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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미식,편식:정동현의 三食일기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음식?
정동현
#정동현




자정이었다. 옷에는 주방의 온갖 냄새가 배여 있었다. 이마에는 흐르다 말라버린 땀 줄기가 소금이 되어 떨어졌다. 눈은 따갑고 허리는 아팠다. 아침 9시부터 자정까지 허리를 숙이고 땀을 흘렸으며 두어 번 화장실에 갔다. 로켓을 쏘아 올리듯 초 단위로 몸을 움직였고 용광로에서 일하는 광부처럼 불꽃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재료들이 준비되면 큰 접시 위에 화가처럼 소스로 그림을 그렸고 외과 의사처럼 핀셋을 들고 꽃과 허브 등으로 음식을 장식했다. 그 후엔 유럽풍의 거만함을 지닌 웨이터가 접시를 손과 팔뚝으로 받쳐 들고 손님에게 가져갔다. 호주 멜버른의 한 주방, 그곳은 뜨겁고 바빴으며 맛에 있어서는 경건하고 또 무절제했다. 맛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했고 누구든 희생해야 했다. 나는 차라리 군대를 주방으로 왔으면 하는 한국 남자만이 가질 수 있는 생각을 하며 하루를 버텼다. 일과를 마치고 나면 주방 밖 홀로 나갈 수 있었다. 그곳에는 늦은 밤 여흥을 즐기고 있는 손님들이 있었다. 내가 만든 30달러짜리 접시를 앞에 둔 남녀는 갈색빛으로 물든 두꺼운 팔뚝과 가는 허리, 길고 날씬한 허벅지를 드러내놓고 서로를 응시했다.


나는 냄새나는 후드티와 밑창이 닳은 운동화를 신고 어두운 거리로 나갔다. 배가 고팠다. 하루종일 비싼 음식을 만드느라 물 외에는 어떤 것도 삼키지 못했다. 이런 밤 내가 향하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1달러짜리 조각 피자를 파는 피제리아, 혹은 편의점이었다. 피제리아에서는 나만큼 피곤해 보이는 직원이 말라빠진 피자를 골판지 위에 올려줬다. 나는 플라스틱을 갈아 만든 것 같이 이상한 밀가루 냄새가 나는 피자를 악어처럼 씹어먹었다. 피자가 질리면 편의점 차례였다. 반값으로 할인 판매를 하는 일본식 참치김밥과 더블초코 아이스크림을 한꺼번에 사곤 했다. 그 둘을 번갈아 가며 먹으면 하루종일 요리를 한답시고 몸을 쥐어 짜낸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 한심함은 김밥과 아이스크림의 조합이 맛있게 느껴질 때 더욱 심해졌다. 나는 그 시절 그 둘을 한 번도 남긴 적이 없다. 말라서 피 냄새가 나는 입속에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을 넣으면 온몸의 세포가 발광을 하며 아이스크림에 달려드는 것 같았다. 김의 감칠맛과 익숙한 통조림 참치의 짠맛이 혀에 닿으면 이 김밥 한 줄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음식이었다. 그 둘을 말끔히 해치운 뒤 씻고 홀로 침대에 누우면 이런 생각이 들곤 했다. 맛있다는 건 무엇일까?





강남에 가면 음식이 싱겁다. 강남 사람들이 짠 음식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강 이남으로 내려가면 짠맛에 대한 참을성이 왜 현저히 낮아질까? 아예 다른 인종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한강을 사이에 두고 기후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일까? 아니다. 단지 그들이 더욱 건강에 신경 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만 간이 강해도 심한 컴플레인이 들어온다.


“손님들 컴플레인이 워낙 많아서요.”


청담동에 문을 연 이탈리안 레스토랑은 마치 간이 되지 않은 설렁탕처럼 밍밍했다. 요리사가 내놓은 답은 '컴플레인' 때문이었다. 어떤 손님은 독을 맛본 것처럼 크게 화를 내기도 한다. 한국에서 여럿과 식사를 하면 십중팔구 누군가는 간을 가지고 불평을 하며 ‘짜다’ 타령을 한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제가 좀 싱겁게 먹거든요.”


이 말을 하는 사람의 표정에서 어떤 미안함도 쑥스러움도 엿볼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의 미각이 너무나 섬세하여 짠맛을 견딜 수 없음을 과시하는 거만한 뉘앙스가 스쳐 지나간다. 그렇다. 어느새 음식을 싱겁게 먹는 것이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나타내는 표식이 되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싱거운 음식이 건강하다는 고정관념이다. 세계에서 가장 음식을 짜게 먹는 나라는 일본이며 또 최고 장수국도 일본이다. 2001년도 통계에 따르면 일본은 인당 일일 12g의 염분을 섭취했다. WTO 권장섭취량은 5g이다. 그리고 일본 남성은 80.98세 여성은 87.14세의 평균 수명을 가진다. 정확히 말하면 염분 섭취량과 고혈압과의 상관관계도 뚜렷하지 않다. 무엇보다 고혈압 자체의 원인이 불분명하다. 무엇보다 염분, 즉 나트륨은 수용성이기 때문에 적정량을 초과하면 소변으로 배설된다. 하지만 사회적 통념상 염분은 악하고 최대한 줄여야 한다. 또 다른 이유는 짠맛이 강할수록 입맛이 저열하다는 인식이다. 간이 최대한 적게 되어야 재료 ‘본연의 맛’을 즐길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 생각을 거슬러 올라가면 본연의 맛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이를테면 김치 본연의 맛은 무엇인가? 소금도 고춧가루도 마늘도 최대한 적게 넣어야 배추 본연이 맛인가? 그렇다면 발효는 어느 정도 해야 하는가? 김치 중 왕 중의 왕은 발효를 최소한으로 한 겉절이인가? 물론 재료가 가진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이끌어내는 것이 요리의 최대 목적인 것은 맞다. 그러나 한국에서 통용되는 본연의 맛은 재료를 생식에 가깝게 소비해야 한다는 원리주의로 향한다. 음식의 염도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은 우리와 너희를 가르고 우열을 판단한다. 근래 한국에서 그 우열의 기준이 되는 음식이 하나 있다. 바로 냉면이다.




한국에서 냉면을 먹는다는 것은 일종의 문화적 체험이다. 냉면에 관한 글과 책은 매해 여름이 되면 선거철 정치인들의 공약처럼 쏟아져 나온다. 대부분 맥락은 다음과 같다. 냉면은 먹는 방법이 정해져 있고 어떤 이상향이 있는 음식이다. 이 방법을 지키지 못하면 문화인이 아니고 개화되어야 한다. 덕분에 남자가 여자를 가르치려 든다는 ‘맨스플레인’이란 단어를 변형해 ‘면스플레인’이란 말까지 생겨났다. 음식에 대해 논하고 평가한다는 것. 어찌 보면 올바른 현상이다. 사람은 자동차가 아닌데도 연비와 같은 가성비를 논하며 오로지 실질적 가치만을 이야기하던 세태보다는 낫다. 그럼에도 불편한 무언가가 있다. 음식을 즐기는 무엇이 아닌, 혹은 소중한 무엇이 아닌 자신을 뽐내고 과시할 수 있는 대상물로 대한다는 것이다.





음식은 살아가기 위한 필요조건이 되면서도 가장 큰 기쁨이 될 수 있다. 음식을 대한다는 것,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렵다. 늘 모순을 품는다. 즐겁고 싶지만 늘 즐거울 수 없다. 누군가에게는 지락의 쾌락이 누군가에게는 생명의 밧줄이 된다. 아직 한국에서 음식을 먹을 때 암과 건강을 동시에 거론하는 이유는 한국이 아직 선진국이 아님을, 즐기고 누리는 대상이 아니라 생명을 유지하는 생존재의 역할을 한다는 반증이다. 호주에서 요리사 생활을 할 때, 나에게 음식은 사치가 아니라 생존이었다. 그 맛없는 삼각김밥과 아이스크림을 동시에 해치울 정도로 허기진, 가난한 나였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음식이 풍족한 세상에 살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가장 부유한 강남에서 산다는 사람도 여전히, 생존에 대해 불안을 느끼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음식은 그리하여 불안의 증거다.


맛있다는 감정은 주관적인 감정이지만 동시에 객관적인 증상이다. 당신이 어떤 맛을 맛있다고 느끼는지, 혹은 이 사회가 어떤 맛을 지향하는지는 내가, 당신이, 그리고 이 나라가 어떤 상태인지 말해준다. 감각이 아니라 생존을 이야기할 때, 취향이 아니라 건강을 이야기할 때, 나는 우리 앞에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그 길 위에는 짜고 달고 시고 매운 감각들이 놓여 있을 것이다. 그 감각들을 논할 때, 감각의 개별성을 깨달을 때, 우리는 음식이 무엇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될 것이다. 달고 짜고 시고 매운 인생의 무엇, 사랑의 무엇으로.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 정동현 셰프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에서 '먹고(FOOD) 마시는(BEVERAGE)'일에 몰두하고 있는 셰프,
오늘도 지구촌의 핫한 먹거리를 맛보면서 혀를 단련 중!
저서로는 <셰프의 빨간 노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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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
당신에게 '여행'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신세계백화점
#신세계백화점


어느 날 갑자기,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먼 북소리가 있다. 존재의 심연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이끌려 하루키는 그렇게 길을 떠났다. 터키의 옛 노래처럼, 모든 것을 뒤에 남기고.


그리스 미코노스 섬



일상에 얽매여 있는 사이에,
긴장감도 없이 질질 나이를 먹어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러고 있는 사이에
무언가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오후의 햇살은 눈부시게 부서지고 태평스레 떠가는 구름은 새하얗다. 잠시 책상에 쌓인 일감에서 고개를 들어 피로한 어깨를 주무르며 창문 밖을 바라보노라면, 그때까지 인식하지 못했던 거리의 소음이 잔잔하게 머릿속으로 파고 들어온다.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들고 가방끈을 추스르며 어디론가 바삐 오가는 사람들, 빌딩 바깥 한구석에 삼삼오오 모여 서서 잠시 얘기를 나누는 직장인들, 늘 한결같은 일상이 도처에 펼쳐져 있다. 생각을 멈추고 멍하니 눈앞에 스치는 풍경을 바라보는 동안, 불현듯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아무 생각 없이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싶은 생각이 밀려온다. 그곳이 어디가 되었든, 지친 영혼이 피로해진 날개를 잠시 접을 수 있는 곳이라면.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글을 쓰다



<먼 북소리>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1986년 가을부터 약 3년간, 하루키 최고의 베스트셀러 가 된 <노르웨이의 숲>과 장편소설 <댄스 댄스 댄스>를 쓰기 위해 남유럽에 머무르며 당시 생활에 대한 단상들을 그려낸 수필집이다.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의 생활이 주된 내용을 이루지만 그 흔한 멋들어진 유적 사진은 한 장도 없으므로, 관광지로 이름난 도시들을 순례하거나 명승고적을 답사하는 내용을 기대했다면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하루키 자신이 많은 이해관계로 얽힌 일본을 떠나 조용한 곳에서 글을 쓰고 싶은 것이 여행의 주된 목적이었기 때문에, 전셋집이나 콘도를 빌려서 실제로 거주하며 여행지의 민낯과 마주치는 지극히 현실적인 체험담이다. 관광 비수기의 남유럽은 우리가 생각했던 모습과는 많이 다르고, 이러한 일상을 그려낸 그의 온화하고 평온한 기록은 언뜻 단조로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관광객을 상대하여 바쁘게 돌아가는 겉치장을 한 겹 들추어내고 나면, 여기에도 마찬가지로 생활이 있고, 사람들이 있고, 소박한 미소와 한숨과 탄식이 존재한다. 결국 어디나 사람이 사는 세상인 것이다. 하루키는 긴 여행을 지속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글을 썼다고 하는데, 그런 만큼 모든 일화가 너무나 하루키다운 담백한 문체로 생생하게 묘사되고, 특유의 시니컬한 유머가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어 웃음보가 터지기도 한다.


그리스 스페체스섬에서 겪은 폭풍우, 미코노스섬에서 사귄 콘도 관리인과의 대화, 남유럽에서 조깅하기(달리기는 하루키의 일상생활 중 큰 일부이기도 하다), 이탈리아 방송의 일기 예보, 로마의 주차 사정, 알프스에서 생긴 자동차 고장 사고 등등에 이르기까지, 마치 하루키와 함께 와인잔을 들고 테이블에 둘러앉아 그가 들려주는 자잘한 무용담을 왁자지껄 즐겁게 듣고 있는 기분이 들 정도의 친근함이다.



나는 문득 이런 식으로도 생각한다.
지금 여기에 있는 것도 기적이며 일시적인 나 그 자체가,
내 존재의 영위 그 자체가, 말하자면 여행이란 행위가 아닌가, 하고

그리하여 나는 어디든 갈 수 있고,
아무 데도 갈 수 없는 것이다.



존재 자체가 곧 여행이란 행위이다


하루키는 인간의 존재 자체가 매 순간 일시적이며 과도기적이라고 말한다. 인간이란 존재는 태어난 그 순간부터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화해간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와 완전히 똑같은 내가 아니며, 내일의 나는 어느 곳에서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이렇게 존재라는 것은 이미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여행을 떠나 길 위에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그렇게 걸어가는 길 위에서 어떤 무지개를 마주하는가는 본인의 선택일 수 있다.


우리는 여행을 떠나면서 대개 홀가분하고 자유로워진 듯한 기쁨을 느낀다. 여행이란 일시적으로나마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떠남으로써, 타인이나 다른 사물과 관계 지어지지 않은 순수한 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낯설고 새로운 상황들과 마주치면서, 그로 인해 배우고 변화하며 성숙해가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 또한 여행이 주는 큰 수확이다. 존재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는 작은 용기가 필요하지만, 일단 한 발길을 나서면 보다 자유로운 자신의 실체와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스에서 시작해 오스트리아에서 끝난 3년간의 긴 여정은 하루키에게 어떤 의미로 남았을까?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왔을 뿐, 이라고 그는 고백하고 있다. 무엇 하나 해결되거나 달라진 것이 특별히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에게 중요한 것은 여행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더욱 피폐한 상태로 남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었으며, 다시 한번 출발점에 돌아와 선 것만으로도 여행은 의미를 갖는다고 결론을 내린다.


길을 떠난 여행자는 결국 피곤에 지친 몸을 이끌고, 익숙하고 편안한 제자리를 찾아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다시 자아를 속박하는 일상으로 돌아오고 나면, 오래지 않아 또다시 영혼이 자유롭게 놓여나던 순간의 환희를 떠올리게 된다. 언젠가 다시 들려올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 같은 먼 북소리를 기억하며, 그것이 상기시키는 가벼운 전율을 그리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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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미식,편식:정동현의 三食일기
당신이 몰랐던 '진짜 파스타의 맛'
정동현
#정동현


서울의 거의 모든 양식당에서 파스타를 판다. 이탈리아 레스토랑은 물론, 프렌치 레스토랑도, 경양식 식당도 파스타를 판다. 심지어 분식집에서 파스타를 먹을 수 있다. 한국 사람들은 파스타를 파스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국수의 일부라고 여긴다. 그래서 양식당에서 파스타가 없으면 장사가 되질 않는다. 이곳저곳 다 파스타를 판다고 모두 수준 높은 것은 절대 아니다. 한국의 파스타는 이탈리아식이라기보다는 미국식에 가깝다. 소스가 흠뻑 젖어 있고 가득 넣은 파스타를 소스에 말듯 먹는 방식이다. 배달 피자에 올라간 토핑처럼 고기며 소시지 같은 부재료가 또 가득 올라간다. 그래야 파스타를 주로 먹는 젊은 층이 만족하고 그래야 장사가 된다.





하지만 정통 이탈리아 파스타는 그렇지 않다. 본래 파스타는 가난한 음식이다. 지금도 대대로 궁핍에 시달리는 이탈리아 남부, 하늘에는 천국처럼 붉은 태양이 밝게 빛나지만, 땅에는 가난과 범죄가 들끓는 이 남부에서, 식량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 건조 파스타가 발명되었다. 우리 옛 조상들이 공기 가득 보리밥을 쌓아 올려 먹었듯이 그들도 그랬다. 위장을 채우기 위해 곡물은 많이, 소스는 적게, 토핑은 거의 없다시피 한 것이 사실 정통 파스타다. 이탈리아에 가서 파스타를 먹으면, 특히 로마 이남으로 내려가면 질릴 정도로 많이 나오는 파스타에 눈이 놀라고 뻑뻑한 소스에 혀가 놀란다. 맛은? 매우 단순하다. 소스와 파스타, 그 외의 것은 사실 찾기 힘들다. 소스의 양도, 질감도, 맛도 다르다. 국물처럼 퍼먹는 용도가 아니라 파스타에 달라붙어 맛을 내는 용도로 그 역할이 한정되어 있다. 파스타는 또 어떨까? 일단 종류가 다양하다. 각 소스에 맞게 파스타를 골라 놓는 것이 보통이다. 파스타가 두껍고 넓다면 소스도 맛이 진한 치즈나 달걀 소스 쪽으로 맞추고 맛이 담백하다면 그에 맞게 면도 가늘어진다. 삶는 방법도 다르다. 정답이라고 할 수 없지만 역시 이탈리아 본토는 파스타의 심이 살아 이는 알덴테(Al dente)를 지키는 게 역시 기본이다.


그러나 가장 큰 차이는 역시 맛에 있다. 소스의 농도가 짙으니 간은 당연히 강해진다. 절대적 염분 섭취량은 한국이 높지만, 단위 그램 당 염분의 양은 이탈리아가 높다. 그만큼 간이 세다. 한국과 일본처럼 감칠맛, 단맛, 혹은 매운맛으로 간을 조절하지 않고 오로지 소금의 짠맛으로 맛의 농도를 결정하기 때문에 한국 사람의 입맛에는 더더욱 짜게 느껴진다. 그러나 여기에 산미가 강한 이탈리아 와인을 곁들이고 미네랄이 알알이 씹히는 탄산수를 마시면 그 염도가 적당하게 다가온다. 한국의 현실은 이와 다르다. 파스타가 짜면 곧바로 컴플레인이 들어온다. 취향에 맞지 않는다는 의견 개진이 아니라 ‘나의 건강을 네가 해치려 하느냐’는 분노다. 먹거리에 대한 신뢰가 낮고 음식을 맛이나 취향에 대한 문제가 아닌 영양분 섭취 혹은 건강과 연결하는 태도다.




이런 한국의 현실에서 청담동 ‘파스토Pasto’는 아직도 정통에 대한 고집을 버리지 않는 의지의 산물이자 이탈리아보다 더 나은 음식을 내놓고자 하는 꿈의 결실체다.




청담동 구석 언덕에 자리 잡은 파스토 앞에 서면 먼저 넓게 트인 창이 다가온다. 날씨가 좋은 이탈리아서 발전한 오픈형 레스토랑이다. 창가에 앉으면 레스토랑 안쪽으로 파고드는 바깥 풍경에 마음 깊숙이 시원한 기분이 든다. 시선을 조금만 돌리면 작은 주방에서 어깨를 부딪혀가며 일하는 요리사들이 보인다. 좌석에 비해 낮게 설치된 주방 구조 탓에 그들이 어떻게 일하고 어떤 음식을 만드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물이 끓고 불이 타오르며 오븐이 뜨겁게 달궈진 주방의 사내들은 허리를 숙이고 손을 쉴 틈 없이 놀리고 있었다.



신선한 올리브유와 곁들여 먹는 식전빵과 에피타이저 메뉴인 이탈리아풍 수제 소시지


자리에 앉자마자 이탈리아 스파클링 와인인 ‘프로세코’ 한잔과 이탈리아산 탄산수를 시켰다. 슈트를 차려 입은 점원이 공손히 서서 와인을 따랐다. 서서히 더워지는 날씨를 한 번에 식히는 냉기와 산미, 탄산감이 목구멍에 가득 찼다. 위장으로 흘러내려가는 그 물줄기에 더위도 함께 사라졌다. 대신 찾아온 것은 식욕이었다. 나는 갓 작업을 마친 농부처럼 허기진 배로 메뉴판을 훑어보고 호기롭게 주문을 넣었다. 곧 버터와 올리브유와 함께 식전빵이 식탁 가운데 놓였다. 프랑스와 달리 싱거운 이탈리아 빵을 초록빛 도는 올리브유에 찍어 먹었다. 싱싱한 풋내가 나는 올리브유의 맛은 프로세코 와인처럼 경쾌했다. 주방을 바라보니 머리가 쌔까만 요리사는 내가 주문 넣은 소시지를 오븐에 넣고 있었다. 빵 한 접시를 해치울 무렵 소시지가 나왔다. 이탈리아풍으로 회향(fennel)향이 주가 된 이탈리안 소시지는 루꼴라와 고수를 동시에 곁들여 냈고 소시지 아래에는 볶은 양파, 위에는 매콤한 토마토 살사 소스가 올라가 있었다.


“취향에 따라 곁들여 드시면 됩니다. 고수 드실 줄 아시면 꼭 곁들여 보세요.”


안경을 낀 종업원은 손수 소시지를 자르며 말했다. 친절하지만 정중했고 부담스럽지 않은 접객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돼지고기를 갈아 만든 소시지는 마른 들판을 닮은 회향의 향이 강하게 울렸다. 루꼴라의 금속성 맛과 잘 어울렸지만, 종업원의 말대로 고수와 곁들이니 또 그 맛이 색달랐다. 소시지 한 접시를 쉽게 비웠다. 배가 서서히 불러왔다. 느긋한 점심이었다. 하지만 거한 식사는 피하고 싶었다.



파스토의 대표 메뉴, 크림소스를 베이스로 한 우니 스파게티와 전복 크림 리조토


이제 남은 것은 메뉴 두 개였다. 파스토의 대표 메뉴라는 우니 스파게티와 전복 크림 리조토였다. 본래 극동지방에서만 먹던 우니 즉 성게알은 이제 이탈리아 현지에서도 흔히 쓰이는 식자재다. 잠시 뒤 나온 접시에는 크림소스가 자작하게 깔리고 스파게티가 곱게 또아리를 틀고 있는 그 꼭대기에 밝게 윤이 나는 우니가 올라가 있었다. 역시 종업원이 다가와 접시를 보여준뒤 능숙하게 우니를 으깨 소스에 비볐다. 바다의 단맛과 짠맛을 동시에 품은 우니의 향기가 조금씩 새어 나왔다. 스파게티를 포크로 말아 입에 넣으니 더욱 진하게 응축된 향기와 맛이 입안 사방에 녹아내렸다. 전복 리조토도 비슷한 결을 지녔다. 전복의 초록 내장을 으깨 소스를 만들고 리조토 쌀의 형체를 굳건히 해 알알이 씹히는 식감을 살린 리조토의 맛도 강하고 진했다. 밀도를 높인 맛과 식감에 이로 씹고 혀로 녹일 때 맛의 단단한 형체가 즉물적으로 느껴졌다. 그에 비하면 위에 올라간 전복의 몸통은 부록이었다. 접시 밑을 툭툭 쳤을 때 그제서야 조금씩 밑으로 흘러나올 정도의 농도를 가진 리조토는 기본기가 탄탄했고 맛은 두꺼운 허벅지로 찬 강한 중거리 슛처럼 거침없었다. 파스타와 리조토는 금세 바닥을 보였다. 얼마 되지 않는 소스까지 핥듯 닦아 먹었다.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도산대로로 나왔을 때 위장 깊숙한 곳에서는 여전히 바다의 향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이탈리아의 바다, 고대부터 젊은이들의 팔뚝으로 노를 젓고 물고기를 잡던 그 바다였다. 파스토가 지향하는 것은 시간이 지나도 늙지 않고 늘 낭만을 노래하는 지중해의 서사가 담긴 음식이었다. 그리고 터보 엔진이 달린 외제차를 발끝으로 작동하며 의미 없는 속도를 자랑하는 허세가 아닌, 단단히 쌓아 올린 근육으로 일궈낸 전통의 맛이었다.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 정동현 셰프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에서 '먹고(FOOD) 마시는(BEVERAGE)'일에 몰두하고 있는 셰프,
오늘도 지구촌의 핫한 먹거리를 맛보면서 혀를 단련 중!
저서로는 <셰프의 빨간 노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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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사물로 시대를 대변하는 팝 아티스트
명품과 함께 소비되는 스티븐 윌슨의 작품세계
신세계백화점


일상의 오브제를 수집해 자신만의 독특한 컬러와 시각으로 표현하는 영국 아티스트 스티븐 윌슨(Steven Wilson). 글로벌 브랜드와의 컬래버레이션으로도 유명한 그의 전시가 2018년 7월 3일까지 광주 신세계갤러리에서 열린다.



한국 전시를 기념해 시인 이원의 시집 〈사랑은 탄생하라〉(문학과 지성사)의 시들을 형상화한 작품

Let the Love be Born, 100 × 100 cm, Edition of Screen Print, 2018


1964년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 의 ‘브릴로 박스(Brillo Box)’가 발표되었을 때 미국의 저명한 미술평론가 아서 단토(Arthur Danto, 1924~2013)는 이 작품을 근거로 ‘미술의 종말’을 주장했다. 그의 요지는 “다원주의 시대에 작품의 외형은 더 이상 미술의 자격을 부여하는 절대적 요소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 장 보드리 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는 〈소비의 사회〉라는 책에서 우리가 익히 팝아트라고 동의하고 이를 대표하는 앤디 워홀의 작품을 “서명이 소비되는 사물로서 예술이라고 하는 독자적 지위를 추구한 최초의 형식”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논의의 배경은 1917년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의 작품 ‘샘(Fountain)’을 시작으로 볼 수 있다. ‘레디메이드(Readymade)’라는 개념과 작가의 서명이 들어 있는 어떠한 사물도 작품으로 치환될 수 있다는 것을 최초로 선보인 사건 말이다. 이로부터 약 50년 후 앤디 워홀은 ‘브릴로 박스(Brillo Box)’를 통해 사회의 산물인 기성의 상품에 서명이 포함된 작품을 제시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현대미술이라고 하는 어떤 개념과 형식을 대중에게 추인받을 수 있었다.


다시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더욱더 분화되고 확장된 예술의 형태와 양식이 우리 앞에 제시되고 있다. 이제는 굳이 작가의 서명, 공인된 전시 공간 같은 이전 시대의 문법을 따를 필요조차 없을 만큼 예술은 광의적이고 일상적인 개념이 되었다.



(좌) Sneaker, 59.4 × 42 cm, Edition of Giclee Print, 2009

(우) Polaroid Land, 70 × 50cm, Edition of 200 Screen Print, 2017


이제 예술은 특수한 조건과 상황을 갖춘 것이 아닌 우리의 삶과 일상에서 존재하고 소비되고 있으며, 그 기저에는 고도의 기술 개발과 정보의 공유로 인한 소통이 밑받침되고 있다. 이제 모든 것이 예술이고 모두가 예술가인 시대에 당면한 것이다. 규정할 수 없기에 모두에게 열려 있고, 모두에게 열려있기에 더더욱 예술을 특수하게 만드는 역설적인 시대가 된 것이다.



Turntable, 50 × 70cm, Edition of 20 Screen Print, 2018


자본의 시대는 모든 것을 시각화하고 그것을 소비시킨다. 그것이 지금의 시각을 다루는 예술이 당면한 현실이다. 이러한 시대를 어떻게 관통할지는 예술가 개개의 선택이고 책임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의 시대는 모든 것이 거래되고 재화로 공인되어야만 가치를 획득할 수 있고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다는 점이며 예술 역시 여기서 비켜갈 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전 시대의 예술가들에 비해 동시대 예술가들이 시장 친화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연스러운 귀결이고, 이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워홀의 말처럼 “돈 버는 것이 최고의 예술이고, 미래의 미술관은 백화점이 될 것이다”라는 그의 예측을 확인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스티븐 윌슨은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시각예술의 요청을 자신만의 독특한 컬러로 채색하면서 문맥을 형성해가고 있는 작가다. 런던 출신 아티스트인 그는 유럽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흔히 알려진 일상의 오브제를 수집하고, 그 수집품을 판화 기법 중 하나인 실크스크린 방식을 통해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가 표현하는 주변의 사물들은 이 시대의 아이콘처럼 각인된다. 팝아트 이후 현대미술에서 새롭게 보일 수 있는 영역으로 제품과 작품, 상품과 예술 사이를 넘나들며 실험적 작품을 생산하고 있으며, 이전의 시대에 비해 더욱 적극적으로 우리의 삶에 개입하고 있다.



현대미술과 일상의 접점을 찾고 있는 그의 다양한 작품은
에르메스, 칼 라거펠트, 아디다스, 시트로엥 등 글로벌 명품 브랜드와의 협업을 통해
우리 일상에서 다양하게 소비된다.


국내 색조 화장품 브랜드인 DLA와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최근 론칭한 ‘DLA Style Fit Pact’.


화려하고 독특한, 그리고 생기 넘치고 활기차 보이는 스티븐 윌슨의 작품은 다양한 프린트 작품뿐 아니라 타이포그래피, 그래픽 디자인 및 아트 디렉션 분야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수많은 글로벌 브랜드로 구성된 제품 기반을 통해 대중의 삶 속에서 소비되어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주로 명품과 글로벌 브랜드라 일컫는 제품에 차용되고 컬래버레이션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인구 15만 명인, 영국 남동부에 위치한 한적한 항구 도시 브라이턴 (Brighton)에서 수도자적 삶으로 자신이 좋아하고 세상이 요구하는 이미지를 생산하고 있다.


이러한 스티븐 윌슨의 작업 방식과 이미지는 현대사회에서 글로벌이라는 어떤 표준과 브랜드라는 제품과 함께 국경과 인종, 성별을 초월해 존재하고, 소비된다. 어느 신문에서도 소개했듯이 “그는 화가이기 전에 이미지를 전달하는 메신저”이고 우리는 그 이미지를 통해 지금의 시대를 인식한다.



스티븐 윌슨의 작업은 지금의 시대를 요약하는 수많은 방식 중
하나의 모델이고 형식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의 작품을 통해 무엇을 느낄지는 우리 각자의 몫이다.


한류 문화를 이끌고 있는 국내의 대표적 엔터테인먼트 YG엔터테인먼트의 캐릭터 크렁크(Krunk)를 시각화한 작품

Bubble Krunk, 100 × 100cm, Edition of 15 Screen Print, 2018


앞으로의 예술이 어떻게 전개되고 나아갈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스티븐 윌슨의 작업은 지금의 시대를 요약하는 수많은 방식 중 하나의 모델이고 형식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의 작품을 통해 무엇을 느낄지는 우리 각자의 몫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을 어떤 형식으로 규정하는 것 역시 우리의 선택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과 작업을 무엇으로 규정하지 않고, 그냥 세상을 자신의 감각과 색깔로 채우고 있는 것이다.


지금처럼 모든 것이 혼재하는 세상. 그래서 길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상황에서 스티븐 윌슨의 작업과 작품을 통해 ‘나’라는 개인이 바라보는 세상, 나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자존감을 성찰하고 지금 우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면 그것을 지금의 예술이라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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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덕온공주의 인장이 60년 만에 귀환한 사연은?
김 석
#김석기자


2016년 하반기를 뜨겁게 달군 화제의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 기억하시나요? 다른 건 몰라도 박보검이란 배우만큼은 강렬하게 기억에 남지요. 이 드라마에서 박보검이 맡은 역할은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였습니다. 스물둘이란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뜬 바로 그 비운의 왕위계승자 말입니다. 효명세자의 아버지는 순조입니다. 순조는 조선 최고의 문예군주로 불리는 정조의 아들이지요. 그러니까 효명세자는 정조의 손자인 겁니다.



2016년 KBS 2TV에서 방영돼 큰 화제를 모은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


순조와 순원왕후는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습니다. 효명세자가 장남이었고, 둘째 아들은 일찍 세상을 떠났지요. 그리고 세 딸 명온, 복온, 덕온공주가 있습니다. 드라마에는 세 공주 가운데 명온공주만 등장하더군요. 아쉽게도 드라마에선 만나볼 수 없었지만, 이 자리에서 소개할 우리의 주인공은 다섯 남매의 막내딸이자 효명세자의 막내 여동생인 덕온공주(德溫公主, 1822~1844)입니다.


덕온공주는 ‘조선의 마지막 공주’입니다. 덕혜옹주가 있는데 대체 무슨 말이냐고요? 공주와 옹주는 엄밀히 말해서 출생 신분이 다릅니다. 정실 왕후가 낳은 딸이 ‘공주’, 그 외에 다른 부인이 낳은 딸을 ‘옹주’라 했습니다. 그래서 고종의 딸인 덕혜는 ‘조선의 마지막 옹주’로 불리는 겁니다. 덕온공주는 일반인에게 시집을 가 궁궐 밖에 나가 살다가 효명세자와 마찬가지로 스물셋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납니다. 뱃속에 있던 둘째 아이와 함께 말이에요.



<덕온공주 당의>, 1837년,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중요민속문화재 제1호


요행히도 덕온공주가 입었던 옷 가운데 원삼, 당의, 장옷, 삼회장저고리, 누비저고리 등 6점이 지금까지 남아 전하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 복식사 연구에 귀중한 유물로 가치를 인정받아 문화재로 일괄 지정됐지요. 그중에서도 특히 덕온공주의 당의(唐衣)는 우리나라 중요민속문화재 제1호입니다. 그나마 이만큼 어엿하게 유물들이 남았으니 고인의 삶을 어렴풋이나마 더듬어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조선 마지막 공주의 인장, 뉴욕 경매에 등장하다



<덕온공주 인장>


그런데 최근 바다 건너 미국 뉴욕에서 범상치 않은 도장 하나가 경매에 나옵니다. 해태 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것만 봐도 상당히 지체 높은 이의 물건임을 단박에 알 수 있지요. 영어 해설을 자세히 읽어보니 놀랍게도 덕온공주(Princess Deokon)의 인장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바닥에 ‘덕온공주지인’ 여섯 자가 새겨져 있다고 했습니다. 경매사인 크리스티 측에 물어보니 미국의 한 소장자가 갖고 있다가 내놓은 물건이라고 하더군요. 만일 진품이라면 그것 자체로 ‘사건’이었습니다.


덕온공주의 도장은 어보(御寶), 즉 왕실 도장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격이 다를 수밖에 없지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2011년 6월, 조선 왕실 도장인 어보(御寶)가 국내에서 경매에 나와 논란이 된 적이 있습니다. 1496년에 만들어진 조선 9대 임금 성종의 비(妃) 공혜왕후의 도장이었는데요. 실제로 사용하려고 만든 게 아니라 의례용으로 만든 어보는 왕실을 상징하는 유물이기 때문에 하나하나가 모두 국보급입니다. 당연히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거고요.



2011년 국내 경매를 통해 존재가 확인된 <공혜왕후 어보>


이런 유물이 경매에 나왔으니 논란이 될 수밖에요. 그럼 도대체 어떤 경로로 이 귀중한 왕실 유물이 경매에 나오게 됐을까요. 추적을 해보니까 6•25 때 미군이 불법으로 몰래 반출을 했고, 그 뒤로 어디를 어떻게 떠돌았는지 무려 60년 동안이나 자취를 감춘 채 행방이 묘연했습니다. 그러다 1987년에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우리나라 수집가가 낙찰받아 보관해 오다가 2011년에 국내 경매에 내놓은 겁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사람이 경매를 통해 국내로 가져온 건 정말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경매라는 것이 가진 자들의 한가한 돈 놀음으로 치부되기도 합니다만, 어디에 있는지 행방조차 알 수 없었던 귀중한 문화재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분명한 순기능이 있습니다. 만약 소장자가 이 유물을 다시 경매에 내놓지 않았다면 국내에 이런 귀중한 왕실 유물이 있는지조차 몰랐겠지요.


다행히 경매에서 어보를 낙찰받은 건 ‘문화유산국민신탁’이었습니다. 함부로 처분할 수 없는 소중한 공동체의 문화유산을 국민의 힘으로 지켜내고 우리 모두의 자산으로 공유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공적 성격의 기구입니다. 4억 6천만 원에 낙찰된 조선왕실 어보는 국가에 무상으로 양도됐고, 이제 어엿한 우리 모두의 자산이 됐습니다. 지금은 국립고궁박물관에 고이 모셔져 있습니다.



대한제국의 '호조태환권'이 장물이 되다



2010년 5월 미국에서 경매에 나와 논란이 된 <호조태환권 원판>


왕실 유물이 경매에 나온 또 하나의 기억할 만한 사례를 소개할까요? 2010년 5월, 미국 미시건 주의 한 작은 도시에서 소리소문없이 경매에 나온 유물 하나가 논란에 불을 지폈습니다. 1893년 대한제국이 ‘호조태환권’이란 지폐를 찍어내기 위해 만든 인쇄용 원판입니다. 결과적으로 지폐를 실제로 발행해서 사용하지는 못했지만, 화폐 개혁을 향한 대한제국 황실의 굳은 의지가 담긴 소중한 유물입니다. 그런데 이 유물이 미국의 자그마한 지방 소도시 경매에 나온 겁니다.


왕실 어보와 마찬가지로 6•25전쟁에 참전했던 라이오넬 헤이즈라는 미군이 1951년 덕수궁에서 반출한 겁니다. 당시 미군이 전리품 삼아 챙겨간 왕실 유물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전쟁이란 비극이 초래한 또 다른 비극입니다. 호조태환권 원판은 당시에 액수에 따라 모두 네 종류가 만들어졌는데, 국내에는 50냥짜리와 10냥짜리 뒷면만 남아 한국은행의 화폐박물관에 보관돼 있었습니다.


불법으로 반출된 유물은 ‘장물’, 즉 ‘훔친 물건’입니다. 이 소식이 언론을 통해 보도된 이후 미국 검찰이 수사에 착수해 경매사와 낙찰자를 장물 거래 혐의로 처벌했고, 마침내 호조태환권 원판은 고향 땅을 떠난 지 60여 년 만에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됐습니다. 돌이켜보면 이 유물 역시 경매에 나오지 않았다면 그 존재조차 몰랐을 테고, 돌려받게 되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왕실 유물은 일반에 유통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해외에 나가 있는 건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장물입니다. 그래서 왕실 유물은 소재만 확인되면 언제든 되찾아올 기회가 있는 거죠.


하지만 해외로 반출된 우리 문화재 가운데 상당수는 반출 과정을 추적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훔친 건지, 아니면 선물로 준 건지, 돈을 주고 사 간 건지, 어떤 경로를 거쳐 해외로 빠져나갔는지 확인할 길이 없는 문화재가 수두룩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건 왕실문화재가 아닌 다음에야 불법으로 반출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나서서 입증해내지 못하면 돌려받을 수가 없다는 거죠. 그걸 가진 사람이 어서 가져가시오, 하고 알아서 선뜻 내놓을 리가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다시, 덕온공주의 인장은 어떻게 됐을까요?



누군가 조선 왕가의 인장을 경매에 내놓고 있다?



인장 경매결과


4월 18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크리스티의 <일본과 한국 미술> 경매에 143번째로 나온 <덕온공주 인장>은 23만 7,500달러, 우리 돈으로 3억 원에 낙찰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확인된 낙찰자는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 조사와 환수를 맡은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었습니다. 이렇게 또 귀중한 유물 한 점이 경매라는 절차를 통해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 겁니다. 국내에 남아 있는 공주와 옹주의 인장이 극히 드물다는 점에서, 더구나 조선의 마지막 공주의 유품이라는 상징성 때문에라도 <덕온공주 인장>의 가치는 오롯합니다.



2017년 5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나온 <숙선옹주 인장>


비슷한 다른 사례가 없을까 하고 과거 크리스티 경매 기록을 찾아보니 흥미로운 사례가 하나 더 나오더군요. 꼭 1년 전인 2017년 5월에 해태 모양의 손잡이가 있는 또 다른 인장이 경매에 출품됐던 겁니다. 이 인장은 정조가 후궁 수빈 박 씨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 숙선옹주(淑善翁主, 1793~1836)가 쓰던 겁니다. 정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순조의 여동생이지요. 덕온공주에게는 고모가 되는 셈입니다.


숙선옹주 인장은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출품된 한국 고미술품 53점 가운데 가장 높은 가격인 34만 3,500달러에 낙찰됩니다. 당시 환율로 계산해보면 우리 돈으로 3억 8,500만 원 정도 됩니다. 덕온공주 인장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팔린 거죠. 그런데도 이 소식은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합니다. 심지어 언론 보도도 거의 없었고요. 숙선옹주 인장은 대체 어디에 가 있는 걸까요. 이후 인장의 종적을 알려주는 정보는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1년 간격으로 숙선옹주와 덕온공주의 인장이 똑같은 경매에 나왔다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봐야 할까요? 누군가 조선의 인장을 여럿 소장한 사람이 일정한 시간을 두고 하나씩 조심스럽게 물건을 경매에 내놓는 건 아닐까요? 공주와 옹주의 도장은 왕가의 유물이긴 해도 왕실 문화재는 아니기 때문에 증거가 명백한 도난품이 아닌 한 돌려달라고 강제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경매에도 나올 수 있는 거고요. 그렇다면 이런 상황을 우리 문화재 당국은 과연 제대로 알고나 있는 걸까요.



다시 고국의 품에 안긴 조선백자의 꽃, 달 항아리


(좌) 2015년 서울옥션 홍콩경매에서 국내로 환수된 백자 달항아리

(우)2018년 5월 서울옥션 홍콩경매에서 고국으로 돌아온 백자 달항아리


2015년 11월, 국보급으로 평가되는 조선시대 백자 달항아리 한 점이 경매에 나옵니다. 일본인 소장자가 50년도 넘게 애지중지 아껴온 귀한 물건이라 처음엔 경매에 내놓지 않으려 했다는군요. 경매 주관사인 서울옥션이 무려 3년 넘게 공을 들여 설득했답니다. 조선 백자의 꽃으로 불리는 달항아리는 현재 온전하게 남아 전하는 것이 10여 점에 불과할 정도로 귀하디귀한 유물이지요. 이 달항아리는 어느 한국인이 21억여 원에 최종 낙찰을 받아 국내로 돌아왔습니다. 굉장히 의미 있는 문화재 환수의 사례였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그보다 예술성이 더 뛰어난 백자 달항아리가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 나왔습니다. 역시 일본 도쿄의 한 소장자에게서 나온 물건이라 했습니다. 이 경매에서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김환기 화백의 그림이 85억 3,000만 원에 낙찰되며 한국 미술품 역대 최고가를 기록했다는 소식이 워낙 화제가 된 터라 달항아리는 사실 뒷전이었습니다. 경매가 끝난 뒤에 확인해보니 다행히 한국인이 낙찰받아 고향으로 돌아왔답니다. 크기로 보나 형태로 보나 빛깔로 보나 근래 보기 드문 이 명품 달항아리의 최종 낙찰가는 우리 돈 25억여 원, 경매에 나온 달항아리로는 역대 최고가 기록을 썼습니다.


우리 문화재가 반드시 우리 땅에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모든 문화재를 되찾아 와야 한다는 발상은 쉽게 말하면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좁은 생각일 뿐이지요. 우리의 귀중한 유물이 해외 유수의 미술관, 박물관에서 한국 미술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한다면 그보다 가치 있는 일은 없을 겁니다. 다만 숱한 외세의 침략과 기나긴 식민지 시절 동안 워낙에 많은 문화재를 잃어버리고 빼앗겼기 때문에, 이제라도 정말 귀중한 것들은 우리 손으로 되찾아 와야겠다는 열망이 솟아나는 것 또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입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문화재를 해외 경매에서 낙찰받아 되찾아오는 사례들이 심심찮게 언론 보도를 통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문화재 반환에 대한 생각과 여건이 성숙했다는 뜻입니다. 그게 합법적으로 문화재를 되찾아오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는 걸 이제는 모두가 분명히 알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요. 이제 긴 타향살이를 마치고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온 <덕온공주 인장>을 우리 박물관에서 곧 만날 수 있겠지요. 그날을 손꼽아 기다려보기로 합니다.




김 석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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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환 작가의 DSLR 여행기
영국 속 또 다른 나라, 스코틀랜드 2편
이 환
#이환작가
이환 작가의 DSLR 여행기,스코틀랜드 2편

스코틀랜드 문화의 중심지,

에딘버러(Edinburgh)

스코틀랜드의 중심 도시 에딘버러(Edinburgh)는 옛 스코틀랜드 왕국의 수도로 스코틀랜드인의 긍지와 자존심이 아로새겨진 역사적인 도시다. 오늘날에는 에딘버러 페스티벌, 프린지 페스티벌, 밀리터리 타투 페스티벌, 북 페스티벌 등 1년 내내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끊이지 않는 세계적인 문화.관광의 도시이다.

스코틀랜드의 중심 도시 에딘버러(Edinburgh)는 옛 스코틀랜드 왕국의 수도로 스코틀랜드인의 긍지와 자존심이 아로새겨진 역사적인 도시다. 오늘날에는 에딘버러 페스티벌, 프린지 페스티벌, 밀리터리 타투 페스티벌, 북 페스티벌 등 1년 내내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끊이지 않는 세계적인 문화.관광의 도시이다

캐슬 록(Castle Rock)이라는 바위산 위에 세워진 요새, 에딘버러 성(Edinburgh Castle).
이 지역의 수비를 위해 6세기 무렵 건축되었다. 구시가지 풍경에서 단연 돋보이는 에딘버러의 랜드마크다.

에딘버러 성 입장 후바로 볼 수 있는 대포.
일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후 한 시에 공포탄을 쏘는 이벤트를 한다.

에딘버러 성에 휘날리는 영국의 국기 유니언 잭(Union Jack)에는 여러 함의가 있다. 유럽의 서쪽 끝자락에 있는 작은 섬나라지만, 한때 전 세계의 상당 부분을 지배했고, 그 영향력은 아직도 엄청나다.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인도 등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53개의 국가로 만든 영연방국가(The Commonwealth)는 아직도 결속력이 대단하다.

에딘버러 성에서는 에딘버러 시내 전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에딘버러 성 앞에서부터 시작해 홀리루드 궁전까지 이어진 1마일의 길을 로열 마일(Royal Mile)이라 한다. 왕의 지나다니는 거리라는 뜻이다. 로열 마일은 가장 스코틀랜드다운 거리라고 할 수 있다. 골목 골목마다 온갖 풍물이 가득하고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로열 마일에서 만난 스코틀랜드 전통 복장의 백파이프 연주자. 그가 입은 타탄 킬트(Tartan Kilt)는 이곳 남성들의 치마 정장이다. 킬트는 본래 모양과 색에 따라서 부족(집안)이나 신분 등을 나타내는데, 지금은 스코틀랜드 군인의 복식이다. 킬트 앞 가운데에는 스포란(Sporan)이라는 가죽 주머니를 달아 놓았다. 치마에 주머니가 없어 필요한 도구들을 담을 곳이 필요했을 거다.

영국의 끝자락,

인버네스(Inverness)

스코틀랜드는 에든버러를 중심으로 남쪽 지역을 로랜드(Low Land), 북쪽 지역을 하이랜드(High Land)라고 부른다. 거친 산지가 대부분인 하이랜드는 대자연이 만든 장엄한 풍경을 뽐내는 지역이다. 네시의 전설이 깃든 네스호(Loch Ness)와 고대의 화산 활동이 만든 대협곡 글렌코(Glencoe),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큰 섬인 스카이섬(Isle of Skye) 등이 다 하이랜드에 있다. 하지만, 하이랜드의 중심도시는 인버네스(Inverness)다. 북위 57도, 영국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이곳은 시내 전체에서 현대식 고층건물을 찾아볼 수 없는 단아하고 소박한 도시이다.

스코틀랜드는 에든버러를 중심으로 남쪽 지역을 로랜드(Low Land),북쪽 지역을 하이랜드(High Land)라고 부른다. 거친 산지가 대부분인 하이랜드는 대자연이 만든 장엄한 풍경을 뽐내는 지역이다. 네시의 전설이 깃든 네스호(Loch Ness)와 고대의 화산 활동이 만든 대협곡 글렌코(Glencoe),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큰 섬인 스카이섬(Isle of Skye) 등이 다 하이랜드에 있다. 하지만, 하이랜드의 중심도시는 인버네스(Inverness)다. 북위 57도, 영국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이곳은 시내 전체에서 현대식 고층건물을 찾아볼 수 없는 단아하고 소박한 도시이다.

11세기에 건설되었다는 인버네스 성(Inverness Castle). 지금은 주(州) 재판소로 사용되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네스강(River Ness)과 마을을 내려다볼 수 있다. 인버네스를 관통하는 네스강은 도시의 상징이다. 인버네스라는 도시의 이름도 네스강의 하구라는 뜻에서 유래한 것이다.

스카치위스키의 고장! 스코틀랜드 어디를 가든 위스키 증류 공장이 널려있다. 뭔가 곰삭은 냄새가 마을 전체에 진동하는데, 이곳 사람들은 위스키 공장의 냄새가 익숙해 보인다.

퍼스(Perth)에서 만난 
스코틀랜드 사람들

스코틀랜드 중부에 위치한 도시 퍼스(Perth)는 15세기 중반까지 스코틀랜드 수도였던 고도(古都)로 한때는 로열 버러(royal burgh)로 불렸다. 마침 퍼스에서 묵은 호텔에서 화려한 현지인들의 결혼식을 엿보게 되었다. 밤늦은 시각, 호텔 매니저가 방문을 두드렸다. 결혼식 뒤풀이 파티에 신랑신부 가족이 초대했다는 것이다.

새벽까지 이어진 신랑신부 가족들과 친구들의 댄스파티. 춤 문화에 익숙지 않은 필자의 눈엔 부럽기 이를 데 없었다.

무도회장의 신랑과 신부의 모습.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시골 사람들의 넉넉한 인심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들의 전통문화에 대한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 있기도 하다.

여행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스코틀랜드의 아름다운 풍경만은 아니었다. 자연과 환경, 문화유산을 보존해가는 그들의 치열한 노력과 고민이 오히려 마음 깊이 남았다. 수년, 혹은 수십 년의 땀이 밴 것은 물론, 시행착오를 통해 몇백 년에 걸쳐 보존되어 온 것들도 있었다.
대를 이어 전해진 그들의 유산, 이것이 많은 여행자가 이곳을 찾는 이유일 것이다.
각각의 여행자들은 이러한 흔적 속에서 내가 그랬듯 나름의 배움도 얻을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사는 동안 ‘여행’을 할 수밖에 없는 여러 이유 중 하나다.