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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옛 그림에서 찾은 무술년 개 이야기
김 석
#김석기자


오수개의 이야기를 기억하시나요? 고려 시대에 전라북도 임실에 살던 김개인(金盖仁)이라는 사람이 개 한 마리를 길렀습니다. 어느 날 외출을 하는데 개도 함께 따라나섰지요. 주인이 술에 취해 길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불이 나서 점점 가까이 다가왔어요. 개가 아무리 짖어도 주인은 안 일어났고요. 그래서 개는 냇물에 몸을 담근 뒤 풀밭을 이리저리 굴러 불이 못 번지게 막습니다. 그러고는 기운이 다해 그만 죽고 말지요. 주인이 잠에서 깨어나 그 사실을 알고는 노래를 지어 기리고 고이 묻어줍니다. 그때 무덤에 꽂은 지팡이가 나무로 자라서 그 땅을 오수(獒樹)라고 했다지요. 이 이야기는 고려 후기의 문신 최자(崔滋, 1188∼1260)의 <보한집 補閑集>에 실려 후대에 널리 알려집니다.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


제 한 몸 바쳐 주인을 구한 충직한 개의 이야기는 그 뒤에도 조금씩 내용만 달리해서 여러 문헌을 통해 전해집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개만큼 인간과 가까운 동물이 또 있을까요. 개와 인간이 함께한 역사만도 2만 년이나 됐다고 하니까요. 고구려 고분 벽화인 무용총 수렵도는 사냥 장면을 그린 가장 오래된 그림입니다. 화면 맨 아래에 검은 사냥개가 말 탄 사냥꾼과 함께 역동적인 모습으로 먹잇감을 쫓고 있지요. 삼국시대에 이미 사냥을 위해 개를 길들였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좌) 김유신묘 십이지신상 부조

(중) 삼국시대 굽다리접시 (호림박물관 소장)

(우) 경복궁 근정전 월대 석견


2018년은 무술년(戊戌年) 개띠 해입니다. 무(戊)는 오방색 가운데 황색을 뜻하고, 술(戌)은 개를 의미하지요. 그래서 2018년을 황색 개띠 해라고 합니다. 개는 열두 가지 띠 동물 가운데 열한 번째 동물입니다. 방위로는 서북서 방향을 지키는 신이고, 시간으로는 오후 7~9시, 달로는 음력 9월을 담당하는 시간의 수호신이기도 하고요. 잘 짖는 본성으로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는 존재로서의 상징성이 오래전부터 옛 풍습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음을 알 수 있지요. 경복궁 근정전 월대 모서리에 석견(石犬)을 새긴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의 기행문 <춘성유기 春城遊記>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근정전 월대 모서리에는 암수 석견이 있는데, 암컷은 새끼 한 마리를 안고 있다. 무학대사는 이 석견은 남쪽 왜구를 향해 짖고 있는 것이고, 개가 늙으면 대를 이어 가라고 새끼를 표현해 넣었다고 했다.



이암, <화조구자도>, 16세기 중반, 종이에 채색, 86×44.9㎝, 보물 제1392호,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강아지 그림이 있습니다. 볕이 따사로운 봄날, 화면 가운데에 앉아 있는 검둥이 녀석이 하얀 꽃망울을 피워 올린 배나무 아래에서 고개를 돌려 동그랗게 뜬 눈으로 어딘가를 쳐다봅니다. 저 눈동자 표현 좀 보세요.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 뒤로 누렁이 한 마리가 두 발을 앙증맞게 모은 채 쿨쿨 낮잠을 자고 있군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평화롭게 잠든 저 표정, 참 귀엽습니다. 그런가 하면 호기심 가득한 흰둥이 녀석은 땅바닥에 철퍼덕 엎드린 채 앞발로 꾹 누른 방아깨비와 노느라 여념이 없네요.


그냥 보기만 좋은 그림이 아닙니다. 개는 털을 가진 동물이죠. 그런데 그림 속 강아지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털이 하나도 없습니다. 털을 묘사하는 대신 몸통을 먹으로 채웠어요. 이 그림은 조선 초기에 개와 매 그림으로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왕족 출신 화가 이암(李巖, 1507~1566)이란 분의 작품인데요. 먹을 이렇게 쓴 그림은 당시 중국에도 없었답니다. 전문가들이 극찬을 아끼지 않은 이유에요. <화조구자도>란 제목이 붙은 이 대단한 그림은 현재까지 확인된 걸로는 조선시대 최초의 개 그림으로 전합니다.


일본화가 소다츠의 개 그림


더 대단한 건 이암의 그림이 국내는 물론 당시 일본에까지 큰 영향을 줬다는 사실입니다. 위의 두 작품은 이암보다 100년쯤 뒤에 교토에서 활동한 일본화가 다와라야 소다츠(俵屋宗達)의 그림인데요. 털을 그리지 않고 먹으로 물들이듯 그렸지요. 일본에서 다라시고미(滲し込み)라 불리는 이 기법의 뿌리가 바로 조선의 이암이었던 겁니다. 그만큼 이암의 그림이 일찌감치 일본에 건너갔다는 뜻이고요. 심지어 17세기 일본에서 나온 <본조화사 本朝畵史>란 책에는 이암을 아예 일본 화가로 소개하기도 했답니다.



(좌) 이암, <모견도>, 16세기 중반, 종이에 옅은 채색, 73.5×42.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중),(우) 이암, <화조묘구도>, 16세기, 종이에 채색, 폭당 87×44.2cm,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개의 변함없는 충직함은 때론 배신을 밥 먹듯 해대는 인간들의 반면교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황해도 강령에서 전승되는 탈놀이인 <강령탈춤>의 한 대목에는 개도 사람에 해당하는 다섯 가지 윤리, 즉 오륜(五倫)을 두루 갖췄다는 내용이 나오는데요. 그럼에도 툭하면 욕설에 이름을 붙여 부르는 인간들이 야속할 만도 합니다. 게다가 위 그림에서도 보듯 전통적으로 개는 고양이와 앙숙이지요. 그런데 이것 때문에도 상대적으로 푸대접을 받아야 했으니 얼마나 억울했겠어요. 조선 후기 문장가 이옥(李鈺, 1760~1815)의 ‘고양이를 탄핵한다(劾猫)’는 재미있는 글에서 개는 자신의 억울한 처지를 다음과 같이 토로합니다.


신은 비록 미천하고 용렬하오나 그 지키는 바가 도둑입니다. 밥을 물에 말아 국을 타고, 한 노구솥 밥에 태반이 콩인 것으로 하루 두 번 배고픔을 면하는 것은 오로지 주인의 은혜입니다. 그리하며 밤이면 감히 눈을 붙이지 못하고 구멍마다 돌면서 경계하여 오로지 도둑을 잡으려는 것입니다. 저 울타리 밖의 도둑도 몰아 쫓아내고자 하는데 하물며 집안의 도둑이겠습니까? ... 이것이 신이 저것을 보면 반드시 쫓아 버리고 마주치면 물어뜯는 이유입니다. ... 어찌 주인께서는 무슨 사심이 그 사이에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십니까? ... 장차 고양이는 배가 불러 죽고 신은 가마솥에서 죽게 됨을 보게 될 것입니다.



(좌) 김두량, <긁는 개>, 조선 18세기, 종이에 먹, 23.1×26.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 이경윤, <화하소구>, 비단에 옅은 채색, 17.7×15.5cm, 간송미술관 소장


조선 전기에 이암이 있었다면 후기에도 개 그림으로 이름을 날린 또 한 명의 화가가 등장하는데요. 영조 때 직업 화가로 활약한 남리 김두량(金斗樑, 1696~1763)입니다. 위에 소개해드리는 <긁는 개>는 김두량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명품입니다. 나무 아래에서 개가 어디가 그렇게 간지러운지 몸을 잔뜩 구부린 채 몸을 긁적이고 있습니다. 털을 정말 한 올 한 올 정성 들여 사실적으로 그렸지요. 알쏭달쏭한 눈빛이며 입 모양까지 얼마나 생동감이 넘치는지 모릅니다. 특히 개의 몸체에서 보이는 생생한 입체감은 서양 화법을 수용한 결과로 보고 있습니다.


긁는 개라는 소재는 그 전에도 그려졌습니다. 오른쪽 작품은 조선 중기 문인화가 낙파 이경윤(李慶胤, 1545~1611)의 그림인데요. 역시 몸을 외로 꼰 채 몸을 긁고 있는 개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그려냈지요. 덥수룩한 털을 한 올 한 올 정성껏 묘사해 현장에서 보고 그린 듯 사실감이 도드라집니다. ‘나무 아래에서 가려운 곳을 긁고 있는 개’라는 구도는 김두량의 그림과 같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이게 그냥 보기 좋아서 그린 게 아닙니다. 여기에는 아주 깊은 뜻이 숨어 있거든요.


한자로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개는 戌(술), 나무는 樹(수)이지요. 戌은 지킬 무(戍)와 글자 모양이 비슷합니다. 지킬 무(戍)는 지킬 수(守)와 음이 같을 뿐 아니라 나무 수(樹)와도 음이 같습니다. 결국 나무 밑 개 그림에는 “지킨다”는 뜻이 담기게 됩니다. 긁는 개는 복을 긁어 들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둘을 종합하면 나무 밑 긁는 개는 집안을 지키고 복을 들여오는 좋은 의미의 그림인 거지요. 비슷한 구도의 그림이 반복해서 그려진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김두량, <삽살개>, 1743년, 종이에 옅은 채색, 35×45cm, 개인 소장


김두량의 또 다른 대표작으로 꼽히는 <삽살개>입니다. 삽살개를 한 번이라도 봤다면 이게 무슨 삽살개인가 싶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삽살개와는 생김새가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요. 이 그림이 중국, 일본을 거쳐서 1995년 7월 부산의 진화랑에서 처음 공개됐을 때도 논란이 엄청나게 뜨거웠다고 합니다. 급기야 MBC <PD수첩>에서까지 보도됐을 정도였다니까요. 논란의 출발점은 이 그림의 옛 소장자가 다른 화가들의 그림과 함께 묶은 화첩에다가 “내가 방(尨) 그림 한 본을 구했더니 필세가 발랄하고 묘하다”고 적어놓은 대목입니다. 방(尨)이 삽살개를 뜻하기 때문이었지요.


삽살개든 아니든 이 개는 처음부터 유명해질 팔자를 타고 난 것 같습니다. 그림 위쪽의 글씨를 쓴 이가 바로 당시 임금이었던 영조였으니까요. 실제로 영조는 김두량을 무척이나 아낀 걸로 알려져 있는데요. 남리(南里)라는 호를 직접 지어주고, 도화서 화원 최고위직인 별제까지 내려줍니다. 게다가 그림이 마음에 들었던지 직접 글씨까지 써줬지요.




(좌) 전(傳) 장조, <견도 犬圖>, 51.8×86.5cm,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우) 전(傳) 장조, <견도 犬圖>, 51.7×75.5cm,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기왕 영조 이야기가 나왔으니 혹시 왕이나 왕세자가 그린 개 그림은 없을까 궁금해집니다. 실제로 있어요. 우리가 흔히 사도세자로 알고 있는 장조(莊祖, 1735∼1762)가 그린 걸로 전해지는 개 그림 두 점입니다. 전문 화가의 솜씨는 아니지만, 붓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거침없이 쓱쓱 그려낸 것이 꽤나 매력적이지요. 어찌 보면 굉장히 현대적인 드로잉 작품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조선 최대의 문예 군주로 불리는 아들 정조의 재능은 아마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좌)작가 미상, <삽살개>, 18세기, 종이에 옅은 채색, 30.9×29.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중)장승업, <쌍구도>, 19세기, 종이에 옅은 채색, 68×68㎝,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우)어유봉, <삽살개>, 18세기, 종이에 옅은 채색, 63.5×37cm, 개인 소장


다시 삽살개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삽살개는 우리나라 토종으로 유명하지요. 순우리말로 ‘삽’은 쫓는다는 뜻이고 ‘살’은 귀신, 액운이란 뜻입니다. 이름 자체가 귀신 쫓는 개란 뜻이니, 그리 이름 지은 까닭도 자연스레 짐작이 됩니다. 삽살개 그림도 여러 폭이 남아 있는데요. 화가에 따라 삽살개를 어쩌면 저렇게 다르게 그릴 수 있을까요. 특히 어유봉의 <삽살개>는 과연 저 동물이 삽살개는커녕 개가 맞나 싶을 정도로 상상 속의 동물로 그려졌습니다. 귀신 물리치는 개의 특성을 부각시키려다 보니 닮게 그리기보다는 표현을 일부러 과장한 게 아닌가 여겨집니다.



(좌)김홍도, <경작도>, 1796년, 종이에 옅은 채색, 26.7×31.6cm, 보물 제782호,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우)김홍도, <점심>, 《단원풍속도첩》, 종이에 옅은 채색, 28×23.9cm, 보물 제527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럼에도 최고의 삽살개 그림을 딱 하나만 꼽으라면 저는 좌측의 작품을 고르겠습니다. 저 유명한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의 그림인데요. 삽살개가 아주 작게 그려져 있지요. 여기서 중요한 건 개의 뒷모습을 그렸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개 그림은 모두 앞모습이나 옆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김홍도는 풍속화에다가 지금껏 본 적 없는 개의 뒷모습을 그려놓았어요. 주인이 밭 가는 모습을 멀뚱히 서서 지켜보고 있는 거예요. 자세가 예술이에요. 저 강아지 한 마리 때문에 그림 전체가 확 살아나는 느낌이랄까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 최순우 선생도 이 그림에 반했던지 “밭갈이하는 주인의 얼굴을 멀찌감치서 바라보는 설멍한 삽살개의 뒷맵시”라는 기가 막힌 표현을 남깁니다.


김홍도의 유명한 그림 한 점을 더 볼까요. 보물로 지정된 《단원풍속도첩》 안에 있는 오른쪽 그림은 점심을 먹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개 한 마리가 앉아서 사람들 밥 먹는 걸 지켜보고 있습니다. 실로 절묘한 위치에 개를 그려 넣었어요. “게걸스럽게 밥을 먹는 인간들을 부러운 눈빛으로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개의 모습이 그림을 더욱 박진감 있게 한다.”는 유홍준 교수의 평가가 딱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만약 이 그림에 개가 없었다고 상상해 보세요. 저렇게 참 작게 그렸는데도 시각적인 효과는 정말 대단하지요. 역시 대가는 뭐가 달라도 다른가 봅니다.



김홍도, <모구양자도>, 18세기, 비단에 옅은 채색, 90.7×39.6cm, 간송미술관 소장


김홍도는 개를 등장시킨 그림을 여러 점 남겼는데요. 그중에서도 대표작이라 할 것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모구양자도>입니다. 어미와 새끼가 다정하게 어울려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지요. 여기서 다시 한번 김홍도라는 화가의 위대함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저 어미개의 당당하고 우아한 자태에서 보게 되는 건 바로 고결한 선비의 모습이에요. 개의 모습에다가 사람의 온기,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었다고 할까요. 그래서 어느 연구자는 김홍도만큼 세상을 따스한 시선으로 본 화가는 없다고 했습니다. 앞에서 보신 이암의 <모견도>와 함께 개 가족을 묘사한 가장 따스한 옛 그림으로 꼽을 만합니다.



작가 미상, <맹견도>, 19세기, 종이에 채색, 44.2×98.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한편 꽤 오랫동안 김홍도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진 그림도 한 점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맹견도>인데요. 1910년대에 서울 북촌의 어느 가정집에서 발견됐다고 합니다. 당시 미술계의 권위자였던 본 고희동, 안중식 등 화가들이 김홍도의 작품으로 결론을 냈어요. 그러곤 김홍도의 도장을 임의로 파서 찍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그림은 김홍도의 작품으로 알려졌지요. 하지만 나중에 가짜 도장이란 사실이 밝혀져 누가 그렸는지 확인되지 않은 작품으로 남게 됩니다.


우리나라 화가의 그림이 맞는지도 의문스럽습니다. 일단 쇠사슬에 묶인 채 어눌한 표정으로 엎드려 있는 저 개는 우리 토종개가 아닙니다. 게다가 개를 묘사한 방식이나 바닥을 포함한 배경에 표현된 원근법과 명암법 등은 우리 전통 기법이 아니라 전형적인 서양화법이거든요. 만일 이 그림이 우리 화가의 솜씨라면 조선 후기에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서양화법을 수용한 작품일 테고, 그게 아니면 서양화법을 익힌 청나라 화가의 그림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맹견이라기엔 너무도 해맑고 순하게 보이는 저 눈동자 때문에라도 오래 기억에 남을 그림이에요.


(좌) 신윤복, <나월불폐도>, 비단에 수묵, 25.3×16.0cm, 간송미술관 소장

(중) 김득신, <성하직구>, 종이에 옅은 채색, 22.4×27.0cm, 간송미술관 소장

(우) 신광현, <초구도>, 조선 19세기, 종이에 옅은 채색, 35.1×29.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름난 화가들의 개 그림 몇 점을 더 소개해 드립니다. 왼쪽은 조선 최고의 풍속화가로 이름을 날린 혜원 신윤복(申潤福, 1758~?)의 그림입니다. 상념에 잠긴 개의 자세와 표정이 예사롭지 않은 작품이에요. 그 옆에 긍재 김득신(金得臣, 1754∼1822)의 그림은 한여름에 삼대가 모여 짚신 삼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의 표정만 봐서는 한 여름 무더위가 그다지 실감 나지 않지요. 그런데 개의 표정을 한 번 보세요. 혀를 쭉 내민 채 헉헉대는 모습입니다. 표정이 정말 예술이에요. 이것 하나로 그림이 확 살아나지요.


애완견을 사람 못지않게 끔찍하게 아끼고 보살피는 반려동물의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어떤 개들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힘겹지요. 주인으로부터 버림받고 떠돌이개 신세가 되거나 먹을거리로 제 한 몸 바치는 일도 다반사입니다. 최근에는 대형견이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사례까지 잇따르기도 했고요. 그래도 부인할 수 없는 건 여전히 개는 인간과 살 부비며 함께 살아가는 고마운 존재라는 겁니다. 그래서인지 사람과 개가 교감하는 따뜻한 모습을 담은 마지막 그림, 신광현의 <초구도>에 더 눈길이 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김 석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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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첫 아티스트 협업, 도자기 예술가와 컬렉션 제작
‘막달레나 수아레즈 프림케스’ 협업 컬렉션

신세계인터내셔날
#신세계인터내셔날


신세계인터내셔날(대표: 차정호)이 수입∙판매하는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마르니(MARNI)가 올해 첫 아티스트 협업 컬렉션을 출시한다.

마르니는 오랜 시간 예술계와 밀접한 교류를 지속해 왔다. 예술은 마르니 디자인의 영감의 원천이자 브랜드 정체성을 이루는 주요 요소라 할 수 있을 만큼 마르니는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와 협업을 통해 매번 새로운 컬렉션을 선보이고 있다.

이번 협업 컬렉션의 주인공은 베네수엘라 출신 예술가 막달레나 수아레즈 프림케스(MAGDALENA SUAREZ FRIMKESS)다. 마르니는 그녀의 솔직하고 개성 있는 디자인에 매료되어 올해 첫 협업을 진행하게 됐다. 도자기 아트로 유명한 막달레나 수아레즈 프림케스는 자신이 입양된 도시인 캘리포니아에서 남편이 만든 도자기 위에 다양한 그림을 그리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그녀는 아이의 순수한 이미지, 광고의 슬로건, 가족의 초상화, 베니스의 해변 등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평범하지 않은 강한 상상력을 표현한다. 

마르니는 이번 컬렉션에서 막달레나 수아레즈 프림케스의 작품이 디자인 된 쇼퍼백과 의류를 선보인다. 자연과 어우러진 평화로운 마을과 아이들의 모습이 담긴 그림이 가방과 의류에 프린트 되어 마치 하나의 예술 작품 같은 느낌을 준다. 전국 백화점 내 마르니 매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2018.2.13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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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화가들의 핫 플레이스 ‘인왕산’
1편 인왕산, 한양의 ‘랜드 마크’가 되다
김 석
#김석기자


높이 338미터.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누상동, 사직동과 서대문구 현저동, 홍제동에 걸쳐 있는 산. 온몸이 화강암으로 이뤄진 바위산이 훤한 이마를 드러내고, 기이한 모습을 한 갖가지 바위가 곳곳에 숨어 있는 자연 돌조각 공원. 능선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한양 도성을 품 안에 가만히 끌어안은 산.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 없이 철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산. 경복궁 서쪽 마을 서촌에 깃든 화가와 문인, 건축가들에게 지금도 끊임없이 영감을 주는 상상의 샘. 이름에 임금 왕(王) 자를 품은 몇 안 되는 산. 경복궁 근처에 가면 어디서도 얼굴을 볼 수 있는 바로 그 산.


임채욱, <인왕 1607>, 66.7×100cm, 한지에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2016



최고의 화가 겸재 정선, 인왕산을 담다


조선 시대에 가장 많이 그려진 산은 어디일까요? 지금까지 남아 있는 그림으로만 보자면 단연 1위는 금강산입니다. 남북 관계에 훈풍이 불던 2007년에 저도 방송뉴스 취재를 위해 네 차례 금강산에 다녀온 기억이 있는데요.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 봉~”하는 노래가사가 왜 나왔는지 알만하더군요. 그 명성에 걸맞게 가는 곳마다 절경이었습니다. 지금처럼 여행이 자유롭지 않았던 조선 시대에 금강산 유람은 풍류를 아는 이라면 평생에 꼭 해야 할, 요즘 말로 하면 ‘버킷 리스트’의 맨 꼭대기를 차지했다지요. 그래서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같은 조선 최고 화가들의 그림으로 남을 수 있었던 거고요.


그렇다면 금강산 다음으로 많이 그려진 산은 어디일까요? 네, 바로 인왕산입니다. 사실 궁금했어요. 금강산이야 원체 이름난 명산이니 그렇다 쳐도, 그다음 자리가 어째서 인왕산인가 하는 싶었거든요. 거리가 가까워서? 거리로만 따지면 경복궁 뒤편에 늠름하게 서 있는 북악산도 있고 남산도 있고, 좀 멀게는 관악산, 낙산, 북한산, 도봉산도 있잖아요. 도성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이렇게도 좋은 산이 많은데 왜 유독 인왕산 그림만 많은 걸까요. 전국 팔도강산에 하고많은 명산이 즐비한데 어째서 화가들은 줄기차게 인왕산을 그렸을까요. 궁금증을 풀어줄 첫 단추는 아래에 소개해드릴 그림 한 점입니다.


정선, <인왕제색도>, 1751년, 비단에 엷은 채색, 79.2×138.2cm, 국보 제216호,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너무나도 유명한 걸작 <인왕제색도>입니다. 서울 살면서 인왕산 한 번 안 가본 사람은 많아도, 이 그림을 한 번도 못 본 사람은 아마 없겠지요. 인왕산을 넘어 조선 시대, 아니 우리 미술의 역사를 대표하는 산 그림이라 해도 좋을 겁니다. 그림의 주인공은 보시다시피 인왕산입니다. 겸재 이전에는 인왕산을 이렇게 화면 중심에 세워놓고 그린 화가가 없었습니다. 작게나마 인왕산을 산수화 귀퉁이 어디쯤에 그려 넣은 화가도 없었고요. 겸재 이전의 화가들은 우리 산천을 그리겠다는 생각을 못 했습니다. 찾아가서 직접 보고 그리는 사생(寫生)의 전통도 물론 없었고요. 당시만 해도 화가들은 대부분 중국의 유명 화보집을 보고 베끼면서 그림을 배웠습니다. 좋은 그림의 모범 사례가 모두 그 안에 있었으니, 구태여 조선의 산을 그릴 필요조차 없었던 게지요. 그래서 화가들이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린 산은 다르게 말하면 ‘천상계의 산’이었습니다.


그걸 ‘지상계’로 끌어내린 조선 최초의 화가가 바로 겸재 정선이었습니다. 흔히 겸재를 진경산수화의 창시자라고 하지요. 진경산수는 실제 경치(實景)를 바탕으로 가장 참된 풍경(眞景)을 그려낸 걸 말합니다. 실제와 똑같이 그린 게 아니라 사람의 내면을 꿰뚫어 보듯 산의 진정한 모습을 그렸다는 뜻입니다. 다른 화가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대 혁신을 이룬 겁니다. 오늘날 <인왕제색도>가 당당히 국가의 보물로 대접받는 이유는 우리 산을 독자적인 진경산수 화풍으로 더없이 아름답게 그려냈기 때문입니다. 이 그림 하나로 인왕산은 명실상부 한양의 ‘랜드 마크’로 우뚝 서게 됩니다.


<인왕제색도>의 인왕산 주봉 부분. 봉우리 윗부분이 잘려 답답한 모습입니다. 

원래 그림에 당연히 여백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면, 후대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그림 윗부분이 잘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인왕제색도>를 더 유명하게 만든 건 그림에 얽힌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겸재가 76살 되던 1751년 둘도 없는 벗이었던 시인(詩人) 사천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이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지요. 그림과 시로 한평생 우정을 나눈 ‘절친’이었으니, 만년의 겸재에겐 얼마나 큰 슬픔으로 다가왔을까요. 그 애통한 마음을 담아 비 갠 직후의 인왕산을 그리는 데 모든 것을 쏟아부어 <인왕제색도>라는 불멸의 걸작을 완성했다는 겁니다. 이 얼마나 극적인 명작 탄생의 비화입니까. 한 편 드라마 같은 이야기 덕분에 <인왕제색도>는 ‘신화’가 됩니다.


스토리텔링을 무척이나 강조하는 시대이지요. 불세출의 걸작에 그럴듯한 이야기까지 곁들여졌으니 더 귀하게 느껴질 밖에요.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이야기는 ‘오해’가 낳은 산물일 가능성이 큽니다. <인왕제색도>가 그려진 시기는 1751년 윤5월 하순입니다. 양력으로 7월, 장마철에 해당하지요. 사천이 그 무렵에 죽었다면 이야기가 들어맞습니다. 그런데 미술사학자 한 분이 한산 이 씨 족보를 뒤져보니 사천 이병연의 사망일은 그보다 훨씬 이른 1월 4일이었습니다. 사천이 죽은 시기와 겸재가 그림을 완성한 시기에 차이가 있다는 얘기지요. 그렇다고 해서 <인왕제색도>의 예술적 가치가 퇴색되는 건 아닐 겁니다.



인왕산, 그 이름에 담긴 역사


겸재 정선 필(筆), <인왕산도>, 18세기, 종이에 엷은 채색, 62×104cm, 개인 소장


이 그림을 혹시 보신 적 있으신가요? 겸재 정선의 그림으로 전하는 <인왕산도>입니다. 개인 소장품으로 지금까지 공개적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하더군요. 인터넷을 뒤지면 사진이 한두 장 보입니다. 비단 아닌 종이에 인왕산 일대를 조금 더 넓은 시야로 담아낸 작품입니다. 일부 연구자들은 겸재가 <인왕제색도>를 그리기 훨씬 전인 오십 대에 이 그림을 그렸을 걸로 봅니다. 두 그림을 통해 겸재가 어떻게 자신의 화풍을 완성시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있다는 건데요. 아무래도 원작을 직접 보지 않고는 판단하기 어렵겠지요. 다만 이상한 건 왼쪽 상단의 그림 제목에 인왕산의 왕 자가 임금 왕(王)이 아닌 왕성할 왕(旺)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에요. <인왕산도>보다 훨씬 뒤에 그려진 <인왕제색도>는 임금 왕(王)을 썼습니다.


여기서 인왕산이란 이름의 유래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경복궁 서쪽에 있는 산이라 해서 서봉(西峯) 또는 서산(西山)으로 불렸다고 해요. 그러다가 세종 때 처음 인왕산이란 이름을 짓습니다. 인왕(仁王)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金剛神)의 다른 이름입니다. 궁궐 바로 옆 산에 인왕사(仁王寺)를 짓고 산 이름도 인왕으로 바꿔 조선왕실을 수호하려는 깊은 뜻을 담은 거지요. 그 뒤 조선 중종 때는 필운산(弼雲山)이란 이름도 나타납니다. 중종 32년에 명나라 사신 공용경이 조선을 방문하자 중종은 인왕산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합니다. 이때 명의 사신이 제안한 이름이 필운산입니다. 조선왕실을 돕는 좋은 구름이 피어나는 산이라는 뜻입니다.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시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 김탁환의 소설 <허균, 최후의 19일>을 보면 인왕산이 아닌 필운산이란 이름만 씁니다. 왕이 부탁해서 명나라 사신에게 받아낸 이름이니 아마도 공식적으로는 ‘필운산’이란 이름을 주로 쓰지 않았나 합니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주로 인왕산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에 임금 왕(王) 대신 왕성할 왕(旺)으로 표기가 바뀝니다. 왕(旺) 자는 임금 왕(王) 옆에 날 일(日)이 붙은 모습이지요. 일제(日)가 조선 왕실(王)을 짓누르는 상징으로 삼으려 대놓고 글자를 바꾼 겁니다. 산 이름도 창씨개명을 당한 거지요. 이런 글자가 <인왕산도>에 적혀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인왕산도>는 정녕 겸재의 그림이 맞는 걸까요?


정선, <수성구지>, 종이에 수묵, 52.9×87.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어찌 됐건 겸재 정선이 그린 걸로 전해지는 인왕산 전경 그림은 <인왕산도>와 <인왕제색도> 두 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겸재는 인왕산 전경뿐 아니라 마치 카메라로 클로즈업하듯 인왕산의 숨은 비경들을 그림으로 남깁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장동팔경첩>이라는 그림 모음집인데요. 장동(壯洞)이란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효자동, 청운동 등을 포함하는 옛 이름입니다. 지리적으로 북악산 계곡부터 인왕산 남쪽 기슭까지인데요. 조선 후기에 이름난 세도가들이 모여 살던 곳이자 겸재 자신의 살던 곳이기도 하지요. <장동팔경첩>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과 간송미술관에 각각 한 부씩 소장돼 있습니다.



더 가까이서 인왕산을 보다


(좌) 정선, <청풍계>, 1730년, 종이에 채색, 96.2×36cm,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우) 정선, <청풍계>, 1739년, 종이에 엷은 채색, 153.6×59cm, 간송미술관 소장


위 그림은 인왕산 계곡의 하나였던 청풍계(淸風溪)를 그린 겁니다. 간송미술관 소장본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에 같은 제목의 그림이 수록돼 있는데요. 고려대학교 박물관에도 <청풍계>란 작품이 소장돼 있습니다. 위의 왼쪽이 1730년에 그려진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본이고, 오른쪽이 그보다 늦은 1739년에 완성된 간송미술관 소장본입니다. 두 그림을 나란히 놓고 보면 나무나 바위의 위치가 거의 비슷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오른쪽 간송본은 겸재의 장동팔경 그림 가운데 지금까지 확인된 가장 큰 작품입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인 미술사학자 최순우 선생은 어느 글에서 이 그림에 대한 감회를 다음과 같이 써 놓았습니다.



온 폭에 거의 하늘의 공간을 남기지 않은 대담한 화면 포치법과
스산스러우면서도 어딘가 호연한 시심이 넘나드는 독특한 분위기가
뭉클한 감명을 안겨 주는 것은 아마도 정을 다해서 길들인
우리 산하의 실감에서 오는 감상인지도 모른다.



(좌) 정선, <필운대상춘>, 1740~1750, 비단에 엷은 채색, 27.5×33.5cm, 개인 소장

(우) 정선, <필운대>, 1751년경, 종이에 엷은 채색, 29.5×33.7cm, 간송미술관 소장


물론 화첩으로 묶이지 않은 것들 중에도 겸재의 인왕산 그림은 꽤 많습니다. 인왕산 남쪽 자락의 필운대(弼雲臺)는 장안에서 손꼽히는 꽃놀이 명소였다고 하지요. 벚꽃 핀 것만 봐도 괜히 가슴이 설레는 게 사람 마음이니, 그 시절에 풍류하면 지금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경치 놓은 필운대 바위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따사로운 햇살에 취하고 봄꽃 향기에 취합니다. 남쪽으로는 저만치 남산과 꼭대기 소나무 한 그루까지 그렸습니다. 애국가 2절의 바로 그 ‘남산 위의 저 소나무’입니다. 오른쪽 작품 역시 필운대 그림입니다. 왼쪽 것과는 반대로 남쪽에서 인왕산을 바라보며 위에서 내려다보듯 바위를 묘사해 놓은 작품이지요.



겸재의 그림, 인왕산의 과거와 현재를 잇다



사직단 부근에서 서촌과 인왕산 일대 답사를 시작한다면 반드시 들러봐야 할 곳 중 하나가 바로 필운대입니다. 이곳은 우리가 잘 아는 ‘오성과 한음’의 바로 그 오성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집터이기도 합니다. 이곳은 원래 임진왜란 때의 명장 권율 장군의 집터였는데, 사위인 이항복이 물려받았다고 해요. 필운(弼雲)은 이항복이 호(號)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집도, 집터도 살필 수가 없습니다. 필운대의 흔적 역시 누추하게 귀퉁이만 남은 바위뿐이고요. 그나마 바위에 새겨진 필운대 세 글자가 남아 옛 자취를 더듬어볼 수 있게 해줍니다. 겸재가 필운대를 그리지 않았다면 옛 모습은 영영 알 길이 없었을 겁니다.



필운대로 들어가는 진입로 왼쪽에 안내판이 서 있습니다. 안내판의 그림은 오래돼서 그런지 지워져 있더군요. 그 자리에 있던 그림이 바로 앞에서 소개한 겸재의 <필운대>입니다. 문화재 안내판에 특정 화가의 그림을 함께 넣는 건 퍽 이례적인 일이지요. 사진이 없던 시절에 그림은 눈에 보이는 것을 담아내는 유일무이한 시각 매체였습니다. 겸재가 그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림에 묘사된 옛 장소들을 까맣게 모를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겸재를 기점으로 인왕산은 비로소 의미 있는 역사의 무대가 되었고, 지금도 수많은 답사객의 발길을 불러 모으고 있으니까요. 인왕산 일대 답사를 다니다 보면 곳곳에서 겸재의 그림을 붙여 놓은 안내판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좌) 옥인시범아파트 (우) 복원된 수성동 계곡


안내판이 전부가 아닙니다. 인왕산 기슭에서 인왕산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있어요. 바로 수성동 계곡입니다. 서울 중심가에 이토록 호젓한 계곡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름난 명소가 됐지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인왕산 아랫마을의 경관은 한 마디로 엉망이 됐습니다. 수성동 계곡 역시 예외는 아니었겠지요. 1971년에 계곡 좌우로 옥인시범아파트 9개 동이 들어서면서 수려했던 풍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40년 세월이 지난 2012년에야 난개발의 상징이었던 아파트를 철거하고 계곡 일대를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해 옛 모습을 되살립니다.



수성동 계곡에는 우리 역사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의 숨결이 서려 있습니다.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 이용(李瑢, 1418~1453)입니다. 안평이 누군가요. 무릉도원을 다녀오는 기이한 꿈을 꾸고 나서 당대 최고의 화가인 안견(安堅, ?~?)으로 하여금 조선 회화 사상 불멸의 걸작으로 꼽히는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한 장본인입니다. 문화 예술에 뛰어난 안목을 가진 풍류객으로도 명성이 높았지요. 왕이 될 수 없었던 안평은 바로 이곳 수성동 계곡 위쪽에 집을 짓고 아버지 세종이 지어준 비해당(匪懈堂)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계곡 입구에서 서 있는 안내판만이 먼 옛날 이곳 어디쯤에 안평의 거처가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지요.


(좌) 정선, <수성동>, 1751년, 비단에 엷은 채색, 33.7×29.5cm, 간송미술관 소장

(우) 복원된 기린교


수성동 계곡을 복원한 1차 근거는 바로 겸재의 그림입니다. 수성동 계곡 입구에 설치된 안내판에도 겸재의 그림이 붙어 있고요. 그림 왼쪽 아래에 작은 돌다리가 놓여 있는 것이 보이지요. 기린교(麒麟橋)라는 이름을 가진 이 다리는 수성동 계곡과 함께 복원돼 옛사람이 남긴 흔적을 더듬어보게 합니다. 고작 작은 돌다리일 뿐인데도 그것이 주는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지요. 역사와 문화와 예술이 깃든 수성동 계곡은 이렇게 호젓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만일 겸재가 없었다면 수성동 계곡을 되찾을 수 있었을까요. 선구적인 화가 한 사람이 남긴 그림이 260여 년이 흐른 뒤에 이토록 의미 있는 변화의 든든한 밑거름이 됐다는 점. 이것이 바로 시대를 초월한 예술의 힘 아닐까요.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


김 석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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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사진이야? 그림이야?
김 석
#김석기자



뭔가 말을 꺼내려는 걸까요?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 당장이라도 무슨 이야기가 흘러나올 것만 같습니다. 조금은 상기된 표정을 짓고 있는 저 앳된 모습의 여인은 지금, 바로 당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습니다. 일단 마주치면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강렬함이 한 줄기 빛처럼 보는 이의 마음을 파고들지요. 도대체 저 여인에게는 어떤 내밀한 사연이 감춰져 있는 걸까요.



섬광처럼 다가온 이 여인의 얼굴을 처음 대면했을 때 저는 무척 놀랐습니다. 그림입니다. 사진이 아니었어요. 직접 보여드리지 못하는 게 몹시도 안타까울 만큼 그 생생한 사실감이 화폭 전체를 휘감아 돌지요. 화가의 작업실 한쪽에 가만히 웅크리고 있던 그 얼굴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욱 더 놀라운 모습으로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사진 같은 그림을 사진으로 보여드려야 한다는 것도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에요.




여인의 상반신을 그린 작품의 옷 주름과 머리 부분을 따로 확대해 보면 한 마디로 입이 딱 벌어지고 맙니다. 세상에나, 도대체 이걸 어떻게 그렸을까요. 더 놀라운 건 이 그림이 수채화라는 사실입니다. 사진인지 그림인지 구분이 안 갈만큼 극도의 사실감을 살린 이런 유형의 그림들을 흔히 극사실주의 회화라고 부르는데요. 이 부류의 그림을 그동안 꽤 많이 보았어도 수채 물감으로 저토록 정밀한 세계를 그려낼 수 있다는 데는 그만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림을 그린 이는 윤위동. 30대의 젊은 서양화가입니다. 이미 20대 시절부터 극사실주의 기법의 인물화에서 출중한 재능을 선보여온 터라 윤위동의 작품 세계는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 제법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 수채 물감으로 소묘를 해서 주변을 깜짝 놀라게 한 게 계기가 돼서 지금까지 줄곧 수채화 작업을 해오고 있다고 하더군요. 저토록 생생한 그림을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붓질이 필요했을까요.




화가의 역량을 평가하는 좋은 척도의 하나는 사람의 손발을 얼마나 잘 그리느냐 하는 겁니다. 보통 사람을 그릴 때는 얼굴 묘사가 가장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게 손과 발이라고 해요. 정확한 비례와 균형, 위치와 자세는 물론 동작까지도 조금만 계산이 어긋나면 굉장히 어색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래서 윤위동 작가의 초창기 작품들 중에는 유독 손과 발을 정밀하게 묘사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 도저한 사실감에선 섬뜩함마저 느껴지지요.


모든 예술가가 대체로 마찬가지겠지만 화가들도 늘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섭니다. 계속 똑같은 그림만 그릴 순 없으니까요. 남의 입맛에 맞는 그림만 계속 그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그래서 화가로서,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진정한 나의 세계를 찾아가는 고통스러운 모험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윤위동 작가가 3년 만에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유형의 작품들을 선보였지요.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바로 ‘모래’입니다.



(좌) 윤위동, <Glory1>, 모래 위에 아크릴 채색, 130×160cm, 2016

(우) 윤위동, <Glory2>, 모래 위에 아크릴 채색, 80×240cm, 2017


왼쪽 그림을 자세히 볼까요. 캔버스에 진짜 모래를 발라 붙인 뒤에 화면 가운데 아래부터 돌들이 점점 커지다가 다이아몬드 결정으로 진화하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각각의 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다이아몬드의 휘황한 광채와 그림자까지 정교한 솜씨는 여전하지요. 다만, 모래라는 재료의 특성 때문에 수채 물감 대신 채색이 쉽고 잘 마르는 아크릴 물감으로 바꿨다고 합니다.


작은 모래 알갱이가 커지고 커져서 끝내는 아름다운 보석으로 완성되어가는 그 자취에다가 작가는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예술 세계 또한 그렇게 한껏 무르익어 찬란하게 꽃피길 바라는 마음도 함께 담겨 있겠지요. 낱낱의 존재들은 모두 흔적을 남기게 마련. 그래서 오른쪽 그림은 모래라는 세상 위에 돌들이 지나간 자취가 일정한 간격으로 남아 있습니다. 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이라고 할까요.



(좌) 윤위동, <자취 3>, 장지 위에 수채, 116×64cm, 2016

(우) 윤위동, <추종1>, 장지 위에 수채, 색연필, 2016


윤위동 작가의 또 다른 변화를 보여주는 곤충 그림들입니다. 이번에 새로 발표한 신작들인데요.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것처럼 생생하지요. 화가의 뛰어난 관찰력과 표현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들입니다. 장지에 수채화로 그리는 특유의 기법은 여전하지만, 주로 인물 묘사에 집중했던 것과는 사뭇 달라졌지요. 화가는 이 유형의 그림에 하나같이 ‘자취’나 ‘추종’이란 제목을 붙여 놓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왼쪽 그림이 화면 오른쪽의 희미한 존재가 차츰 또렷해지면서 개미라는 한 개체로 완성되는 과정을 보여준다면, 오른쪽 작품은 대장격인 개미 뒤로 수많은 작은 개미가 따르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두 개미를 가까이 들여다보면 작은 물방울들이 알알이 맺혀 있는 걸 볼 수 있거든요. 화가는 결국 이런 과정들, 흔적들을 통해서 순환하는 자연의 질서와 섭리, 더 나아가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끈끈하게 이어지는 윤회의 철학을 표현해보고 싶었다고 합니다.


화가의 이런 깊은 뜻을 알고 나면 작품을 대하는 마음가짐도 달라질 수밖에요. 극사실주의 그림들은 일단 그 외형의 화려함으로 보는 이를 사로잡지요. 하지만 사람도 겉모습만 잘생기고 예쁘다 해서 다가 아니듯, 화가들이 별 의미도 없이 자기 그림 솜씨 뽐내보려고 극사실주의 그림에 몰두하는 건 결코 아닙니다. 새로운 세계를 추구하는 예술가로서 삶의 진실에 한 발이라도 더 다가가려는 것이지요. 그래서 팔이 빠지도록 그리고 또 그리는 것이고요.



디에고 코이 <반사>, 종이에 연필


사전을 찾아보면 극사실주의(hyperrealism)를 “주관을 극도로 배제하고 사진처럼 극명한 사실주의적 화면 구성을 추구하는 예술양식”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 미국에서 크게 유행한 팝 아트(Pop Art)의 강력한 영향 속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지극히 미국적인 리얼리즘의 한 흐름으로 여겨지지요. 슈퍼리얼리즘(superrealism), 포토리얼리즘(photorealism), 래디컬리얼리즘(radicalrealism) 등등 부르는 용어도 꽤 다양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유행이 생겨난 걸까요? 당시 미국 미술의 주류는 추상미술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아무리 추상미술이 대단하다 해도 대중에겐 사실 잘 와 닿지 않았지요. 도대체 뭘 그린 건지 도통 모르겠으니 말이에요. 그런 추상미술이 미술 권력의 정점에서 장기 집권 체제를 이어가자 반기를 든 화가들이 등장합니다. 화가들이여! 다시 붓을 들라! 거칠게 말씀드리면 극사실주의는 이런 맥락에서 탄생한 겁니다.



페드로 캄포스, <Hot Day III>, 캔버스에 유채, 120×170cm


사진 같다! 사진보다 더 실감 난다! 똑같다! 극사실주의 그림을 본 사람들이 보이는 흔한 반응입니다. 한 마디로 잘 그렸다는 거지요. 똑같이 그릴 수 있는 화가의 수고와 능력에 감탄하는 겁니다. 자타공인 누구나 잘 그렸다고 고개를 끄덕인다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극사실주의 그림은 사진과 곧잘 비교됩니다. 사진이야 카메라 셔터만 눌러도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지만, 그걸 그림으로 그린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무나 그릴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우리나라에서 극사실주의가 등장한 과정도 비슷합니다. 1970년대 우리 미술계를 주름 잡은 건 최근 한껏 몸값이 뛰고 있는 ‘단색화’로 대변되는 추상미술이었지요. 여기에 대한 반성으로 1980년대에 싹을 틔운 사실주의 미술의 흐름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극사실주의였던 겁니다. 그 뒤로 별 뚜렷한 흐름을 보여주지 못하다가 2000년대 중반 미술시장의 본격적인 성장과 함께 다시 무대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김창영 <Sand Play>


모래 그림으로 유명한 김창영 화백의 작품입니다. 캔버스에 모래를 얇게 바른 뒤에 붓으로 세밀하게 다시 그려서 완성한 건데요.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 화백은 이른바 ‘모래 회화’라는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하며 전 세계에서 주목을 받았지요. 부산에서 살았던 1970년대 후반에 바닷가 모래밭에서 영감을 얻어 그리기 시작했다고 하니 모래만 그린 세월이 어느덧 40년을 헤아립니다.


화가는 모래 위의 흔적들이 쉴 새 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모습에서 ‘존재의 생성과 소멸’을 보았다고 해요. 그저 모래밭을 실감나게 그렸구나, 쉽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진짜 모래를 캔버스에 얹고 그 위에 다시 물감을 발라 진짜와 가짜, 현실과 가상의 차이가 뭔지를 생각하게 만들지요. 그저 똑같이만 그린 건 아니란 뜻입니다. 바로 여기에 극사실주의 회화의 존재 이유가 있는 거고요.



이목을, <空1017>, 판넬에 유채, 2010년경 (이미지 출처: 아트뮤제)


극사실주의가 대중에게 열렬한 지지를 얻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화가의 노고입니다. 지독할 정도의 끈기와 집착, 정성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지요. 완벽에 가까운 화가의 손재주에 감탄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물론 초창기에는 영혼은 없이 기교만 앞세운 그림이란 비난도 적지 않았다고 해요. 하지만 손으로 그린다는 그 행위 때문에 도리어 극사실주의 회화가 보여주는 아날로그적 가치는 더 돋보입니다.


반면 그걸 그려내는 화가에겐 고통입니다. 위에 소개하는 그림은 ‘대추 화가’로 유명한 이목을 화백의 작품이에요. 마치 화면에서 대추가 툭 튀어나올 것만 같은 생생한 사실감 덕분에 이목을 화백의 작품들은 한동안 굉장히 귀하신 몸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화가에겐 그게 그만 독이 되고 말았지요. 갈수록 나빠지는 시력을 되찾을 길이 없었으니까요. 터럭 한 올까지 현미경 보듯 정교하게 그려야 했으니 직업병에 시달렸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습니다.



(왼쪽부터) 김대연 , 정창기 , 이창효 , 윤병락 


실제처럼 생생한 그림 앞에 서면 누구나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촉각을 자극한다는 바로 그 점이야말로 극사실주의 회화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어요. 이목을 화백의 대추 그림도 그렇지만 극사실주의 화가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주특기가 있습니다. 남들은 그리지 않는 걸 찾아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는 거지요. 우리나라에도 독보적인 개성을 지닌 극사실주의 화가들이 꽤 많습니다. 


위에서 맨 왼쪽은 김대연 화백의 포도 그림입니다. 포도를 얼마나 많이 그렸으면 ‘포도 그림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에요. 저걸 그렸어 하는 반응이 절로 나오지요. 극사실주의 화가들 중에는 이렇게 정물, 특히 과일을 주로 그리는 화가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딸기와 자두 그림으로 유명세를 얻은 정창기, 역시 자두를 많이 그린 이창효, 사과 그림의 윤병락 등은 지속적으로 과일을 소재로 한 정물화를 그려온 화가들입니다.



(왼쪽부터) 박종경 , 김영성 , 남학호 , 류재현 


동식물을 소재로 작품 활동을 하는 화가들은 꽤 많습니다. 이광호는 선인장 종류의 식물을, 박종경은 콩을 화폭에 가득 채워 넣습니다. 김영성은 어항 속 금붕어나 달팽이, 개구리, 곤충 따위를, 박정빈은 잉어를 즐겨 그리지요. 그런가 하면 자연 자체로 시선을 돌려 자갈밭 풍경에 초점을 맞춘 남학호나 숲 자체를 묘사의 대상으로 삼은 류재현의 그림도 눈여겨 볼 만합니다. 살아 있는 생명체를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극사실주의의 정체성과 딱 맞아떨어진다고 할 수 있겠지요.



(왼쪽부터) 안성하 , 고영훈 , 설경철 作, 이석주 , 배주 


그런가 하면 움직이지 않는 사물들을 작품의 소재로 끌어들이기도 하는데요. 유용상과 안성하는 유리잔에 무언가를 담은 형상을 주로 선보이고 있지요. 책 그림 하면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고영훈, 설경철의 그림도 책 좋아하는 분들의 취향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다른 시점을 보여주는 이석주의 그림도 책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장난감 레고만 집중적으로 그린 덕분에 한때 ‘레고 작가’로 불렸던 배주라는 화가도 빼놓을 수 없지요.



강형구,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259×193.5cm, 1999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극사실주의 회화의 본령은 인물 초상이 아닐까요. 극사실주의 인물화 분야에서는 해외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는 우리 화가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분이 바로 강형구 작가에요. 2001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자화상과 우리 시대의 우상들을 화폭에 그려왔지요. 익히 알고 있는 인물들을 다르게 그림으로써 그 사람에 대한 사유의 폭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정중원 


최근 해외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은 젊은 극사실주의 화가 정중원의 작품 역시 놀라움을 줍니다. 이 작품을 본 해외 언론이 실제 사진과 그림을 비교해서 보여주기도 했는데요. 사실 저는 전혀 구분을 못하겠더라고요. 그 정도로 실제처럼 묘사하는 재주가 뛰어나 해외에도 활발하게 작품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인물화로 국내외에 이름을 알린 화가들로 이상원, 강강훈, 한영욱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왼쪽부터) 이상원 , 강강훈 , 한영욱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아마도 모든 예술에 통용되는 말일 겁니다. 사진 같아서, 실제보다 더 실제 같아서 놀라움을 주는 극사실주의 회화는 무엇보다 어렵지 않아서 친근하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을 고스란히 보여주니까요. 하지만 화가에 따라, 소재에 따라 거기에 담긴 의미와 정신은 천차만별이지요. 화가들이 수백, 수천만 번의 붓질을 마다않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완성된 작품은 그래서 하나의 작은 세상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그 속엔 생생한 우리네 삶이 숨 쉬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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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조선시대부터 #먹스타그램이 있었다!
김석
#김석기자



옛말에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지요.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금강산 여행은 평생의 꿈이었습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버킷리스트,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 가운데서도 첫 손에 꼽힐 정도였어요. 그래서 수많은 시인과 화가가 금강산을 유람하고 주옥같은 시와 그림들을 남겼습니다. 그런 금강산인데도 허기 앞에선 장사 없나 봅니다. 일단 좋은 구경도 밥 먹고 하자는 속담이 전해져올 정도니까요. 삶이란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일입니다. 먹어야 살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먹을거리를 장만하고 음식을 해먹는 모습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화가들의 단골 소재였습니다. 얼마 전 <풍미 갤러리>라는 책을 읽었는데요. 서양의 명화 중에서 음식과 관련된 그림만을 골라 묶은 미술책입니다. 다 읽고 나니 궁금해졌어요. 우리 조상이 남긴 옛 그림 속에는 어떤 음식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까 하고 말이지요.



#아이스타그램, 아이의 첫 음식 모유를 담은 자모육아



|신한평 <자모육아>, 종이에 담채, 23.5×31.0cm, 간송미술관 소장



올해 놓쳐서는 안 될 미술 전시회가 있습니다.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8월 28일까지 이어지는 <간송문화전 6부: 풍속인물화 - 일상, 꿈 그리고 풍류>입니다. 저 유명한 신윤복의 <미인도>를 비롯해 보석처럼 빛나는 우리 옛 그림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지요.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소재로 한 풍속인물화에는 음식과 관련된 그림들이 제법 많은데요. 위의 그림은 신윤복의 아버지인 신한평(申漢枰, 1735~1809)이란 분이 그린 자모육아(慈母育兒)란 작품입니다. 자애로운 어머니가 아이를 기른다는 뜻이지요. 자녀 셋을 둔 어머니가 막내인 갓난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습니다. 엄마 품에 폭 안겨 젖을 빠는 아기, 그 모습을 한없이 자애로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을 어쩜 저리도 사랑스럽게 그렸을까요. 모유(母乳)는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 먹는 음식입니다. 젖을 떼고 나면 다시는 맛볼 수 없는 귀하디귀한 음식이기도 하고요.




#술스타그램, 신윤복이 화폭에 담은 주막의 풍경



|신윤복 <주사거배>, 종이에 담채, 28.2×35.6cm, 국보 제135호, 간송미술관 소장



기왕 말 나온 김에 신윤복의 그림도 하나 살펴보겠습니다. 국보 제135호로 지정된 신윤복의 <혜원전신첩>에 실린 그림 30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술집 풍경이군요. 신윤복이 즐겨 그린 기생은 보이지 않고 가마솥 뒤 부뚜막에 앉은 주모가 국자로 술을 떠서 잔에 따르고 있습니다. 갓 쓴 손님네들이 다들 서 있는 걸 보면 요즘 말로 딱 선술집이지요. 예나 지금이나 술은 어쩔 수 없이 술인 모양입니다. 오른쪽 위에 한자로 된 글귀 내용이 또 절묘합니다. “술잔 들어 밝은 달 맞아들이고, 술항아리 안은 채 맑은 바람 대하네.” 화가의 풍류가 이랬습니다.




#회식스타그램, 강가에서 즐기는 풍류 넘치는 회식



|김득신 <강상회음>, 종이에 담채, 22.4×27.0cm, 간송미술관 소장



이번엔 강가에 조촐한 밥자리가 마련됐군요. 조선 후기에 풍속화가로 이름을 날린 김득신(金得臣, 1754~1822)의 작품입니다. 옛날 옛적엔 뜻 맞는 사람끼리 강에 나가 고기도 잡고, 잡은 고기를 요리해서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고 하는데요. 주로 삼복에 일손 없는 날을 골라 이른바 천렵(川獵)을 즐기는 것도 옛 사람들에겐 빼놓을 수 없는 놀이였다고 합니다. 가운데 생선 요리를 놓고 둘러앉은 네 사람이 밥을 먹고 있는데, 한 명은 그 뒤에서 혼자 술병을 독차지하고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네요. 한 소년이 나무 뒤에서 지켜보며 뭐라도 좀 얻어먹을 수 있을라나, 기회를 엿보는 것만 같아 웃음을 줍니다.




#일상스타그램, 김홍도가 담은 일상의 풍경들



아주 오래 전부터 정물화를 그려온 서양과 달리 우리 옛 그림에는 정물화의 전통이 없습니다. 먹거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그림이 없다는 뜻이지요. 음식을 먹거나 요리를 준비하는 모습, 더 넓게 잡아도 고기 잡고 농사짓는 풍습 정도를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나라 회화사를 대표하는 풍속 화가를 딱 한 사람만 꼽으라면 단연 김홍도가 되겠지요.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조선시대의 이미지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김홍도의 풍속화 25점을 수록한 기념비적인 화첩 <단원풍속도첩>(보물 제527호)에도 어김없이 음식과 관련된 그림들이 있습니다.



|왼쪽부터 김홍도 <점심> <주막>, 종이에 엷은 채색, 28.0×23.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너무나도 유명한 그림들이지요. <점심>은 말 그대로 점심 식사 장면을 그린 겁니다. 화면 한가운데 숟갈로 밥을 떠먹는 인물을 중심으로 조촐한 서민들의 야외 식사 모습이 정감 있게 묘사돼 있습니다. 하루하루 팍팍하고 고단한 삶을 살았을 백성들의 먹고 사는 일상을 참 따뜻한 시선으로 그렸어요. 위에서 술집 그림을 잠시 보았지만 사실 백성들이 밥 먹고 술 마시던 곳은 <주막>이지요. 평상도 아닌 댓돌에 걸터앉아 밥그릇을 한쪽으로 기울여 숟갈로 음식을 뜨는 모습을 보세요. 그릇에 음식을 담는 주모의 표정은 또 어떤가요. 이런 백성들의 소박한 건강함이야말로 김홍도의 풍속화가 갖는 진정성의 힘이 아닐까요.




#요리스타그램, 세계에서 사랑받는 김준근이 담은 우리의 풍속



|<국수 누르는 모양> 김준근b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화가로 김준근(金俊根, ?~?)이란 분이 있습니다. 원산 지역 토박이 출신의 지방 화가인데, 놀라운 건 김준근의 작품이 해외 미술관과 박물관에 꽤 많이 소장돼 있다는 점입니다. 미국, 캐나다,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덴마크, 오스트리아, 영국, 일본까지 전 세계 각지에 퍼져 있거든요. 1890년대에서 1990년대 초반에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 가운데는 한국의 풍속을 잘 보여주는 그림을 구하려는 사람이 꽤 많았다고 해요. 김준근의 그림은 그런 외국인 고객들의 취향을 만족시킨 겁니다. 오죽했으면 ‘수출 풍속화’로 불렸을까요.



|왼쪽부터 <떡매질> <두부 짜기>, 김준근


|왼쪽부터 <밥 푸고 상차리기>, <방아찧는 모양>, <엿 만들기>, 김준근



당시의 풍속과 생활상 치고 ‘없는 게 없는’ 김준근의 풍속화는 지금까지 파악된 수량만 자그마치 1600점이 넘는다고 합니다. 게다가 김준근의 작품에는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대단히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들이 제법 많습니다. 위의 그림 여섯 점을 차례대로 살펴보면 <국수 누르는 모양>, <두부짜기>, <떡매질>, <밥 푸고 상차리기>, <방아찧는 모양>, <엿 만들기>입니다. 정말 다채롭지 않나요? 조선시대 어떤 풍속화가도 이토록 세세한 것까지 그림으로 남기진 않았습니다. 가히 살아 있는 생활사 교과서라 할 만하지요.





#여행스타그램, 외국인의 시선에 비친 우리의 모습


|엘리자베스 키스 <맷돌 돌리는 여인들 Women at Work>, 종이에 구아슈, 1919년



그렇다면 낯선 이방인의 눈에 비친 한국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일제강점기에 한국을 여행하며 다양한 풍속을 그림으로 남긴 영국의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1956)의 그림 중에도 음식과 관련된 작품이 두 점 있습니다. <맷돌 돌리는 여인들>이란 제목의 수채화는 두 여인이 마당 한가운데서 맷돌로 뭔가를 갈고 있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이런 모습이 외국인 화가의 눈에는 분명 이국적으로 다가왔겠지요.



|엘리자베스 키스 <금강산 절 부엌 A Temple Kitchen, Diamond Mountains>, 채색 목판화, 1920년



이번에는 <금강산 절 부엌>이란 제목이 붙은 채색 목판화인데요. 아주 깔끔하게 정돈된 어느 절 부엌에서 한 남자가 부뚜막에 올라앉아 아궁이 밥을 짓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구수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장면까지 정말 생생하게 그려놓았네요. 그러고 보니 금강산 이야기로 시작한 우리의 그림 여행은 묘하게도 이렇게 다시 금강산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 옛 그림에서는 결코 본 적 없었던 ‘밥 짓는 남자’와 함께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