도 많고 고풍스럽다. 이 도시에서 브리타니아 다리를 건너가면 앵글시 섬에 다다른다. 이 섬은 웨일즈와 잉글랜드를 통틀어 가장 큰 섬이다. 


방고에서 다리를 건너 5분정도 차로 달리면, 작은 마을 기차역이 있다.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단 하나! 기차역 푯말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서다. 1848년 앵글시 섬에서 첫 번째로 생긴 이 기차역 이름은 숨이 찰 정도로 길다. 



세계적으론 모르겠지만, 최소한 영국에서 가장 길다. 뜻은 ’빠른 물살 소용돌이 옆 흰 개암나무의 구덩이 속 성 마리아 교회와 붉은 굴의 성 티실리오 교회‘라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간단히 ’Llanfair PG‘라고 부른다.








웨일즈 본토에서 앵글시 섬을 가는 데는 두 개의 다리가 있다. 하나는 메나이 현수교(Menai Suspension Bridge·1826년 건설), 다른 하나는 브리타니아교(Britania Bridge·1850년)다. 브리타니아교 아래로는 기차 철길이 있다. 


모터보트를 타고 메나이 해협을 둘러보았다. 섬 주변을 둘러보는 데는 가장 효율적인 교통수단이다. 물개들이 한가로이 모여 햇볕을 쬐는 바위자락이 가장 인기 있어 보인다.


이 지역은 옛 드루이드교의 흔적과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고대 켈트족의 믿음으로 알려진 이 종교는 드루이드라는 사제들이 지도자 역할을 했는데 신전을 만들지 않았고 문헌도 남기지 않았다. 다신교에 영생불멸을 믿었고 마법과 주술이 발달했다. 숲 속에 모여 제사를 지내는데 사람을 죽여 피를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 


이런 제의식 때문에 로마군이나 잉글랜드군이 침입했을 때 많은 핍박을 받았다. 잉글랜드 남부의 거석유적인 스톤헨지(Stonehenge)도 이들이 만들었고 할로윈이란 서양풍습도 여기서 비롯됐다고 한다.







앵글시 섬에서 아일랜드로 넘어가는 관문이 바로 홀리헤드(Holyhead) 항구다. 페리로 3시간 15분, 쾌속선으로 1시간 20분이면 더블린에 도착한다. 대합실에서 아일랜드로 수학여행 가는 전통 옷을 입은 웨일즈 여학생들을 만났다. 


앙증맞은 모자와 레이스 자수로 장식된 숄에 체크치마를 단정히 입은 모습이 정감 있다. 검정색의 기다란 ‘웰시 모자’는 체크무늬 앞치마와 함께 이곳 전통의상의 특징. 시골 아낙네들이 주로 입었던 옷 양식이 전통의상으로 정착했다고 한다.








여행(旅行)의 한자말은 ‘사람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며 간다’라는 의미다. 영어 ‘travel’의 어원은 좀 다르다. ‘travail’에서 나왔는데 노동, 고생을 뜻한다. 여행 장비와 교통수단이 부족했던 먼 옛날 바깥나들이는 고행 길이었을 것이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를 거쳐 여기까지 오는 데는 쉽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땅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한편으로 기쁨이었다. 이제 포크음악의 본고장, 아이리시펍과 기네스의 나라 아일랜드로 향해간다.





영국관광청 웹사이트   

www.visitbritain.com  


웨일즈관광청 웹사이트 

www.visitwal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