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G 스페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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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트의 리얼한 마케팅 이야기
약은 약사에게, 광고는 TV에게?
최훈학
#최훈학마케팅담당


광고인들에게 TV는 최고의 광고 매체로 자리매김해 왔습니다. 여기서 최고란, 효과뿐만 아니라 비용 또한 최고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 근래 모바일 시대가 시작된 후 TV 광고의 위상은 예전 같지 않습니다.



TV광고, 단점이 더 많다?


마케팅의 최전선에서 일하는 담당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TV 광고는 효과가 좋지만 몇 가지 단점이 있습니다.


먼저, 시간이 짧아 원하는 메시지를 충분히 전달하기 어렵습니다. TV 광고 계좌는 15초 단위로 판매됩니다. 15초는 광고주 입장에서 브랜드와 상품 중 한 가지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는 짧은 시간이며, 그마저도 충분치 않습니다.


또한, 시청하는 고객이 광고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인식하도록 만들기가 어렵고, 리모컨 사용으로 채널 변경이 잦아지면서 그나마 광고를 제대로 보는 분들도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과거 TV가 주력 매체일 때처럼 시청자가 보여주는 것만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시대는 지났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TV 광고는 다른 매체와 비교해 심의가 까다롭고 고객의 연령대나 성별 등 타깃을 명확하게 잡기 어렵다 보니 소재를 재미있게 풀어가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TV 광고는 TV 광고대로 제작하고 모바일 바이럴 광고는 별도로 제작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럴 경우 제작비 증가의 부담이 따르겠죠.


무엇보다 광고주 스스로가 TV 광고에 대해선 유독 자기 검열이 심한 것도 재미있는 광고를 만들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최고경영진이 TV를 보다가 자기 회사 CF가 나오는데 모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겠죠. 때문에 TV 광고의 경우 마케팅팀과 광고대행사가 작업한 후 최고 경영층까지 보고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렇다 보니 보고가 올라가면서 사람들의 연령대가 높아지게 되고, 그 결과 타깃은 넓어지고 반감을 일으킬 수 있는 요소 (물론, 이 부분이 재미있는 요소이기도 합니다.)는 제거되어 처음 기획과는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본 광고 자료 중에 광고주의 계속되는 요구사항으로 인해 광고가 망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상이 있습니다. 광고인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한 영상입니다.



일본 초밥 브랜드 '긴노사라' 아이데이션 광고



좋은 TV광고가 만들어지기까지


그렇다면, 좋은 TV 광고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론, 이것은 TV 광고 뿐만 아니라 모든 광고에 적용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광고 제작과정을 광고주와 대행사의 관계로만 보지 않고 실무적인 역할로 분담해 보면 됩니다. 마케팅리더, 마케팅실무자, 광고대행사 각자가 자기 역할에 충실할 때 좋은 광고가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광고에 대한 모든 결정은 결국 광고주 즉, 회사 최고경영진에서 내립니다. 앞서 일본 광고 사례에서도 보았듯이 광고 제작과정에는 수많은 의견이 존재합니다. 각자 연령도 다르고 취향도 다르기 때문이죠. 마케팅 리더의 역할은 이러한 과정들을 매끄럽게 조율해 여러 의견을 수렴한 후 광고의 콘셉트와 광고 크리에이티브*에 조화롭게 녹아들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고, 광고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예상치 못한 위험 요소들을 관리하는 것도 필수적인 일입니다.


* 광고 크리에이티브(advertising creative)

광고의 창작과정을 뜻하는 용어로 광고기획 과정을 통해 나온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출처 : 위키피디아)


마케팅 실무자의 역할은 광고대행사의 크리에이티브와 실제 광고하고자 하는 상품, 서비스가 잘 매칭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크리에이티브가 잘 전달되도록 현장을 디테일하게 챙기는 일 역시 가장 중요합니다. 광고대행사가 크리에이티브를 잘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만약, 현실에서 마케팅 리더가 본인의 역할을 망각하고 광고대행사의 크리에이티브 내용을 본인의 취향대로 바꾸는 데 집착하거나 예산, 의사결정 문제를 실무자에게 미루게 되면, 그 결과 광고가 어떻게 나올 것인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TV광고의 왕좌를 넘보는 바이럴 광고


이마트는 2017년 하반기에 피코크 티라미수 TV 광고와 바이럴 광고를 제작하여 운영하였으며 광고 후에 매출이 광고 직전 대비 300% 이상 신장하였으니, 일단 광고는 성공적이라 평가하고 있습니다.



[PEACOCK] 티라미수 케이크 : 자매편


[PEACOCK] 티라미수 케이크 : 비밀연구소편



TV 광고를 런칭하고 난 후 그 자체로 인지도나 매출을 많이 끌어올렸지만, 짧은 메시지 전달의 아쉬움이 있어 바이럴 광고를 추가로 제작하였습니다.



[이마트] PEACOCK TIME! 서현을 춤추게 한 피코크 티라미수!



아이돌 스타 서현을 모델로 한 티라미수 광고는 풀버전 및 인스타그램용 1분 버전, 극장광고용 30초 버전 등 TV를 고려하지 않고 만들어졌음에도 기획, 음악, 안무, 상품 메시지가 아주 조화롭게 만들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유튜브 채널에서도 현재 백만 뷰 이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잘 만들어진 광고 영상은 그 자체로도 파급력을 가져 TV 못지 않은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TV 광고의 힘은 강하고 그 힘은 앞으로도 당분간 지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SNS 중심으로 전파되는 1분 바이럴 광고 역시 그에 못지않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콘텐츠만 좋다면 시청자가 능동적으로 선택해서 볼 수 있으며, 정해진 프로그램 사이에 15초 단위로 방영하는 TV 광고보다 더 많은 메시지를 담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콘텐츠를 만든다는 것, 어찌 보면 광고의 본질에 더 가까운 것이지 않을까요? 콘텐츠의 힘이 중요한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이마트 최훈학 마케팅 담당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IDEA와 MONEY의 사이에서,

회사와 고객의 사이에서

항상 방황하는 마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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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월 Publisher’s letter
2018년, 당신의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SSG블로그


한해 마무리, 잘 하셨나요? 

한해를 마무리하며 모인 오랜 친구들과 그 이야기들을 나누다 보니

참 많은 일이 있었구나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온 수많은 날 중
 기억에 남는 날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추억이 되는 하루,
그 날의 이야기에는 눈물이든 웃음이든 분명 다른 특별함이 있죠.


이야기로 여러분을 만나는 공간, SSG블로그.

2018년의 SSG블로그를 시작하며
기억되는 이야기가 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분명 특별한 이벤트가 주는 기쁨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더 가까이 듣고,
소통하는 세심함과 꾸준함이 필요하겠죠. 


그렇게 담아 낸 우리의 이야기가
여러분의 일상 속 좋은 기억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2018년, 작은 소소하지만 기쁨이 될 수 있는 신세계그룹만이 할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담기 위해 2018년도 열심히 달려가겠습니다.


무술년 새해, 여러분과 함께 써내려 갈 행복한 스토리를 기대하며, SSG블로그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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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화가들의 핫 플레이스 ‘인왕산’
1편 인왕산, 한양의 ‘랜드 마크’가 되다
김 석
#김석기자


높이 338미터.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누상동, 사직동과 서대문구 현저동, 홍제동에 걸쳐 있는 산. 온몸이 화강암으로 이뤄진 바위산이 훤한 이마를 드러내고, 기이한 모습을 한 갖가지 바위가 곳곳에 숨어 있는 자연 돌조각 공원. 능선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한양 도성을 품 안에 가만히 끌어안은 산.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 없이 철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산. 경복궁 서쪽 마을 서촌에 깃든 화가와 문인, 건축가들에게 지금도 끊임없이 영감을 주는 상상의 샘. 이름에 임금 왕(王) 자를 품은 몇 안 되는 산. 경복궁 근처에 가면 어디서도 얼굴을 볼 수 있는 바로 그 산.


임채욱, <인왕 1607>, 66.7×100cm, 한지에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2016



최고의 화가 겸재 정선, 인왕산을 담다


조선 시대에 가장 많이 그려진 산은 어디일까요? 지금까지 남아 있는 그림으로만 보자면 단연 1위는 금강산입니다. 남북 관계에 훈풍이 불던 2007년에 저도 방송뉴스 취재를 위해 네 차례 금강산에 다녀온 기억이 있는데요.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 봉~”하는 노래가사가 왜 나왔는지 알만하더군요. 그 명성에 걸맞게 가는 곳마다 절경이었습니다. 지금처럼 여행이 자유롭지 않았던 조선 시대에 금강산 유람은 풍류를 아는 이라면 평생에 꼭 해야 할, 요즘 말로 하면 ‘버킷 리스트’의 맨 꼭대기를 차지했다지요. 그래서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같은 조선 최고 화가들의 그림으로 남을 수 있었던 거고요.


그렇다면 금강산 다음으로 많이 그려진 산은 어디일까요? 네, 바로 인왕산입니다. 사실 궁금했어요. 금강산이야 원체 이름난 명산이니 그렇다 쳐도, 그다음 자리가 어째서 인왕산인가 하는 싶었거든요. 거리가 가까워서? 거리로만 따지면 경복궁 뒤편에 늠름하게 서 있는 북악산도 있고 남산도 있고, 좀 멀게는 관악산, 낙산, 북한산, 도봉산도 있잖아요. 도성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이렇게도 좋은 산이 많은데 왜 유독 인왕산 그림만 많은 걸까요. 전국 팔도강산에 하고많은 명산이 즐비한데 어째서 화가들은 줄기차게 인왕산을 그렸을까요. 궁금증을 풀어줄 첫 단추는 아래에 소개해드릴 그림 한 점입니다.


정선, <인왕제색도>, 1751년, 비단에 엷은 채색, 79.2×138.2cm, 국보 제216호,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너무나도 유명한 걸작 <인왕제색도>입니다. 서울 살면서 인왕산 한 번 안 가본 사람은 많아도, 이 그림을 한 번도 못 본 사람은 아마 없겠지요. 인왕산을 넘어 조선 시대, 아니 우리 미술의 역사를 대표하는 산 그림이라 해도 좋을 겁니다. 그림의 주인공은 보시다시피 인왕산입니다. 겸재 이전에는 인왕산을 이렇게 화면 중심에 세워놓고 그린 화가가 없었습니다. 작게나마 인왕산을 산수화 귀퉁이 어디쯤에 그려 넣은 화가도 없었고요. 겸재 이전의 화가들은 우리 산천을 그리겠다는 생각을 못 했습니다. 찾아가서 직접 보고 그리는 사생(寫生)의 전통도 물론 없었고요. 당시만 해도 화가들은 대부분 중국의 유명 화보집을 보고 베끼면서 그림을 배웠습니다. 좋은 그림의 모범 사례가 모두 그 안에 있었으니, 구태여 조선의 산을 그릴 필요조차 없었던 게지요. 그래서 화가들이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린 산은 다르게 말하면 ‘천상계의 산’이었습니다.


그걸 ‘지상계’로 끌어내린 조선 최초의 화가가 바로 겸재 정선이었습니다. 흔히 겸재를 진경산수화의 창시자라고 하지요. 진경산수는 실제 경치(實景)를 바탕으로 가장 참된 풍경(眞景)을 그려낸 걸 말합니다. 실제와 똑같이 그린 게 아니라 사람의 내면을 꿰뚫어 보듯 산의 진정한 모습을 그렸다는 뜻입니다. 다른 화가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대 혁신을 이룬 겁니다. 오늘날 <인왕제색도>가 당당히 국가의 보물로 대접받는 이유는 우리 산을 독자적인 진경산수 화풍으로 더없이 아름답게 그려냈기 때문입니다. 이 그림 하나로 인왕산은 명실상부 한양의 ‘랜드 마크’로 우뚝 서게 됩니다.


<인왕제색도>의 인왕산 주봉 부분. 봉우리 윗부분이 잘려 답답한 모습입니다. 

원래 그림에 당연히 여백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면, 후대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그림 윗부분이 잘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인왕제색도>를 더 유명하게 만든 건 그림에 얽힌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겸재가 76살 되던 1751년 둘도 없는 벗이었던 시인(詩人) 사천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이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지요. 그림과 시로 한평생 우정을 나눈 ‘절친’이었으니, 만년의 겸재에겐 얼마나 큰 슬픔으로 다가왔을까요. 그 애통한 마음을 담아 비 갠 직후의 인왕산을 그리는 데 모든 것을 쏟아부어 <인왕제색도>라는 불멸의 걸작을 완성했다는 겁니다. 이 얼마나 극적인 명작 탄생의 비화입니까. 한 편 드라마 같은 이야기 덕분에 <인왕제색도>는 ‘신화’가 됩니다.


스토리텔링을 무척이나 강조하는 시대이지요. 불세출의 걸작에 그럴듯한 이야기까지 곁들여졌으니 더 귀하게 느껴질 밖에요.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이야기는 ‘오해’가 낳은 산물일 가능성이 큽니다. <인왕제색도>가 그려진 시기는 1751년 윤5월 하순입니다. 양력으로 7월, 장마철에 해당하지요. 사천이 그 무렵에 죽었다면 이야기가 들어맞습니다. 그런데 미술사학자 한 분이 한산 이 씨 족보를 뒤져보니 사천 이병연의 사망일은 그보다 훨씬 이른 1월 4일이었습니다. 사천이 죽은 시기와 겸재가 그림을 완성한 시기에 차이가 있다는 얘기지요. 그렇다고 해서 <인왕제색도>의 예술적 가치가 퇴색되는 건 아닐 겁니다.



인왕산, 그 이름에 담긴 역사


겸재 정선 필(筆), <인왕산도>, 18세기, 종이에 엷은 채색, 62×104cm, 개인 소장


이 그림을 혹시 보신 적 있으신가요? 겸재 정선의 그림으로 전하는 <인왕산도>입니다. 개인 소장품으로 지금까지 공개적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하더군요. 인터넷을 뒤지면 사진이 한두 장 보입니다. 비단 아닌 종이에 인왕산 일대를 조금 더 넓은 시야로 담아낸 작품입니다. 일부 연구자들은 겸재가 <인왕제색도>를 그리기 훨씬 전인 오십 대에 이 그림을 그렸을 걸로 봅니다. 두 그림을 통해 겸재가 어떻게 자신의 화풍을 완성시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있다는 건데요. 아무래도 원작을 직접 보지 않고는 판단하기 어렵겠지요. 다만 이상한 건 왼쪽 상단의 그림 제목에 인왕산의 왕 자가 임금 왕(王)이 아닌 왕성할 왕(旺)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에요. <인왕산도>보다 훨씬 뒤에 그려진 <인왕제색도>는 임금 왕(王)을 썼습니다.


여기서 인왕산이란 이름의 유래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경복궁 서쪽에 있는 산이라 해서 서봉(西峯) 또는 서산(西山)으로 불렸다고 해요. 그러다가 세종 때 처음 인왕산이란 이름을 짓습니다. 인왕(仁王)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金剛神)의 다른 이름입니다. 궁궐 바로 옆 산에 인왕사(仁王寺)를 짓고 산 이름도 인왕으로 바꿔 조선왕실을 수호하려는 깊은 뜻을 담은 거지요. 그 뒤 조선 중종 때는 필운산(弼雲山)이란 이름도 나타납니다. 중종 32년에 명나라 사신 공용경이 조선을 방문하자 중종은 인왕산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합니다. 이때 명의 사신이 제안한 이름이 필운산입니다. 조선왕실을 돕는 좋은 구름이 피어나는 산이라는 뜻입니다.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시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한 김탁환의 소설 <허균, 최후의 19일>을 보면 인왕산이 아닌 필운산이란 이름만 씁니다. 왕이 부탁해서 명나라 사신에게 받아낸 이름이니 아마도 공식적으로는 ‘필운산’이란 이름을 주로 쓰지 않았나 합니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주로 인왕산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에 임금 왕(王) 대신 왕성할 왕(旺)으로 표기가 바뀝니다. 왕(旺) 자는 임금 왕(王) 옆에 날 일(日)이 붙은 모습이지요. 일제(日)가 조선 왕실(王)을 짓누르는 상징으로 삼으려 대놓고 글자를 바꾼 겁니다. 산 이름도 창씨개명을 당한 거지요. 이런 글자가 <인왕산도>에 적혀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인왕산도>는 정녕 겸재의 그림이 맞는 걸까요?


정선, <수성구지>, 종이에 수묵, 52.9×87.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어찌 됐건 겸재 정선이 그린 걸로 전해지는 인왕산 전경 그림은 <인왕산도>와 <인왕제색도> 두 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겸재는 인왕산 전경뿐 아니라 마치 카메라로 클로즈업하듯 인왕산의 숨은 비경들을 그림으로 남깁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장동팔경첩>이라는 그림 모음집인데요. 장동(壯洞)이란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효자동, 청운동 등을 포함하는 옛 이름입니다. 지리적으로 북악산 계곡부터 인왕산 남쪽 기슭까지인데요. 조선 후기에 이름난 세도가들이 모여 살던 곳이자 겸재 자신의 살던 곳이기도 하지요. <장동팔경첩>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과 간송미술관에 각각 한 부씩 소장돼 있습니다.



더 가까이서 인왕산을 보다


(좌) 정선, <청풍계>, 1730년, 종이에 채색, 96.2×36cm,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우) 정선, <청풍계>, 1739년, 종이에 엷은 채색, 153.6×59cm, 간송미술관 소장


위 그림은 인왕산 계곡의 하나였던 청풍계(淸風溪)를 그린 겁니다. 간송미술관 소장본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에 같은 제목의 그림이 수록돼 있는데요. 고려대학교 박물관에도 <청풍계>란 작품이 소장돼 있습니다. 위의 왼쪽이 1730년에 그려진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본이고, 오른쪽이 그보다 늦은 1739년에 완성된 간송미술관 소장본입니다. 두 그림을 나란히 놓고 보면 나무나 바위의 위치가 거의 비슷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오른쪽 간송본은 겸재의 장동팔경 그림 가운데 지금까지 확인된 가장 큰 작품입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인 미술사학자 최순우 선생은 어느 글에서 이 그림에 대한 감회를 다음과 같이 써 놓았습니다.



온 폭에 거의 하늘의 공간을 남기지 않은 대담한 화면 포치법과
스산스러우면서도 어딘가 호연한 시심이 넘나드는 독특한 분위기가
뭉클한 감명을 안겨 주는 것은 아마도 정을 다해서 길들인
우리 산하의 실감에서 오는 감상인지도 모른다.



(좌) 정선, <필운대상춘>, 1740~1750, 비단에 엷은 채색, 27.5×33.5cm, 개인 소장

(우) 정선, <필운대>, 1751년경, 종이에 엷은 채색, 29.5×33.7cm, 간송미술관 소장


물론 화첩으로 묶이지 않은 것들 중에도 겸재의 인왕산 그림은 꽤 많습니다. 인왕산 남쪽 자락의 필운대(弼雲臺)는 장안에서 손꼽히는 꽃놀이 명소였다고 하지요. 벚꽃 핀 것만 봐도 괜히 가슴이 설레는 게 사람 마음이니, 그 시절에 풍류하면 지금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경치 놓은 필운대 바위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따사로운 햇살에 취하고 봄꽃 향기에 취합니다. 남쪽으로는 저만치 남산과 꼭대기 소나무 한 그루까지 그렸습니다. 애국가 2절의 바로 그 ‘남산 위의 저 소나무’입니다. 오른쪽 작품 역시 필운대 그림입니다. 왼쪽 것과는 반대로 남쪽에서 인왕산을 바라보며 위에서 내려다보듯 바위를 묘사해 놓은 작품이지요.



겸재의 그림, 인왕산의 과거와 현재를 잇다



사직단 부근에서 서촌과 인왕산 일대 답사를 시작한다면 반드시 들러봐야 할 곳 중 하나가 바로 필운대입니다. 이곳은 우리가 잘 아는 ‘오성과 한음’의 바로 그 오성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집터이기도 합니다. 이곳은 원래 임진왜란 때의 명장 권율 장군의 집터였는데, 사위인 이항복이 물려받았다고 해요. 필운(弼雲)은 이항복이 호(號)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집도, 집터도 살필 수가 없습니다. 필운대의 흔적 역시 누추하게 귀퉁이만 남은 바위뿐이고요. 그나마 바위에 새겨진 필운대 세 글자가 남아 옛 자취를 더듬어볼 수 있게 해줍니다. 겸재가 필운대를 그리지 않았다면 옛 모습은 영영 알 길이 없었을 겁니다.



필운대로 들어가는 진입로 왼쪽에 안내판이 서 있습니다. 안내판의 그림은 오래돼서 그런지 지워져 있더군요. 그 자리에 있던 그림이 바로 앞에서 소개한 겸재의 <필운대>입니다. 문화재 안내판에 특정 화가의 그림을 함께 넣는 건 퍽 이례적인 일이지요. 사진이 없던 시절에 그림은 눈에 보이는 것을 담아내는 유일무이한 시각 매체였습니다. 겸재가 그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림에 묘사된 옛 장소들을 까맣게 모를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겸재를 기점으로 인왕산은 비로소 의미 있는 역사의 무대가 되었고, 지금도 수많은 답사객의 발길을 불러 모으고 있으니까요. 인왕산 일대 답사를 다니다 보면 곳곳에서 겸재의 그림을 붙여 놓은 안내판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좌) 옥인시범아파트 (우) 복원된 수성동 계곡


안내판이 전부가 아닙니다. 인왕산 기슭에서 인왕산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있어요. 바로 수성동 계곡입니다. 서울 중심가에 이토록 호젓한 계곡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름난 명소가 됐지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인왕산 아랫마을의 경관은 한 마디로 엉망이 됐습니다. 수성동 계곡 역시 예외는 아니었겠지요. 1971년에 계곡 좌우로 옥인시범아파트 9개 동이 들어서면서 수려했던 풍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40년 세월이 지난 2012년에야 난개발의 상징이었던 아파트를 철거하고 계곡 일대를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해 옛 모습을 되살립니다.



수성동 계곡에는 우리 역사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의 숨결이 서려 있습니다.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 이용(李瑢, 1418~1453)입니다. 안평이 누군가요. 무릉도원을 다녀오는 기이한 꿈을 꾸고 나서 당대 최고의 화가인 안견(安堅, ?~?)으로 하여금 조선 회화 사상 불멸의 걸작으로 꼽히는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한 장본인입니다. 문화 예술에 뛰어난 안목을 가진 풍류객으로도 명성이 높았지요. 왕이 될 수 없었던 안평은 바로 이곳 수성동 계곡 위쪽에 집을 짓고 아버지 세종이 지어준 비해당(匪懈堂)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계곡 입구에서 서 있는 안내판만이 먼 옛날 이곳 어디쯤에 안평의 거처가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지요.


(좌) 정선, <수성동>, 1751년, 비단에 엷은 채색, 33.7×29.5cm, 간송미술관 소장

(우) 복원된 기린교


수성동 계곡을 복원한 1차 근거는 바로 겸재의 그림입니다. 수성동 계곡 입구에 설치된 안내판에도 겸재의 그림이 붙어 있고요. 그림 왼쪽 아래에 작은 돌다리가 놓여 있는 것이 보이지요. 기린교(麒麟橋)라는 이름을 가진 이 다리는 수성동 계곡과 함께 복원돼 옛사람이 남긴 흔적을 더듬어보게 합니다. 고작 작은 돌다리일 뿐인데도 그것이 주는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지요. 역사와 문화와 예술이 깃든 수성동 계곡은 이렇게 호젓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만일 겸재가 없었다면 수성동 계곡을 되찾을 수 있었을까요. 선구적인 화가 한 사람이 남긴 그림이 260여 년이 흐른 뒤에 이토록 의미 있는 변화의 든든한 밑거름이 됐다는 점. 이것이 바로 시대를 초월한 예술의 힘 아닐까요.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


김 석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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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미식,편식:정동현의 三食일기
셰프가 아플때 먹는 음식, 추억에 담긴 힘
정동현
#정동현


휴일 없이 일했다. 어젯밤까지 웃고 떠들던 동료가 갑자기 출근하지 않았다. 모두 말은 하지 않을 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또 도망갔군.’


주방에서 도망치는 요리사는 봄날 환절기 감기처럼 드문 일이 아니다. 출근 시간을 한 시간쯤 넘기면 부주방장이 조용히 다가와 ‘이건 네가 해야겠어’라고 넌지시 알려준다. 모두 동요하지 않는다. 속으로 욕을 할 뿐 티를 내지도 않는다. 그러다 창고나 주방 뒤편 쓰레기장에서 잠시 틈이 나면 ‘왜 그랬대?’라고 소식을 묻는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아무 이유가 없는 경우도 있고, 며칠 전부터 그런 낌새가 보이는 경우(일이 힘들다고 징징댔다니까)도 있다. 때로 동료와 대판 싸우고 그 기세를 몰아 나가버리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레스토랑 문을 닫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누군가는 일해야 하고 사람들은 밥을 먹어야 한다. 땀이 들어가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이마의 땀을 닦으면 이미 땀은 굳어 소금이 되어 있었다. 뜨거운 열기 때문인지, 아니면 몸의 한기에서 치솟은 식은땀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어차피 내일은 쉬는 날이었다.


‘젠장.’


기름이 튀어 나의 살을 익혀도 욕을 할 힘조차 남지 않았다. 일을 마친 뒤 나눠준 맥주 한 병을 단숨에 마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두운 천장을 보며 잠에서 깼을 때 침대 시트는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감기몸살이었다. 영하로 기온이 잘 내려가지 않는 호주 멜버른에서 감기라니. 나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리고 무기력했다. 침대에서 일어날 기운조차 나지 않았다. 그러나 겨우 찾아온 휴일을 그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힘을 내어 침대에 앉아 요리책을 꺼내 읽었다.


요리책의 이름은 ‘moro’였다. 영국의 모로칸 음식점에서 낸 요리책으로 흑백의 화보가 가득했다. 그 화보는 이런 것들이었다. 아이와 어머니가 함께 콩을 고르고, 머리에 두건을 쓴 어머니는 또 국을 끓인다. 터번을 쓴 아버지는 화덕에 빵을 굽고 자신만만한 표정의 젊은 부부가 카메라를 응시한다. 음식 사진의 채도는 낮아 흐릿한데 오히려 그 담백한 색감에 맛이 더 가깝게 전해오는 것만 같았다. 화려하지 않은 사진은 그렇기에 더욱 정감이 가고, 그 속에 함께 담긴 사람들의 모습은 이것을 먹는 이들이 정말 살아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했다. 그리고 나는 울었다. 요리라는 것은 사람들과 따로 떼어내 생각할 수 없다.





외국에서 살며 몸이 아프면 자연히 한국음식을 찾게 됐다. 나는 영국과 호주에 널린 각국의 음식점을 볼 때마다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그 각국의 이민자들은 각국의 음식점을 찾는다.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것이 고향의 음식인 것이다. 무엇보다 남의 땅에 와서 그곳에 진짜로 살지 못하고 자꾸만 저 멀리 떨어진 곳의 음식을 찾는 나를 볼 때마다 나는 웃음을 잃었다.


현대의 요리는 첨단을 달린다. 어떻게 하면 더 '맛있게'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세계의 요리사들과 '과학자'들은 엄청난 돈과 노력을 들여 고민한다. 전에 없던 기법을 고안하고 새로운 맛을 창조해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평소에 먹는 음식은 피쉬앤칩스라든가 라멘, 스파게티 같은 것들이다. 업장에서 일을 마치고 많은 셰프들은 맥도날드로 향한다. 그들이 만드는 음식과 먹는 음식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람이란 제각각의 취향을 가진다. 누구는 진한 커피를, 누구는 연한 커피를 좋아한다. 이것은 우열의 관계가 아니라 순전히 취향일 뿐이다. 그렇다면 맛있는 커피와 맛없는 커피를 구별하는 것은 또 어떤 것일까? '맛'에도 객관적인 척도를 적용하여 그것을 가려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러나 남이 맛있다고 해도 내가 싫으면 그만이다. 그리고 각각의 요리와 식재료는 그런 객관적인 척도로 적용할 수 없는 차원에 있는 것들이 있다. 흐물흐물하고 질기고 냄새나는 것들에 우리는 미치도록 열광하지 않는가?


예를 들면, 떡볶이의 식감은 외국인에게는 고무(rubber) 같다며 낮게 평가된다. 물론 배고픈 근대를 겪으며 그 맛과 질감이 예전 같지 않아진 탓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떡을 쫄깃하다며 즐겨 먹는다. '그게 얼마나 맛있는데!'라고 아무리 외치고 답답해해도 그들의 입맛을 바꿀 수는 없다. 어렸을 적부터 스테이크와 감자칩을 먹으며 살아온 이들이다.


말콤 글래드웰이 TED강연에서 말했듯이 스파게티 소스에서도 사람들의 취향은 무수히 다양하다. 절대적인 스파게티 소스는 없고 상대적인 스파게티 소스만 있을 뿐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의 합의점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절대적이진 않다. 미인은 많지만, 절대적 미인은 없는 것과 같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예수 공자 부처 같다면 그것은 또 다른 지옥일 것이다. 음식도 그렇다. 어떤 절대적인 기준의 맛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잘나고 못나고 예쁘고 작고 큰 우리만큼 다양한 맛이 존재한다. 그것은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너와 나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국을 떠나 혼자 아픈 나는 오징어 볶음을 떠올렸다.


부산 살던 어린 시절, 일요일 점심에는 꼭 매콤한 오징어 볶음을 먹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 맛을 잊지 못해서 동생은 어머니께 자주 오징어 볶음을 해달라고 졸랐다. 내가 군대 가기 전 집에서 마지막으로 먹었던 음식이 오징어 볶음이었다. 인도 여행을 마치고 집에 와 처음 먹었던 음식 또한 오징어 볶음이었다. 나이가 들어 술을 마시고 속이 쓰린 일요일이 아침이 되면 어머니는 꼭 오징어 볶음을 했다. 이제 아들은 커서 해장이 필요한 나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어머니에게는 어린아이였고 그 아이가 좋아한 것은 오징어 볶음이었다



8세기부터 15세기까지 스페인을 점령했던 무어인들의 전통음식을 기반으로 한

런던 레스토랑<MORO>의 레시피를 담은 요리책 <MORO> 시리즈.

단순히 음식 뿐 아니라 음식에 담긴 문화와 가족, 지역사회의 정신까지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저 책을 읽으며 눈물이 났던 이유는 별 것 없는 요리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맵고 짜고 질긴 오징어 볶음을 먹던,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닌 누군가를 위한 것, 내가 한 것이 아닌 나를 위한 것, 객관이 아닌 주관, 절대적이기보단 상대적이며, 평가가 아닌 사랑이 있던 요리 때문이었다. 별 것 아닌 그것 때문이었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근처 한인식당을 찾았다. 그곳에서 오징어 볶음을 시켜 먹었다. 그 오징어 볶음은 철판 위에서 지글거렸다. 양파와 파, 오징어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흰 쌀밥 위에 양념을 비벼가며 오징어 볶음을 싸우듯 씹고 삼켰다. 조금씩 땀이 흘렀다. 매운 고춧가루와 마늘, 생강 따위가 빗어낸 극동의 매운맛이 혈관 속을 흐르며 몸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철판 위의 작은 빨간 흔적마저 싹싹 긁어낸 후 나는 다시 침대 위에 누웠다. 매운맛과 약 기운이 몸에 동시에 흘렀다. 나는 다시 땀으로 침대를 적시며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사람들과 만나 웃고 떠들었다. 그것은 꿈이었지만 꿈같지 않았다.


다음 날 나는 불 앞에 서서 냄비와 칼을 휘둘렀다. 혹시나 마늘 냄새가 난다고 비웃을까,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땀만 흘리며 하루를 보냈다.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 정동현 셰프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에서 '먹고(FOOD) 마시는(BEVERAGE)'일에 몰두하고 있는 셰프,
오늘도 지구촌의 핫한 먹거리를 맛보면서 혀를 단련 중!
저서로는 <셰프의 빨간 노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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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경복궁, 어디까지 가봤니?
3편. 경복궁 복원에 얽힌 이야기
김 석
#김석기자




꽃담과 굴뚝에 새겨 넣은 만수무강의 염원


경회루를 찍고 아미산을 지나 그저 물 흐르듯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주치게 되는 또 하나의 보물이 바로 자경전(慈慶殿) 꽃담입니다. 자경전은 고종의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헌종의 어머니 신정왕후 조대비에게 보답하기 위해 경복궁 중건 당시인 1888년에 흥선대원군이 지어준 건물이라고 하지요. 대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의미로 자경전 바깥의 서쪽 담장에 갖가지 꽃을 그려 넣었습니다. 담장 위에 펼쳐진 야외 꽃그림 전시회라고 할까요. 벽돌이 그려내는 기하학적인 무늬와 예쁜 꽃이 기가 막히게 어울려 있습니다. 호젓한 궁궐 산책길에 이만한 호사가 없었겠지요.





꽃담을 따라 걸으며 잠시 나만의 평화로운 시간을 갖고 난 뒤 이제 자경전 후원으로 향합니다. 이곳에도 아주 귀한 보물이 있습니다. 교태전과 마찬가지로 자경전 역시 대비가 잠을 자는 공간이었으니 당연히 굴뚝이 있는데요. 교태전 후원 굴뚝과 달리 자경전 굴뚝은 외벽 북쪽에 덧집처럼 붙어 있습니다. 언뜻 봐선 이게 굴뚝인가 싶지만 기와지붕 위에 연가가 한 줄로 늘어서 있는 게 보이시지요? 아궁이 숫자에 맞춰 모두 10개가 가지런하게 앉아 있네요. 꼭 전선 위의 참새처럼 말이에요. 하지만 이 독특한 형식의 굴뚝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건 뭐니 뭐니 해도 조선시대 궁궐 굴뚝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에 걸맞은 다채로운 무늬들입니다.





외벽의 중앙에는 가로로 긴 화면에 갖가지 자세와 모양을 한 십장생(十長生) 벽화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위와 아래, 양쪽 옆면에는 험상궂은 얼굴의 나티(짐승 모양을 한 귀신)와 박쥐, 학 등이 십장생을 호위하듯 자리하고 있어요. 마찬가지로 사악하고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는 의미와 오래 사시라는 염원을 담은 형상들이지요. 조선시대 궁궐 굴뚝의 대표 선수로 평가돼 굴뚝만 따로 보물 제810호로 지정돼 있을 정도에요. 귀한 유물인 만큼 온전하게 보존하기 위해 궁궐 안임에도 이례적으로 덧집까지 만들어 놓았더군요. 그래서인지 경복궁에 가면 일부러라도 꼭 한 번은 가봐야 할 것 같은 마음이 절로 일어납니다.



자경전을 지키는 해태상의 비밀


이렇게 귀한 보물들이 격을 높여준 덕분에 자경전은 건물 자체도 따로 보물 제809호로 지정돼 있습니다. 뒤를 보았으니 이번엔 앞을 봐야지요. 그런데 이게 뭔가요. 건물을 좀 더 자세히 보려고 다가갔더니 멀찍이 떨어져 있을 땐 잘 보이지 않던 돌조각 하나가 서 있군요. 생김새로 보아서는 영락없는 해태상입니다. 광화문 바깥으로 양옆에 떡 하니 앉아 있는 바로 그 해태상의 축소판이에요. 궁궐 건물 앞에 짐승의 돌조각을 세워둔 건 처음 봅니다. 물론 전례가 없다고 해서 꼭 그러지 말란 법도 없지만요. 아무튼 워낙 드문 경우라 이번에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해태라고 부르는 이 정체 모를 짐승은 예로부터 불을 막아주고 선악을 구별할 줄 아는 영험한 능력을 가진 상징이었답니다. 한자 이름은 해치(獬豸)입니다. 광화문 앞에 두 마리가 좌우로 짝을 지어 서 있으니 우리에게도 굉장히 친숙한 존재이지요. 선과 악을 가려낼 줄 안다는 상징성 덕분에 국회의사당과 검찰청사 앞에도 서 있습니다. 자경전 앞에 수호자처럼 자리하고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로 해석하면 될 겁니다. 문제는 이 해치상이 과연 언제 자경전 앞에 세워졌느냐 하는 점이에요. 정확한 기록은 없습니다만 다른 해치상이 만들어진 시기로 유추를 해볼 순 있겠지요.



(좌) 광화문 좌측 해치상
(우) 광화문 우측 해치상



광화문 앞 해치는 1864년 경복궁 중건 때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당시에 만들어진 해치상이 또 있어요. 경복궁 동남쪽 끝에 외로운 섬처럼 외따로 떨어져 있는 건물을 기억하시나요? 동십자각(東十字閣)이란 이름을 가진 이 건물은 궁궐을 지키는 파수꾼들이 근무하던 망루입니다. 역시 경복궁 중건 때 지어졌고요. 이곳만 아니라 서쪽에도 서십자각(西十字閣)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헐려 사라지고 지금은 동십자각만 덩그러니 도로 한가운데 남아 있지요.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동십자각을 찍은 사진을 보면 망루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 자경전의 것과 거의 똑같은 해치상이 보입니다.





해치가 만들어진 시기는 모두 고종 때입니다. 결국 자경전 앞 해치상 역시 고종 때 만들어진 걸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렇다면 동십자각 입구를 지키던 해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서십자각의 해치는 어딘가에 남아 있기는 한 걸까요. 일제강점기 흑백사진을 보면 당시에도 자경전 앞에 해치가 서 있는 게 보입니다. 그런데 이 녀석은 동십자각 해치와는 생김새와 자세가 조금 다르거든요. 혹시 서십자각이 헐리면서 그곳에 있던 해치가 자경전 앞으로 옮겨진 건 아닐까요. 그렇다면 동십자각 해치도 어딘가에 보관돼 있는 것은 아닐까요.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향원정 복원은 현재 진행 중!


이런저런 궁금증도 품어보면서 궁궐을 돌아본다면 그동안 미처 몰랐던 것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지요. 그래서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 모양입니다. 이제 경복궁 답사를 마무리해야 할 시간입니다. 경복궁 후원을 대표하는 명소를 꼽으라면 누가 뭐래도 아름다운 호수와 어우러진 향원정(香遠亭)이 아닐까요. 조선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 같았던 시절, 고종이 경복궁 후원에 건청궁(乾淸宮)을 짓고 들어가 살던 1867년에 인공 연못을 파고 그 안에 정자를 지었습니다. 그 역사적, 건축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아 보물 제1761호로 지정돼 있어요. 봄·여름·가을·겨울 어느 계절에도 찾아온 이들을 실망시키지 않는 호젓한 공간입니다.




연못 남쪽에 이편과 저편을 이어주는 나무다리가 놓여 있는데요. 취향교(醉香橋)라는 이름도 근사한 이 다리는 사실 엉뚱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원래 위치는 남쪽이 아니라 북쪽이에요. 건청궁(乾淸宮)에서 머물던 왕의 동선에 맞게 지은 거지요. 6.25 전쟁 당시 폭격에 다리가 부서진 뒤 1953년에 다시 지었다는데, 그때 왜 원래 자리에 다리를 놓지 않았을까요. 아무리 전쟁 직후라도 분명히 다리가 부서진 잔해가 남아 있었을 거고, 그렇다면 제자리를 찾는 건 일도 아니었을 텐데요. 실제로 일제강점기에 찍은 사진을 보면 향원정 북쪽 건청궁 앞으로 다리가 놓여 있음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지요. 게다가 원래 다리가 있던 자리에는 지금도 나무다리를 얹어 놓았던 기단석이 그대로 있습니다.



심지어 지금처럼 다리 바닥면이 평평한 게 아니라 무지개다리처럼 가운데 부분이 위로 불룩하니 솟아 있었던 것도 알 수 있지요. 기왕 국가가 그토록 귀하게 여겨 보물로 지정했다면 경복궁 중건 사업의 취지에 맞춰 다리 또한 원래 자리에 제대로 복원하는 게 옳습니다. 1953년에 새로 지은 뒤로 지금까지 반세기가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왜 저 모습으로 그냥 내버려 둔 걸까요. 지금 향원정에 가보면 연못 주변에 가림막이 빙 둘러 쳐져 있습니다. 낡은 향원정은 다 해체해서 말끔하게 보수하고, 취향교는 원래 위치에 복원하기로 한 거지요. 늦어도 한참 늦었습니다만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이젠 기다리는 일만 남았지요. 3년 뒤, 향원정이 어엿한 옛 모습으로 우리 곁에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에요.






김 석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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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환 작가의 DSLR 여행기
대영제국의 중심, 런던을 거닐다
이 환
#이환작가
이환 작가의 DSLR 여행기,no.1,THE UNITED KINGDOM,런던 편 Part.2
영국,정식명칭:그레이트 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위치:서유럽, 프랑스의 북서쪽,언어:여어,수도:런던(LONDON),인구:64,769,452명(2017년7월기준),종교:영국성공회 카톨릭 이슬람교 힌두교 THE UNITED KINGDOM,LONDON

UK LONDON PART 2.

영국의 중심, 런던의 일상을 거닐다
아직도 종이 신문을 읽는 이들이 많은
미디어의 천국
COUNTRY OF MEDIA

수많은 신문과 잡지가 가판대를 채우고 있다. 공원이든 카페든, 혹은 지하철이든 신문 읽는 이들 이 많다. 요즘엔 핸드폰을 보는 사람들이 늘고 있지만, 아직도 신문이나 책을 읽는 이들이 부러울 정도로 많다. 영국 신문들이 세계 신문시장의 모델이 되는 이유 중 하나는 변하는 독자들의 취향 에 맞춰 오랜 시간 동안 치열한 경쟁을 통해 변화를 거듭해 왔기 때문이다.

관광객이 사랑하는 명소, 코벤트 가든
COVENT GARDEN

코벤트 가든 역 광장. 가장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사랑하는 런던 명소다. 마술, 저글링, 버스커들의 놀라운 창작음악 등 기상천외한 퍼포먼스를 매일 감상할 수 있다. ‘코벤트 가든(Covent Garden)’이라는 이름 그대로 ‘수도원 채소밭’에서 출발했을 이곳은 1970년대 중반까지 청과시장 이었다고 한다.

[마이 페어 레이디(My Fair Lady, 1964)] 라는 뮤지컬 영화에서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이 주인공 일라이자 둘리틀(Eliza Doolittle)의 모습으로 꽃을 팔던 거리도 이곳이다. 가난하지만 말괄량이 여인 일라이자가 교양 있고 우아 한 신데렐라로 재탄생한다는 이야기처럼, 이곳에 오면 꿈과 희망이 꿈틀거린다!
작지만 자신이 가진 한 가지 재능에 몰두하며 탄성과 웃음을 선사하는
이들의 삶을 보며 여정의 고단함도 덜어낸다.
런던을 물 위로 거닐다,
리틀 베니스
LITTLE VENICE

리틀 베니스는 패딩턴 기차역(Paddington Station) 옆 두 개의 큰 물길이 만나는 곳이다. 런던 내의 하천은 거의가 인공 물길(Canal)이다. 매년 5월이면 리틀 베니스 물길 위는 울긋불긋 깃발과 문양과 꽃 장식으로 가득하다. 화려한 장식의 보트 수백여 척이 한데 모여 장관을 이룬다. 이곳에서는 주변 리젠트 파크(Regent Park)나 더 캠든 마켓(The Camden Market), 런던 동물원(London Zoo) 등을 쉬이 갈 수 있다. 고색창연한 런던을 물 위로 다니며 색다른 풍경을 맛볼 수 있다.

즐거운 거리 축제, 노팅힐 카니발
NOTTING HILL CARNIVAL

휴 그랜트(Hugh Grant)와 줄리아 로버츠(Julia Roberts)가 나오는 영화 [노팅힐(Notting Hill, 1999)]의 배경지역. 노팅힐 카니발은 서부 런던 지역에 주로 거주하던 아프리카계 캐리비언(Afro-Caribbean) 이민자들이 1964년부터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을 뽐내는 거리 축제다. 매년 8월 마지막 주 토요일부터 시작된다. 세계 음식들이 길거리를 가득 메우고, 다양한 음악과 함께 시름을 잊을 수 있다. 거리 축제 중 브라질 리우 카니발(Rio Carnival) 다음으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골동품 속 숨은 진주를 찾아라,
포토벨로 마켓
PORTOBELLO MARKET

노팅힐 바로 옆 골동품 가게. 전 세계 서화들과 동서양의 온갖 물건들이 즐비하다. 주말이면 거리에도 긴 노점이 펼쳐진다.

안전한 도시를 책임지다,
런던 경찰
LONDON POLICE

런던의 경찰은 친절한 이미지로 알려졌지만, 실제론 연속된 테러 때문인지 꽤 엄격하다. 런던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건 정복 경찰 외에 눈에 안 띄는 수많은 사복 경찰 때문이다. 시민 대부분은 경찰의 권위를 인정하며 범죄가 발생하면 놀랄 만큼 매우 빠르게 움직인다.

런던에는 지하철의 안전만 책임지는 교통 전문 경찰이 따로 있다.
약속과 만남의 광장, 피카딜리 서커스
PICCADILLY CIRCUS

피카딜리 서커스(Piccadilly Circus),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만나는 약속을 한다. 뉴욕의 타임스 스퀘어(Times Square)를 연상시킨다.

모던한 국제도시 런던과
세월을 보전하는 시민들
LONDON PEOPLE

뉴욕처럼 전 세계인들이 모여 사는 국제도시, 시내에서 길을 잃었을 때, 제대로 알려주는 이를 찾기 힘들다. 그 역시 관광객이거나 혹은 다니는 길만 알고 사는 런던 사람일 거다. 첨단 문명이 지배하는 현대에도 런던 사람들은 수백 년 긴 세월의 흔적들을 매우 아끼고 보존하는 데 지극정성이다. 백 년 넘는 펍이나 레스토랑도 많고, 도심 한가운데에도 리젠트 파크나 하이드 파크 등 크고 작은 공원 들이 잘 보존되어 시민들에게 위안을 준다.

런던 사람들은 특히 집을 사랑하고 정원을 사랑한다. 집안이나 정원 가꾸기에 관한 쇼핑몰, 그런 제품들을 소개하는 잡지나 TV프로그램도 많다.
성당 옆에는 어김없이 공동묘지가 있다. 노인들이 옛 사람들의 무덤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지하철이나 거리 어디를 가든 버스커들의 공연을 만날 수 있다.
Walk alone in London
is the greatest rest.
런던을 혼자 걷는 것은 가장 큰 휴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