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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화가들의 핫 플레이스 ‘인왕산’
2편. 역사와 예술을 품은 인왕산
김 석
#김석기자


500년 조선 왕조의 법궁(法宮)이었던 경복궁 위로 고개를 내민 작지만 늠름하기 이를 데 없는 산. 한양의 주산(主山)인 백악산(북악산)입니다. 해발고도가 342m에 불과해도 동쪽의 낙산(타락산), 서쪽의 인왕산, 남쪽의 남산(목멱산)과 함께 한양을 감싸 안은 내사산(內四山) 가운데 가장 높답니다. 적어도 조선 중기까지 한양을 대표하는 산의 지위를 누린 건 백악산이었지요.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송두리째 불에 타 폐허가 되자 상황이 달라집니다. 주인 없이 터만 남은 궁궐 뒤에 쓸쓸히 서 있던 백악 대신 인왕산의 존재가 부각되기 시작한 겁니다.


(좌) 정황, <청풍계>, 18~19세기, 모시에 엷은 채색, 22.7×16.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 장시흥, <창의문>, 18세기 후반, 종이에 엷은 채색, 19×15.5cm,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그런 시대 분위기에 정점을 찍은 인물이 바로 화성(畫聖 : 그림의 성인, 즉 매우 뛰어난 화가를 높여 이르는 말)으로 추앙받는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이었고요. 인왕산을 한양의 ‘랜드 마크’로 만든 것은 전적으로 겸재의 유산이었습니다. 인왕산 구석구석을 그림으로 남긴 것은 물론 인왕산 전경을 최초로 화폭에 아로새긴 화가 또한 겸재였으니까요. <인왕제색도> 덕분에 인왕산은 국보에 그려진 최초의 산이라는 영예를 누리게 되지요. ‘인왕산 화가’ 하면 겸재를 꼽는 데 아무도 이의를 달 사람이 없을 겁니다. 생전에도 그랬고 사후에도 겸재의 영향력은 대단했습니다.


겸재의 진경산수화풍이 크게 유행하면서 그를 따르고 본받은 화가들이 ‘겸재 화파’를 이룹니다. 겸재의 그림 솜씨를 물려받은 손자 정황(鄭榥, 1735∼?)의 <청풍계>는 겸재의 그림과 구별이 안 될 만큼 꼭 닮았습니다. 오른쪽 그림은 장시흥(張始興, ?~?)이라는 화가가 그린 <창의문>입니다. 청와대를 지나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을 지금은 자하문 고개라고 많이들 부르지요. 자하문은 창의문의 별칭이었습니다. 인왕산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린 능선은 창의문을 기점으로 백악산으로 다시 솟구쳐 오릅니다. 역시 낙관만 가리면 영락없는 겸재의 그림입니다.



인왕산 전경을 담은 또 하나의 그림


강희언, <인왕산도>, 종이에 엷은 채색, 36.6×53.7㎝, 개인 소장


겸재 이후 인왕산 전경을 그린 화가가 또 있습니다. 조선 후기의 중인 화가인 담졸 강희언(姜熙彦, 1738~?)입니다. 위 그림이 강희언의 <인왕산도>인데요. 한눈에 봐도 겸재의 <인왕제색도>와는 확연히 다른 화풍이 눈에 띄지요. 가장 도드라진 특징은 역시 인왕산의 당시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일 겁니다. 겸재의 인왕산은 실제 경치와 분명히 다릅니다. 실제와 똑같이 묘사한 것이 아니라 예술적 상상력을 발휘해 가장 인왕산다운 인왕산을 그렸으니까요. 반면 강희언의 그림을 보면 산세는 물론 인왕산을 끼고 이어진 한양도성과 산 아랫마을까지 꼼꼼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화면 오른쪽 위에서 사선으로 물결치듯 죽죽 뻗어 내려간 골짜기의 묘사에도 상당한 공을 들였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전통 한국화에선 볼 수 없었던 원근법을 적용했다는 점일 겁니다. 그림 오른쪽 상단 글씨에 “늦은 봄 도화동에 올라 인왕산을 바라보며(暮春登桃花洞 望仁王山)” 그렸다고 적혀 있습니다. 카메라를 들고 현장을 직접 찾아 나선 미술사학자 이태호 교수는 지금의 창의문 쪽 백악산 중턱에서 그린 것으로 봤어요. 500~600미터 떨어진 곳에서 볼 때 인왕산의 전모가 한눈에도 적절하게 포착된다는 겁니다. 이태호 교수는 “강희언 그림에서 현대적인 기품이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라 생각된다.”고 했습니다.


또 하나 특징적인 것은 화면 아래 흰 안개도 그렇지만 하늘을 마치 수채화 그리듯 시원하게 채색했다는 점이에요. 이 부분은 강희언의 직업과 연결해서 풀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강희언은 열일곱 나이에 천문 지리 분야인 음양과에 급제한 뒤 관상감에서 관원으로 일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기상청 직원 출신 화가라고 할까요. 자신보다 63살이나 많은 겸재와 이웃에 살며 그림을 배웠지만, 제자는 스승의 유산에 서양화풍을 과감하게 접목합니다. 그림 왼쪽 상단에 당시 예술계의 큰 어른이었던 표암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의 평가가 적혀 있습니다.



寫眞境者 每患而使乎也圖 而此幅 旣得十分逼眞 且不失畵家諸法
(진경을 그리는 자는 그림이 지도와 같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이 그림은 충분히 사실적이고 또한 화가들의 여러 화법을 잃지 않았다.)



겸재가 좋아 인왕산을 그리게 한 시인


겸재 정선과 같은 시대를 산 인물 가운데 권섭(權燮, 1671~1759)이란 분이 있습니다. 명문세가 출신임에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아 이름은 덜 알려졌지만, 우리 문학계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시인이지요. 지금까지 전해오는 한시만 3,000수가 넘는다고 하는데요. 권섭은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삼연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의 문하에서 화가인 겸재 정선과 가깝게 지냈습니다. 나이 차도 5살밖에 안 됐고요. 두 사람의 돈독한 친분을 보여주는 시 한 편이 남아 있습니다. 제목은 ‘정선에게(寄鄭元伯)’입니다.



2002년 서울옥션 미술품 경매에 출품된 《옥소북악십경》 (사진제공: 서울옥션)


권섭은 생전에 겸재의 그림을 무척 좋아했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꼭 갖고 싶은 겸재의 그림이 있으면 손자에게 같은 구도로 다시 그리게 해서 화첩으로 묶어 간직했을 정도니까요. 그 손자가 권신응(權信應, 1728~1786)이란 화가입니다. 2002년 서울옥션 미술품 경매에서 권섭의 작품으로 소개된 《옥소북악십경》이란 8폭짜리 화첩이 출품돼 관심을 모았는데요. 당연히 권섭이 직접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을 테고, 그렇다면 손자를 시켜서 그린 게 아닐까 합니다. 《옥소북악십경》을 자세히 검토한 미술평론가 최열 선생은 화풍으로 볼 때 권신응의 그림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인왕산이 등장합니다.


권신응, <청풍계>, 1753년, 종이에 엷은 채색, 41.7×25.7cm, 개인 소장


화면 맨 위에 가는 먹선 두어 개로 쓱쓱 그어나간 능선 위에 한자로 인왕산(仁王山) 세 글자가 또렷하게 적혀 있습니다. 산수화에다가 구체적인 지명을 써넣은 대표적인 화가가 겸재 정선이었지요. 다분히 겸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지도에 지명을 써넣은 당시의 경향을 흡수한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사정이야 어찌됐든 지도가 아닌 그림에 인왕산 이름이 적혀 있는 사례로는 극히 이례적이지요. 그 왼쪽 아래 커다란 바위에는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 적혀 있습니다. 지금도 인왕산에 가면 볼 수 있는 백세청풍 바위의 글자는 조선 중기의 문신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이 당대 최고의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글씨를 가져와 새겼습니다.


겸재 정선의 그림으로 더 유명한 인왕산 청풍계는 당시 세도정치의 주역이었던 안동 김씨 장동파, 즉 장동김씨의 땅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백세청풍 각자를 새긴 김상용은 인왕산 쪽에, 형보다 더 유명했던 동생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은 인왕산이 바라다보이는 백악산 쪽에 살았습니다.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간 김상헌은 고달픈 타향살이 속에서 인왕산을 그리워하는 시를 씁니다.



필운산(弼雲山)은 인왕산의 옛 이름입니다. 떠나온 집을 그리는 간절하고 애틋한 마음이 절절하게 전해지는 것만 같습니다. 아무튼, 당대 최고의 권문세가가 깃든 터전이었으니 도성 안에서 얼마나 풍광이 뛰어나고 아름다운 곳이었는지 알만하지요. 기왕 김상헌의 형 김상용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보다 앞선 시기에 청풍계를 그린 작품을 한 점 더 볼까요. 경기도 안산시에 있는 성호기념관에 <청풍계첩(靑楓契帖)>이란 주목할 만한 시화첩이 소장돼 있습니다. 광해군 12년인 1620년 봄에 인왕산 청풍계(靑楓溪) 태고정(太古亭)에서 이름난 문인 7명이 모여 봄을 즐기고 시를 지어 책으로 묶습니다. 이런 모임을 계회(契會)라고 하는데, 계회를 기념하는 그림 한 점이 함께 수록돼 있습니다.



가장 오래된 인왕산 그림을 만나다


성호기념관 소장 《청풍계첩》에 수록된 인왕산 청풍계 그림


왼쪽으로 인왕산 아래 개울이 흐르고 그 옆에 초가집이 한 채 고고하게 서 있지요. 김상용의 집 태고정(太古亭)입니다. 이곳에서 모임을 연 겁니다. 정작 집주인인 김상용은 다른 지방에서 벼슬을 살고 있어 모임에는 함께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당시 모임에 참석한 인물은 모두 7명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병조판서 이상의(李尙毅, 1560~1624)라는 분을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계회를 연 뒤 시와 그림을 두루마리에 묶어 참석자들이 한 부씩 나눠 가졌습니다. 이런 두루마리를 계축(契軸)이라고 합니다. 다른 두루마리는 모두 사라지고 이상의 소장본만 집안에 대대로 전해집니다.


(좌)백세청풍 각자 (우) 김상용 집터 표석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상의의 증손자가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 1681~1763)입니다. 이익은 ‘경서청풍계첩후(敬書淸楓溪帖後)’라는 글에서 두루마리의 그림이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1736년에 원본을 똑같이 그리게 한 뒤 원래 두루마리였던 것을 첩(帖), 그러니까 책의 형태로 바꿨다는 사실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결국 <청풍계첩>에 수록된 위의 그림은 17세기에 그려진 원본을 18세기에 다시 그린 거지요. 그렇다고 해도 이 그림의 가치가 폄하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인왕산 청풍계를 그린 유일한 작품일 뿐 아니라, 겸재 정선보다 시기적으로 무려 120년이나 앞서기 때문입니다. 청풍계 역시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렵습니다. 김상용의 집터였음을 알리는 표석이 서 있을 뿐이지요.


권신응, <옥류동>, 1753년, 종이에 엷은 채색, 41.7×25.7cm, 개인 소장


다시 권신응의 그림을 더 볼까요. 《옥소북악십경》 가운데 <옥류동>이란 작품에도 인왕산(仁王山) 세 글자가 선명합니다. 그 아래로 죽 내려오면 또 다른 세 글자가 보이는군요. 수성동(水聲洞)입니다. 겸재 정선의 그림 덕분에 옛 모습에 가깝게 복원된 바로 그 수성동 계곡입니다. 이렇게 그림으로 그려진 것만 봐도 당시에 얼마나 이름난 명승지였는지 알 수 있지요.


(좌)권신응, <삼계동>, 1753년, 종이에 엷은 채색, 41.7×25.7cm, 개인 소장

(우)권신응, <수문루>, 1753년, 종이에 엷은 채색, 41.7×25.7cm, 개인 소장


이 밖에도 《옥소북악십경》에는 크든 작든 인왕산이 등장하는 그림이 더 있습니다. 왼쪽 그림의 삼계동(三溪洞)은 지금의 부암동, 그러니까 서울미술관과 석파정이 있는 그 일대 땅의 옛 이름입니다. 오른쪽 그림은 <수문루(水門樓)>입니다. 오른쪽 아래로 보이는 문은 홍지문(弘智門)이고, 그 왼편에 수문 다섯 개가 나란한 구조물은 오간수문(五間水門)입니다. 문루 위에 적힌 세 글자는 한북문(漢北門)으로 홍지문의 다른 이름이고요. 조선시대에는 인왕산 능선을 타고 뻗은 한양도성이 부암동으로 내려와 홍지문까지 이어졌지요. 멀리 북한산 문수봉이 우람하고, 가깝게는 홍제천이 굽이굽이 흐르는 이곳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절경이었던 모양입니다. 화면 오른쪽으로 깎아지른 인왕산 바위가 흔적을 남겨 놓았습니다.



옥계시사와 임득명의 인왕산 그림


인왕산 기슭에 초가집을 짓고 살며 서당 훈장 노릇을 하던 천수경(千壽慶, 1758~1818)이란 분이 있습니다. 양반이 아닌 중인 출신으로 가난했지만 글 좋아하고 시를 무척 잘 썼다고 하지요. 조선의 문예군주로 불리는 정조가 서얼과 중인 출신 인재들을 대거 등용해 규장각에서 일하게 한 사실은 유명합니다. 조선 중앙관청의 하급관리인 경아전(京衙前), 특히 규장각 서리들이 주로 모여 살던 곳이 바로 인왕산 기슭의 옥계(玉溪), 즉 옥류동(玉流洞) 일대였어요. 천수경을 중심으로 시 짓고 풍류 즐기는 이들 13명이 의기투합해 1786년 7월 16일 시 모임을 결성합니다. 옥계시사(玉溪詩社)라는 이름으로 말이죠.


임득명, <등고상화>, 《옥계사수계첩》, 종이에 엷은 채색, 24.2×18.9㎝, 삼성출판박물관 소장


그 해에 옥계시사 동인들은 자신들의 시와 그림을 엮어 책을 꾸밉니다. 현재 삼성출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옥계사수계첩(玉溪社修禊帖)》인데요. 여기에 옥계시사 동인이었던 화가 임득명(林得明, 1767~?)의 그림 4점이 전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그림이 12폭이었다고 하는데 8점은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전해지는 그림 4점 가운데 인왕산 그림 한 점은 각별하게 주목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임득명의 <등고상화(登高賞華)>는 인왕산에서 즐기는 봄꽃놀이 장면을 그린 작품인데요. 갈지자(之)로 흘러내리는 능선을 따라 붉은 꽃이 활짝 피어나 보기 드문 진풍경을 연출하고 있지요. 인왕산의 봄을 대표하는 그림이라 해도 좋을 겁니다.


임득명이라는 화가가 남긴 흔적은 더 있습니다. 옥계시사 결성 5년 뒤인 1791년에 꾸며진 《옥계사시첩(玉溪社詩帖)》에 임득명의 그림 11점이 수록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지요. 이 시첩은 현재 영국 국립도서관(The British Library)에 소장돼 있습니다. 그동안 제대로 빛을 못 보다가 한국사학자 정옥자 교수가 《조선후기 중인문화연구》라는 책에 자세한 내용을 그림과 함께 소개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인왕산의 야경을 그린 단원 김홍도


김홍도, <송석원시사 야연도>, 1791년, 종이에 엷은 채색, 25.6×31.8cm, 한독의약박물관 소장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옥계사시첩(玉溪社詩帖)》이 만들어진 그해에 모임에 초청받은 전문 화가들이 또 다른 그림을 남겼다는 사실입니다. 그중 하나가 조선 최고의 화가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의 <송석원시사 야연도(松石園詩社夜宴圖)>입니다. 난데없이 왜 송석원시사로 이름이 바뀌었냐고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옥계시사 결성을 주도한 천수경은 나중에 자신의 호를 송석원(松石園), 송석도인(松石道人)으로 바꿉니다. 옥계시사와 송석원시사는 결국 같은 모임으로 시기에 따라 명칭이 달리 불린 것뿐입니다.


제목에서 보듯 이 작품은 밤 그림입니다. 조선 정조 때인 1791년 6월 15일 유두날 밤, 천수경의 집 송석원에서 열린 시 모임을 그린 작품이지요. 달빛 그윽한 밤에 당대의 시인과 문사 9명이 초가집 앞의 너른 뜨락에 앉아 풍류를 즐기고 있습니다. 문인들의 고상한 모임을 그린 이런 그림을 아회도(雅會圖), 또는 아집도(雅集圖)라고 부릅니다. 이 모임에 초청받은 김홍도가 그림을 그리고, 당대의 서예가였던 미산 마성린(1727~1798)이 시를 썼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대 최고의 화가에게 모임을 그리게 할 정도로 이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마성린이 쓴 시의 내용처럼 여름밤의 아스라한 분위기가 깊은 운치를 자아내지요. 김홍도가 46세에 그린 이 작품은 한껏 무르익은 그 시대의 문화적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입니다.


이인문, <송석원시회도>, 《송석원시사첩》, 1791년, 종이에 엷은 채색, 25.6×31.8cm, 개인 소장


여기에 김홍도의 그림과 짝을 이루는 작품이 한 점 더 있습니다. 김홍도와 동갑내기 화가인 이인문(李寅文, 1745~1821)의 <송석원시회도(松石園詩會圖)>입니다. 김홍도의 그림과 달리 이 작품은 낮 그림이에요. 화면 왼쪽 너럭바위 위에 두 무리가 옹기종기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이지요. 뒤로는 왼쪽에 인왕산, 오른쪽에 백악산이 솟아 있고 멀리 뒤로 삼각산이 보입니다. 김홍도와 단짝 친구였던 이인문 역시 모임에 초빙돼 그림을 그렸다는 걸 알 수 있지요. 낮과 밤에 모인 장소가 달랐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화폭을 잔잔하게 물들이고 있는 인왕산 자락의 그윽한 풍경이 참 아름답습니다. 사람들이 모인 배경에 치솟은 커다란 바위에는 송석원(松石園) 세 글자가 적혀 있습니다.


(좌)1950년대에 김영상이 찍은 송석원 각자 바위 (우)송석원 터 표석


송석원이 대체 어디에 있었는지 많은 이가 궁금증을 품고 찾아다녔지요. 하지만 어렴풋하게 추정만 할 뿐 정확한 위치는 아직까지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1950년대에 서울연구가 김영상 선생이 찍은 사진으로 남아 있는 ‘송석원’이란 바위 글자는 저 유명한 추사 김정희의 32세 때 글씨라고 합니다. 이 바위 역시 지금은 행방이 묘연합니다. 연구자들은 아마도 지금의 박노수미술관 근처 어딘가에 바위가 묻혀 있지 않을까 추측하기도 합니다. 인왕산 일대 답사에 나선 이들은 보통 박노수미술관 근처에서 송석원시사의 흔적을 어렴풋이나마 더듬어보곤 하지요. 과거의 자취는 사라지고 지금은 그 터로 추정되는 자리에 표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수많은 사연과 이야기를 품은 산


박제신, <서교전별>, 1826년, 종이에 엷은 채색, 25.3×31.8cm


옛 그림에서 인왕산의 흔적을 더듬어보는 여행도 이제 막바지에 다다랐습니다. 지난해 말, 국내의 한 고미술품 경매에 인왕산 그림이 한 점 나왔습니다. 소향관 박제신(朴齊臣, 1792~?)이란 생소한 화가가 그렸다는 <서교전별(西郊餞別)>이란 작품인데요. 경매사 측이 소개한 그림 내력을 보니, 조선 후기 실학자인 담헌 홍대용의 손자인 홍양후(洪良厚, 1800~1879)가 연행사의 일원으로 청나라에 갈 때 서대문 밖에서 배웅하는 모습을 그린 작품입니다. 그림 좌우 여백에 적혀 있는 글씨가 그런 내용을 알려주지요. 박제신은 정조 때 우의정을 지낸 박종악(朴宗岳, 1735~1795)의 손자였으니, 아버지 대에서 맺은 인연이 자손들에게까지 이어져 이런 그림이 탄생하지 않았나 하고 경매사 측은 설명합니다.


그림을 자세히 뜯어보면 역시나 겸재의 영향이 지대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겸재의 그림이 시대의 전범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던 겁니다. 하지만 조선 말기에 들어서면 인왕산 그림을 더는 보기 어렵게 됩니다. 조선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영조와 정조의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인왕산도 차츰 그 빛을 잃어갔습니다. 이 시점에서 옛 화가들이 그림 속에 남긴 인왕산의 흔적을 더듬어보는 까닭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그토록 가까운 곳에 산 좋고 물 좋은 곳이 있었으니 한양 최고의 명승으로 각광받았을 수밖에요. 500년 조선 역사에 그렇게도 많은 이야기와 사연을 품은 채 그림의 소재로, 배경으로 널리 사랑받은 산이 달리 또 있을까요.



김 석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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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미식,편식:정동현의 三食일기
워라밸의 시작, 요리하는 자유
정동현
#정동현


신세계그룹이 올해부터 대기업 최초로 주 35시간 근무제를 도입했다. 덕분에 업무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면 오후 다섯시다. 회사 문을 나서 지하철에 들어서면 쉽게 앉을 자리를 찾을 수 있다. 삶의 형태가 바뀐 것이다. 팀의 부제가 ‘2AM’, 팀 주제가로 ‘죽어도 못 보내’를 부르던 시절은 안녕이다. 아침 9시에 업무를 시작해 저녁이라고 부르기엔 부끄러운 오후 5시가 되면 일이 끝난다. 이른바 워라밸은 이렇게 이룩되었다. 정확한 시간에 일이 시작되고 끝난다.





지하철은 바흐의 평균율 연주처럼 규칙적인 리듬으로 역을 통과한다. 직장인이 받는 가장 큰 스트레스는 생활을 통제할 수 없는 것에서 온다고 한다. 자기 삶에 대한 결정권을 가질 때 계획을 세울 수 있다. 그것은 자율이라고 하고 또 다른 말로는 자유라고 한다. 이제 남는 시간에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다른 문제가 생겨난다. 선택의 문제다. 여기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자유에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할 수 있는 자유, 또 다른 하나는 하지 않을 자유다. 어떤 것을 할지 말지 결정해야 한다. 나는 말하고 싶다. 요리할 수 있는 자유를 선택하라.


생존의 필수 기술이었던 요리가 취미 생활이란 범주 안에 들어간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이제 요리는 당당한 취미 생활이고 또 당당한 특기인 시대다. 그 말은 요리 자체에 돈과 시간이 꽤 많이 든다는 이야기다. 한가지 밝힐 사실이 있다. 만약 절약하고 자 한다면 4인 가구 이상이 아니라면 외식을 하는 편이 훨씬 낫다. 비싼 식재료 값, 각종 기구, 수도광열비, 특히 시간을 돈으로 환산한다면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요리를 한다는 말은 구시대적인 발상이다. 대규모로 식재료를 구입하고 대량으로 조리해 단가를 낮춘 즉석식품을 먹는 편이 시간과 돈을 아끼고자 한다면 보다 현명한 선택이다.





그렇다면 요리를 해야 하는 이유가 뭘까? 쉽게 생각해보자 일 년에 몇 안 되는 캠핑과 같은 행사에 솜씨를 발휘할 수도 있다. 물론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다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무인도에 떨어진다거나 하는 위급한 상황에서 좋은 기술인 것도 맞다. 역시 이 또한 매우 드문 확률이다. 직업으로서 요리란 기술을 습득한다면 세계 어느 나라에 가서도 직업을 구할 수 있다. 세계 어느 나라에 가서든 하루 12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시달리며 그 나라 최저임금에 가까운 급여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 또한 확실하다. 하나하나 따지면 굳이 스스로 요리를 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남이 몰아주는 차가 제일 좋듯 남이 해주는 요리가 제일 맛있다는 말에 수긍이 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요리는 편리나 이익, 영리 같은 숫자 놀음과 큰 관련이 없다.



불, 요리 그리고 진화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한 책 요리본능(2011, 리처드 랭엄 지음, 조현욱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옛날 요리는 생존의 기술이었고 인류가 동물과 다른 존재가 된 전제조건이었다. 하버드 교수 랭엄 박사는 자신의 저서 ‘요리 본능’에서 현재 인류가 존재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요리라고 썼다. 요리함으로써 각종 식재료의 맛과 흡수율이 높아지고 그에 따라 가용 가능한 열량이 늘어나게 되어 뇌 체적 증가로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현재 각종 신념과 여러 필요 때문에 식재료 그대로 생식을 하는 집단의 경우 시간당 흡수 열량 자체가 요리해서 먹는 쪽에 비교해 현저히 낮으며 그에 따라 성장 장애, 영양결핍, 생리불순, 심지어 불임과 같은 여러 증상을 겪게 된다는 연구 결과도 많다. 거창하지만 요리란 인간이기 위한 하나의 조건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요리는 문화 그 자체이다. 문화가 발전함에 따라 요리에 각국의 기후, 문화, 역사, 경제 상황에 스며들었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오래 보관이 가능한 건조 파스타 위주의 단순한 식문화가 발달했고 중앙집권적인 정치 제도를 가졌으며 물산이 풍요로운 프랑스에서는 일찍이 왕족과 귀족들을 중심으로 호화로운 식문화가 탄생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요리로 귀결된다.


요리하며 느끼게 되는 것은 이 인간의 조건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말 자체는 거창하지만, 요리를 하는 순간 나는 제대로 된 인간이 되는 것 같다. 밥을 짓고 나물을 무치며 국을 끓일 때, 그 모든 준비 과정에서 고립된 현대인이 아니라 이 사회와 관계하는 인간임을 느낀다. 만약 밥을 짓는다면 어떤 쌀을 고를지, 그 쌀이 어떤 처리 과정을 거쳤는지, 쌀에 물을 얼마나 불릴지, 화력에 따라 쌀알의 분포에 따라, 기구에 따라, 어떻게 밥맛이 달라지는지 느끼게 된다. 그 과정이 반복되고 학습되면 요리란 행위로 이름 붙여진다. 시금치를 산다. 서양의 시금치와 동양 시금치의 차이에 대해서, 왜 소금물에 데쳐야 싱싱한 초록색이 살아나는가에 대해서, 왜 소금간을 할 때 설탕으로 살짝 밑간을 하는지, 왜 소금에서도 단맛이 나는지, 이런 사실에 대해 알게 된다. 그것이 요리다.





만약 밥 짓기 전문가라면 이보다 더욱 많은 설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쌀의 유래, 품종의 역사, 그리고 한국 농경 정책과 자본의 역할 등, 수많은 이야기가 밥 짓기 하나에 얽혀 있다. 요리를 하려면 장을 봐야 한다. 그때부터 무수한 선택이 기다리고 있다. 어떤 쌀을 살 것인가? 왜 이 쌀이어야 하는가? 그 선택을 하며 사회에 대한 이해가 넓어진다. 쌀이 어떤 가공을 거치고, 그 가공 방법에 있어 어떤 법제가 적용되는지. 그리고 문화적으로 왜 쌀이 우리에게 중요한지, 밥을 중심으로 한 한국인의 식문화는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등 그 끝이 없다. 실제로 요리에 들어가게 되면 또 다른 차원의 설명이 필요하다. 요리는 이제 화학이 된다. 물을 얼만큼 부어야 하고, 어떻게 불 조절을 해야 하는지는 삼투압과 열에너지, 비열 등과 관련이 있다. 어떤 팬이 잘 뜨거워지는가? 왜 팬은 무거워야 하는가? 비열이 높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요리를 하며 배운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 즉 요리를 통해 우리는 사회에 대한 감수성이 높아진다. 김밥을 한 번이라도 싸본 사람은 김밥 원가 운운하며 그 값이 비싸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김밥 하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수작업이 선행되어야 하는지 김밥을 싸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그 과정에 숙련되면 마지막에는 창조의 기쁨을 느낀다.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듯 재료들을 썰고 볶아 새로운 결과물을 만드는 기쁨이 찾아온다. 이윽고 그 결과물을 사람들과 나눌 때는, 먹을 것을 나누는 원초적인 사랑이 탄생한다.


느껴보라. 차가운 물이 손에 닿고 쌀알이 그 물속에서 움직이는 감촉을. 갓 지은 밥의 구수한 향내를. 요리는 귀찮고 해치워야 하는 숙제가 아니다. 인간이 세계와 소통하는 방법이요, 필수적인 과제다. 자신이 먹을 것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자립의 가장 기초다. 바로 주방에 가라. 칼을 들어라. 양파를 잘라라. 불 위에 팬을 올려라. 인간이란 동물로서, 한 사회와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한 남자와 여자로서, 삶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그 밸런스를 위해, 요리란 무게추를 삶에 올려놓자. 돈과 서류 속에서 존재하는 허깨비 같은 삶이 아니라 칼과 불, 피와 고기, 풀과 나무 속에 존재하는 인간이 되자. 그리고 깨닫게 된다. 행복이란 균형 속에 찾아온다는 것을. 균형이란 행복의 또 다른 이름이란 것을.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 정동현 셰프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에서 '먹고(FOOD) 마시는(BEVERAGE)'일에 몰두하고 있는 셰프,
오늘도 지구촌의 핫한 먹거리를 맛보면서 혀를 단련 중!
저서로는 <셰프의 빨간 노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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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g블로그 에디터가 전하는 이야기
봄, 어떤 시작을 준비하고 있나요?
SSG블로그


신세계백화점 본점에서 만나는 봄 VMD


총총총 바쁘게 움직이던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지고,
그저 스쳐 지나던 나무에 시선이 머뭅니다.

무거웠던 어깨가 가벼워져 조금은 힘이 나고,
길어진 해에 조금은 나른하기도 합니다.


춘삼월, 

봄 경치가 한참 무르익는 이 계절
우리 마음도 조금은 여유로워집니다.

그래서 계절도, 새 학기도 이때 시작하나 봅니다.

들뜬 마음에 새해 세웠던 계획들이 흐트러졌다면
숨 한 번 고르고 다시 시작해보세요.

멀게만 느껴졌던 봄이 이렇게 성큼 다가왔듯 

어렵게만 생각되는 목표지점에도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거예요.


SSG블로그도 춘삼월 봄꽃 같은 이야기로 여러분을 찾아가 볼까 합니다. 


날씨 언니가 알려주는 황사대비 피부관리법,

위풍당당 이마트 트레이더스의 성공비결,

봄날의 달달한 썸남썸녀 스토리,

맛있는 음식이 당기는 봄, 제주소주 푸른밤을 찾아 떠나는 서울 속 제주 맛집 여행,

새로운 계절, 꼭 마련해야 할 신세계그룹 화제의 상품을 소개하는 쓱-REVIEW까지!


살랑이는 봄의 바람과 햇살, 힘차게 돋아나는 새싹.

이 계절 하루하루를 여러분과 함께한다면  

그 무엇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는 이 시간이 더욱 따스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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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옛 그림에서 찾은 무술년 개 이야기
김 석
#김석기자


오수개의 이야기를 기억하시나요? 고려 시대에 전라북도 임실에 살던 김개인(金盖仁)이라는 사람이 개 한 마리를 길렀습니다. 어느 날 외출을 하는데 개도 함께 따라나섰지요. 주인이 술에 취해 길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불이 나서 점점 가까이 다가왔어요. 개가 아무리 짖어도 주인은 안 일어났고요. 그래서 개는 냇물에 몸을 담근 뒤 풀밭을 이리저리 굴러 불이 못 번지게 막습니다. 그러고는 기운이 다해 그만 죽고 말지요. 주인이 잠에서 깨어나 그 사실을 알고는 노래를 지어 기리고 고이 묻어줍니다. 그때 무덤에 꽂은 지팡이가 나무로 자라서 그 땅을 오수(獒樹)라고 했다지요. 이 이야기는 고려 후기의 문신 최자(崔滋, 1188∼1260)의 <보한집 補閑集>에 실려 후대에 널리 알려집니다.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


제 한 몸 바쳐 주인을 구한 충직한 개의 이야기는 그 뒤에도 조금씩 내용만 달리해서 여러 문헌을 통해 전해집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개만큼 인간과 가까운 동물이 또 있을까요. 개와 인간이 함께한 역사만도 2만 년이나 됐다고 하니까요. 고구려 고분 벽화인 무용총 수렵도는 사냥 장면을 그린 가장 오래된 그림입니다. 화면 맨 아래에 검은 사냥개가 말 탄 사냥꾼과 함께 역동적인 모습으로 먹잇감을 쫓고 있지요. 삼국시대에 이미 사냥을 위해 개를 길들였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좌) 김유신묘 십이지신상 부조

(중) 삼국시대 굽다리접시 (호림박물관 소장)

(우) 경복궁 근정전 월대 석견


2018년은 무술년(戊戌年) 개띠 해입니다. 무(戊)는 오방색 가운데 황색을 뜻하고, 술(戌)은 개를 의미하지요. 그래서 2018년을 황색 개띠 해라고 합니다. 개는 열두 가지 띠 동물 가운데 열한 번째 동물입니다. 방위로는 서북서 방향을 지키는 신이고, 시간으로는 오후 7~9시, 달로는 음력 9월을 담당하는 시간의 수호신이기도 하고요. 잘 짖는 본성으로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는 존재로서의 상징성이 오래전부터 옛 풍습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음을 알 수 있지요. 경복궁 근정전 월대 모서리에 석견(石犬)을 새긴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의 기행문 <춘성유기 春城遊記>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근정전 월대 모서리에는 암수 석견이 있는데, 암컷은 새끼 한 마리를 안고 있다. 무학대사는 이 석견은 남쪽 왜구를 향해 짖고 있는 것이고, 개가 늙으면 대를 이어 가라고 새끼를 표현해 넣었다고 했다.



이암, <화조구자도>, 16세기 중반, 종이에 채색, 86×44.9㎝, 보물 제1392호,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강아지 그림이 있습니다. 볕이 따사로운 봄날, 화면 가운데에 앉아 있는 검둥이 녀석이 하얀 꽃망울을 피워 올린 배나무 아래에서 고개를 돌려 동그랗게 뜬 눈으로 어딘가를 쳐다봅니다. 저 눈동자 표현 좀 보세요.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 뒤로 누렁이 한 마리가 두 발을 앙증맞게 모은 채 쿨쿨 낮잠을 자고 있군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평화롭게 잠든 저 표정, 참 귀엽습니다. 그런가 하면 호기심 가득한 흰둥이 녀석은 땅바닥에 철퍼덕 엎드린 채 앞발로 꾹 누른 방아깨비와 노느라 여념이 없네요.


그냥 보기만 좋은 그림이 아닙니다. 개는 털을 가진 동물이죠. 그런데 그림 속 강아지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털이 하나도 없습니다. 털을 묘사하는 대신 몸통을 먹으로 채웠어요. 이 그림은 조선 초기에 개와 매 그림으로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왕족 출신 화가 이암(李巖, 1507~1566)이란 분의 작품인데요. 먹을 이렇게 쓴 그림은 당시 중국에도 없었답니다. 전문가들이 극찬을 아끼지 않은 이유에요. <화조구자도>란 제목이 붙은 이 대단한 그림은 현재까지 확인된 걸로는 조선시대 최초의 개 그림으로 전합니다.


일본화가 소다츠의 개 그림


더 대단한 건 이암의 그림이 국내는 물론 당시 일본에까지 큰 영향을 줬다는 사실입니다. 위의 두 작품은 이암보다 100년쯤 뒤에 교토에서 활동한 일본화가 다와라야 소다츠(俵屋宗達)의 그림인데요. 털을 그리지 않고 먹으로 물들이듯 그렸지요. 일본에서 다라시고미(滲し込み)라 불리는 이 기법의 뿌리가 바로 조선의 이암이었던 겁니다. 그만큼 이암의 그림이 일찌감치 일본에 건너갔다는 뜻이고요. 심지어 17세기 일본에서 나온 <본조화사 本朝畵史>란 책에는 이암을 아예 일본 화가로 소개하기도 했답니다.



(좌) 이암, <모견도>, 16세기 중반, 종이에 옅은 채색, 73.5×42.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중),(우) 이암, <화조묘구도>, 16세기, 종이에 채색, 폭당 87×44.2cm,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개의 변함없는 충직함은 때론 배신을 밥 먹듯 해대는 인간들의 반면교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황해도 강령에서 전승되는 탈놀이인 <강령탈춤>의 한 대목에는 개도 사람에 해당하는 다섯 가지 윤리, 즉 오륜(五倫)을 두루 갖췄다는 내용이 나오는데요. 그럼에도 툭하면 욕설에 이름을 붙여 부르는 인간들이 야속할 만도 합니다. 게다가 위 그림에서도 보듯 전통적으로 개는 고양이와 앙숙이지요. 그런데 이것 때문에도 상대적으로 푸대접을 받아야 했으니 얼마나 억울했겠어요. 조선 후기 문장가 이옥(李鈺, 1760~1815)의 ‘고양이를 탄핵한다(劾猫)’는 재미있는 글에서 개는 자신의 억울한 처지를 다음과 같이 토로합니다.


신은 비록 미천하고 용렬하오나 그 지키는 바가 도둑입니다. 밥을 물에 말아 국을 타고, 한 노구솥 밥에 태반이 콩인 것으로 하루 두 번 배고픔을 면하는 것은 오로지 주인의 은혜입니다. 그리하며 밤이면 감히 눈을 붙이지 못하고 구멍마다 돌면서 경계하여 오로지 도둑을 잡으려는 것입니다. 저 울타리 밖의 도둑도 몰아 쫓아내고자 하는데 하물며 집안의 도둑이겠습니까? ... 이것이 신이 저것을 보면 반드시 쫓아 버리고 마주치면 물어뜯는 이유입니다. ... 어찌 주인께서는 무슨 사심이 그 사이에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십니까? ... 장차 고양이는 배가 불러 죽고 신은 가마솥에서 죽게 됨을 보게 될 것입니다.



(좌) 김두량, <긁는 개>, 조선 18세기, 종이에 먹, 23.1×26.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 이경윤, <화하소구>, 비단에 옅은 채색, 17.7×15.5cm, 간송미술관 소장


조선 전기에 이암이 있었다면 후기에도 개 그림으로 이름을 날린 또 한 명의 화가가 등장하는데요. 영조 때 직업 화가로 활약한 남리 김두량(金斗樑, 1696~1763)입니다. 위에 소개해드리는 <긁는 개>는 김두량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명품입니다. 나무 아래에서 개가 어디가 그렇게 간지러운지 몸을 잔뜩 구부린 채 몸을 긁적이고 있습니다. 털을 정말 한 올 한 올 정성 들여 사실적으로 그렸지요. 알쏭달쏭한 눈빛이며 입 모양까지 얼마나 생동감이 넘치는지 모릅니다. 특히 개의 몸체에서 보이는 생생한 입체감은 서양 화법을 수용한 결과로 보고 있습니다.


긁는 개라는 소재는 그 전에도 그려졌습니다. 오른쪽 작품은 조선 중기 문인화가 낙파 이경윤(李慶胤, 1545~1611)의 그림인데요. 역시 몸을 외로 꼰 채 몸을 긁고 있는 개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그려냈지요. 덥수룩한 털을 한 올 한 올 정성껏 묘사해 현장에서 보고 그린 듯 사실감이 도드라집니다. ‘나무 아래에서 가려운 곳을 긁고 있는 개’라는 구도는 김두량의 그림과 같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이게 그냥 보기 좋아서 그린 게 아닙니다. 여기에는 아주 깊은 뜻이 숨어 있거든요.


한자로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개는 戌(술), 나무는 樹(수)이지요. 戌은 지킬 무(戍)와 글자 모양이 비슷합니다. 지킬 무(戍)는 지킬 수(守)와 음이 같을 뿐 아니라 나무 수(樹)와도 음이 같습니다. 결국 나무 밑 개 그림에는 “지킨다”는 뜻이 담기게 됩니다. 긁는 개는 복을 긁어 들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둘을 종합하면 나무 밑 긁는 개는 집안을 지키고 복을 들여오는 좋은 의미의 그림인 거지요. 비슷한 구도의 그림이 반복해서 그려진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김두량, <삽살개>, 1743년, 종이에 옅은 채색, 35×45cm, 개인 소장


김두량의 또 다른 대표작으로 꼽히는 <삽살개>입니다. 삽살개를 한 번이라도 봤다면 이게 무슨 삽살개인가 싶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삽살개와는 생김새가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요. 이 그림이 중국, 일본을 거쳐서 1995년 7월 부산의 진화랑에서 처음 공개됐을 때도 논란이 엄청나게 뜨거웠다고 합니다. 급기야 MBC <PD수첩>에서까지 보도됐을 정도였다니까요. 논란의 출발점은 이 그림의 옛 소장자가 다른 화가들의 그림과 함께 묶은 화첩에다가 “내가 방(尨) 그림 한 본을 구했더니 필세가 발랄하고 묘하다”고 적어놓은 대목입니다. 방(尨)이 삽살개를 뜻하기 때문이었지요.


삽살개든 아니든 이 개는 처음부터 유명해질 팔자를 타고 난 것 같습니다. 그림 위쪽의 글씨를 쓴 이가 바로 당시 임금이었던 영조였으니까요. 실제로 영조는 김두량을 무척이나 아낀 걸로 알려져 있는데요. 남리(南里)라는 호를 직접 지어주고, 도화서 화원 최고위직인 별제까지 내려줍니다. 게다가 그림이 마음에 들었던지 직접 글씨까지 써줬지요.




(좌) 전(傳) 장조, <견도 犬圖>, 51.8×86.5cm,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우) 전(傳) 장조, <견도 犬圖>, 51.7×75.5cm,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기왕 영조 이야기가 나왔으니 혹시 왕이나 왕세자가 그린 개 그림은 없을까 궁금해집니다. 실제로 있어요. 우리가 흔히 사도세자로 알고 있는 장조(莊祖, 1735∼1762)가 그린 걸로 전해지는 개 그림 두 점입니다. 전문 화가의 솜씨는 아니지만, 붓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거침없이 쓱쓱 그려낸 것이 꽤나 매력적이지요. 어찌 보면 굉장히 현대적인 드로잉 작품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조선 최대의 문예 군주로 불리는 아들 정조의 재능은 아마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좌)작가 미상, <삽살개>, 18세기, 종이에 옅은 채색, 30.9×29.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중)장승업, <쌍구도>, 19세기, 종이에 옅은 채색, 68×68㎝,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우)어유봉, <삽살개>, 18세기, 종이에 옅은 채색, 63.5×37cm, 개인 소장


다시 삽살개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삽살개는 우리나라 토종으로 유명하지요. 순우리말로 ‘삽’은 쫓는다는 뜻이고 ‘살’은 귀신, 액운이란 뜻입니다. 이름 자체가 귀신 쫓는 개란 뜻이니, 그리 이름 지은 까닭도 자연스레 짐작이 됩니다. 삽살개 그림도 여러 폭이 남아 있는데요. 화가에 따라 삽살개를 어쩌면 저렇게 다르게 그릴 수 있을까요. 특히 어유봉의 <삽살개>는 과연 저 동물이 삽살개는커녕 개가 맞나 싶을 정도로 상상 속의 동물로 그려졌습니다. 귀신 물리치는 개의 특성을 부각시키려다 보니 닮게 그리기보다는 표현을 일부러 과장한 게 아닌가 여겨집니다.



(좌)김홍도, <경작도>, 1796년, 종이에 옅은 채색, 26.7×31.6cm, 보물 제782호,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우)김홍도, <점심>, 《단원풍속도첩》, 종이에 옅은 채색, 28×23.9cm, 보물 제527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럼에도 최고의 삽살개 그림을 딱 하나만 꼽으라면 저는 좌측의 작품을 고르겠습니다. 저 유명한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의 그림인데요. 삽살개가 아주 작게 그려져 있지요. 여기서 중요한 건 개의 뒷모습을 그렸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개 그림은 모두 앞모습이나 옆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김홍도는 풍속화에다가 지금껏 본 적 없는 개의 뒷모습을 그려놓았어요. 주인이 밭 가는 모습을 멀뚱히 서서 지켜보고 있는 거예요. 자세가 예술이에요. 저 강아지 한 마리 때문에 그림 전체가 확 살아나는 느낌이랄까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 최순우 선생도 이 그림에 반했던지 “밭갈이하는 주인의 얼굴을 멀찌감치서 바라보는 설멍한 삽살개의 뒷맵시”라는 기가 막힌 표현을 남깁니다.


김홍도의 유명한 그림 한 점을 더 볼까요. 보물로 지정된 《단원풍속도첩》 안에 있는 오른쪽 그림은 점심을 먹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개 한 마리가 앉아서 사람들 밥 먹는 걸 지켜보고 있습니다. 실로 절묘한 위치에 개를 그려 넣었어요. “게걸스럽게 밥을 먹는 인간들을 부러운 눈빛으로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개의 모습이 그림을 더욱 박진감 있게 한다.”는 유홍준 교수의 평가가 딱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만약 이 그림에 개가 없었다고 상상해 보세요. 저렇게 참 작게 그렸는데도 시각적인 효과는 정말 대단하지요. 역시 대가는 뭐가 달라도 다른가 봅니다.



김홍도, <모구양자도>, 18세기, 비단에 옅은 채색, 90.7×39.6cm, 간송미술관 소장


김홍도는 개를 등장시킨 그림을 여러 점 남겼는데요. 그중에서도 대표작이라 할 것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모구양자도>입니다. 어미와 새끼가 다정하게 어울려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지요. 여기서 다시 한번 김홍도라는 화가의 위대함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저 어미개의 당당하고 우아한 자태에서 보게 되는 건 바로 고결한 선비의 모습이에요. 개의 모습에다가 사람의 온기,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었다고 할까요. 그래서 어느 연구자는 김홍도만큼 세상을 따스한 시선으로 본 화가는 없다고 했습니다. 앞에서 보신 이암의 <모견도>와 함께 개 가족을 묘사한 가장 따스한 옛 그림으로 꼽을 만합니다.



작가 미상, <맹견도>, 19세기, 종이에 채색, 44.2×98.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한편 꽤 오랫동안 김홍도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진 그림도 한 점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맹견도>인데요. 1910년대에 서울 북촌의 어느 가정집에서 발견됐다고 합니다. 당시 미술계의 권위자였던 본 고희동, 안중식 등 화가들이 김홍도의 작품으로 결론을 냈어요. 그러곤 김홍도의 도장을 임의로 파서 찍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그림은 김홍도의 작품으로 알려졌지요. 하지만 나중에 가짜 도장이란 사실이 밝혀져 누가 그렸는지 확인되지 않은 작품으로 남게 됩니다.


우리나라 화가의 그림이 맞는지도 의문스럽습니다. 일단 쇠사슬에 묶인 채 어눌한 표정으로 엎드려 있는 저 개는 우리 토종개가 아닙니다. 게다가 개를 묘사한 방식이나 바닥을 포함한 배경에 표현된 원근법과 명암법 등은 우리 전통 기법이 아니라 전형적인 서양화법이거든요. 만일 이 그림이 우리 화가의 솜씨라면 조선 후기에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서양화법을 수용한 작품일 테고, 그게 아니면 서양화법을 익힌 청나라 화가의 그림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맹견이라기엔 너무도 해맑고 순하게 보이는 저 눈동자 때문에라도 오래 기억에 남을 그림이에요.


(좌) 신윤복, <나월불폐도>, 비단에 수묵, 25.3×16.0cm, 간송미술관 소장

(중) 김득신, <성하직구>, 종이에 옅은 채색, 22.4×27.0cm, 간송미술관 소장

(우) 신광현, <초구도>, 조선 19세기, 종이에 옅은 채색, 35.1×29.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름난 화가들의 개 그림 몇 점을 더 소개해 드립니다. 왼쪽은 조선 최고의 풍속화가로 이름을 날린 혜원 신윤복(申潤福, 1758~?)의 그림입니다. 상념에 잠긴 개의 자세와 표정이 예사롭지 않은 작품이에요. 그 옆에 긍재 김득신(金得臣, 1754∼1822)의 그림은 한여름에 삼대가 모여 짚신 삼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의 표정만 봐서는 한 여름 무더위가 그다지 실감 나지 않지요. 그런데 개의 표정을 한 번 보세요. 혀를 쭉 내민 채 헉헉대는 모습입니다. 표정이 정말 예술이에요. 이것 하나로 그림이 확 살아나지요.


애완견을 사람 못지않게 끔찍하게 아끼고 보살피는 반려동물의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어떤 개들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힘겹지요. 주인으로부터 버림받고 떠돌이개 신세가 되거나 먹을거리로 제 한 몸 바치는 일도 다반사입니다. 최근에는 대형견이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사례까지 잇따르기도 했고요. 그래도 부인할 수 없는 건 여전히 개는 인간과 살 부비며 함께 살아가는 고마운 존재라는 겁니다. 그래서인지 사람과 개가 교감하는 따뜻한 모습을 담은 마지막 그림, 신광현의 <초구도>에 더 눈길이 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김 석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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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쉐린 가이드를 넘어서, 진짜 맛집의 조건
정동현
#정동현


한국 사람은 질문 할 줄 몰라서 문제라고 한다. 질문을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구식 문화 때문이라는 주장과 질문을 할 정도로 심화된 지식이나 논리를 갖추지 못해서라고도 한다. 그러나 나는 질문을 꽤 자주 받는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갈만한 식당 좀 추천해주세요.”


장소도 사람도 특정짓지 않은 이런 질문을 받으면 돌에 맞은 것처럼 정신이 멍해진다. 혹은 이런 질문도 있다.


“추천 식당 리스트 좀 주세요.”


아예 리스트를 통째로 넘기라는 주문이다. 물론 나도 나만의 리스트가 있다. 새롭게 문을 연 식당, 혹은 가봄직 한 곳은 스크랩해놓고 갈 기회를 엿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 갈만하고 좋은 식당이 언제나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만약 요즘의 화두인 인공지능을 탑재하여 질문한 이의 상황과 처지를 ‘알아서’ 파악해 그가 가고 싶은 곳을 독심술의 대가처럼 말해주고 싶지만, 매번 내가 처하는 상황은 그렇지 않다. 이 정도는 약과다. 정말 난처한 질문은 이런 것이다.


“음식은 맛있었으면 좋겠고, 분위기도 좋아야지. 룸도 있고 말이야, 그런데 값이 좀 쌌으면 좋겠어. 장소는 강남이어야 하고, 회사에서 가까워야 돼. 집에 가기도 편해야지. 아, 그리고 요즘에 핫한 곳 없나?”


청순하지만 섹시하고 돈이 많지만 검소하며 클래식하지만 모던한 듯한 이 질문은 사람을 미궁에 빠뜨린다. 과연 이 사람이 가고 싶은 식당은 어느 곳일까?


이런 질문을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받았던 모양이다. 근래 신문 지상에서 보이는 문장들은 다음과 같다.


“미식의 기준이 열렸다. 한국의 식당이 국제적인 명성을 날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세계 유수의 레스토랑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외국 관광객들에게 제대로 된 레스토랑 가이드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



미쉐린 가이드 서울(THE MICHELIN GUIDE SEOUL)은 미쉐린 가이드 글로벌 컬렉션의 28번째 가이드 북이다.



화려한 형용사로 장식된 문장들을 보면 과연 나라의 국격이 드높아진 것만 같다. 레스토랑에 별을 붙여주는 프랑스 발(發) 미쉐린 가이드 이야기다. 1900년 창간한 미쉐린 가이드는 타이어 회사에서 판촉물로 만든 것이 그 시작이다. 자동차가 막 보급되던 때, 자동차를 가지고 할 수 있는 레저 활동을 소개하기 위해 갈만한 레스토랑을 추린 것이 좋은 반응을 받았고 그것에 부응해 기준을 세우고 지역을 넓혀 나갔다. 애초에 미식은 돈과 권력을 먹이로 자라는 꽃과 같다. 지중해와 대서양이 위아래로, 내륙에는 드넓은 평지에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를 바탕으로 사시사철 각양각색의 물산이 넘쳐나는 프랑스는 미식이 자라나기에 가장 걸맞는 입지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중앙 집권 왕정을 구축하며 그 물산과 사람, 곧 기술이 한 곳에 모여 사치스럽고 그만큼 고급스러운 음식문화가 탄생하게 된다. 저 반대편의 중국 역시 마찬가지다. 반면 이탈리아는 제대로 된 중앙 권력이 탄생한 것이 20세기 초였다. 지금 이탈리아의 식문화라는 것이 지방 중심의 토속적이고 단순한 음식이 대다수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미식 가이드는 미식이 소수의 왕족과 귀족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대중이 그 향유의 주체가 되면서 나타났다. 미쉐린 가이드가 그랬고 미국의 변호사가 만든 자갓 가이드가 그랬다. 새롭게 등장한 정치, 산업 엘리트들과 그들을 닮고 싶어 하는 대중이 미식 가이드의 주요 독자였다. 웬만한 여유가 있지 않고서는 미쉐린 가이드에서 논하는 3스타, 즉 그 식당에 가기 위해 그 식당이 있는 나라에 여행할 수 없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화제거리를 찾는 신문을 비롯한 대중 매체는 날로 영향력이 커져가는 미식 가이드의 향방에 대해 기사를 썼다. 미식 가이드는 근대가 발현되고 본격적인 자본주의 시대가 열리면서 매식(買食)이 하나의 문화 활동으로 자리 잡음에 따라 발생한 일종의 사회현상인 것이다. 최소한 최근 90년대까지는 그랬다.





미쉐린 가이드가 유럽을 벗어나 미국과 일본에 상륙한 사건은 그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반면 쇠퇴를 알리는 징조이기도 했다. 프랑스에 본진을 둔 미쉐린 가이드가 타 국가로 상륙할 때마다 해당 국가의 매체는 언제나 ‘우리나라의 음식이 제대로 평가받을 기회’이자 ‘세계에 널리 알려질 수 있는 전기’라는 미사여구를 늘어놓았다. 미쉐린 가이드의 인지도와 영향력에 힘입어 그런 효과가 없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관광객들은 허접한 가이드북과 접근하기 어려운 현지 맛집들을 미쉐린 가이드를 통해 소개받았다. 그렇게 세계만방에 미쉐린 가이드가 퍼져 나갈수록 미쉐린 가이드의 진정성과 신뢰도는 하락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제아무리 미쉐린 가이드라도 타지의 맛집을 모두 알 수 없고, 또 프랑스 음식이 아닌 현지 음식에 대한 이해도 완벽히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같은 그 별을 주는 기준이 유럽 바깥으로 나갈수록 관대해지고 그 기준 역시 논란이 되었다. 미쉐린 가이드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정부의 홍보비 지원을 받고 한국에 온 미쉐린 가이드는 첫해부터 선정 기준에 논란을 일으켰고 두 번째 해가 되었을 때는 소수의 관심만을 받았다.



미쉐린 가이드는 이제 앱으로도 여행과 미식정보를 소개한다.



이제 사람들은 맛집에 대한 절대적 기준을 논하거나 가이드북을 탐독하지 않는다. 대신 손쉽게 인터넷 검색을 하고 텔레비전 방송 맛집 리스트를 훑어본다. 허위 정보와 별점이 난무하고 그 틈에서 제대로 된 집을 찾기 위해 시간과 돈을 써버리며 ‘맛집이란 집치고 맛있는 집을 못 봤다’라고 불평을 한다. 신문과 방송, 가이드북을 불신한 사람들은 자신만의 리스트를 만들어 SNS를 통해 공유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맛집의 민주화’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리스트는 넘쳐난다. 하지만 그 리스트를 맥락에 따라 해석하고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식사라는 행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자신이 가지려고 하는 그 식사가 어떤 의미인지, 어떤 자리인지 알고 그 식당에 들어서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더불어 식사하는 상대방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한다.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식당과의 관계도 이 변수 속에 들어간다. 오랫동안 왕래하며 식당 주인과 안면을 트고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만의 장소를 만들 때, 그 장소를 사람들과 나눌 때, 그리고 그 사람들과 장소에서 시간 속에 더 깊은 의미를 만들 때, 우리는 유행에 휩쓸려 채집하듯 맛집을 다닐 때 느껴지는 정체 모를 허무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맛이란 미뢰에서 느껴지는 맛 분자의 총합이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관계하는 양상이며 이야기이고 또 때로는 사람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그 사람이 다니는 식당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준다.


주관 없이 남이 좋다는 곳에 철새처럼 부유하며 취향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 오로지 사람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식당들을 소모해버리는 매체. 그 사이에서 얻어맞은 듯 피로해지면 나는 늘 가던 집으로 발길을 돌린다. 익숙한 냄새, 익숙한 사람들, 와인이 익듯 조금씩 변해가는 분위기, 그 사이에서 나는 평화롭게 식사를 한다. 그곳은 오글거리는 ‘오빠 맛집’도 아니고 거창한 ‘몇 대 천황’도 아니다. 그저 나의 오래된 단골집일 뿐이다.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 정동현 셰프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에서 '먹고(FOOD) 마시는(BEVERAGE)'일에 몰두하고 있는 셰프,
오늘도 지구촌의 핫한 먹거리를 맛보면서 혀를 단련 중!
저서로는 <셰프의 빨간 노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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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환 작가의 DSLR 여행기
1년 내내 무료하지 않은 도시, 런던 이야기
이 환
#이환작가
이환 작가의 DSLR 여행기,no.3,THE UNITED KINGDOM,런던 편 Part.3
영국,정식명칭:그레이트 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위치:서유럽, 프랑스의 북서쪽,언어:여어,수도:런던(LONDON),인구:64,769,452명(2017년7월기준),종교:영국성공회 카톨릭 이슬람교 힌두교 THE UNITED KINGDOM,LONDON

UK LONDON PART 3

매일매일이 새로운 런던 라이프 매일매일이 새로운
런던 라이프

1년 내내 무료하지 않은 도시, 런던! 매일같이 펼쳐지는 축제와 공연, 이벤트로 지루할 틈이 없다. 이야깃거리도 끊이지 않는다. 셰익스피어의 공연장, 셜록 홈즈와 해리포터의 고향도 바로 이곳이다. 또한, 사람들이 열광하는 스포츠, 현대 민주주의의 기반이 된 정치실험과 전통들도 이곳에서 시작됐다. 오늘날에는 거대한 이민자 집단이 이 도시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뉴욕처럼 다양한 문화를 가진 민족이 한데 모여 살아가는 또 하나의 용광로(Melting Pot)를 형성하고 있다.

1년 내내 무료하지 않은 도시, 런던!
매일같이 펼쳐지는 축제와 공연, 이벤트로 지루할 틈이 없다. 이야깃거리도 끊이지 않는다. 셰익스피어의 공연장, 셜록 홈즈와 해리포터의 고향도 바로 이곳이다. 또한, 사람들이 열광하는 스포츠, 현대 민주주의의 기반이 된 정치실험과 전통들도 이곳에서 시작됐다. 오늘날에는 거대한 이민자 집단이 이 도시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뉴욕처럼 다양한 문화를 가진 민족이 한데 모여 살아가는 또 하나의 용광로(Melting Pot)를 형성하고 있다.

런던의 중심지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의사당 앞은 전 세계 관광객들의 필수 방문지다.
런던의 전통이 깃들다, 로드 메이어 쇼
LORD MAYOR’S SHOW

런던 중심부 금융 지역에 위치한 구시가지(The City of London)에는 특별한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이 지역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런던의 시장(市長)과는 별도로, 정치적 권력이 부여되지 않은 상징적 명예 시장이 존재한다. 과거 대영제국의 흔적이다. 매년 11월, 800년 역사를 가진 런던 최대의 축제가 펼쳐진다. 바로 로드 메이어 쇼(Lord Mayor’s Show, 런던 시장의 날)다.

런던 중심부 금융 지역에 위치한 구시가지(The City of London)에는 특별한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이 지역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런던의 시장(市長)과는 별도로, 정치적 권력이 부여되지 않은 상징적 명예 시장이 존재한다. 과거 대영제국의 흔적이다. 매년 11월, 800년 역사를 가진 런던 최대의 축제가 펼쳐진다. 바로 로드 메이어 쇼(Lord Mayor’s Show, 런던 시장의 날)다.

과거 런던의 시장이 국왕에게 충성을 다짐하던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로드 메이어 쇼'가 되었다. 전통 복장을 한 명예시장이 탄 금마차가 길드홀에서 출발하여 세인트폴을 걸쳐 왕립 재판소로 간다. 웅장하고도 화려한 장관을 뽐내는 로드 메이어 쇼는 런던의 가장 유명하고 의미 있는 행사 중 하나다.

신나는 코스튬 퍼레이드, 할로윈 데이의 풍경
HALLOWEEN DAY

할로윈(Halloween)은 매년 10월 31일, 그리스도교 축일인 만성절(萬聖節) 전날에 열리는 축제다.

할로윈 호박은 '구두쇠 영감 잭'이라는 아일랜드의 민담에서 유래된 것이다.
잭이 불덩이를 호박 속에 담아 돌아다니는 모습이 이어져 오늘날 할로윈의 대표 상징이 되었다.
할로윈 호박은 '구두쇠 영감 잭'이라는 아일랜드의 민담에서 유래된 것이다. 잭이 불덩이를 호박 속에 담아 돌아다니는 모습이 이어져 오늘날 할로윈의 대표 상징이 되었다.

시내 거리는 기괴한 분장과 함께 독특한 의상을 입은 어린이들과 청년들로 넘쳐난다. 이제는 우리에게도 할로윈 분장 문화는 어느 정도 익숙하다. 이는 악령에게 해를 입지 않기 위해 비슷한 모습으로 분장했던 고대 켈트인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런던, 낭만과 문화의 향연을 마주하다
CULTURE & PERFORMANCE OF LONDON CULTURE
& PERFORMANCE OF LONDON

런던은 현지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한데 어우러진 도시다. 런던 사람들을 구경하기에 최적의 장소는 코벤트 가든(Covent Garden)이다. 마임 연기, 마술쇼, 버스킹 등의 갖가지 공연이 온 거리에 넘친다.

거리 곳곳에서 사람들의 다채로운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
워털루역 지하 보도 공터에서 보드를 즐기는 런던 보이
워털루역 지하 보도 공터에서 보드를 즐기는 런던 보이

런던 방문에서 빼먹을 수 없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문화탐방이다. 런던의 웨스트엔드(West End)는 뉴욕의 브로드웨이(Broadway) 못지않은 공연 문화의 천국이다. 레미제라블, 오페라의 유령, 라이언 킹 등 수많은 오리지널 뮤지컬 공연을 관람하는 짜릿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영어공연이니 미리 스토리를 알고 들어가는 게 도움이 된다.

런던 방문에서 빼먹을 수 없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문화탐방이다. 런던의 웨스트엔드(West End)는 뉴욕의 브로드웨이(Broadway) 못지않은 공연 문화의 천국이다. 레미제라블, 오페라의 유령, 라이언 킹 등 수많은 오리지널 뮤지컬 공연을 관람하는 짜릿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영어공연이니 미리 스토리를 알고 들어가는 게 도움이 된다.

티켓을 싸게 사려면 레스터 스퀘어로 가자. 일반 가격의 반값에 티켓을 살 수 있다. 자유 여행자라면 극장 앞에서 무작정 기다려보자. 남은 좌석을 저렴하게 구할 수도 있다.

런던에서는 공원을 거닐자!
런던에서는 공원을 거닐자!
PARK OF LONDON

런던에서 가장 놀란 것 중 하나가 바로 무수히 많은 공원이다. 산업혁명의 발상지인 영국의 수도에서 이렇게 잘 보존된 자연환경을 마주할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런 공원이 일상 속 평범한 풍경이라니, 런던 사람들이 부러울 정도다. 런던의 1인당 공원면적은 33.4㎡로 서울의 16.2㎡에 비해 두 배가 넘는다. 대도시 1인당 공원면적으로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리치몬드 공원(Richmond Park)

런던 남부 리치몬드 공원의 풍경. 수많은 사슴이 자유로이 노닐고, 승마를 즐기는 시민들을 만날 수 있다. 약 900만㎡의 크기로 14세기 왕이 살았던 곳이다.

하이드 파크 (Hyde Park)

버킹엄 궁 옆 하이드 파크.
런던에서 가장 큰 호수공원이다. 헨리 8세 시대에는 사냥터와 군대 훈련장이었으나 나중에 시민들의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하이드 파크 (Hyde Park)

버킹엄궁 옆 하이드 파크.
런던에서 가장 큰 호수공원이다. 헨리 8세 시대에는 사냥터와 군대 훈련장이었으나 나중에 시민들의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햄스테드 히스(Hampstead heath) 언덕

공원 주변에 고급 주택이 몰려 있어 ‘런던의 베벌리 힐스(Beverly Hills)’로 불린다. 런던은 평지가 대부분이라 높은 산이 없고 언덕 정도가 전부다.

햄스테드 히스(Hampstead heath) 언덕

공원 주변에 고급 주택이 몰려 있어 ‘런던의 베벌리 힐스(Beverly Hills)’로 불린다. 런던은 평지가 대부분이라 높은 산이 없고 언덕 정도가 전부다.

큐 가든 (Kew Garden)

미소년 나르시소스는 연못에 비친 자기 얼굴에 반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결국엔 죽게 되는데, 그 자리에 노란 수선화가 피었다. 나르시시즘 신화다. 노란 수선화가 아름답게 수 놓아진 이곳은 런던 서남부의 교외에 위치한 왕립 정원 ‘큐가든’이다. '큐가든'은 수 세기(1759년 개원)에 걸쳐 전 세계의 식물들을 한곳에 옮겨 놓은 최초의 식물 도서관이자 영국식 정원의 모델이다. 뉴욕타임스도 지난 1,000년 동안 가장 우수한 발명품 중 하나로 이 정원을 꼽았다.

새로운 사람들이 만드는 새로운 런던
NEW PEOPLE OF LONDON

본디 영국인 자체가 단일 민족은 아니다. 과거에는 북유럽과 프랑스에서 건너온 민족들이 영국의 주축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수많은 이민자가 그 자리를 채워가고 있다. 런던은 오래전부터 이민자를 받아들였다. 영국 인구의 12%가 런던에 살고, 이민자 중 40%가 런던에 산다. 오늘날 전 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이 런던으로 흘러들어오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런던 시내에서 길을 물으면 잘 모른다는 대답이 많다. 이민자와 관광객이 많기 때문이다.

런던 트라팔가 광장 (Trafalgar Square)에서 인도의 전통 축제인 디왈리 축제를 볼 수 있다. 디왈리는 힌두 달력 여덟 번째 달(Kārtika, 카르티카) 초승달이 뜨는 날, 집마다 작은 등불을 밝히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힌두교 전통 축제이다.

빛나는 런던의 밤
THE NIGHT OF LONDON

런던의 밤은 언제나 아름답다. 자가용을 가지고 시내로 들어오면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도심통행세’를 일찍이 시행했지만, 여느 도시처럼 많은 차량들로 붐빈다.

빨간색 이층버스(더블데크)는 영국의 명물이자 상징이다.
템즈강 하류의 런던 브릿지 (London Bridge)는 8년 동안 건설해 1894년 완공한 빅토리아풍 다리다.
큰 배가 지나갈 때 1,000톤이 넘는 다리의 중앙이 수압으로 들어 올려진다.
템즈강 하류의 런던 브릿지 (London Bridge)는
8년 동안 건설해 1894년 완공한 빅토리아풍 다리다.
큰 배가 지나갈 때 1,000톤이 넘는 다리의 중앙이 수압으로 들어 올려진다.
시내 중심가 쇼핑몰의 마네킹 광고. 런던의 다양한 인간 군상들 외에 또 하나의 신인류를 떠올리게 한다.
시내 중심가 쇼핑몰의 마네킹 광고.
런던의 다양한 인간 군상들 외에 또 하나의 신인류를 떠올리게 한다.
굿바이, 런던
GOOD BYE, LONDON.

지구상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흥미로운 도시를 꼽자면 단연 런던이다.

런던은 뉴욕, 도쿄보다 더 많은 스토리를 가진 도시다. 이는 런던의 미디어가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달한 배경이기도 하다. 또, 21세기에 여전히 왕이 존재하는 전통 있는 도시이기도 하면서, 많은 예술 천재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유행을 창조하는 역동적인 곳이다. 앞으로도 런던은 수려한 전통 위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하는 도시로 남을 것이다.

런던은 뉴욕, 도쿄보다 더 많은 스토리를 가진 도시다. 이는 런던의 미디어가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달한 배경이기도 하다. 또, 21세기에 여전히 왕이 존재하는 전통 있는 도시이기도 하면서, 많은 예술 천재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유행을 창조하는 역동적인 곳이다.

앞으로도 런던은 수려한 전통 위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하는 도시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